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지 않으면 될 일을 굳이 끄집어내서, 한번 시작하고 보니, 끝이 없다. 서운하고 불쾌했던 어제의 짧은 순간이 자꾸만 넗혀져만 간다. 일 년 전, 십 년 전까지도 거슬러가며 그 사람의 잘못된 행동을 인성을 찾아 나선다. 마치, 투명한 거실 통창 한 모퉁이에 붙은 티끌이 눈에 거슬려, 때 뭍은 걸레로 자꾸 문지르다 보니 창 전체가 뿌옇게 흐려져, 바깥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되는 어리석음이랄까.
과학적으론 화의 화학적 수명은 90초에 불과하다는데, 왜 이리 오랫동안 헤어나질 못하고 끊임없이 시달리게 되는 걸까? 그 생각을 멈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어, 처음 시작된 화라는 불씨에 계속 연료를 공급하는 셈이다. 그냥 내버려 두면 저절로 사라질 생각을 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화, 원망, 이런 것들은 과거에 대한 미련, 후회, 집착으로 인한 구속에서 벗어나질 못하게 할 뿐이다.
이렇게 과거에 구속되어 있으니, 정작 매 순간 새로이 지나가는 현재를 계속 놓치게 되고, 이렇게 지나가버린 과거를 또 붙잡고 무엇인가를 탓하고, 원망하는 과거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이런 화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는 최선의 방법이 용서다.
증오와 원망이 과거로 인한 구속이라면, 용서는 과거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누가 무슨 잘못을 했건, 그건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 일 뿐이다. 실재(實在)가 아니라 내 기억을 토대로 지금 내 생각 속에만 존재하는 환영, 허상일 뿐이다. 용서는 이런 허상 덩어리인 원망과 분노를 놓아버리는 것이다.
복수와 용서, 과연 어느 쪽이 진정 행복으로 가는 길일까?
원한은 과거의 깊은 동굴 속으로 나를 가둘 뿐이고, 원한에 대한 대갚음(복수)은 피가 피를 부르는 악순환의 윤회를 거듭케 할 뿐이다. 용서는 분노와 원망을 잠재워 평안을 되찾게 해 준다. 결국 상대가 아니라 내가 행복해지기 위함이다. 진정한 자유와 평화는 구속이 아니라 놓아버림과 포용에 있다.
어쩌면 용서를 원한과 복수의 반대 개념으로 받아들인 잘못된 이해가 용서를 그토록 힘들게 만든 건지도 모를 일이다. 원망과 원한은 상대가 아니라, '남의 탓'으로 돌리려는 나의 마음이 빚어낸 결과인지 모른다. 내 마음이 원한을 낳고, 그로 인해 내가 고통받는 셈이다. 자업자득이다.
원한은 나는 옳은데 상대가 틀렸고, 잘못했다는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이런 견지에서 진정한 용서를 다시 놓고 보면, 참된 용서란 남을 놓아주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편견과 자기중심적 생각에 갇힌 나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옳고 그름, 이롭고 해로움, 이 모든 것들은 나를 중심에 둔 어리석은 이분법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진정한 용서란 감히 나의 옳음에 대해 상대의 틀림을 너그러이 용납한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려 한 나의 이기적 집착을 놓아버리고, 다름을 받아들이는 수용인 셈이다.
나의 편협한 생각 속에 존재하는 과거를 놓아 버리니, 지금이 자유로운 것이다. 비로소, 과거의 어둠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현재를 알아차릴 수 있게 되니, 용서야 말로 과거의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이요, 현재에 자유로운 삶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다.
"나를 욕했다. 나를 때렸다. 나를 이겼다. 내 것을 훔쳤다." 이러한 생각을 품은 이에겐 원한이 가라앉지 않을 것이요, "나를 욕했다. 나를 때렸다. 나를 이겼다. 내 것을 훔쳤다." 이러한 생각을 품지 않은 이에겐, 원한이 가라앉으리라.
원한은 원한으로 갚을 수 없나니, 원한을 버릴 때에만 원한은 풀리리니, 이것만이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이다. <법구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