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고나 커피,’ 공들인 시간의 결과였다. 당연히 그 갈색 음료 안에는 시간의 켜가 숨겨져 있다. 그 커피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청춘을 방구석에 구겨 넣어 공간을 제한한 탓에 생긴 발명품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안에는 공간 변경이라는 사건도 담겨 있다. ‘달고나 커피’는 달고나 맛의 커피에 그치지 않는다. 조금 과장하자면 시간과 공간의 사연을 담은 작은 우주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코로나 바이러스는 대단해 보인다.
우리에게 새로운 커피도 선물하고 공간과 시간을 깊게 고민케 했다. 더 나아가서는 시간과 공간의 전유를 획책할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바이러스에 시달리던 이탈리아 사람들은 베란다에 나와 온 동네 합창을 시도했다. 베란다를 오라토리움으로 전유한 사건이었다.
시내 카페들은 강의 수강과 회사 사무 공간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보했다. 저녁 식사는 가족을 다시 모으는 시간으로 과거 명성을 되찾았다. 빡빡하게 짜여진 일과표는 강제력 없는 시간 규정이 되고 말았다.
텔레비전과 편성표는 어색한 궁합의 커플이 되고 말았다. 시간과 공간으로 엮인 학교 출석이라는 제도는 온라인 강의 탓에 무력한 존재가 되었다. 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만나면서 벌어진 일들이다.
물론 안과 바깥, 과거-현재-미래의 시공간 범주가 흐트러질 거라는 예측은 코로나 바이러스 이전부터 있었다.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들은 온 힘을 다해 그를 설파했다. 해체주의자들은 범주 해체를 주창하며 진리의 영역을 흔들어 댔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그 설파와 주창을 단숨에 성큼 넘어서는 큰 울림으로 세상을 흔들었다. 우리로 하여금 그 예측을 온 몸으로 경험케 했다.
우리 몸은 그에 응답하며 새로이 몸을 추스르고 있다. 바이러스와 우리의 만남으로 자연스레 새로운 생태계 및 인식 네크워크가 구축되었다. 우리의 반응에 따라 바이러스의 위세도 정해지고, 바이러스의 위세에 따라 우리의 몸짓도 달라졌다. 숙명적 동반자가 된 셈이다.
‘숙명’이란 명칭은 간단치 않다. 운명을 눈 앞의 화살로 빗대는 반면 숙명은 머리 뒤 화살이라 말한다. 긴장으로 만나며 대해야 하는 존재라는 뜻이리라. 숙명적 동반자 네트워크는 피할 수 없기에 만남을 존중하며 신중히 다루어야 한다.
단순히 학문적으로 구성된 형이상학적 개념이라 치부할 일은 아니다. 강단의 대상에 머물기만 하지도 않는다. 그는 우리의 삶과 죽음에 결부되는 결연한 존재다.
그를 삐끗하고 잘 못 다루었다가 험한 꼴을 연출한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신중하게 다루지 않은 탓에 시민이 힘없이 쓰러져 주검이 되게 하는 몹쓸 장면까지 연출한 사회도 여럿 목격하였다.
동반자가 된 숙명이기에 내 공부가 그를 비켜갈 순 없다. 그로부터 멀찌감치 서서 바라만 볼 수 없는 사회 내 존재 아닌가. 당연히 내 공부를 매만지며 그 쓸모를 고민하게 된다.
지금껏 벌여온 공부로 그 동반자 네트워크를 신중히 다루는데 기여할 바는 있을까. 세상과 바이러스의 네트워크에 내 공부를 보태어 네트워크를 더 새롭게 만들고 사람들을 이롭게 할 새 과제가 툭 하고 내 앞에 떨어졌다.
공부가 공부로 그치지 않고 생명을 구하고, 삶을 편케 하는 실사구시의 공부를 챙기도록 명받게 되었다. 대단한 소명의식 때문이 아니다. 살리고, 또 살기 위해서다.
살아남을 요량으로 당분간 바이러스가 흔든 범주들의 가운데에 서 보기로 한다. 안도 바깥도 아니고,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닌 곳에 서서 세상을 달리 보려 한다. 낯설기는 하지만 부대끼고 살아가야 할 곳이 곧 그곳이기 때문이다.
베란다와 카페, 일과표 없는 일상, 편성표없는 텔레비전. 출결석이 없는 학교, 그 사이 공간과 사이 시간이 우리의 삶의 조건이 되었으므로 그를 뜯어보고 새롭게 가꾸려 한다.
공공 카페를 만들어 모이고, 공부하며, 업무 챙기는 것은 물론이고 공론장 역할도 하게 하는 일, 베란다를 상실한 아파트 주민을 위해 공공 베란다를 만드는 일, 비용 지불 없이 언제든 원하는 문화적 내용을 챙겨볼 수 있게 할 공공 플랫폼을 세우는 일, 영세 상점들의 배달을 연결해주는 공공 앱의 개발 등등.
‘달고나 커피’는 이미 상품으로 출시되었다. 편성표 없는 텔레비전은 거대 미디어 자본인 넷플릭스가 점령했다. 시간과 공간의 켜를 제대로 챙겨보기도 전에 자본의 무임승차가 극성이다.
이익을 챙기려는 쪽이 어찌 자본뿐일까. 모든 권력은 그 변화에 틈입하려 한다. 재택근무를 활성화한다며 프리랜서 양산이라는 계획을 담은 고용 정책이 그 예다. 그래서 실사구시라는 깃발 드는 일로만 그치면 공부는 뒷북이 되고 만다.
공부하는 모두에 학문공동체라는 기합을 넣고, 실사구시라는 깃발을 들고, 동시에 권력이라는 포식자의 먹이가 되지 않도록 긴장해야 한다. 그 새로운 공부로부터 혜택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는지 두리번거려야 한다. 어깨를 겯어야 하며, 사회적인 것을 더 챙겨내야 하며, 낮은 곳을 응시하는 공부여야 한다.
공부의 존재 이유, 융합 공부의 필요성, 강단을 넘은 실천이어야 할 당위성은 또렷해진다. 바이러스와 인간, 공부를 네트워크로 엮으면서 얻게 된 성과다. 바이러스를 미워할 증오 시간보다는 수긍하며 뛰는 생산적 시간이 필요해진 때다.
떨어지기보다는 붙어서 챙겨내야 할 일이 더 많은 시간과 공간이 되었다. ‘달고나 커피’가 기억 속에서 희미해진 달고나의 맛과 그 때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해주었듯 인간-바이러스 네트워크의 시간과 공간은 잊혀져 가거나 흉한 꼴로 전락해가던 우리의 공부를 건져내 주고 있다.
그렇게 바이러스와의 숙명적 관계는 더욱 짙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