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셔온 커피만큼 늘어가는 기억들
모처럼 오렌지카운티에 비가 내린다. 그것도 이렇게 쏟아지듯이 내리는 것은 근 일 년만이 아닐까 싶다. 겨울 우기에만 잠깐씩 비가 내리고 일 년 내내 징허게 맑은 하늘에 햇빛이 쨍쨍 대는 캘리포니아에 이런 비는 정말 귀한 손님이다. 게다가 지난 몇 해 계속 가물었던 터라 더욱 반갑다. 집에서 커피를 내려 도서관으로 가려던 발걸음이 동네 스타벅스로 바뀌었다. 커피 한잔 마저도 돈 주고 사 먹기에는 내 주머니 사정이 녹녹지 않기도 하고, 커피 한잔 마저도 나에게 대접하기에는 아깝다며 근래의 내 삶이 너무 값어치가 없음을 스스로 비난하고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비 오는 날 밖이 보이지 않는 도서관에 있기에는 너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만에 내리는 비인데.
이것 또한 비 때문일까? 사실 갑자기 커피 내리기가 귀찮아지며 커피 내리는 노동을 $1.95에 사버리자는 생각이 발걸음을 바꾼 가장 큰 요인이지 싶다.
이렇든 저렇든 커피는 있어야 한다. 커피는 이제 내 미국 생활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미국에서 살며 늘은 것은 커피와 눈치뿐이라는 자조적인 농담을 할 정도로 그렇다. 아침에 하루를 일어나 그게 언제든 커피 한잔을 한 후에야 하루가 시작되는 느낌이고 장거리 운전을 할 때면 꼭 커피가 자동차 홀더에 껴있어야 하며 식사 후 커피 한잔이 없으면 소화가 되지를 않는다. 언제부터 이랬을까 싶지만, 분명한 것은 처음에는 이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 도착한 곳은 Virginia 였다. 자세한 도시는 생각도 나지 않는, 단지 Washington DC와 가까웠다는 기억만 있다. 친구와 함께 온 그의 친척집이 미국 생활의 첫 시작이었다. 처음 와 본 타국이라 모든 것이 생소하고 친구의 친척집이었기에 조심스러웠던 그때, 며칠을 친척의 일정에 맞춰 따라 움직이던 친구와 나는 모험을 해 보기로 했다. 둘이서 전철을 타고 Washington 관광을 가기로 했다. 전철역까지도 한참을 버스를 타고 나가야 했고 그마저도 갈아타면서까지 가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결론적으로는 사실 뭘 봤는지도 기억이 없다. 백악관을 봤다는 기억과 그 근처의 도시 구조 정도. 그저 엄청나게 긴장하고 있었던 감각의 기억만 남아있다. 얼마 전 16년 만에 다시 방문한 Washington에서 옛 기억을 되살려 봤지만 역시나 그 이상은 남아있지 않았다.
당시 핸드폰이 없던 우리는(2000년도에 미국에서는 핸드폰 가지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공중전화로 친척에게 전화를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공중전화를 쓸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무슨 자신감으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가지고 있는 준비해 온 동전이 없었다. 전철표를 사며 생각 없이 동전을 다 써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동전이 필요한 우리는 거리 가판대에서 파는 커피를 한잔 사기로 했다. 동전이 목적이었기에 가장 작은 사이즈로. 지금 생각해 보면, 가판에서 파는 small 사이즈 커피가 12 온즈나 됐을까? 진하지도 않았을 테고 한 모금 거리도 안될 양이었을 텐데, 지금까지 남아있는 당시의 강렬한 인상은 검은 먹물을 한 사발이 우리 앞에 놓이는 것이었다. 옆에 설탕이 있는지 크림이 있는지도 모르는 동양의 젊은이들은 그래도 돈 주고 산 것이라며 꾸역꾸역 쓰디쓴 커피를 서로 더 먹으라고 인심을 쓰며 끝내 바닥을 보았다. 이 기억이 내 미국 생활의 처음이다. 이상하게도 이 기억이 미국 생활 첫 기억으로 간직되고 있다. 그만큼 강렬한 기억이기 때문이기도 할 테고, 그 후 살아오며 커피가 내 삶에 주는 비중이 그만큼 커졌기 때문이겠지.
뉴욕에서 그리고 캘리포니아에서 16여 년을 살며 커피 한잔을 마주하면 연결되어 따라나오는 기억들 그리고 그 기억 안의 사람들이 참 많다. 스타벅스 톨 사이즈 커피 한 잔이면 심장이 너무 벌렁거리며 뛴다던 미네소타로 시집간 친구, 설탕을 넣어도 넣어도 달지가 않다며 설탕 봉지를 계속 뜯고선 결국 설탕물을 마시던 한국 군대에 입대 후 연락이 끊긴 동생, 아침마다 가판에서 파는 작은 커피 한잔과 버터 바른 차디 찬 베이클 하나, 합이 $1 짜리 아침 식사로 하루 종일을 버티던 힘들었던 시절, 무언가 나 자신에게 상을 주고 싶은 날 특별히 큰 맘먹고 사 먹던 $1.50짜리 스타벅스 tall 사이즈 커피. 지금은 그게 $1.95가 되었으니 그맘큼의 시간이 또 흐른 것이겠지. 그리고 그런 힘들던 추억을 듣고 언젠가부터 내 크리스마스 카드에 꼭 스타벅스 카드를 껴 전해주는 누님.
모처럼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스타벅스에 앉아 있는 오늘 이 순간도 커피와 이어져 이 글을 쓴 기억으로 세겨지겠지 싶다. 뉴욕을 떠올리면 한겨울 스타벅스에서 식어가는 커피를 앞에 두고 앉아 통유리 밖으로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 사이를 바삐 걸어가는 인파를 바라보던 기억이 남듯이.
오늘 나에게 커피를 사준 만큼 커피값을 충당할 만한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오늘은 그냥 이렇게 보내야겠다. 오래간만에 비가 저렇게 오는데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 값어치가 충분하니까. 여러모로 여력이 없어 한동안 끄집어내지 못했던 옛 기억들 떠올린 것만으로도 그 값어치가 충분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