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4월 8일에 쓴 글
이 글은 2005년 블로그와 한 인터넷 신문에 올린 글입니다. 2023년 오늘, 당시와는 제작 환경이 상전벽해처럼 바뀌었습니다. 한국 드라마 산업도 채널의 다변화와 외국 자본의 투자로 양적인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그 결과 K-드라마, 한류라고 부르는 질적인 성장도 이루었습니다. 주 52시간 근무 체제는 드라마 제작 문화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었습니다. 쪽대본으로 드라마를 제작하던 시절은 거의 끝나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지상파 방송사로 몰려있던 드라마 제작의 권력이, 케이블 TV와 제작사로 옮아갔습니다. 2023년 오늘은 그 권력이 넷플릭스로 대변되는 해외 OTT 사업자에게 주어졌습니다.더불어 드라마를 실시간으로 시청하는 행태는 거의 끝나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스트리밍의 시대입니다.
최근 경기 침체로 광고 시작이 축소되면서 급속도로 드라마 제작시장이 얼어붙고 있습니다. 국내 자체적으로 드라마를 펀딩 할 수 있는 재원이 부족합니다. 한국 드라마의 펀딩을 해외 OTT산업에 기대는 형국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한국 드라마의 전성기가 정점을 찍지 않았나 하는 불안한 생각이 떠오르는 요즈음입니다.
때문에 아래의 글은 2023년 오늘의 현실에 맞지 않습니다. 필요하신 분만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기록용으로 올려둡니다. (2023년 10월 11일)
한 블로그에서 A 드라마에 대한 혹평을 읽었습니다. A드라마에서 나타난 ‘촌스러움’은 비단 이 드라마만의 문제점은 아닐 것이기에 한국 드라마의 일반적인 제작 관행에 비추어 변명을 하겠습니다.
많은 분이 드라마의 설정이나 소품이 현실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비판을 하십니다. 이렇게 드라마가 현실보다 뒤처지게 허술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 드라마의 연출이나 작가가 세상의 현실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둘째, 제작 기간이 부족해 충분한 준비와 검증을 할 시간이 없었다. 셋째, 이야기의 전개 상 필요하거나, 또는 중요치 않다고 생각해서 가상의 전제를 도입했다. 넷째, 드라마의 시청대상층이 이런 디테일을 의식하지 않기에 무시한다.
첫째 항에 대한 변명부터 하겠습니다. 드라마 제작진이 세상 경험이 없어서 이런 실수를 범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특히 신인 작가와 신인 연출이 파트너가 되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드라마 작가는 직장생활을 해본 적이 없을 것이라는 전제로 비판하면 자신의 전직(前職)을 들어가며 억울해할 작가가 꽤 많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제작기간이 부족해 충분한 준비와 검증을 할 여유가 없기 때문에 드라마의 디테일이 부족한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나라 1시간짜리 미니시리즈 드라마는 보통 5일에서 6일의 촬영 기간에 제작합니다. 그런데 보통 16부작 정도를 만들면 1부에서 4부까지 제작하는데 총전력의 80%를 사용합니다. 드라마의 성패가 초기에 결정이 되기 때문이죠. 그래서 사실 5부 이후의 드라마는 편당 2 ~ 3일의 제작기간 밖에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일 제작 일정이 촉박한데 특별한 소품이나 설정이 필요하다면 제작진은 대충 흉내만 내고 지나갔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 제작기간은 제작비와도 직결이 되는 문제입니다. 선진국의 드라마와 우리의 드라마는 제작 일정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미국의 드라마나 일본의 드라마는 일주일에 한 회만 방송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CSI] 나 [24] 등은 한 회 총 45분의 분량을 최소 12일에서 15일에 거쳐 찍습니다. 우리는 1회가 약 65분의 러닝타임인데 이것이 일주일에 2회가 방송이 되고 이것을 방송을 나간 후부터는 4일 정도에 촬영을 끝냅니다. 즉 45 min: 12 days(미국)와 130 min(65 X 2) : 4 days(한국)는 결코 등식이 성립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우리 드라마가 후진적인 제작체계를 지녔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국 드라마가 이렇게 촬영시간이 부족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윗글에서 썼듯이 초기 방송분의 성과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연출과 작가는 1회부터 4회까지의 대본을 고치고 또 고칩니다. 그렇게 고친 대본을 들고 촬영장에 나가 연출은 힘을 주어 찍습니다. 이렇게 심혈을 기울인 방송분이 1회에서 4회까지 준비가 되고, 그 후에는 거의 생방송 분위기로 촬영합니다. 천만다행으로 대본이 축적되어 있더라도 방송사나 제작사에서 일찍 촬영을 시작하는 것을 막는 경우도 있습니다. 시간 여유가 많으면 제작비를 과하게 쓸까 촬영을 막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촬영이 급박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대부분 대본이 늦어져서입니다.
