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라이프스타일과 공감하는 디자인

우리는 어디에 살 것인가?

by Utopian

새로운 개념, 습관으로 스며드는 모빌리티

새로운 개념이나 용어가 등장하면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비슷하다. 어떤 이들은 이해를 돕기 위해 비슷한 사례를 찾아내려 애쓴다. 그리고 나중엔 “그거, 결국 ○○랑 비슷한 거잖아”라며 평가절하하거나, 아예 이미 이해했다고 스스로 정리해 버린다. 반대로 끝내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점점 배척하다가, 어느 순간 그것이 사회에 널리 퍼져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되면 뒤늦게 따라붙는다.

그래서 새로운 시장을 열겠다는 제안은 언제나 고독하다. 발명가가 맞닥뜨리는 외로움과 불안, 그 신념이 흔들릴 때의 긴장감이 따라온다. 하지만 결국 중요한 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핵심 문장을 찾는 일이다. 사람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 그리고 그것을 실제로 구현할 실행 계획이 있어야 한다.

PBV(Purpose Built Vehicle)는 바로 이 지점에서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새로운 “장소”를 만드는 프로젝트라는 관점에서 보면, PBV는 단순한 차가 아니다. 일상의 공간을 확장하거나 전환시킬 수 있는 이동하는 플랫폼이다. 하지만 이걸 “자동차의 진화형” 정도로만 이해한다면, 결국 또 하나의 기능적 신제품으로만 남게 될 위험이 있다.


혁신이 습관이 되지 못하면

아무리 의미 있는 도구라도 사람들이 자주 쓰지 않으면 오래가지 못한다. 기술은 멋있어 보일 수 있지만, 기술만으로 생활을 바꾸진 못한다. 결국 생활을 바꾸는 건 습관이다.

편안하게 가는 길,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물건, 익숙하게 자리 잡은 장소. 이런 것들이야말로 혁신이 사회에 뿌리내리는 가장 강력한 방식이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도 처음에는 낯선 혁신이었지만, 메시지를 보내고 사진을 찍고 길을 찾는 습관 속에 스며들면서 어느새 손에서 떼기 힘든 도구가 되었다. 전기차도 마찬가지다. 충전 인프라가 부족할 때는 ‘불편한 차’였지만, 집 앞이나 회사 주차장에서 충전하는 습관이 만들어지자 ‘편한 차’가 되었다.

PBV도 이렇게 습관 속으로 들어와야 한다. 특정 목적을 가진 이동수단이 아니라, 사람들이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활용하는 장소가 돼야 한다. 그래야만 ‘지속 가능한 혁신’이 된다.


모빌리티에 스며드는 습관

우리가 준비하는 새로운 모빌리티는 사람들의 습관에 맞춰 스며들 수 있어야 한다. 단순히 옵션을 늘려 제공하는 게 아니라, 사용자가 필요에 따라 일부를 손쉽게 바꾸거나 확장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용자는 PBV를 낮에는 카페로, 밤에는 물류 배송차로 활용할 수 있다. 또 다른 사용자는 평일엔 사무실로, 주말엔 가족 캠핑카로 전환할 수 있다. 중요한 건 모빌리티 자체보다, 사용자가 원하는 일을 더 잘할 수 있도록 습관을 개선해 주는 도구라는 점이다.

이를 위해 다양한 아이템들을 기업이 전부 제공하려 들면 결국 또 하나의 폐쇄적 제품군이 될 수밖에 없다. 대신 일정 규격 안에서 외부 서비스와 아이템들이 쉽게 결합할 수 있도록 열어둬야 한다. 스마트폰이 다양한 앱을 통해 확장되듯, PBV도 생활 서비스와 연결될 수 있는 플랫폼이어야 한다.


규제와 자유의 균형

이 과정에서 규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금의 자동차 규제는 안전을 지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동시에 생활의 자유를 제한하는 경우도 많다. 새로운 모빌리티가 등장하면 규제 역시 사람들의 삶의 모양에 맞게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더 많은 자유를 주면서도 안전은 지킬 수 있다.

예컨대 도로 위의 자율주행차 규제가 정리되지 않으면, 기술이 있어도 실제 생활에선 쓸 수 없다. 반대로 규제를 풀어 자유를 주되, 사용 데이터를 공유하고 관리하는 방식으로 안전을 담보할 수도 있다. 메이커와 사용자가 함께 아이템을 개발하는 과정 속에서 규제는 점차 현실에 맞게 조정되어야 한다.


제조사와 고객의 새로운 관계

전통적인 제조사와 고객의 관계는 단순했다. 고객은 비용을 지불하고, 제조사는 제품을 제공했다. 입력과 출력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구조였다. 하지만 앞으로는 다르다. 고객은 요구사항을 제안하고, 제조사는 그것을 충족시키는 도구와 플랫폼을 제공한다.

이 과정은 단순한 판매가 아니라, 입출력이 서로 교환되는 소통이다. 고객은 필요를 제시하고, 제조사는 해결책을 내놓는다. 그리고 그 결과로 새로운 습관이 만들어진다. 결국 제품은 팔리는 것이 아니라, 생활에 스며드는 것이다.

