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한국 전쟁 이전까지의 방송사 전속가수
해방을 전후해 악극단은 다른 어느 때 보다 호황을 누렸다. 음반 산업의 공백, 연행 무대의 부재 탓이다. 일제 시대 가장 최후로 찾을 수 있는 음반 광고는 1943년 12월 27일 자 <매일신보>에 실린 콜롬비아 레코드사의 광고다 (이준희, 2004, p.141).
그로부터 약 4년간 레코드 생산이 이뤄지지 않았다. 사회가 혼란스럽긴 했지만 대중을 위한 오락은 여전히 필요했고, 그것을 제공하는 집단도 필요했다. 음반을 대신해 악극단이 그 역할을 해냈다.
해방 직후 대중음악계 상황 묘사가 악단이나 악극단, 가극단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박찬호, 2009, p.21-22). : <K.P.K>, <C.M.C>, <O.M.C>, <약초 악극단>, <부길 부길 쇼단> 등. <한국 악극사>를 정리한 박노홍도 악극의 전성기를 일본이 전시체제로 돌입한 1941년부터 한국전쟁 이후인 1955년까지로 잡고 있다 (김의경, 유인경, 2008).
지역의 극장문화 연구에서도 1950년대 후반에 영화가 본격적인 산업시스템을 갖추기까지는 지역 극장 수입은 주로 악극단에 의한 것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위경혜, 2007, pp.56-60).
음반 산업의 공백 혹은 침체기에 악극단 등의 공연이 가졌던 위력은 다른 사례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준희(2007, p.93)에 따르면 김시스터즈의 경우 국내에서 취입한 음반은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들의 인기는 대단했는데 공연을 통한 인기 구가로 볼 수밖에 없다. 이들이 국내 인기를 기반으로 미국으로 진출하기까지는 미군부대, 악극단에서의 성공이 큰 몫을 했던 셈이다.
1960년대 LP음반 시대가 도래하면서 다시 음반이 중요한 대중음악 수용 수단으로 자리 잡게 되는 데는 대중음악 예술인들이 대중예술인으로 버티게 해 준 악극단, 미군부대 무대 같은 연행 공간이 기여한 바가 크다.
악극단의 부흥과 함께 음반 공백기에 서서히 그 영향력을 키워가던 방송에 대한 언급도 필요하다. 방송 또한 악단, 악극단 등과 같이 공연의 공간으로서 혹은 그나마 소량으로 제작되던 음반을 소개하는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는 - 공연과 음반으로 - 이중화된 대중음악 유통방식을 통합해내는 역할을 해온 독특한 활동자로 파악할 수도 있다.
한국방송공사가 1977년 펴낸 <한국 방송사>에는 “서울 중앙방송이 1947년 박시춘, 손목인이 교대로 지휘하는 방송 경음악단을 조직하였고 이예성, 김백희, 송민도, 옥두옥, 원방현, 이계운을 전속가수로 선발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p.134).
해방되던 해 12월 초에 서울 중앙방송이 <약초 악극단>의 가요극, 경음악을 방송 편성했던 것으로 보아 방송 경음악단의 설립과 전속가수 선발은 상시적으로 대중음악 프로그램을 담당할 대중음악 예술가를 방송국 산하에 두고자 한 계산으로 보인다.
최창봉도 회고에서 “방송국에는 대중가요 음반도 많지 않았고 가요계도 자리가 잡히지 않아서 유행가를 방송하기 힘들었다..... (중략).... 1947년 6월에는 방송 경음악단과 전속가수를 모집하여서 신작 가요를 만들고 보급하게 되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최창봉, 2001, pp; 74-5)
서울 중앙방송은 1947년에 김백희, 이예성 (이상 기성 가수), 옥두옥, 원방현, 이계운을 선발하고, 48년 1월에 송민도, 금사향을 전속가수로 선발해 합류시킨다.
큰 의미는 없지만 이들을 묶어서 KBS 전속가수 제1기라 칭하고 있다. 국영방송이 된 이후인 1949년에 서울 중앙방송은 고대원, 이경희를 전속가수로 선발한다. 이들을 제2기 전속가수로 명명하기도 하지만 정작 방송국에서 어떤 활약을 했는지는 뚜렷하지 않다.
고대원과 이경희는 방송국을 떠난 후에 더 명성을 얻었던 것으로 미루어 방송의 초기 전속가수 활약은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47년
김백희, 이예성, 옥두옥, 원방현, 이계운, 송민도, 금사향
1949(2기)
고대원, 이경희
제1기 전속가수와 관련해서 기억해야 할 일은 방송국이 중심이 되어 음반(SP)을 발매했다는 사실이다. <K.B.C> 즉 <조선방송문화협회>는 1947년 경 ‘안해의 노래’ ‘사나이의 길’ ‘추억의 황성’ ‘목장의 노래’ 등이 담긴 일련의 SP를 생산한다.
그에 실린 노래의 가사와 곡조는 과거의 그것에 비해 파격적인 모습을 보였다. 초기 전속가수제에 참여했던 박시춘, 손목인, 유호가 음반 제작에 참여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일본 유학파(혹은 거류 경험자)로서 한반도 바깥의 대중음악 경향성을 잘 파악할 위치에 있었다.
1945년 방송국에 스카우트되어 방송작가로 재직 중이었고, <K.B.C> 음반 제작에 참여했던 유호는 새로운 건전가요를 만들자는 기운이 넘쳤고, 전과는 다른 음악을 해보자는 주문이 많았다고 말한다.
당시 전속가수들에게 방송국은 전속이라는 이름에 합당하는 보상을 하진 못했다. 다만 새로운 경향을 전하는 일로 보상체계를 갈음했을 수는 있다.
전속이긴 했지만 가수들은 방송활동 외에도 악극단 등 공연활동을 하거나 레코드사와의 전속계약 등을 통해 가수 생활을 영위해갔는데 방송국의 전속으로 있다는 명예, 그리고 새로운 경향의 음악의 수여를 방송국 전속가수제의 혜택으로 사고했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 전쟁 동안이나 이후에도 이들이 큰 활약을 벌일 수 있었던 것도 방송활동을 통해 인지도를 높였거나 방송국에서 맺었던 작곡가들과의 인연, 그리고 새로운 경향을 먼저 경험했던 탓으로 돌릴 수 있겠다.
서울 중앙방송국의 전속가수제는 두 번의 공모에 그치는 등 한국전쟁 이전까지는 미미한 대중음악적 사건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한국 전쟁 이후의 방송국 전속가수 제도는 이후에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