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인> 2019
착한 영화, 슬픈 영화에 선입견이 있습니다. 한국 영화 곳곳에 뿌리 박힌 신파에 강한 거부감이 있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텝니다. 틀에 박힌 영화는 고통과 슬픔을 마케팅 삼아 과도한 연출로 포장합니다. 슬픈 이야기가 아예 싫다는 말이 아닙니다. 타인의 아픔과 그에 대한 공감은 영화뿐 아니라 어느 매체에나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저 스크린 안을 들여다 볼뿐인데 저절로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작품들이 많고, 그런 영화를 만나면 눈물 콧물 다 흘려도 부끄럽지 않고 뿌듯합니다. 하지만 많은 제작사들이 눈물 포인트를 단순히 관객의 돈을 쓸어 담을 장치이자 '흥행의 묘약'정도로 여기며 억지로 양념을 칩니다. "이야.. 엄청 슬픈 장면이지? 주인공이 저렇게 괴로워하는데 네가 안 울고 배길 것 같아?"라며 억지 감동을 강요하죠. 하나의 트렌드처럼 자리 잡은 뜬금없는 신파는 관객의 수준을 얕잡아보는 뻔한 상술입니다.
극장에 <증인>을 보러 갈 때에도 조금은 불안했습니다. 자폐증 소녀와 변호사의 만남이라는 키워드만 보고 혹시나 뻔한 스토리에 눈물만을 강요하는 영화가 아닐지 걱정이 됐습니다.
영화를 보고 지인과 계속 같은 말을 했습니다."정말 오랜만에 보는 잘 만든 영화다." <증인>은 재판을 통해 만난 변호사와 소녀의 소통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정우성이 연기하는 변호사 순호는 오랜 민변 활동을 뒤로하고 대형 로펌에 들어가지만 로펌의 이미지 쇄신이라는 명목으로 살인 용의자의 국선변호를 맡게 됩니다. 잘하면 파트너 변호사로 승진할 수 있는 기회가 걸린 재판입니다. 살인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 지우(김향기)는 자폐증을 가지고 있어 타인과 소통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순호는 지우에게 다가가고 조금씩 그녀의 마음을 여는 법을 배웁니다.
<증인>은 배우들의 연기를 빼놓고 말할 수 없는 영화입니다. 저는 대학 영화과에서 촬영감독을 지망해 관련 강의를 집중적으로 들었고 이런 배경 때문인지 영화를 분석할 때 미장센을 가장 먼저 보게 됩니다. 이야기와 주제를 알맞게 받쳐주는 시각 연출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증인>은 이런 기술적인 요소보다는 연기에 더욱 집중해서 봤습니다.
정우성이 그동안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나 <강철비> 같은 영화에서 맡았던 쿨하고 강한 이미지는 전혀 볼 수 없습니다. 생활고와 삶에 치인 나머지 자신의 이상과 신념을 포기할 위기에 놓인 변호사 순호. 출세와 법, 양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만이 보입니다. 정우성이 이런 배우였나 생각하게 할 정도로 배역을 잘 표현한 생활연기를 보여줍니다. 대중에게 익숙한 스타의 모습이 아닌 변호사 순호만 남습니다.
김향기도 굉장히 어려운 배역을 자연스럽게 소화했습니다. <신과 함께> 두 편의 엄청난 흥행으로 아직 어린 배우에게 '덕춘'의 이미지가 굳어지는 게 아닌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결과는 역시 평생 연기를 해온 베테랑 답습니다. 아직 어린 나이의 배우이지만 따듯하고 속 깊은 연기를 보여줍니다.
순호를 상대하는 검사 역의 이규형을 비롯해 주조연 배우 모두 우리가 다른 매체에서 보아왔던 그들의 캐릭터가 아닌 진짜 세상에서 살아 숨 쉬는 인물로 느껴집니다. 앞에서부터 계속 같은 표현을 썼지만, 단순히 부여된 대사를 주고받는 게 아닌 실제 인물 같다는 말보다 배우를 칭찬하는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를 가르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직선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는 관객이 있는 반면 복잡하게 얽힌 추리소설 같은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이 있습니다. 독특하고 창의적인 표현방식이나 묵직한 메시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도 많습니다. 단순히 장르의 구분으로 평을 나누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우는 순호에게 묻습니다 "아저씨는 좋은 사람입니까?" 자신을 이용하고 괴롭히는 사람들에 많은 고통을 받은 지우. 순호의 목적은 지우를 이용해 재판에서 이기는 것이지만 그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옳은 선택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됩니다. 지우가 순호에게 던지는 질문처럼 <증인>이 좋은 영화냐고 묻는다면 "증인은 좋은 영화다"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때때로 재밌고 때때로 감동적인 잘 만든 상업 영화, 공감과 소통을 주제로 갖춘 드라마의 훌륭한 예시라고 생각합니다. 대사나 소품의 사소한 디테일까지 좋은 영화를 만드는데 많은 고민을 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폐라는 소재를 단순히 재미나 흥행을 위한 도구가 아닌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이야기로 풀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