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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Aug 22. 2020

올곧게 빛나는 멋(1)

주디스 라이트(Judith Light)



주디스 라이트(Judith Light) in 라이언 머피‘s


<더 폴리티션(The Politician)>(Netflix)

<베르사체(The Assassination of Gianni Versace: American Crime Story)>(FX) 3화


* 위 작품들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디디 스탠디시Dede Standish 캐릭터 묘사 비중이 큽니다. 왜냐면 내가 사랑하니까요.



아. <베르사체>(FX)를 본 건,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였다.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기는커녕, 캐스팅 리스트 중 페넬로페 크루즈가 유일하게 낯익은 이름이었다. 그냥 넷플릭스에 떠 있는 보랏빛 알록달록한 이미지를 관찰하다 홀린 듯 클릭했다. 내 라이언 머피 입문작이었고, 어떤, 시작이었다. 작품 자체를 좋아하게 된 것은 물론, 줄줄이 덕질의 덕질로 이어졌다. 코디 펀을 알게 됐고,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를 시즌1부터 달리기 시작했고, 글이 일곱 개나 나왔고, 라이언 머피라는 이름을 신뢰하게 됐다.(아 물론 글리는 보지 않을 것이다. 제프 윙거가 말했지, “I hate Glee!”)  


그리하여 톤도 성격도 플롯도 연출도 다 다른, <더 폴리티션>(Netflix)에 이르렀다. 감수성도, <베르사체>가 약간 비장하게 옳았다면, 이 작품은 ‘트렌디’하게 옳았다. 페이튼과 동료들이 캠페인에서 다양성과 환경을 중요시하는 것은, 그저 표를 위한 건 아니다. 지금은 21세기. PC가 트렌드다. 미래의 정치를 지향하는 이 팀은, 단순히 척만 하고 뒤에서 비웃는 게 아니라, 그게 옳으니까, 또 그래야 살아남을 테니까, 정말로 겉과 속 모두 전략적으로, 당연히, PC하다. 페이튼은 ‘찬물 샤워는 못하겠다!’고 소리치더라도, 그것을 실천하는 인피니티를 존중한다. 시즌2에서는 스카이가 ‘왜 패셔너블하다고 백인들이 콘로를 하는 게 잘못됐는지’ 설명하는 씬도 있다. 성적 지향, 인종, 환경, 질병 등 다양한 이슈를 선거 한가운데로 끌어와 특유의 긴박한 코미디로 다루면서도, 감수성은 바르게 유지한다.


매우 흥미롭고 신선해서 정신없이 웃으며 봤는데, 이상하게도 시즌1이 끝나가도록 최애 캐릭터는 딱히 없었다. 물론, 모든 캐릭터가 매력이 펑펑 터졌다. 페이튼과 ‘팀’, 아스트리드, 리버, 인피니티, 스카이, 그 가족들, 인물들 사이의 관계성 전부. 그럭저럭 최애 없이 잘 보고 있었는데, 아, 시즌1의 마지막화, 립스틱을 가지고 허둥지둥 난리 치는 디디를 보고 말았다. 그 정도로 충분했으나, 두 명의 남편을 한번에 끌어안는 ‘충격적인’ 장면 후, 돌이킬 수 없게 됐다. <더 폴리티션>의 내 최애는, 기성 정치인, 디디 스탠디시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더 폴리티션>(Netflix) 시즌2. 트레일러 캡쳐.


디디 스탠디시는 페이튼 호바트의 반대편에 있는, ‘기성 정치인’의 대표 격으로 설정된 캐릭터다--정도로 서술을 끝내기엔 덧붙일 말이 많다. 디디 스탠디시는, 무려 30년 동안, 뉴욕 주를 대표하는 상원의원이었다. 차근차근 소수자와 약자를 위한 변화를 만들어 나갔다. 디디는 남편에게 말한다. “Governing still turns me on행정은 아직 날 흥분시켜.” 그것이 바로 그녀의 방식이고, 당선 비결이다. 정치는 싫어하고, 행정은 사랑하고 ‘잘’하며, 비리는 참지 못한다. 오히려 ‘젊은 에너지’ 페이튼이 더 치사하고 능숙한 술수로 캠페인을 펼친다. 페이튼은 정치를 하고, 디디는 행정을 한다. 둘 중 누구를 응원해야 할지 헷갈린다. 페이튼이 뻔하게 정의로운 주인공이 아니듯, 디디도 판에 박힌 안타고니스트가 아니다. 그렇기에 쇼는 스파크가 튀도록 흥미진진해진다. 누굴 고르든, 고르지 않든 시청자의 몫이다.  


