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없는 홍상수 영화제
옥자 논란 후 '합법적'인 영화관 운영을 위해서 저작권을 풀 수 있는 상영작을 찾기로 했고, 투자자 등이 복잡하게 얽힌 영화가 아닌 독립영화를 물색했다. 본인의 작품을 남의집 옥상에서 상영하는 것에 동의해 줄 영화인을 떠올리니 대학교 동창 박우식 감독이 생각났다.
박우식 감독의 본업은 연극 배우다. 요새는 '리코앤치타 프로덕숀' 이라는 제작사를 차려 본인이 직접 각본도 쓰고 연출도 하며 창작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원래 박감독에게는 몇달전 '남의집 연극' 이라는 프로젝트를 제안해서 우리 거실에서 연극을 한편 해보자고 졸라 놓은 상황였는데, 남의집 영화관에 적합한 작품을 물색하던 중 박감독이 제작한 장편 영화 '홍상수를 위하여'가 떠올랐다. '이거다!' 싶어 바로 그에게 연락했다.
이렇게 7분만에 섭외를 마쳤다.
영화 '홍상수를 위하여' 에 참여한 스텝 크래딧은 이렇다. 박감독이 각본, 연출, 주연까지 올라운드 플레이어로 뛴 작품이다.
감독/작가 : 박우식
출연 : 박우식,이송이
책임 프로듀서 : 배시아
제작 : 리코 앤 치타
촬영감독 : 배시아
'홍상수를 위하여'는 박감독이 홍상수 감독에 대한 애정, 리스펙을 담아 제작한 작품으로 곳곳에 홍상수의 촬영기법, 미장센, 대사 등등이 녹아있는 오마주다. 홍상수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이니 관람을 마친 관객들끼리 홍상수에 대한 생각들을 나누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그림였다. 옥상에서 영화보고, 거실에서 뒷풀이를 즐기면 딱이겠다. 싶었다. 물론 홍상수는 오지 않겠지만서도.
홍상수, 사실 내게 큰 울림은 없는 주제다. 대학생 때 주변 선후배들 따라서 몇편 본 것이 전부였고, 뜬금없는 대사와 얼척없는 카메라 줌 인/아웃을 보며 '독특하네' 라며 그 작품의 느낌을 알.고.있.는 정도. 그랬기에 그의 작품에 환호하는 팬들이 궁금했다. 그의 작품에서 무슨 매력을 느끼는거지? 박감독과 옥상에 영화를 보러 올 손님들과 이야기하며 나도 그 맛을 음미하고 싶었다. 뭐, 평양냉면을 무슨 맛으로 먹는건지 궁금해 하는 느낌이랄까?
홍보페이지에는 큰 힘을 들이지 않았다. 옥자 때 정성스레 찍어 두었던 옥상 영화관 전경 사진에 '홍상수를 위하여' 스틸컷을 아주 그럴싸하게 그림판으로 짤라다 붙이니 누가 봐도 짜깁기한 티가 났다. 이것도 나름의 매력이 있겠다 싶어 그대로 SNS에 올려 전국의 홍상수빠들을 소환했다. 홍상수 영화 좀 본다는 분들일지 아니면 남의집 옥상이 탐나는 분들인지 모르겠지만 신청인원이 정원을 넘겼다. (남의집 프로젝트가 정원 미달인 적은 한번도 없었다. 브이!)
그리고 2주 후. (홍상수 느낌의 편집을 글로 옮겨 봤는데 알랑가 몰라ㅎ)
이러다 쪄죽겠다 싶은 날씨였다. 서울 한낮 온도가 36도에 육박하는 살인적인 더위가 남의집 영화관 오픈날에 들이닥쳤다. 아무리 옥상 영화가 낭만적이라지만, 영화를 보다가 호흡곤란을 일으켜서 골로 가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이 절로 드는 날씨였다. 내심 옥상은 무리겠다. 싶었다. 저작권만 풀면 옥상에서 영화를 볼 수 있을 줄 알았건만 황망하게 폭염이 발목을 잡다니! 여러 모로 옥상은 쉽사리 남의집 프로젝트에게 곁을 내주지 않는구나.
홍상수빠들이 남의집에 입성했다. 에어컨 빵빵한 거실에 들어서자 다들 시원하다며 탄성을 내지른다. 한 손님은 오는 길에 이미 더위에 질린 듯 "이거 옥상에서 볼 수 있겠어요?" 라며 거실쪽 TV를 그윽하게 바라본다. 박감독도 "안그래도 청량감없는 영화라 이 더위에 보면 굉장히 텁텁할텐데..." 란다. 이미 옥상은 물건너 가고 거실 영화제로 중지가 모인 듯 했지만 만에 하나 옥상을 원하는 손님이 있다면 응당 옥상으로 올라가자고 했다. 남의집 영화관 상품 구성이 옥상 영화이기에 여기에 시간과 금액을 지불하신 분의 의견을 마땅히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 옥상에서 보고 싶어요
손님 중 한분이 금방이라도 울것 같은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며 얘기했다. 밤의 서점을 운영하시는 밤의 점장님였다. 옥상에서 영화를 보고 싶어서 주말 근무 날짜도 바꾸셨다며 기대에 찬 신청 동기를 적어주셨던 게 생각나자 아차! 싶었다. 내가 더위를 먹고서 잠깐 맛이 갔었구나. 어떻게 끌고 온 영화관 이벤트인데 기껏 덥다는 이유로 그토록 그렸던 옥상 영화 관람의 그림을 포기한다더냐! 이내 정신을 차리고 손님을 이끌고 옥상으로 올랐다.
