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가요계는 이른바 대마초 파동으로 쑥대밭이 된다. 당시 인기 가수치고 이 사건으로 활동을 중지하지 않은 가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당시 트로트 계열도 나훈아, 남진을 이을 대형가수가 등장하지 않아 불황을 헤매고 있었다. 그런 탓에 가요계는 무주공산이 된다. 스타 부재로 가요계는 풀이 죽은 듯 보였다. 그 고요와 결핍을 뚫고 ‘트로트고고’라는 장르가 등장한다.
트로트와 당시 유행이던 4박자의 고고리듬이 결합한 혼성 형식이었다. 나이트클럽, 고고장에서 활동하던 그룹사운드(혹은 보컬 그룹)의 리더가 솔로로 나서 이 장르를 소화했다. 조용필, 최헌, 김훈, 조경수, 윤수일, 함중아, 장계현 등이 이 장르의 대표 주자다. 이들 인기는 1970년대 말에 정점에 이른다. 이후 1980년대까지 여세를 몰아간다. 춤을 출 수 있을 만큼의 경쾌 성, 쉽게 따라 부를 만큼의 용이성, 그룹사운드가 전하는 모던함으로 여러 세대를 아우르는 강점을 갖고 있었다.
윤수일은 1977년 트로트고고 ‘사랑만은 않겠어요’를 부르며 데뷔한다. 윤수일의 인기는 1982년 ‘아파트’를
발표하고 1984년 방송사 가요 순위프로그램에서 5주 연속 1위에 오르면서 정점을 찍는다. 경쾌 성, 용이성, 모던함을 다 갖춘 이 곡은 방송 너머 각종 운동경기장에서 응원가로 불리며 누구나 알고 부르는 노래가 된다. ‘아파트’는 한국 가요사에 ‘트로트고고’라는 장르의 존재증명곡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하겠다.
간간히 무대를 서는 윤수일이었지만 점차 대중의 시야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러던 차 그의 노래 그리고 ‘트로트고고’가 로제의 ‘APT’로 다시 소환되었다. 무려 40년 만의 귀환이다. 짙은 수염을 하고 주름이 굵어진 윤수일의 얼굴에서 그 세월의 흔적을 읽을 수 있다. 같은 제목을 한 두 곡 사이의 세월 간극에선 무슨 일이 있었을까. 흔치 않은 제목인 ‘아파트’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너의 아파트’를 찾아가는 윤수일과 ‘나의 아파트’에 빨리 와서 파티를 하자는 로제 사이. 국내에서 5주 연속 1위에 오른 곡과 빌보드 차트 연속 3주 5위에 오른 곡 사이. 아파트라는 말 외엔 한국어 가사인 곡과 몇 마디를 빼곤 모두 영어로만 구성된 곡 사이. 군부독재 시대의 ‘아파트’와 계엄사태를 응원봉으로 거부하는 시대의 ‘APT’ 사이. ‘트로트고고’라는 혼성 장르에서 ‘팝락’이라는 혼성 장르 사이.
그 사이에서 아파트는 녹아내려 점차 그 형체가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보고 만지며 찾아가고 잠자며 머물던 공간에서 게임의 순간으로 바뀌어 있다. 아파트는 더 이상 묻고 따지지 않는 공기처럼 우리가 비켜 갈 수 없는 삶의 일부분이 된 공간이다.
묻고, 벨 누르며 격을 차리는 객체화된 공간은 더 이상 아니다. 이모지로 초청하면 그에 응해 밤새 게임하며 노는 무형에 가까운 공간이다. 나를 기다리며 네가 지키는 공간에서 우리가 함께 즐기는 공간으로 그 형태를 바꾸었다. 국적, 성별, 언어 경계가 모두 사라져 다양한 깃발, 인물, 인종, 놀이가 어우러지는 그런 공간이다.
윤수일의 ‘아파트’는 무주공산의 순간에서 장르 혼성을 꾀한 혁신이었다. 틈새를 비집고 한국 대중음악에 변화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도시와 일상을 노래에 담는 사건을 만든 모험가이기도 했다. 그 탓에 지금의 트로트가 만들어졌다는데 많은 이가 동의하고 있다.
로제의 혁신은 더 커 보인다. 일상의 놀이를 케이팝에 얹는 솜씨, 로컬 한 소재 활용을 질러버린 용감함, 자신의 다국적성을 작품에 담는 영리함, 글로벌을 감당하기 위한 협업을 꾀한 점 등.
윤수일은 자신의 ‘아파트’를 구축아파트라고 낮춘다. 아직도 왕성하게 무대를 누비는 노장의 빛나는 겸양처럼 들린다. 덕분에 로제는 신축 ‘APT’의 주인공이 되었다. 딱딱하던 모든 경계를 허물었고, 객체로 다뤄지던 존재를 유동의 존재로 만들며, 오고 가는 주체가 뚜렷하던 데서 누구든 함께 하는 공간으로 바꾼 혁신가가 되었다.
윤수일은 과거 한때 새로운 장르로 무주공산을 물들이던 인물이지만 겸양으로 세상에서 살짝 비켜서면서 염치 있는 노장으로 우뚝 섰다. 혁신을 이룬 젊은 로제는 과거에 고마움과 성원을 보내는 그런 개념 있는 젊은이로 박수받고 있다.
‘아파트’와 ‘APT’ 사이를 수많은 분, 초, 시만 메우고 있진 않았다. 40년 사이로부터 붉어지는 혁신, 겸양, 교훈, 개념은 차고 넘친다. 마침 노래의 제목이 건설, 건축과 관련되었는 바 두 곡이 얻은 찬사와 영광의 기운이 새해엔 온 건설업계에 흘러넘치길 기원한다. 건배, 건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