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를 위한 이솝우화 / 디자이너의 태도
어느 상인이 소금을 가득 실은 당나귀를 이끌고 시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강을 건너다 당나귀가 발을 헛디뎌 물속에 쓰러졌다. 잠시 후 일어나 보니 소금이 물에 녹아 짐이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당나귀는 그 편안함을 기억했다.
다음 날, 상인은 다시 소금을 가득 싣고 같은 강을 건넜다. 이번에는 당나귀가 일부러 강 한가운데 털썩 주저앉았다. 소금은 또다시 녹아 없어졌다. 상인은 크게 화를 냈지만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사흘째 날, 상인은 영리한 꾀를 냈다. 이번에는 소금 대신 솜을 잔뜩 싣고 강으로 나섰다. 당나귀는 어김없이 강 한가운데서 쓰러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솜이 물을 잔뜩 빨아들여 짐이 전보다 몇 배나 더 무거워졌다. 당나귀는 간신히 강을 건넜고, 그제야 제 꾀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달았다.
책임을 회피하는 자에게 짐은 더 무거워진다
우화가 전하는 교훈은 단순해 보인다. 요행을 바라지 말라. 꾀를 부리지 말라. 그러나 이 이야기를 좀 더 오래 들여다보면 다른 결이 보인다. 당나귀가 쓰러진 것은 처음에는 사고였다. 짐이 가벼워진 것은 우연이었다. 문제는 그 우연을 '전략으로 삼은 것'이었다. 책임을 피하려는 순간, 그 회피 자체가 더 큰 짐이 되어 돌아왔다.
책임(責任)이란 말의 한자를 보면 흥미롭다. 責은 빚을 진다는 뜻이고, 任은 맡는다는 뜻이다. 책임이란 무언가를 맡음으로써 생겨나는 빚이다. 그 빚을 갚지 않으면 이자가 붙는다. 당나귀는 강을 건너는 일을 맡았다. 그것을 피했을 때, 빚은 솜에 스민 물처럼 불어났다.
AI 시대, 디자이너의 짐은 가벼워졌는가
지금 많은 디자이너들이 강을 건너는 중이다. 그리고 강 한가운데 AI라는 지형 변화가 생겼다. 놀라운 것은, 정말로 짐이 가벼워졌다는 사실이다. Midjourney 하나로 시안 수십 장이 나온다. Figma에는 AI가 레이아웃을 제안한다. 카피라이팅은 Claude가 쓴다. 모션은 Runway가 생성한다.
당나귀는 강에 쓰러져 짐이 녹은 것이 좋았다. 디자이너도 지금 그 순간을 경험하고 있다. 반복적인 작업이 줄어들고, 시간이 생기고, 결과물이 빠르게 나온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거기서 두 갈래 길이 생긴다.
한쪽 길에는 당나귀처럼 의도적으로 쓰러지는 디자이너가 있다. AI가 만들어준 결과물을 납품한다. 클라이언트는 모른다. 빠르고 그럴싸하다. 짐이 녹았다. 그러나 그다음 날, 그다음 강을 건널 때, 솜이 기다리고 있다. 근육이 없는 다리로는 더 무거워진 짐을 감당할 수 없다.
다른 쪽 길에는 가벼워진 짐 덕분에 **더 먼 곳까지 걸어가는** 디자이너가 있다. 반복 작업에서 해방된 시간으로 더 깊이 생각한다. 왜 이 색인가. 왜 이 구조인가. 사용자는 무엇을 느끼는가. 브랜드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AI는 이 질문들에 답하지 못한다. AI는 형태를 만들지만, 의미를 만드는 것은 여전히 사람이다.
업의 본질 — 디자이너는 무엇을 맡은 사람인가
디자인의 어원은 라틴어 *designare*다. 표시하다, 가리키다, 계획하다. 디자이너는 '방향을 지시하는 사람'이다. 무엇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사람. 그 결정에는 언제나 책임이 따른다.