애플이 ‘아이폰’을 파는 게 아니라 ‘앱스토어와 생태계’를 판 것처럼, PBV도 단순한 차량이 아니라 ‘이동하는 생활 습관’을 제공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새로운 경제 체계가 만들어진다.


생활을 바꾸는 혁신

새로운 경제는 결국 생활에서 출발한다. 사람들이 매일 쓰고, 자연스럽게 습관이 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질 때 비로소 혁신은 뿌리를 내린다.

PBV가 진정한 의미의 모빌리티 혁신이 되려면, 자동차의 다음 버전이 아니라 사람들의 습관을 바꾸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이동식 병원, 이동식 사무실, 이동식 공연장, 이동식 교실 같은 모습으로 생활에 파고들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PBV는 단순히 새로운 탈것이 아니라, 생활을 바꾸는 플랫폼이 된다.

그리고 이 변화가 널리 퍼질 때, 우리 사회는 또 한 번의 혁신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기술이 아닌 습관이 만든 혁신, 생활을 바꾸는 모빌리티 혁신이다.

모빌리티를 만들어 가는 일

문화센터 강좌의 제목에도 이제는 ‘모빌리티’라는 단어가 흔히 등장한다. 처음 들었을 때는 낯설고 새롭게 들리던 단어가 어느새 일상적인 단어가 되어버렸고, 이제는 조금 진부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하지만 이 단어가 가진 뿌리를 따져보면 여전히 흥미롭다. ‘Mobility’라는 단어는 Move + Ability, 즉 움직이고 또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동시에 Mobile + Ability, 즉 모바일 디바이스에서 파생된 이동성과 연결 능력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실제로 두 가지 모두 캠브리지 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전자의 경우는 자동차나 교통수단 같은 물리적 운송기기를 기반으로 한 정의이고, 후자의 경우는 우리가 손에 쥐고 있는 휴대폰과 그 안에서 작동하는 소프트웨어 서비스에 가깝다. 즉, 모빌리티라는 말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두 가지 차원을 동시에 품고 있으며, 지금 세계적으로 가장 중요한 기술적 논의들이 모여드는 교차점이기도 하다. 세계 기업가치 1, 2위를 번갈아 다투는 애플과 테슬라는 각자의 영역에서 모빌리티를 대표하는 기업이다. 더 중요한 건 이 두 회사 모두 자동차라는 물리적 이동수단과 모바일 기기가 제공하는 연결 능력을 하나로 통합하려 애쓰고 있다는 점이다.

애플과 테슬라 말고도 수많은 제조사들이 이미 다양한 모빌리티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각 지역에서 운영되는 대중교통수단과 이를 매끄럽게 이어주는 멀티모달(Multimodal) 서비스는 사람들의 이동을 단순히 편리하게 만드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동하는 동안 시간을 의미 있게 쓸 수 있도록 돕고, 때로는 이동 자체를 새로운 경험으로 만들어낸다. 자동차라는 기계, 스마트폰이라는 디바이스가 서로 연결될 때 이동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하나의 생활양식이 된다.

이런 흐름 속에서 새롭게 주목받는 것이 바로 PBV(Purpose Built Vehicle)다. 단순히 새로운 차량의 한 라인업이 아니라, 모빌리티가 가진 본질을 구현할 수 있는 새로운 접근 방식이다. 지금까지 자동차는 세단, 해치백, SUV처럼 형태나 크기에 따라 세분화되어 왔고, 이미 100년 넘게 이런 분류 체계는 성공적으로 자리 잡아 나름의 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 모델을 갑자기 멈추고 완전히 새로운 가치관을 적용하는 것은 쉽지 않다.

최근 자동차 업계의 화두인 SDV(Software Defined Vehicle)도 마찬가지다. 기존의 관성을 바꾸기에는 레거시 메이커들이 너무 깊숙이 전통적 구조에 뿌리내려 있다. 그래서 오히려 처음부터 새롭게 출발한 테슬라 같은 신생 메이커들이 이런 변화를 더 빨리 흡수하고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PBV도 마찬가지다. 전통적 제조사들은 내연기관 중심의 개발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여전히 생산자 위주의 사고방식에 머물러 있다. 반면 PBV는 전기 기반 파워트레인과 주문자 중심의 개발 방식으로 가야 한다. 이 차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근본적인 가치관의 전환이다. 결국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위해 필요한 건 ‘기술’이 아니라 ‘가치’다.

그래서 최근 메이커들은 변화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하나의 공통된 가치관을 중심에 두려 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지속가능성이다.

