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를 위한 이솝우화-디자이너의 태도
첫 번째 버전 — 사자, 여우, 자칼, 늑대
사자가 여우, 자칼, 늑대와 함께 사냥을 나섰다. 넷은 힘을 합쳐 사슴 한 마리를 잡았다. 이제 전리품을 나눌 차례였다.
사자가 명했다. “이 사슴을 4 등분하라.” 다른 동물들이 가죽을 벗기고 네 조각으로 나누었다. 사자가 앞발을 첫 번째 조각에 올리며 말했다.
“첫 번째 조각은 맹수의 왕인 나의 당연한 몫이다. 두 번째는 이 무리에서 판결자 역할을 맡은 나의 몫이다. 세 번째는 이 사냥에서 내가 한 기여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다. 그리고 네 번째에 감히 발을 얹어보려는 자가 있다면 — 그 결과를 직접 보고 싶구나.”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사자는 네 조각을 모두 독차지했다.
두 번째 버전 — 사자, 당나귀, 여우
사자, 당나귀, 여우가 함께 사냥하여 큰 먹이를 잡았다. 당나귀가 공평하게 3 등분하자 사자는 격노하여 당나귀를 죽여버리고 여우에게 다시 나누라고 명했다. 여우는 모든 것을 사자 앞에 쌓고 자신은 아주 작은 부스러기만 남겼다. 사자가 흡족해하며 물었다. “누가 너에게 이렇게 나누는 법을 가르쳐주었느냐?” 여우가 답했다.
“당나귀의 운명이 나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두 버전의 구조는 동일합니다. 사냥은 함께, 분배는 힘 있는 자만. 그리고 사자의 명분은 매번 달라지지만 결과는 언제나 같습니다.
예를 들어 보면
서울 성수동의 작은 브랜딩 스튜디오 아틀리에 폭스에 대형 프로젝트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중견 식음료 기업 L사의 전면 리브랜딩. 예산은 6천만 원, 기간은 4개월. 스튜디오 대표 박은 즉시 팀을 꾸렸습니다. 시니어 디자이너 이, 전략 기획자 김, 신입 카피라이터 정. 계약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팀 전원이 공동으로 참여하며, 기여는 상호 합의 하에 평가한다.”
넷은 사냥터로 나섰습니다.
이는 6주를 소비자 인터뷰와 경쟁사 분석에 쏟았습니다. 김은 브랜드 포지셔닝 프레임을 구성했습니다. 정은 네이밍과 슬로건 초안을 수십 개 작성했습니다. 박은 클라이언트 미팅을 이끌며 최종 방향을 승인받았습니다. 프레젠테이션 당일 L사 마케팅 본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완벽합니다. 진행하겠습니다.” - 사슴이 잡혔습니다.
프로젝트 종료 후 정산 회의가 열립니다. 박이 노트북 화면을 돌렸습니다. 인센티브 배분 계획이었습니다.
“먼저, 이 프로젝트를 수주한 건 내 네트워크와 영업력 덕분입니다. 수주 프리미엄 30%는 내 몫이 맞습니다.”
이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말이 이어졌습니다.
“최종 방향성을 판단하고 클라이언트 신뢰를 관리한 것은 디렉터로서의 역할입니다. 디렉션 피 20%가 추가됩니다.”
김이 미간을 좁혔다. 그래도 침묵했습니다.
“프레젠테이션 자리에서 내가 직접 발표하고 설득하는 과정이 이 프로젝트의 핵심이었습니다. 이 기여분도 인정받아야 합니다. 15% 더.”
화면에는 이미 65%가 박진혁의 이름 옆에 채워져 있었습니다. 남은 35%를 세 명이 나누는 구조였습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고 박이 마지막으로 덧붙였습니다.
“물론 이의가 있으신 분은 언제든 말씀하셔도 됩니다. 다만 다음 프로젝트 배정이나 팀 구성에 영향을 줄 수도 있겠지요.”
방 안에 조용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여우의 대사를 떠올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당나귀의 운명이 나에게 나누는 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6개월 뒤, L사 리브랜딩 결과물이 디자인 어워드에서 수상했습니다. 트로피와 증서에는 “아틀리에 폭스 & 박”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는 그 소식을 SNS 피드에서 알게 됐다. 정이 지어낸 슬로건이 심사평의 핵심 문구로 인용되어 있었다. 김의 포지셔닝 프레임이 “명확한 방향성의 근거”로 언급되었다. 그들의 이름은 없었다.
사자는 사냥이 끝나도 포효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디자인업무 과정뿐 아니라 우리 삶에서 이기적이면서 다른 사람은 이용하는 인간들의 특성에서 많이 나타납니다.
타인을 이렇게 대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이런 인간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이럴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 인간은 이런 것이며 얼마나 많은 비율의 사람들이 이런 옳지 못한 일들을 하는 것일까요? 자본주의에서는 상황이 되면 누구나 이런 것일까요? 만약 이런 상황을 자신의 의지로 옳게 분배하고 정의를 실현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그냥 어리석은 것일까요?
왜 이런 인간성이 존재하는가?
