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간의 빅픽쳐
가능성의 시작
2018년, 새로운 운송기기와 삶의 방식을 전동화와 함께 본격적으로 연구하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제품은 그 준비의 결과이고, 앞으로의 삶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구체화된 모습이다. 이런 준비는 자동차를 만드는 사람들이 사회적인 기여할 수 있는 본질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단순히 사람과 물건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주는 역할이 자동차의 전부였다면, 이제는 그 안에서 필요한 공간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가 중요해졌다. 주어진 공간은 단순한 이동수단이 아니라, 목적을 담아 장소로 변모한다. 그 장소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불필요한 소비를 줄일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더 지속가능한 삶을 만들어가는 기반이 된다. 이것이 생각의 시작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자동차 회사에서 미래 모빌리티에 대한 고민이 한창이었다. 2030년, 즉 일반적인 차량 개발기간의 두 배가 되는 시간을 목표로 삼아, 자동차가 아닌 ‘움직이는 도구’를 만들기 위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는 단순히 다음 신차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두 번의 신차 개발 사이클을 투자해 ‘미래’라는 목표를 향한 도전이었다.
디자인, 마케팅, 설계, 엔지니어링, 신기술, 상품기획, 홍보 등 각 부문의 전문가들이 모여 2030년의 이야기를 함께 만들기 시작했다. 먼저 영화, 애니메이션, 소설 등에서 제시된 미래상을 참고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늠했다. 이후 각 그룹은 창의적인 아이디어 과정을 거쳐 시나리오를 만들고, 거기에 필요한 기술 요건, 서비스 내용, 생산 및 제품화 조건 등을 정리했다. 이 아이디어들은 스케치와 발표 과정을 거쳐 총 몇 가지의 미래연구 시나리오로 발전했다.
이 중 브랜드 방향성과 부합하는 6개의 최종안을 선정해 프레젠테이션 자료와 책자로 정리했다. 이후 각 부문과 열띤 토론을 이어가며 구체화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렇게 정리된 아이디어들은 ‘전혀 보지 못한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우리가 반드시 준비해야 할 필요한 미래’에 가까웠다. 새로운 미래는 어디에도 없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이미 삶 속에 스며든 습관과 버릇을 다시 정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는 “우리의 일은 사람들이 원하기 전에,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처럼 우리의 역할도 시장조사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이 아직 알지 못하는 미래상을 경험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진짜 필요한 것과 고쳐야 할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어떤 미래인가’라는 질문을 사람에 맞추어 고민해야 했다. 사람은 모두 다르다. 같은 것을 보아도 각자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다. 그렇기에 더욱더 명확한 비전과 경험을 제시해야 했다. 과거에는 관찰을 통해 맞춰주는 방식이 최선이었지만, 지금은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졌다. 이제는 모든 사람에게 맞추려 하기보다는, 그들이 공감할 수 있는 가치를 보여주고 스스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우리가 준비하는 것은 제품을 포함한 ‘플랫폼’이다. 그러나 많은 플랫폼은 기업의 이익만을 우선시하며 얕은 수단으로 전락했다. 그래서 앞으로 필요한 것은 이타성을 가진 플랫폼이다. 기업의 목표는 이윤의 추구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기여와 이타적인 활동이 매출의 일부를 차지해야 한다. 예컨대 도요타의 e-Palette 프로젝트는 단순히 자율주행 셔틀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커피숍, 병원, 이동식 회의실 등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공간’을 실험하는 과정이었다. 이는 이윤보다 사회적 가치 창출을 함께 고민한 대표적인 사례다.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순간의 이익을 위한 기교는 통하지 않는다. 소비자는 더 이상 얕은 장치에 속지 않는다. 오히려 얕은수는 브랜드의 신뢰를 해치고 부작용을 낳는다. 지금은 ‘돈을 벌고 싶다면 진심을 담아야 하는 시대’다. 테슬라의 초기 디자인이 완벽하지 않았음에도 시장에서 신뢰를 얻었던 이유는, 그 안에 담긴 진심과 뚜렷한 미래 비전이 소비자들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최소 5년 이상의 준비와 10년 이상의 미래 구체화를 통해 의미 있는 이야기를 전하고, 이를 실제 제품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결국 디자인과 기술, 서비스는 순간의 화려함이 아니라 오랜 시간 사람들에게 가치를 줄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도시와 함께 진화하는 새로운 이동 수단, PBV
도시 풍경은 늘 바뀌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온라인 쇼핑이 지금처럼 일상 깊숙이 들어올 줄 몰랐고, 자율주행차가 실제 도로에서 시험 주행을 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전혀 새로운 이동의 전환점에 서 있다. 바로 PBV(Purpose Built Vehicle), 목적 기반 차량이다.
