연희동에 위치한 밤의 서점은 두 분의 점장님들이 운영한다. 각각 밤의 점장과 폭풍의 점장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다. 서점 이름이 밤의 서점이니 밤의 점장은 당연히 있어야 하고, 밤의 점장이 주는 정적인 느낌 외에 동적인 느낌의 무언가를 찾다가 폭풍을 택했다고 한다. 밤의 점장님은 출판사에서 책을 만드셨던 분이고, 폭풍의 점장님은 광고대행사에서 AE 경력을 가진 분이였다. 고등학교 동창이신 이 두 점장님들이 교대로 밤의 서점을 운영하신다.
남의 집 프로젝트 참여를 확정한 후, 어떤 콘텐츠를 전달할 지에 대해 아이디어 회의를 하기 위해 두 점장님을 밤의 서점에서 뵙기로 했다. 서점 주인장들이시니 책을 보거나 집필 작업을 하고 계시겠거니 했으나 두분 모두 카운터 옆에 위치한 싱크대와 힘겹게 사투를 벌이고 계셨다. "물이 새네요. 잠시만요." 자영업의 리얼한 속살을 마주하니 더욱 정감이 갔다. 뭐라도 도울라치니 두 점장 모두 손사레를 치며 잠시 책을 둘러보라 하신다. 10여분 서가를 둘러보고 있으니 두분의 속삭임이 들린다. "이번에 고치긴 글렀네. 일단 회의부터 하자."
"무슨 이야기를 하면 될까요?"
남의 집 프로젝트를 접하신 대부분의 가게 점장님들의 첫번째 질문이다. 강연 자체가 익숙치 않으신 분도 있거니와 강연 경험이 있더라도 청중이 동네주민인 건 드물기 때문에 누구나 봉착할 수 있는 난해함이다. 이때 나의 역할은 부담을 줄여주는 것.
"동네주민들께 편하게 점장님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면 되요. 서점을 열게 된 계기라던가, 점장으로의 일상은 어떤지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도 좋구요."
이렇게 물고를 트면 '이게 이야기꺼리가 되나?' 싶은 표정을 지으시고 여기에 난 최고의 리엑션으로 자신감을 불러일으킨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어요? 대박!"
그렇게 두 점장님들과 밤의 서점에서 1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눈 뒤 특강의 제목을 "밤의 서점을 내 서재처럼 활용하는 법" 으로 정했다. 한 점장님이 물으신다. "근데 회사일로 바쁘신데 이런 것까지 하시려면 힘들지 않으세요? 돈이 되는 것도 아닌데." 여기에 모범답변을 건넸다. "회사일에서 충족되지 않는 무언가를 여기서 채우고 있죠." 이 말도 사실이지만 실은 너무 재밌다. 생면부지의 누군가에게 다가가 그들의 이야기를 끄집어 내서 또다른 남에게 전달하는 경험.
이후 홍보페이지를 만들어 모객을 진행했고 다행히 이틀만에 매진되었다. 만석이 되었다는 사실에 두 점장님들도 흡족해했고 기획자로서 뿌듯했다. 그렇게 순조롭게 진행되며 강연 전날이 되던 날, 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했다. 건강하셨던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였기에 그의 소천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탓에 오히려 침착했다. 집안 어르신, 지인들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알린 후 점장님들께 연락드려 특강을 취소했다. 신청해 주신 모든 분들께도 문자로 양해를 구했다. 돌이켜보니 당시에는 부친상이 어떤 것이라는 감이 없었고 일단 내 앞의 일상을 정지상태로 돌리는 데에 집중하자는 생각 뿐였다. 그렇게 밤의 서점 특강은 다음을 기약할 틈도 없이 취소되었다.
몇 주간 애도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일상을 회복하기로 마음먹은 뒤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이 밤의 서점 특강 재개였다. 밤의 서점에 방문해서 머쓱하게 웃음지으며 아버지 잘 보내드리고 왔다며 다시 특강을 진행해보자고 했다. 당시 서점에 계셨던 폭풍의 점장님이 안해도 무방하니 일단 내가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책을 한권 선물해 주겠다며 서가를 뒤적이셨다. "하필 이런 건 꼭 찾을 땐 없더라.." 며 아쉬워 하셨는데 알고 보니 그 책은 이미 며칠전 은재형이 혼자 밤의 서점을 찾았을 때 밤의 점장님의 추천으로 내게 선물했던 롤랑바르트의 '애도일기'였다. 학부시절 기호학 공부하며 접했던 롤랑바르트를 이런 순간에 접하니 묘했다.