딱 내가 그렸던 그림이 펼쳐졌다. 옥상 창고를 스크린 삼아 바라보며 옹기종기 앉아 있는 사람들의 모습. 그 뒤로는 옆집 불빛과 가로등이 무대처럼 펼쳐져 있다. 낮동안 뜨겁게 달궈진 옥상 바닥의 잔열이 온돌마냥 올라오고 궁둥산에서 내려온 후덥지근한 밤바람이 그 위에 포개져 노천탕 느낌을 자아냈다. 그곳에서 맥주 한잔을 들고 비스듬히 앉아 있으면 스크린에 EBS 수리영역1이 상영된다 하더라도 머리도 쏙쏙 들어올 것만 같았다.
새하얀 캔버스에 파란색 물감으로 '홍상수를 위하여'라고 적힌 타이틀이 뜬다. 창고 벽면에 두 주인공이 나타났다. 캠핑용 블루투스 스피커를 통해 첫대사가 울린다.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온 민희씨를 만났다." 이내 홍상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소주가게 씬으로 이동. 주연을 맡은 박우식 감독의 대사가 이어진다.
민희씨가 김민희라면 어떨 것 같아?
영화의 시놉시스는 이렇다
영화감독인 한 남자와
"김민희"라는 이름의 한 여자가 오랜만에 재회한다.
둘은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영화를 본 후 서로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의 주연 김민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 어라? 할지도 모른다. '홍상수를 위하여'는 감독 홍상수와 배우 김민희의 스캔들이 터지기 전에 제작된 영화이다. 그들의 러브스토리와는 무관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등장 인물의 이름과 내용 때문에 그 스캔들을 예견한 패러디물로 해석되기도 한다.
옥상에서 영화를 보니 생활 BGM이 가미된다. 옆집에 주차되어 있던 차에 시동이 걸리는 소리, 앞마당 강아지가 짓는 소리, 골목길을 걸으며 누군가와 통화하는 이웃의 목소리까지 여과없이 들린다. 극장이라면 분명 시비거리가 되겠지만, 남의집 옥상에서 들으니 영화의 일부마냥 자연스럽다. 홍상수에 대한 영화라 그런 건지, 아니면 옥상이라는 공간이 주는 여유 혹은 너그러움일런지.
자기 체면인지 모르겠으나 어느새 더위가 가셨다. 궁둥산에서 내려오는 밤바람도 이제는 약간의 한기을 머금고 살랑살랑이는 것 같다. 박감독 말마따나 청량감없는 영화지만 옥상이 탄산감을 더해준달까? 손님들은 옥상에서의 영화관람을 어떻게 느끼셨을지 후기를 받아보았다.
30분 정도의 영화 관람을 마친 후 다시 거실로 내려가 '감독과의 대화' 형식의 뒷풀이를 진행했다. 남의집 프로젝트 역사(?)상 처음으로 술자리를 의도적으로 만들어 봤다. 그동안의 남의집 프로젝트에서는 호스트와 손님간의 정보 제공 혹은 교감이 주를 이루어서 함께 모인 손님간의 소통이 늘 아쉬웠다. 이번에는 남의집에 놀러온 손님들끼리 이야기 나누며 친해지는 경험도 더하고 싶었다. 게스트하우스 거실 느낌이라고나?
홍상수의 밤에는 소주가 제격이지만 한여름이기에 시원한 맥주를 택했다. 연희동 대표 수제맥주 케그스테이션에서 공수해온 맥주를 풀자 금새 사라졌다. 혹시나 하며 구비해 둔 캔맥주도 내놓자마자 동났다. 어라? 이대로 물만 마시며 얘기하기엔 분위기가 너무 달아올라 있어 냉큼 근처 편의점에 가서 패트병 맥주를 두어병 사왔다. 입장료(1만원)로 받은 총 예산을 넘긴 상황였지만 이 분위기에서 수금하며 찬물을 끼얹기 싫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1차로 맥주가 동난 타이밍에 한번 자리를 정리했어야 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말미에..)
박우식 감독이 '홍상수를 위하여'를 만들게 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대화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홍상수 감독의 영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의 한장면에서 영감을 얻어 시나리오를 쓰게 되었다.