어떤 작가는 지난주에 집필한 드라마가 방송 후에 금주 방송분을 집필하기 시작합니다. 배우의 연기와 시청자의 반응을 확인하고 대본을 쓰겠다는 이유입니다. 수, 목 드라마라면 빠른 경우 목요일 저녁부터 다음 주 수요일 대본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온 연기자와 스탭이 비상이 걸려 기다리다 몇 씬 씩 보내온 대본으로 촬영을 시작합니다. 금토일월 4일 동안 겨우 촬영을 마치고, 방송 당일에 편집, 효과 더빙, 믹싱을 하고 방송합니다. 그런데 이 경우만 해도 상당히 대본이 일찍 나온 편입니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대본을 받아 수요일이나 목요일에 방송하는 일이 자주 벌어집니다.
현실은 연출자의 과욕, 대본의 수급 문제 등 모든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촬영을 급하게 만듭니다. 스타를 캐스팅하기 위해 시간을 허비하기도 해 사전제작은 정말 요원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한 드라마의 촬영에 A, B팀의 두 명의 연출과 두 팀의 스탭이 동원이 됩니다. 배우를 A 팀과 B팀이 이 장소 저 장소로 주고받으며 제작이 진행됩니다. 비상시에 한국 드라마 PD의 촬영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빨라 실제 대본이 나오는 속도보다 촬영 속도가 빠를 정도입니다. 한국의 배우도 놀랍습니다. 5분 전에 받아 든 대본을 금세 암기하고, 연출이 전해 준 앞뒤 씬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바로 연기합니다. 이런 제작 과정 속에 어느덧 드라마의 품질 관리는 간데없고, 단지 방송을 제시간에 내느냐 못 내느냐 촌각을 다투는 위험한 곡예를 하고 있습니다.
드라마가 현실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세 번째 이유는 이야기 전개 상 필요하거나, 또는 중요치 않다고 생각해서 가상의 전제를 도입했을 때입니다. 현실을 충분히 알고 반영한다면 아주 사실적인 드라마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현실을 잘 알 경우 오히려 현실에 갇혀 드라마의 재미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실제 상황이나 사실에 과하게 집착하는 것은 오히려 작가의 상상력이나 연출의 창의력에 제약을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를 알면서도 무시할 때도 많습니다.
한편 많은 드라마의 배경 가운데 드라마화하기에 좋은 특성 하나만을 확대해서 다루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취재는 자세히, 드라마는 대충' 만들자는 모토를 가지고 있습니다. 현실을 반영하되 그 현실을 마음껏 활용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자는 것이죠. 드라마 속의 리얼리티는 그것이 극 중 주인공의 활동 공간으로 충분히 기능하느냐의 여부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현실의 공간을 드라마적 공간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현실을 재단하고 비약하며 편집하는 일이 많습니다. 이 과정에서 드라마의 현실이 주인공의 선택과 갈등 상황을 그럴듯하게 보이게 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현실의 리얼리티와는 다른 '극적인 리얼리티'가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이 드라마는 현실을 제대로 그리지 못하고 있다'라는 비판보다는 '이 드라마의 스토리는 개연성이 없다'라는 지적이 훨씬 제작진에게는 뼈 아픈 법입니다.
네 번째로 드라마에서 소개하는 직업의 현실은 어떤 시청자층을 대상으로 삼느냐에 따라 다른 양상을 가집니다. 일반적으로 대한민국의 드라마는 여성 시청자를 주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30대부터 50대의 여성을 위해서 만들고, 초등학교를 졸업한 정도라면 드라마의 내용을 90% 이상 이해할 수 있는 소재를 다루려고 합니다. 수도권에 거주하는 주부가 주요한 대상입니다. 따라서 보통 여성이 골 아프게 생각할 직업은 가급적 다루려 하지 않으려 합니다. 설사 다룬다 하더라도 골 아픈 디테일은 생략해 버리곤 합니다.