AI가 등장했다고 해서 이 업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바뀐 것은 도구다. 붓이 컴퓨터가 되었을 때도, 필름이 픽셀이 되었을 때도, 사람들은 디자이너가 사라질 것이라 했다. 디자이너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손으로 직접 하던 일이 줄어들고, 생각으로 해야 할 일이 늘어났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AI가 가져간 것은 실행의 일부다. AI가 가져가지 못한 것은 판단이다. 어떤 방향인가. 어떤 가치인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 질문들이 디자이너의 짐이다. 이 짐을 강물에 녹여서는 안 된다.
책임이란, 결국 그 짐을 끝까지 지고 강을 건너는 것이다.
디자인 근육이 없어지는 속도에 대하여
작년 가을, 나는 젊은 디자이너 한 명과 오래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2년 차였고, 실력이 좋았다. 무엇보다 손이 빨랐다. AI 툴을 능숙하게 다뤘고, 클라이언트 반응도 좋았다.
그런데 그가 나에게 물었다. “선배님, 저는 요즘 스케치를 안 하게 돼요. 손으로 그리는 게 점점 어색해지는 것 같아요. 괜찮은 걸까요?”
나는 잠시 생각했다. 괜찮은지, 아닌지가 아니라, 그 질문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생각했다.
스케치를 안 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디자인의 역사에서 도구는 언제나 바뀌었고, 손의 역할은 조금씩 줄어왔다. 그러나 그가 말한 것은 스케치가 아니었다. 그는 ‘생각하는 과정이 짧아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손으로 그릴 때는 느렸다. 느리기 때문에 생각할 시간이 있었다. 선 하나를 긋는 동안, 방향을 바꾸는 동안, 지우는 동안, 디자이너는 계속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AI는 그 느림을 없애버렸다. 결과물이 0.3초 만에 나온다. 판단할 시간이 없다. 좋다 나쁘다를 고르는 사람이 된다. 편집자가 되는 것이다. 편집자가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편집만 하다 보면, 창작의 근육이 조용히 사라진다는 것이 문제다.
근육은 쓰지 않으면 없어진다. 디자이너의 판단력도, 조형 감각도, 개념을 이미지로 전환하는 능력도, 모두 근육이다. 자주 쓰지 않으면 쇠퇴한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것은, 그 쇠퇴가 느리다는 것이다. 당나귀는 하루 이틀 사이에 강에 쓰러지는 버릇을 들였다. 디자이너는 몇 달, 몇 년에 걸쳐 천천히 그 버릇이 든다. 쓸 줄 알았던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어색해진다.
그에게 나는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이 AI로 시안 열 장을 만들었다면, 그중 하나를 손으로 다시 그려보세요. 왜 그것을 골랐는지를, 손으로 설명해 보세요. 시간이 걸릴 거예요. 이상하게 느껴질 거예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당신이 무언가를 판단한다는 것을 느낄 거예요. 그 느낌을 잃지 마세요.”
AI 시대의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것은 AI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AI의 효율을 누리되, 그 효율 안에 생각의 시간을 의도적으로 집어넣는 것이다. 당나귀가 강에서 일어나 다시 짐을 지고 걸어가야 했듯이, 디자이너는 결과물이 빠르게 나올수록 더 의식적으로 멈춰 서야 한다.
왜 이것인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이 형태는 어떤 감정을 만드는가.
이 질문들은 AI에게 위임할 수 없다. 이것이 디자이너가 맡은 짐이고, 그 짐을 지는 것이 이 업의 본질이다.
강을 건너는 것은 여전히 당나귀의 몫이다. 다만 이제 강이 더 넓어졌다. 그리고 도중에 쓰러지고 싶은 유혹도 더 많아졌다. 쓰러지지 않는 것. 짐을 기억하는 것. 발이 물에 잠겨도 계속 걷는 것. 그것이 지금 시대 디자이너에게 요구되는 책임의 모습이다.