특강의 제목이 '밤의 서점을 내 서재처럼 활용하는 법' 였는데 지금 내게 전해진 '애도일기'가 밤의 서점이라는 서재에서 꺼내져 내 손에 쥐어진 책였다. 동네주민의 이야기를 접한 동네서점장들이 마음을 모아 전해준 책. 이보다 완벽한 큐레이션이 또 있을까? 대형서점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동네서점만의 매력이다.
드디어 열린 밤의 서점 특강날. 예정된 일정보다 한달이 지연된 탓인지 처음에 신청해 주신 분 중 재신청해서 방문하신 분은 없었고 새로 신청해서 오신 분들로 거실이 채워졌다. 처음 뵙는 분들이 내 집 거실에 모여있는 이 광경. 오랜만에 접하니 좀 생경했다. 한창 프로젝트 진행했을 때의 무뎌진 초심을 되찾은 듯 했다. 역시 남의 집 프로젝트는 어색해야 제 맛이지.
두 점장님들도 적잖이 긴장하신 듯 했다. 밤의 점장님은 스크립트를 보시며 발표 자료를 점검했고, 폭풍의 점장님은 이런 밤의 점장님의 모습을 보고 "뭐 그리 긴장하냐? 편하게 생각해." 라고 하셨지만 앉아 계신 폼이 상당히 경직되어 있었다. (실제 발표 때는 폭풍의 점장님이 더 떠셨다는ㅎ)
밤의 점장님이 밤의 서점 창업을 결심한 이야기부터 들려 주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했던 이야기여서 귀를 쫑긋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인용문이 등장했다. 미란다 줄라이라는 행위예술가의 인터뷰 발췌문인데 그 전문은 이렇다.
출판사에서 기획,편집 업무를 담당하던 밤의 점장이 나와서 프리랜서 번역 활동을 할 때의 가장 큰 갈증은 서로를 지지해 주고 자극할 수 있는 커뮤니티였다고 한다. 그러던 와중에 동네서점을 준비하던 지인으로부터 서점 매니저를 제안받아서 함께 준비를 했는데, 막상 지인은 서점 창업 계획을 거두게 되어 밤의 점장님이 직접 서점을 차리기로 마음먹었다 한다.
책을 파는 것뿐만 아니라
혼자 외롭게 고군분투하고 있는 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날 수 있는 그런 공간을 만들고 싶어서 서점을 열었습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츠타야 서점을 운영하는 CCC의 창업자 마쓰다 무네아키가 쓴 '지적자본론'의 문구가 떠올랐다.
각 도시에서 동시에 병행적으로 발생하는 가시화된 제안을 서로 연결해 도시 전체의 힘을 구성해 가는 구조. 이제 도시는 그 구조를 실현하기 위한 장소를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요새 남의 집 프로젝트의 의미를 자문하며 읽고 있던터라 깊게 마음에 새기기는 했으나 한편으론 '츠타야 정도를 만든 사람이니까 이런 소리를 하지' 싶었다. 한데 밤의 점장님께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듣게 되니 더 현실감있게 와닿았다.
특히 '혼자 일할수록 더욱더 남들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는 말을 계속 곱씹게 된다. 남의 집 동네가게가 남의 집 프로젝트에 어떤 의미인지 명제화하고 싶었는데 그 실마리를 찾은 것 같아서 반가웠기 때문이다. 나혼자 거실에서 꼼지락거리던 프로젝트가 지역 주민, 동네 가게를 만나 커뮤니티로 번져가는 경험이 나에겐 자극이요, 자산인게다.
밤의 점장님은 동네서점을 운영하며 겪은 다양한 에피소드들도 들려주었다. 처음 방문한 손님들이 고민 상담을 하는 경우도 왕왕 있고, 점장님이 소장용으로 가지고 있던 책을 발견한 손님이 첫사랑과의 추억이 깃든 책이라며 희색을 띄어 의도치 않게 판매로 이어지기도 했단다. 또 어떤 사연인지 모르겠으나 매주 월요일 특정 시간에 비슷한 옷차림으로 나타나 책을 사가시는 남자분도 있다.
이런 동네서점을 찾는 손님들은 어떤 분들일까? 일단 90%는 여성분이라 한다. (오예!) 이어서 발표를 진행한 폭풍의 점장님의 손님 자랑이 시작되었다. "서점이 전체적으로 어두워서 그런지 모르겠는데요, 제 눈엔 어찌나 다들 그렇게 예쁘고 훈훈한지요~" 라며 " 훈남의 완성은 책입니다!"는 명언을 날리셨다. 그러곤 날 향해 "남의 집 프로젝트 담당자님을 서점에서 봤을 땐 괜찮았는데, 이 집에서 보니 영..." 이란다.