펀드 매니저를 다룬다 하면, 실제로 자금을 운영하고 투자하여 이윤을 내는 행위는 여성 시청자의 흥미를 유발하기도 어렵다고 전제하고, 겉멋만 부리고 곧장 개인의 애정사로 올인하는 것이 우리 드라마의 현실입니다. 만약 한국판 CSI를 제작한다면 그리 좋은 성과는 거두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상이나 메시지가 여성 주부 시청자층이 쉽게 호응할 만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우리 대통령이 좋아한 미국 드라마 [Westwing] 같은 훌륭한 정치 드라마도 우리나라에서는 성공할 가능성이 적습니다. 너무 남성 지향적이고 지식인에게만 소구 할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직업의 현실성과 전문성, 그리고 이야기를 잘 조화시킨 성공작은 무엇일까요. 바로 [대장금] 같은 드라마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성주부층이 쉽게 흥미를 가질 수 있는 요리, 즉 건강과 웰빙을 드라마의 틀 속에 잘 우려 넣은 신선함이 {대장금]의 성공원인 중 하나였다고 봅니다. 그래서 잘 된 드라마와 그렇지 않은 드라마를 비교하면 여성의 흥미를 돋우는 요소가 있었느냐가 성패의 차이를 만들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미국이나 일본드라마는 왜 우리와는 달리 수준 높은 전문적인 소재들을 채택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여성층을 노리지 않을까요?
많은 분이 일본이나 미국 드라마가 소재의 신선함과 극적 완성도를 가지고 있다고 칭찬하십니다. 이들은 여성시청자가 선호하지도 않을 수도 있는 과감하고 파격적인 소재를 드라마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들은 왜 여성시청자를 겨냥한 우리와는 달리 파격적인 기획을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 이유를 미국과 일본 방송 시장 경쟁의 치열함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과 일본은 우리보다 경쟁의 양상이 치열합니다. 미국의 경우 ABC, CBS, NBC, FOX, UPN, 등 7개의 전국 네트워크 TV가 200여 개의 케이블 TV, 또는 위성채널이 더 많은 시청자의 시선을 받기 위해 경쟁합니다. 일본은 민영 상업방송 사이의 공방이 치열해 공영인 NHK 외에도 도쿄를 기준으로 후지 TV, NTV, TBS, TV아사히, TV도쿄 등 5개의 민영 상업방송이 매일 전쟁 같은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런 경쟁 체제 속에서 이들이 택한 성공 전략은 이른바 ‘틈새 전략’입니다. 즉 상대 프로그램과 차별화할 수 있는 개성적인 소재를 찾은 것이 미일 드라마의 소재가 다양성과, 전문직이 등장하는 전문 장르 드라마를 제작할 수 있는 배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은 시청자라도 확실하게 먹힐 수 있는 이야기를 찾아 공략한 후, 전체적인 파이를 넓혀간다는 전략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전략이 오히려 대중의 흐름을 읽는 것에 실패했다는 비판도 그들 내부에 있습니다.
[겨울 연가]가 대박이 터지자, 일본의 TV 관계자도 놀랐지만, 저희 한국 드라마 PD들도 놀랐습니다. 그래서 저희 동료 한 사람이 한일합작 관계로 만난 일본의 드라마 PD들에게 물어봤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일본의 드라마가 완성도도 높고 재밌는데, 왜 일본인들이 이렇게 한국의 드라마에 열광하느냐’가 그 질문이었습니다. 그러자 일본의 드라마 프로듀서가 해준 대답은 ‘한국의 드라마는 쉽고, 갈등이 명확하다. 우리는 [겨울연가]를 보면서 그동안 우리가 범용 마켓에 자리 잡고 있는 대중의 기호를 놓치고 있었다고 느끼고 반성하고 있다’가 했답니다. 즉 틈새를 공략하다 정작 다수의 마켓을 생각하지 못했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미국의 경우 수많은 Cop 드라마와 메티칼 드라마의 홍수 속에 최근 가장 주가를 올린 드라마는 [Desperate Housewives]라는 것인데, 이 드라마는 전형적인 아줌마 기획입니다. 5명의 각각의 사연을 가진 한동네의 아줌마들이 자신의 삶의 중반에 새로운 선택을 하는 미스터리 멜로물입니다. 이 드라마의 작가는 ‘왜 프라임 타임대에 한낮에 방송할 수 있는 아줌마 취향의 소프드라마(Soap drama)를 만드느냐’고 방송사로부터 수 없이 거절을 당해야 했답니다. 그래서 미, 일의 시청자에게도 한국의 드라마가 택하는 성공전략이 먹히는 것이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참, 우리는 미국, 일본의 드라마 중 성공한 것들만 골라서 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실제로 들여다보면 이들의 드라마에도 실망스러운 수준에서 제작돼 얼마 못 가 막을 내리는 것들이 아주 많습니다.
드라마 A를 변명하려 시작한 글이 길어졌습니니다. 이제 변명은 그만하고 어떻게 해야 한국 드라마가 수준을 올릴 수 있을지 제작진으로서 제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수준 높고 재미있는 드라마는 현재의 제작 시스템에서는 나오기 힘듭니다. 몇 명의 장인이 초인적인 노력을 하고, 방송사가 그 초인적인 노력을 감당하려고 출혈을 감당해야 나올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는 소수의 명품과 다수의 쓰레기가 생산되는 현재의 양상이 반복될 뿐입니다.