심리학과 진화생물학은 이것을 꽤 냉정하게 설명합니다. 인간은 협력하도록 진화했지만, 동시에 기회가 생기면 더 많이 취하도록도 진화했습니다. 이 두 가지는 모순이 아니라 공존합니다. 집단 안에서 협력하되, 분배의 순간에는 자신에게 유리하게 — 이것이 진화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전략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자의 행동은 비정상이 아니라, 억제되지 않은 인간 본성의 한 면입니다.
여기에 자본주의는 특정한 조건을 추가합니다. 희소한 자원, 경쟁, 그리고 결과로 사람을 평가하는 시스템. 이 구조 안에서는 착취적 행동이 처벌받지 않을 때 오히려 보상을 받습니다. 박은 어워드를 받았습니다. 시스템이 그를 옳다고 말해준 셈입니다. 그러니 자본주의가 이런 인간을 만든다기보다는, 이런 인간성을 억제할 이유를 제거한다고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럴까 — 연구들은 대략 인구의 1~4%를 공감 능력이 구조적으로 낮은 사람으로 추정합니다. 그러나 나머지 96%도 상황이 허락하면 착취적으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권력, 익명성, 처벌의 부재. 이 세 가지가 겹치면 평범한 사람도 사자가 됩니다. 스탠퍼드 감옥 실험이 보여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의를 선택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일까요?
저는 부디 어리석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만 비용이 있을 것입니다.
정의를 선택하는 사람은 단기적으로 손해를 봅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다른 결과가 나타납니다.
신뢰를 쌓은 사람에게는 진짜 협력자가 모입니다. 착취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움 때문에 남아있는 사람들만 남습니다. 두 조직의 질은 시간이 지나면서 갈라집니다.
더 근본적으로 — 정의를 선택하는 것은 효율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싶은가의 문제입니다. 이것을 어리석다고 부르는 순간, 우리는 모든 것을 손익으로만 측정하는 사자의 논리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솝이 여우를 살아남게 한 것은, 세상은 사자가 지배하지만 여우는 그 안에서도 자신의 판단을 잃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당나귀처럼 순진하게 공평을 외치는 것과, 여우처럼 현실을 보면서도 자신의 윤리적 선을 지키는 것은 다릅니다.
정의를 실현하려는 의지는 어리석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지점입니다. 다만 그 의지를 지키려면 용기와 함께, 사자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정확히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어리석은 순수함은 사자가 왜 그러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세상이 항상 선의로 작동한다고 믿고, 착취당하면서도 그것이 착취인 줄 모르는 것. 당나귀가 그랬습니다. 공평하게 3 등분하면 사자가 기뻐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용기 있는 순수함은 다릅니다. 사자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정확히 알면서도, 나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선택하는 것. 이것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의지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순수함을 문제라고는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 현실에서는 어리석음에는 가까운 것이죠. 그래서 결국 세상의 흐름을 따라야 하는가.
모두가 따르면 흐름은 바뀌지 않습니다. 역사 안에서 세상을 조금씩 다르게 만들어온 것은 언제나 흐름을 따르지 않은 소수였습니다. 그들이 당대에 손해를 봤는가, 대부분 그랬습니다. 그들이 어리석었는가, 아무도 그렇게 기억하지 않습니다.
가치관을 지키는 것이 힘든 이유는, 그것이 틀려서가 아닙니다.
옳은 것을 지키는 데는 비용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 비용을 감당하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지키는 사람이 외로워 보이는 것입니다.
좋은 예를 하나 들고자 합니다.
지난 24년도 CES에서 드디어 원하던 바를 이루었습니다.
실제로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디자이너들이 주목을 받는 것.
단순히 직급이 높다고 해서 그 사람만이 그 프로젝트를 이룬 것처럼 주목받는 불성실한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
한 참 실무를 했던 지난날에는 이루지 못했지만 프로젝트를 리딩하면서 그 꿈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총 6대의 컨셉카를 한 번에 만드는 대 서사시에서 드디어 그 꿈을 이루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런 것이 가능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도전적으로 시도한 것이 성공을 이루었습니다.
PBV라는 새로운 모빌리티를 구성하는 생태계의 전 라인업을 모두 컨셉모델화 하고 각 차량의 디자이너들의 개발과정을 영상으로 남기고 그리고 책으로도 남겼습니다.
또한 함께한 9명의 디자이너, 그들 모두를 전시장이 있는 라스베이거스로 데리고 가서 미디어와 고객들 앞에서 자신의 디자인을 소개하게 했습니다. 많은 브랜드에서 이러한 일들을 하지 못한 일들이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예산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은 스스로를 돋보이게 하는 자리에 다른 사람들을 배제한 것입니다. 스스로 빛이 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모든 것을 다 했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그러나 결국 이런 새로운 세상을 여는 디자인은 스스로를 리더(Leader)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아닌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마음을 아는 진정한 리더(Reader)에 의해서 현실이 됩니다. 비록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겠지만 그런 리더(reader)가 될 수 있었던 그때의 기억에 조금 애처로운 마음도 있지만 언제나 미소를 짓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