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의 후견주의
미국의 대법관과 후견주의
서굿 마셜 (Thurgood Marshall, 1908-1993). 미국의 대법관 중 후세에까지 이름을 남긴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미국 최초의 흑인 대법관이었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고향의 대학이던 메릴랜드 로스쿨로부터 입학을 거부당했다. 흑인 대학인 하워드 대학에 진학했다. 1930년대부터 변호사로 활동하며 흑인 차별 철폐에 헌신했다.
미국 공립학교의 인종 분리가 위헌이라는 판결을 이끌어냈다. 이 판결로 서굿은 시민권 운동의 영웅으로 떠오른다. 1967년 민주당 출신의 린든 존슨 대통령에 의해 대법관 지명을 받는다. 서굿은 “헌법은 완전하지 않다. 우리는 그것을 정의를 향해 나아가며 더 완전하게 만들어가야 한다”는 신념을 대법관 보직 내내 드러냈다.
미국 대법관은 종신직이다. 자발적으로 사임하거나 사망하거나 탄핵으로 파면되지 않으면 평생 재직할 수
있다. 서굿 마셜은 스스로 은퇴를 자청하였다. 자신이 “늙고 병들어 죽어간다”며 은퇴를 선언한다. 그의 은퇴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우려를 표명했다. 은퇴를 선언한 1991년 당시의 대통령은 공화당의 조시 H.W 부시였기 때문이었다.
부시 대통령은 서구의 후임으로 흑인 법률가였던 클라렌스 토머스(Clarence Thomas)를 지명한다. 토마스는 흑인 빈민가 출신이었다. 하지만 그 보수성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지명 후 청문회에서 성희롱 폭로가 이어졌고 미국 사회가 연일 청문회 중계를 시청하고, 각자의 입장에서 그를 지지 혹은 반대하며 논란을 벌였다.
미국 역사상 가장 논쟁적인 대법관 인준 사건으로 남았다. 상원 투표에서 52 대 48이라는 초박빙 표차로 임명 승인이 이뤄졌다. 그리고 대법관 임명 이후에도 줄곧 강경 보수 성향의 판결을 내렸고, 심지어 인종 문제에 있어서도 소수자 우대 정책에 반대하기도 했다.
서굿과 토마스 대법관의 임명을 길게 소개한 데는 정치적 후견주의(Clientalism)에 대해 말을 하기 위함이었다. 후견주의는 권력자가 개인이나 집단에 혜택, 자리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정치적 충성, 지지 등 보상을 받는 일을 일컫는다. 민주당 출신 대통령이 진보 성향의 법률가를 지명해 민주당에 맞는 판결을, 공화당 출신 대통령이 보수 성향의 법률가를 지명해 그에 맞는 판결을 내려주길 원하는 것도 일종의 후견주의다.
한국의 대법관 후견주의
물론 그런 식으로 따지면 후견주의에 해당하지 않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는 반문도 가능하겠다. 하지만 대법관의 판결이 당의 색깔을 따르고, 정치색을 드러낸다면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대법관 정도의 직책에 이르러서는 후견주의는 어떤 식으로든 완전히 배격되어야 하지만 현실에선 그렇지 못하다.
한국의 대법관 선출 및 임명 방식도 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대법원장이 제청하고, 대통령이 임영 제청한 후,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 표결하고, 대통령이 대법관을 최종 임명한다. 그런데 대법원장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것을 감안하면 후견주의적 성격은 대체로 뚜렷이 드러난다.
2025년 5월 1일에 있었던 대법원의 파기환송 사건을 보면 더욱 그렇다. 대법관들은 고등법원 판결 파기환송에 10명이 동의했고, 2명이 반대하였다. 그런데 동의 법관 10명은 윤석열에 의해 임명 제청된 자들이고, 2명의 반대자는 문재인 대통령에 의해 임명 제청된 사람들이다. 이재명 후보의 사건이 정치적인 내용을 담고 있음을 감안하면 이 판결은 ‘정치적’이었거나 ‘후견주의적’이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되었다.
후견주의 천국
전통적으로 후견주의라며 지속적인 비판을 받아온 곳이 있다. 방송위원회와 그로부터 추천되는 KBS, MBC의 이사진 구성방식이다. 5인 방송위원회의 결정은 거의 모든 안건이 3:2로 결정된다. 여당 몫의 3인 위원, 여당 몫의 2인 위원이 어김없이 자신을 추천한 당의 입장에 맞춘 표결을 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위원들의 전문성이 발휘되지 못함은 불론이고 무능과 비생산의 온실처럼 손가락질받는다.
그래서인지 그곳에 이뤄지는 위원 선임은 터무니없는 경우가 많다. 전문성 있는 인사를 위원으로 추천하는 것이 아니라 거수기 역할을 잘해줄 사람을 뽑는 일이 반복되는 것은 당연하다. 무려 장관 및 차관급 자리 5개를 거수기 노릇 할 사람들로 가득 차니 그 위원회가 정상적이기란 어렵다.
방송통신위원회의 추천을 받는 공영방송의 이사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방송에 관한 전문성은 장식물에 불과하다. 언제든 자신을 추천했던 당에서 던져주는 결론에 표결할 준비 자세를 취하고 있다. 후견주의의 끝판왕인 셈이다.
그런데 방통위원회나 공영방송 이사회의 후견주의 폐해와 대법원에서 벌어지는 후견주의가 가져올 해악 간에는 비교가 불가하다. 그래서 대법관에겐 자격 외에도 특정 자질을 요청하고 심사하려 한다. 외부 압력으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하고, 사적 이익, 친분, 권력관계에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국민이 납득할 만한 신뢰감을 주는 품위도 갖추어야 한다. 사회 전체에 미칠 영향력을 감안해야 하고, 다양한 사회 갈등에 대한 균형 감각도 지녀야 한다.
대법관들의 5월 1일 결정에서 후견주의가 강했을까, 아니면 자질의 발휘가 충분히 이뤄졌을까. 10:2라는 결론은 후견주의의 스모킹 건처럼 보인다. 방송통신위원회의 3:2, KBS 이사회의 7:4, MBC의 재단 격인 방송문화진흥회의 6:3이란 한결같은 투표결과와 판박이다. 판박이라 해서 같은 강도로 욕을 먹을 일은 아니다. 공영방송 이사회, 방송통신위원회의 후견주의에 대한 비판보다 100배 이상의 강도로 대법원의 후견주의도 비판받아 마땅하고, 개혁되어야 한다.
대법관이 거수기 꼴을 하고 있어선 사회는 늘 억울함으로 가득 차지 않을까. 거수기 노릇하는 자를 뽑는데 자격은 왜 그리 휘황찬란한지. 나이 45세 이상이어야 한다는데 거수기에 뭐 그런 연령 제한이 필요할까. 법조 경력이 20년 이상이 되어야 한단다. 거수기가 되는데 너무 과한 스펙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