PBV는 단순히 바퀴 달린 운송 수단이 아니다. 특정 목적에 맞게 설계되고, 때로는 사용자의 생활 방식까지 담아내는 일종의 ‘이동 플랫폼’이다. 도시화가 가속화되면서 라스트마일 배송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고, 탄소 규제가 강화되면서 전기차 전환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 여기에 자율주행과 공유 경제까지 결합하면서 PBV의 필요성은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글로벌 자동차 회사들이 뛰어드는 이유
자동차 회사들이 PBV 개발에 열을 올리는 건 단순한 신기술 실험이 아니다. 미래의 이동 수요가 바뀌고, 새로운 시장이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은 기아를 앞세워 이 흐름의 중심에 서 있다. 2023년 경기도 화성에서 시작한 PBV 전용 공장은 연간 15만 대 생산 능력을 갖췄다. 단순히 차를 더 많이 만들겠다는 게 아니라, “필요에 따라 변신하는 차량”을 본격적으로 양산하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대표 모델인 Kia Concept PV5는 모듈형 설계로 택시·배달차·캠핑카 등으로 손쉽게 바뀔 수 있다. 마치 레고 블록을 바꿔 끼우듯, 사용자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차량을 재구성할 수 있는 것이다.
폭스바겐은 MOIA라는 자회사를 세우고, 전기 셔틀 서비스를 이미 독일 도심에서 운영 중이다. GM은 BrightDrop을 통해 FedEx 같은 물류 대기업과 손잡으며 배송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리비안은 아마존 전용 전기 밴을 만들어 아예 거대한 물류망의 한 축을 차지했고, 캐누 같은 스타트업은 유연한 플랫폼으로 틈새를 노리고 있다.
각 회사들이 선택한 길은 다르지만, 모두 공통적으로 미래의 이동 수단이 기존 승용차의 연장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동 수단에서 생활 플랫폼으로
PBV의 진짜 매력은 ‘목적 기반’이라는 이름처럼, 필요에 따라 유연하게 변한다는 점이다.
기아의 Easy Swap은 그 좋은 예다. 낮에는 택시로 손님을 태우고, 밤에는 배달차로 도심을 누비다가,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캠핑카로 변신한다. 같은 차지만 시간과 목적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사용자는 굳이 여러 대의 차를 살 필요가 없다.
자율주행과 만나면 가능성은 더 커진다. 로보택시 안에서 회전 좌석에 앉아 업무를 보거나, 친구와 대화하며 이동하는 모습은 이미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운전대가 사라진 공간은 더 이상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작은 생활공간’이 된다.
폭스바겐 MOIA는 공유 서비스를 통해 “함께 이동하는 경험”을 강조한다. 여러 승객이 하나의 공간을 공유하면서 비용을 줄이고, 동시에 환경에도 기여한다. 이동이 곧 ‘사회적 경험’이 되는 셈이다.
리비안의 Prime Van이나 카누의 다목적 차량은 또 다른 방향을 보여줬다. 배송 업무에 쓰이다가 주말엔 캠핑카로 바뀌고, 필요하면 이동식 상점으로 변신한다. 차가 단순히 이동 도구가 아니라, 일과 여가를 연결해 주는 플랫폼이 되는 것이다.
PBV가 바꾸는 일상
PBV는 결국 “운송기기가 우리의 삶 속으로 얼마나 깊이 들어올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이동을 위해 차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생활을 중심에 두고 차량을 조율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앞으로는 퇴근길에 타는 로보택시 안에서 회의를 마치고 집에 도착하거나, 주말에는 같은 차로 친구와 캠핑을 떠나는 모습이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혹은 동네 골목에서 작은 이동식 카페를 발견하고, 그것이 PBV 기반 서비스라는 사실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PBV는 자동차 산업의 또 다른 진화다. 하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우리의 생활 방식과 도시의 리듬을 새롭게 짜는 움직임이다. 단순히 교통수단이 아니라, 라이프스타일 플랫폼으로서의 가능성이 바로 여기에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