폭풍의 점장님은 얼마전 밤의 점장님과 함께 다녀왔던 일본 서점 탐방기를 들려 주었다. 다이칸야마의 '츠타야'부터 키치죠지의 '하쿠넨', 진보초의 '잇세이도', 카구라자카의 '카모메북스'까지 다양한 지역에 위치한 각기 다른 색채의 일본 서점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이 중 카모메북스가 '이웃에 살고 싶은 서점'이라며 지역 분위기 면에서나 서점 내부적으로 참고할 것이 가장 많았다고 했다.
그러곤 서점 탐방기의 마무리는 '일본 돈까스 최고!' 라며 일본에 가면 돈까스는 꼭 잡숴 보시라는 팁으로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그때 폭풍 점장님의 눈에는 돈까스 하트가 뿅뿅!
강연의 꽃, 경품 추첨의 시간이 왔다. 참석자 중 세명을 추첨으로 선별해 *블라인드 데이트를 즉석에서 증정하는 시간였다. *블라인드 데이트: 밤의 서점 점장님들이 선별한 도서를 봉투에 담아 제목을 가린 채 판매하는 상품. 봉투에 점장님들이 친필로 기재한 추천사를 보고 있으면 책 제목을 맞춰보고 싶은 욕구가 솔솔~
당첨되신 분들은 세번의 기쁨을 누렸다. 뽑혔다는 첫번째 기쁨, 뭘 고를까 행복한 고민의 두번째 기쁨 그리고 마지막은 어떤 책인지 발견했을 때의 기쁨. 옆에서 지켜보니 이중에서 블라인드 데이트의 추천사를 보며 어떤 책을 고를지 고민할 때가 제일 행복해 보였다. 주변 참석자들도 이거가 낫겠다. 저걸 골라라 등의 훈수를 들며 함께 선택의 순간을 만끽했다.
90분 정도의 특강을 마치고 참석자들을 배웅한 뒤, 두 점장님과 연희동 브라더스는 남의 집 거실에서 뒷풀이를 가졌다. 은재형의 필살기 카레와 수다캠프 사장님께서 협찬해 주신 그루지아 와인을 함께 하며 강연 때 못푼 이야기를 나누었다. ( 라 썼지만 실은 술 마시면서 각자 하고 싶은 얘기 떠들며 놀았다.)
잘다니던 직장을 나와 서점을 창업한 두 명과 직장 외에 무언가 하고 싶어 근질근질한 두명이 마주 앉아
"나오지마~ 밖은 추워."
"그래도 부럽습니다."
"다닐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 붙어 있어!"
라며 팽팽히 맞섰다.
은재형이 최근에 밀고 있는 참외 스무디를 맛본 밤의 점장님은 입맛에 맞았는지 "이제 곧 여름인데 밤의 서점에서 뜨거운 차 대신에 이걸 드려도 되겠네요." 라며 제안(이라 믿고 있다)을 했고 이에 은재형은 "평소 저의 꿈은 납품입니다." 라 했다. 혹시나 올 여름에 밤의 서점에서 참외 스무디를 전해주면 이 날의 결과물이라 여기시길.
뒷풀이로 이밤의 끝을 잡고 싶었으나 육아와 출근을 위해 마무리를 했다. 두 점장님들을 보내고 은재형과 설거지를 하며 넥스트 남의 집 프로젝트 아이템 중 하나인 옥상 영화제에 대해 이야기 나누던 중 밤의 서점이랑 콜라보로 해도 재밌겠다 얘기가 되었다. 밤의 서점이 그간 북클럽이라는 이름으로 독서 토론 혹은 낭독회를 진행해 왔는데 여기에 영화감상도 곁들이면 더 재밌지 않을까 하는 상상.
바로 두 점장님이 계신 카톡창에 '같이 영화제 할래요?'라고 운을 띄우니 밤의 서점에서도 영화를 상영하고 싶었는데 공간이 여의치 않아 아쉽던 차였다고 했다. 옳다구나. 특강 기획자와 연사로서의 만남이 마무리될 즈음 새로운 공모가 시작되는 오픈 엔디드의 순간. 다시 한번 지적자본론의 문구가 떠올랐다.
동시에 병행적으로 발생하는 가시화된 제안을
서로 연결해 도시 전체의 힘을 구성해 가는 구조.
글을 쓰는 지금, 영화제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은 아직 없다. 걍 분위기에 취해 '같이 해보자~ 으샤으샤!' 한 것으로 그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거실에서 함께 도모한 두 개의 프로젝트가 무언가의 공모로 이어질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참으로 설렌다. 이것이 남의 집 동네가게가 남의 집 프로젝트를 성장시키는 티핑 포인트가 될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