파타고니아가 “목적은 지구, 수단은 사업”이라는 방향성을 내세우듯, PBV 개발에도 같은 맥락이 적용된다. 개발자들은 기능 하나를 논의할 때도 단순히 비용만 따지지 않는다. 이 아이디어가 지구에 도움이 되는가,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가를 먼저 고민한다. 이런 가치관이 없이는 새로운 모빌리티를 설계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PBV는 더 많은 생산과 소비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 대신 교환과 연결의 가능성을 미리 준비한다. 어떤 서비스나 차량이 필요하지 않게 되거나 목적이 바뀌었을 때도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업의 이윤은 어디서 나오는가라는 질문이 생긴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좋아요”라는 작은 클릭만으로도 수익을 만들어내는 시대에 살고 있다. 단순한 판매이익이 아니라, 구독과 서비스의 형태로 안정적인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



학생들이 제안하는 PBV 디자인, 그리고 스타트업의 현실 실험

PBV(Purpose Built Vehicle)는 자동차 회사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미래를 준비하는 디자인 학교 학생들과 스타트업들도 각자의 시각에서 새로운 해석을 내놓고 있다. 학생들은 제약에서 자유로운 상상으로, 스타트업은 현실적인 솔루션으로 접근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1. 디자인 학교 학생들의 실험

RCA(영국, 로열 칼리지 오브 아트)
런던의 RCA는 미래 모빌리티 콘셉트로 유명하다. 2023년 졸업 전시에서는 ‘모듈러 어반 팟(Modular Urban Pod)’이라는 프로젝트가 눈길을 끌었다. 이 차량은 자율주행을 기반으로 도시에서 화물 운송과 승객 이동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게 설계됐다. 내부는 3D 프린팅 모듈로 재구성할 수 있어 배달 모드와 승객 모드를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유연한 라이프스타일을 그대로 반영한 셈이다.

홍익대학교 산업디자인
홍익대는 국내 자동차 디자인 교육의 중심지답게 PBV를 다룬 작품이 자주 나온다. 2022년 학부 전시에서는 ‘에코 시프트 밴(Eco-Shift Van)’이 공개됐다. 작은 전기 PBV로, 라스트마일 배송과 공유 모빌리티를 결합한 아이디어다. 외부에 태양광 패널을 장착해 스스로 충전할 수 있고, 배송을 마치면 승객 탑승 모드로 전환된다. 환경 문제를 생각하는 젊은 세대의 가치관이 묻어나는 디자인이다.

아트센터 디자인 칼리지(미국)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아트센터는 GM, 포드와 협업하며 실무 중심의 과제를 진행한다. 2024년 전시에서는 ‘플렉시 프레이트(FlexiFreight)’라는 프로젝트가 발표됐다. 물류 차량이면서 동시에 캠핑카로 변신 가능한 자율주행 PBV다. 접이식 구조로 화물 공간과 레저 공간을 바꿀 수 있고, AI가 사용자의 패턴을 학습해 최적의 내부 레이아웃을 제안한다. 일과 여가의 경계가 흐려지는 새로운 세대의 생활방식을 담아낸 결과물이다.


2. 스타트업의 PBV 도전

어라이벌(Arrival, 영국)
현대차그룹이 1억 유로를 투자한 어라이벌은 대표적인 PBV 전문 스타트업이다. ‘어라이벌 밴’과 ‘어라이벌 버스’를 개발하며 2023년부터 소규모 생산을 시작했다. 스케이트보드 플랫폼을 활용해 모듈화 된 차체를 만들고, 마이크로팩토리라는 방식을 도입해 비용을 낮췄다. UPS와의 계약도 맺으며 상용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아빈(AVIN, 미국)
자율주행 PBV 스타트업 아빈은 리프트(Lyft)와 손잡고 ‘아빈 셔틀’을 개발 중이다. 2024년 시범 운행을 마쳤고, 2026년 상용화를 목표로 한다. 8~12인승 소형 셔틀로, 도시 내 단거리 이동이나 공항 셔틀에 최적화됐다. 좌석이나 조명 같은 인테리어를 승객이 직접 맞춤 설정할 수 있는 것도 특징이다.

라이트이어(Lightyear, 네덜란드)
태양광 전기차로 유명한 라이트이어는 ‘라이트이어 카고(Lightyear Cargo)’라는 PBV를 준비하고 있다. 하루 최대 70km를 태양광으로 달릴 수 있어 충전소 의존도를 크게 줄인다. 작은 물류부터 승객 이동까지 다양한 용도로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 중이다. 2025년 시제품 공개가 목표다.

볼링거 모터스(Bollinger Motors, 미국)
전기 상용차 전문 스타트업 볼링거는 ‘딜리버-E(Deliver-E)’라는 PBV를 내놨다. 이미 북미 물류 업체에 납품 중이고, 2024년에는 생산량을 늘릴 계획이다. 화물 공간을 모듈화해 배달 규모에 맞춰 조정할 수 있다는 점이 강점이다.


3. 학생과 스타트업, 공통점과 차이점

학생들의 PBV 프로젝트는 실험적이고 자유롭다. 모듈화, 지속 가능성, 사용자 경험 같은 키워드를 적극적으로 끌어와 “이런 미래라면 어떨까?”를 제안한다. 반면 스타트업은 당장 시장에서 쓸 수 있는 솔루션을 내놓는다. 자율주행, 전기화, 모듈화를 현실에 맞춰 구현하며 상용화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하지만 두 그룹 모두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게 있다. 바로 개인화, 환경 친화, 다목적성이다. 사람들의 일, 여가, 비즈니스가 점점 뒤섞이는 흐름 속에서 PBV는 단순한 이동 수단을 넘어 하나의 생활 플랫폼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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