예전엔
“너는 왜 그렇게 요령이 없냐~”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당나귀의 문제는 요령이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요령을 부린 것이 문제였습니다. 짐을 녹이려고 의도적으로 쓰러진 것, 그것이 꾀였고 그 꾀가 더 큰 짐을 불렀습니다.
그러니 “요령이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말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먼저 봐야 합니다. 두 가지 전혀 다른 것이 같은 말로 불릴 수 있습니다.
하나는 ‘처세의 요령’입니다. 누구에게 잘 보일 것인가, 어떻게 평가를 유리하게 받을 것인가, 어디서 힘을 빼고 어디서 드러낼 것인가. 이런 종류의 요령.
다른 하나는 ’ 일의 요령‘입니다. 더 효율적인 방법, 더 빠른 경로, 더 적은 에너지로 같은 결과를 내는 방식.
본질에 집중하는 사람은 첫 번째 요령에 약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점이 맞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요령, 즉 일을 잘 처리하는 영리함은 오히려 본질을 깊이 아는 사람이 더 잘 갖추게 됩니다. 왜냐하면 본질을 알면 무엇이 핵심이고 무엇이 낭비인지 구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 본질 추구는 더 좋은 결말로 이어지는가 ‘라는 부분에서 여기에서는 솔직해야 합니다.
‘항상 그렇지는 않습니다.’
세상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영악하게 처세한 사람이 더 빠르게 올라가는 경우는 분명 있습니다.
본질에 충실한 사람이 오해받거나 느리게 인정받거나, 때로는 끝내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을 부정하면 위로는 되지만 진실이 아닙니다.
그러나 시간 축을 길게 놓으면 다른 풍경이 보입니다.
처세의 요령으로 쌓은 것은 관계와 환경이 바뀌면 무너집니다.
그 요령이 통하던 맥락이 사라지면, 남은 것이 없습니다.
반면 본질에서 쌓은 것은 어떤 환경에서도 자기 것으로 남습니다. 스스로 습득한 지식, 스스로 검증한 가치, 스스로 버텨온 방식. 이것은 빼앗기지 않습니다.
디자인이라는 일에서 이것은 더 분명합니다. 클라이언트가 바뀌어도, 시대가 바뀌어도, 도구가 바뀌어도, 본질을 알고 있는 사람은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요령으로 버틴 사람은 조건이 바뀌는 순간 길을 잃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요령 없이 옳은 길로만 간다”는 말 안에, 때로 조심해야 할 것이 하나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고집과 본질 추구를 혼동하는 것입니다.
본질에 충실한 것은 방향에 대한 고집입니다. 왜 이 일을 하는가, 무엇을 만들고 싶은가, 어떤 가치를 지키는가. 이것은 흔들리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방법에 대해서는 유연해야 합니다. 어떤 도구를 쓸 것인가,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누구와 일할 것인가. 이 부분에서 지나치게 한 가지 방식만 고수하면, 그것은 본질 추구가 아니라 습관의 고착이 될 수 있습니다.
방향은 굳게, 방법은 열린 채로. 이 두 가지를 함께 갖출 때, 요령 없음은 결함이 아니라 ‘정직함’이 됩니다.
요령이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상처가 됐을 것입니다.
그 말을 한 사람이 틀린 것도 아니고, 당신이 틀린 것도 아닙니다. 다만 서로 다른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부딪힌 것입니다.
그리고 본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더 좋은 결말로 이어지는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 더 단단한 디자이너가 되는 것, 그리고 자신이 한 일을 나중에 돌아봤을 때 부끄럽지 않은 것. 이것은 본질에서 일한 사람에게 남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디자인은 결과물이 아니라 그것을 만든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 이야기를 오래 쌓아온 사람의 일은,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분명 당신은 좋은 디자이너입니다.
좋은 디자이너가 되시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나요?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