정치인은 주로, 속내를 숨기는 사람으로 표현되나, 디디의 겉과 속은 같다. 청렴결백은 어쩌면 이런 성격의 그녀에게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의원으로서 일을 하거나 카메라 앞에 설 때는 어느 정도의 연기가 수반되지만, 완전히 감추고 덮는 게 아니라, 공적인 태도를 입을 뿐, 여전히 솔직하다. 당당함과 떳떳함, 일에 대한 자신감에서 나오는 포스가 흐른다.  


공감능력이 뛰어나지만 감정에 치우치지는 않는다. 허대서가 네거티브 캠페인을 계획할 때마다, 디디는 찝찝해하며 페이튼을 안쓰러워한다. 자길 속이고 선거에 피해를 준 남편을, 동정은 하지만- 용서는 않는다. 쉽게 흥분하지만 표출은 그때그때 나직하게 한다. 뒤끝이 없다. 잘못은 쿨하게 인정하고 신념은 밀고 나간다. 자부심이 자만심으로 번지지 않는 까닭은 그 초점이 해낸 일들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일을 위해 삶을 포기하진 않는다. 디디 스탠디시는 비현실적으로 ‘완벽하게’ 멋지다. 동시에, 그 멋짐을 완성하는 것은 ‘완벽하지 않음’이다. 삼자결혼을 염두에 둔 표현은 아니다. 오히려 그건 ‘완벽’의 요소에 포함된다.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청렴하고, 능력 있고, 유머러스한데, ‘퀴어queer’하기까지 하다. ‘숨기는 데에 지쳤다’며 잔을 드는 디디 스탠디시를 보고 반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더 폴리티션>(Netflix) 시즌2. 트레일러 캡쳐.


내가 말하는 ‘완벽하지 않음’은, 공적인 자리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이 쇼가 진행되는 동안 시청자에게 만은 그대로 드러나는, ’사소한 부분‘에 있다. 선거 캠페인-질려버린 정치를, 페이튼 때문에 아주 오랜만에 해야 하는 상황, 능숙한 ‘정치인’ 디디가 ‘능숙하지 않게’ 전략을 짜고 행동하며 ‘사소한’ 문제에 패닉하는 모습이 이 드라마의 재미 중 하나다.


이쯤에서 배우의 이름을 적어야겠다. 주디스 라이트. 그가 지금보다 젊었을 때 어떤 모습으로 어떤 연기를 했는지 나는 보지 못했으나, 지금 그의 매력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는, 나이다. 떨리는 성대와 약간 둔해진 입술이 깊은 목소리와 만나면, 환상적이다. 움푹 들어간 큰 눈과 스모키 메이크업은 조화롭고, 각이 분명한 얼굴의 주름은 세월의 멋을 얹어 인상을 특별하게 만든다. 약간 굽은 어깨와 꼿꼿한 자세는, 마른 팔다리와 만나 프로페셔널한 수트핏을 완성한다.


주디스 라이트는 자신의 특징을 속속들이 매력적인 방식으로 디디에게 결합시켰다. 허스키하고 낮은데 칼칼한 쇳소리가 섞인 음색, 분명한 발성과 발음, 고집스러운 눈썹. 털털하고 쿨하다. 약간 느리다. 빠르고 사무적인 톤으로 대사를 주고받는 페이튼 캠페인 사무실과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어깨는 살짝 굽어 있고, 머리는 흔들린다. 꼿꼿한 허대서의 등과 비교된다. 허대서와 디디의 대조되는 제스처-‘사소한’ 문제에 패닉하는 디디와 부드럽게 달래는 허대서, ‘중요한’ 일이 터지면 흥분해서 화내는 허대서와 털털하게 달래는 디디- 를 보는 재미는 정말로 거대하다. 허대서를 비롯해, 디디가 각 인물을 대하는 태도, 거기서 발생하는 케미, 각기 다른 ‘위기’ 상황에서 보이는 반응은, 일관성 있으면서도 매번 새롭다. 예측 가능하나, 주디스 라이트를 통해 드러나는 순간, 예상치 못했던 무언가가 된다.  


<더 폴리티션>(Netflix) 시즌1. IMDB 이미지.


