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미켈란젤로, '피에타'>
곧고 길게 뻗은 탄천 길을 자주 걷다보니, 이솝동화 속 장면들을 가끔 만난다.
어디선가 차갑고 센 바람이 불어 닥치자 길을 걷던 사람들이 모두 모자와 외투를 꺼내선 온몸을 싸매고 바삐 달아난다.
얼마나 지났을까? 구름사이로 따사로운 햇살이 온화한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은 거추장스러운 겉옷을 챙겨 넣고, 시원한 미풍과 따스한 햇살을 즐기며 천천히 걷거나, 아예 잔디밭에 자리 깔고 누워 푸르른 하늘과 녹음을 즐긴다.
또 얼마가 지나고, 살갗을 태울 듯이 따가운 태양이 내리쬐자, 사람들은 다시 양산, 모자, 수건 등으로 얼굴과 온몸을 감싼다.
한 하늘과 태양이건만, 같은 듯 다르다.
연애감정의 사랑과 자애의 차이랄까?
따사로운 햇살은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평안하게 어루만져 주지만, 작열하는 태양은 살을 태우는 따가운 아픔이 따라온다. 지나침은 아니함만 못하다는 말이 이래서 나온 건가.
'사랑'이란 단어로 표현되지만, 대상과 관점에 따라 다른 유형들이 존재하는데, 그리스 신화와 철학에서는 크게 4가지 유형의 사랑을 찾아볼 수 있다.
에로스(Eros): 남녀 간의 성적인 사랑(연애)
스토르게(Storge): 부모와 자식(혈육) 간 사랑
필리아(Philia): 친구와의 우정
아가페(Agape): 신과 사람의 사랑
불교에서도 두 극단적인 유형의 사랑을 찾아볼 수 있다.
12 연기(緣起)에 등장하는 '애욕(愛慾, 사랑과 욕심)'이 이기적 자기중심적 욕망에 기초한 것이라면, 또 다른 사랑은 '자비'라 할 수 있다. 전자가 그리스어의 에로스에 까까운 욕망적 사랑이라면 후자는 아가페 또는 기독교에서의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다.
연애 감정의 사랑, 에로스는 상대적이요, 배타적, 조건적 사랑일 듯하다. 좋아서 주지만, 받기 위해 하는 사랑이요, 응답이 없을 땐, 상대를 다치게 할 수도 있다. 저 사람이라야만 하는 욕망(갈애)과 집착에서 출발하니 고통이 따른다.
반면, 자애(慈愛)는 절대적, 무조건적, 수용적 사랑이다. 받고자 함이 아니고, 상대에 대한 배려가 깔려 있다. 이점에선 모성애(스토르게)와 비슷해 보이지만, 모성애 또한 제 자식이란 집착에서 나오다 보니, 고통이 따를 수도 있다. 진정한 사랑, 자애는 그 대상에 대한 집착이 없다 보니 고통 또한 따를 리 없다. 가려서 좋아하고 사랑함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는 사랑이다.
진정한 자애란 자비라고나 할까? 자비(慈悲)란 자애(慈)에 연민(悲)까지도 내포한 말이다. 더 정확히는 사무량심(四無量心, 4가지 한량없는 마음)으로 일컫어지는 자비희사(慈悲喜捨)의 준말이다.
자(慈): 나를 사랑하듯 상대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무한한 사랑, 받고자 함이 없이 주는 기쁨이다.
비(悲): 상대의 슬픔을 진정으로 함께 해주고, 보담아 주는 무한한 연민이다.
희(喜): 상대의 기쁨에 함께 기뻐해주는 따사로움이다. 함께 슬퍼해주는 것보다 기뻐해 주는 게 쉬울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내가 시험 또는 승진에서 탈락했는데 합격한, 승진한 내 옆 사람을 진정으로 축하해 주고 함께 기뻐할 수 있을까?
사(捨): 버림이다. 무엇에도 연연하지 않고, 다 줄 수 있는 버림이다. 나라는 분별심을 버렸기에 어떤 상대든 차별 없이 평등하게 대하고 포용할 수 있는 것이다. 분별로 인한 집착이 있고서는 절대 불가능한 것이 버림일 것이다.
이토록 진정한 사랑은 힘든 것이다. 분별로 인한 집착 때문이다. 그래서 고통이 수반되니 이 또한 마음챙김이 필요하게 된다.
사랑은 도파민, 엔돌핀으로 상징되는 열정, 정열을 발하게 하는 에너지를 가졌고, 순탄하게 잘 이루어지면 세라토닌으로 상징되는 행복감과 평안한 기쁨인 모성애의 상징, 옥시토신 분비에 까지 이르게 되니, 이 아니 즐거운가!
근데, 세상만사 내 뜻대로 만 되지는 않으니, 실연의 아픔, 지나친 집착으로 인해 상대가 질려서 떠나고 마는 이별을 경험하기도 한다. 모성애에서도 자식 잃은 슬픔, 또는 자식의 경쟁 실패 등으로 인해 발생하게 되는 남에 대한 원망, 저주 이런 것들은 사랑이 깊었던 만큼, 아픔으로 인한 고통 또한 심각한 부작용으로 남게 된다.
사랑은 받는 것이라기보다는 주는 것임은 사랑의 유형에 관계없이 공통적 출발점이다. 실제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이 더 즐겁다. 차이는 다음 단계에서 발생한다. 남녀 간의 연애 사랑은 받기를 갈망하고 주는 것이니, 결국은 받기 위함이니, 조건부요, 상대적이다. 부모의 자식이나 반려동물에 대한 사랑과 같은 모성애는 받는 것보다는 주는 즐거움이 강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일방적으로 주는 것 같지만, 내 자식, 내 강아지로 한정된 배타성이 숨어 있다. 외형적으로는 주는 듯 하지만, 이 또한 내 자식을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대리 만족이라는 무의식적 욕구가 잠재되어 있다. 내 자식을 사랑하는 만큼, 내 자식에 아픔을 준 자들에 대해선 원망과 원한이 따른다.
이런 사랑은 일견 '받기보다는, 주었다'고 우기기도 하지만, 곰곰이 놓고 보면 이 또한 자기중심적 사랑이다. 자기가 만족감을 받기 위해서 주었던 사랑이니, 조건이 숨어 있었다. 결국 집착과 그로 인한 고통을 피할 수 없다. 최근 유명 정치인과 연예인들에 대한 팬덤에서도 지나침이 불러온 잘못된 사랑의 예들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절대자 신에 대한, 신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는 종교에서 조차 지나침과 배타성이 야기한 종교전쟁은 오랜 역사와 함께 현재까지도 부작용으로 남아 있다. 신을 빙자한 인간인 권력자들의 자기중심적 해석이요, 권력유지를 위한 집착이지, 진정한 사랑은 아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己心), 어디에도 머무름(메임)이 없이 마음을 내어주고,
무위자연(無爲自然), 오고 감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자세가 진정한 사랑의 기본 아닐까? 태어났으니, 자라서 떠나거나, 늙고 병들어 사라짐은 정해진 사실이요, 만났으니 언젠가는 헤어질 테니 말이다.
결과는 어차피 이별이요, 죽음이다. 결국, 지금 이 순간만이 남을 뿐이다.
돌아보고 후회하지 말고, 미리 당겨 걱정도 말고,
지금 내 잎에 있는 이 순간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