"원래는 다양한 주제들로 짧은 대화를 극화하고 싶었어요. 근데 홍상수의 영화에서 의미심장한 대사를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것을 보고 좀더 길게 써봐도 되겠다 싶어 작업하게 되었죠."
그렇다면 그는 홍상수 감독과 친분이 있을까?
실제로 뵌적은 없으니 팬이라는 표현이 적절하겠네요~
어떤 연유로 홍상수를 좋아하게 되었는가?
손님들에게 남의집 공식질문 마냥 화두를 던졌다. 남들이 보길래 따라서 보니 어느샌가 모든 작품을 섭렵했다는 A, 남자들의 찌질한 모습을 관찰하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B, 요새 작품에서는 여자들의 찌질함에 포커싱하는데 그게 더 재밌다는 C, 신문방송이라는 전공의 특성상 안보면 안될 것 같은 주변의 분위기에 휩쓸려 보기 시작했다는 D 등 각양각색의 답변이 돌아왔다. 한명씩 돌아가며 답변을 하는 과정에 자연스레 본인의 전공 혹은 하는 일 등이 공유되었고 여기에 맞장구치며 혹은 질문을 던지며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혹자는 모르는 남남이 한 테이블에 둘러앉으면 그 뻘쭘함과 어색함을 어찌 견뎌내련지 궁금 혹은 우려를 표한다. 물론 처음에는 어색천만하다. 한데 홍상수라는 공통된 관심사 덕분에 어색함을 풀어내는데 소요되는 시간과 노력이 감소된다. 낯섬이란 어찌보면 소통의 재료가 부재함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초면에 사람들이 호구조사, 취미 등을 물어보며 서로의 공통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렸다. 남의집 프로젝트가 줄 수 있는 가치 중의 하나로 타인과 어울리기 위한 첫번째 허들인 공통분모 물색의 장벽을 낮추는 것도 추가해 봄직했다.
박우식 감독이 그의 연인 배시아 감독과 함께 설립한 '리코앤치타 프로덕숀' 이야기도 덧했다. 배시아 촬영감독과 박우식 연출,배우의 조합으로 다양한 주제의 영상물을 제작하고 있고 그 첫번째 창작물이 '홍상수를 위하여'였다. 둘의 연애 초반에 어떤 작품을 좋아하냐는 질문에 배시아 감독이 애니메이션 '치코앤리타'를 떠올리며 '리코앤치타'라고 답한 것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프로덕숀을 설립한 것이 두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건가요?" 라고 궁서체로 질문을 던졌더니 이런 선문답이 돌아왔다.
페이스북 페이지를 만들었다는 의미가 있죠.
어느덧 자정이 지나 있었다. 뒷풀이때부터 넋놓고 술마시고 떠드는 사이 시간에 맞춰 행사 진행하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부랴부랴 행사를 마무리했다. 어둑어둑한 연희동 밤길로 배웅하며 "또 놀러오세요~"라며 다음을 기약했다. 집안 뒷정리를 하며 아무도 12시 넘도록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에 '다들 그만큼 즐겁게 놀았나 보네' 라고 자평을 했으나 다음날 참석 후기를 받고 깊은 반성을 했다.
너무 늦은 시간에 행사가 마무리 된 것에 불편을 겪으신 손님들이 많았다. 뒷풀이 자리이니 먼저 일어나실 분은 알아서 가시겠지 싶었는데 손님들 입장에선 처음 방문한 남의집에 와서 선뜻 먼저 나서겠다고 말할 수 없었던거다. 눈치없고 추책맞은 호스트같으니라고. 손님들 말마따나 집안에서 진행되는 행사이니 만큼 더욱더 맺고 끊음을 확실히 해야겠다.
옥상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그림에 홀려 옥자 논란으로 적잖이 욕을 먹어가는 시행착오를 거쳐 홍상수 특별전까지 오게 되었다. 그토록 원했던 것을 이루었으니 성취감과 희열감이 극에 달아오를 줄 알았으나 막상 덤덤했다. 연극이 끝난 후 텅빈 객석을 바라볼 때와 비슷한 공허함도 일고. 오롯이 올라온 감정이니 무슨 연유인지 분석하기 보다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개인적 감회와 별개로 손님들과 술자리를 빌어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간 발견하지 못한 남의집 프로젝트의 또다른 가치를 발견했다. 남의집에 찾아온 손님 한분한분의 이야기와 그들의 세계가 흥미진진했고, 몇주가 지난 지금도 문득문득 생각나고 궁금하다. 어찌보면 남의집이라는 마중물로 보인 이들이 원했던 것은 유용한 정보, 특이한 경험이 아니라 낯선 이와의 만남 그리고 대화가 아녔을까? 앞으로의 남의집 프로젝트는 호스트와 손님 모두가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며 느슨하더라도 낯선 이와 관계를 맺는 경험에 초점을 맞춰볼까 한다.
아. 박우식 감독의 '홍상수를 위하여' 감상을 원하시는 분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