다수의 우수한 인력이 장기간에 걸쳐 검토한 좋은 기획안을 만듭니다. 그 기획안으로 테스트용 파일럿 프로그램을 만듭니다. 이를 통해 사전에 검증받은 후 방송한다면 좋은 프로그램이 시청자를 찾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결과를 만들 제작상의 여유가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시간에 쫓겨 방송용 테이프를 방송 시작 직전에 주조정실로 밀어 넣는 웃지 못할 일이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그 과정에서 방송 프로그램은 거의 도박 테이블에 주사위를 던지듯 전파를 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날림과 부실공사가 아직까지 우리 방송계에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시청자에 대한 범죄요, 비판해야 할 사실입니다. 시청률을 핑계로 막판까지 작가는 내용을 고치고, 시청자의 선호를 보고 한 주, 한 주 프로그램의 제작 방향을 바꾸는 기획의 우유부단함이 진정 시청률 경쟁이 낳은 폐해입니다. 이를 개선하려면 제작진에게 다음과 같은 시간적 경제적 여유를 주어야 합니다.
첫째, 惡質의 프로그램을 방송 전에 폐기하고, 良質의 프로그램을 선택할 수 있는 편성의 여유가 필요합니다. 둘째, 방송 현업인 외에 기획 준비 팀과 장기 기획을 할 수 있는 인력의 여유가 필요합니다. 셋째, 하루라도 더 촬영과 취재, 편집에 시간을 들일 수 있는 제작 일정의 여유가 필요합니다.
위의 세 가지는 양질의 프로그램에 다가갈 수 있는 외부적인 환경인데 방송사의 경제적 여유로부터 가능한 사항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방송사 수익구조의 다변화와 개선이 필요합니다. 현재와 같이 드라마 제작에 소요되는 비용은 시장의 논리에 따라 점점 늘어나고 있는데, 방송사의 거의 대부분의 수익원인 광고는 비시장논리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양질의 드라마를 제작하기 위한 재원이 한계 상황에 부딪치고 있습니다. 편법에 가까운 제작 협찬이 판을 치게 됩니다.
방송정책이나 편성상 프로듀서가 시청률에서 자유로운 해방구를 만들어 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시청률이 잘 나올 개연성이 있는 맛있는 ‘기호품’ 프로그램뿐 아니라, 시청자들의 입에는 쓰더라도 몸에 좋은 ‘영양식’을 공급할 여유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이런 채널과 시간대에서 새로운 시도와 기획이 시청률에 구애받지 않고 시도할 수 있는 여유가 우리 방송에 주어졌으면 한다.
끝으로 TV 드라마를 진지하게 평가할 비평가들의 존재가 필요합니다. 한국 영화의 발전에는 인력의 고급화를 통해 영화 산업이 진흥되었고 여기에 자본의 결합이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제작진 이외에 새로운 비평가, 거의 비평가 수준에 이른 많은 관객이 큰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오늘 TV 드라마를 진지하게 평가할 비평가의 존재는 부족합니다. 블로그에 영화평을 써내는 블로거는 숱하게 많지만, 진지하게 TV 드라마의 성과를 논의하는 비평은 거의 없습니다. 드라마를 진지하게 비판하는 시청자 군의 성장은 TV드라마를 시청률로만 평가하지 않고, ‘작품’으로 바라보게 끔 제작진을 환기시킵니다. 이런 시청자는 수준 높은 드라마의 생명을 연장시키고, 시청률은 높아도 ‘못난’ 드라마들이 제정신을 차리는 회초리 노릇을 할 것입니다.
한류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횡재를 한 기분입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그들보다 수준 높은 프로그램을 만들 의지와 투자가 없다면 이 한류는 곧 역류(逆流)가 되어 우리에게 불어닥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벌써, 아시아권에서 ‘한국 프로그램은 항상 그 내용이 그 내용이다, 항상 눈에 보이는 연예인만 출연한다’는 비판의 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정은 우리 국내의 시청자에게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획기적인 체질 개선과 품질관리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우리 시청자에게도 방송은 ‘바보상자’에서 ‘쓰레기 상자’로 외면당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시청자에게 계속 사랑받기 위해 시간과 여유를 제작진에게 줬으면 합니다. 연일 계속되는 밤샘에 이성적 판단이 흐려진 제작물을 시청자에게 보내는 부실의 고리를 끊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루아침에 나오지 않는 명품을 만들 수 있는 장인의 공덕을 방송사가 갖추고, 시청률이 좋은 프로그램은 그대로 가치가 있고, 시청률이 좋지 않은 프로그램도 소수에게 높은 만족감을 줄 수 있는 ‘명품의 바다’가 우리 방송에서 물결쳤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