예상은 첫 등장부터 깨진다. 어수선하게 방을 돌아다니며 허대서를 붙잡았다가, 거울을 보고 ‘색이 죽어서 입술이 없는 것 같다’고 투덜댄다. 보는 사람이 다 정신이 없는데, 그 정신없음이 불안함이 아닌 기분 좋은 미소로 번진다. 디디가 이런 상태(티노는 왜 나를 만나자고 하였는가 내 입술은 죽어서 보이지 않는데 망할 내 립스틱은 어디로 갔는가?)일 때, 주디스 라이트는, 쇳소리가 섞인 허스키한 목소리를, 톤을 높여 빠르게 뱉는다. 첫마디를 가끔 더듬어 준다. 머리를 흔들고 손짓을 크게 한다. 약간 놓은 상태에서 연기하는 것 같기도 하다.


계속 어수선하게 허대서와 이야기하며 걷다가 마지막 순간, 고개를 들고 눈을 내리깔며 ‘하-’하는 완벽하게 정제된 감탄사를 뱉는다. 다음 순간부터, 디디는 워킹 모드로 들어가, 차분한 톤과 유한 미소를 입고 상대를 대한다. 물론 꾸며낸 미소다. 딱 필요한 정도로만 부드러워 사무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부담스럽지 않게 예의 바르다. 매번 눈웃음을 날리며 나긋나긋하나 빠르고 저돌적으로 말을 붙이는 허대서와 대조된다. 티노가 서로 의견이 갈리는 부분에 대해 질문하자, 상대의 비위를 맞추려 얼버무리지 않고, 상냥하지만 분명히 반대 의사를 표시한다. 티노를 대할 때 디디는 주로 상대의 매력을 의식해 살짝 긴장해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는 긴장의 주도권을 빼앗으며 카리스마틱하게 자신감을 표출한다.


예상치 못한 제안을 받은 순간, 다시 말을 더듬기 시작한다. 디디의 약점이자, 강점이며, 매력이다. 허대서가 ‘디디는 비밀이 없다, 보장한다’고 말하자 입꼬리만 올린 채 허공을 응시하다, 눈을 굴리고, 입을 움찔거린다. “난 비밀이 있어, 그래서 저 말이 매우 찔려.”라고 얼굴에 쓰여 있다. 물론 인물의 반응-상대는 모르고 시청자는 아는-으로 전개를 암시하는 드라마적 장치이지만, 주디스 라이트의 표정은, 디디답게 이를 더 ‘투명하게’ 드러냈다. 그러나 악수하며 제안을 수락하는 문장은, 쏘-핫하게 내리깐 목소리로 뱉는다. 집에 돌아가 혼자 기쁨에 겨운 듯 얼굴이 붉어져 숨을 파 뱉는다. 주디스 라이트는 숨김과 숨기지 못함을 반복하는 디디의 상태를 흥미롭게 드러낸다.


<더 폴리티션>(Netflix) 시즌2. 트레일러 캡쳐.


더 이상 삼자결혼이 그들만의 비밀이 아니게 되었어도, 디디의 얼굴엔 별 위기감이 묻어나지 않는다. 딱히 ‘숨김’의 상태는 아니다. 일단 화나서 마구 쏟아내는 허대서를 달래는 데에 집중을 쏟고 있어서다. 웃음기 없는 차분한 톤으로 위로하다가, 낮게 힘을 줘 “This is manageable.”하고 강조한 후, 열심히 설득하기 시작하는데, 목소리 톤이 특이하다. 평소처럼 낮다가, 까지거나 갑자기 높게 올라가기도 한다. 긴장해서 멋대로 오르내리는 게 아니라 드라마틱한 스토리텔링을 위한 수단 같은데, 또 의도된 것 같지는 않다. 진지하게 늘어놓는 와중 ‘40세 이상 여성의 성적 욕구’에 대해 농담조로 말하며 자신 있게 피식 웃는다. 그녀 옆의 두 남자처럼, 시청자도 홀려 자동으로 따라 웃게 된다. 디디는 허대서를 아끼고 의지하지만, 무조건 따르진 않는다. 타이르다가, ‘쟬 포기하라’는 말에, 천천히 일어나며 “NO.(느낌표가 아니라 마침표.)”라고 낮고 굵게 뱉으며, 물기 어린 눈으로 이를 악물고 으르렁거린다.


립스틱이 보이지 않을 때는 패닉하지만 이처럼 ‘큰 일’이 닥쳤을 때는 차분하고 느긋해 ‘보인’다. 디디의 그 태도 때문에 허대서는 갑갑해 더 화를 내고, 둘은 대조된다. 함께 많은 일을 겪어온 두 사람은 아마, 매번 그러한 그림을 만들었을 것이다. 페이튼 측에 삼자결혼이 알려졌을 때도, 티노가 망했을 때도, 디디는 본인의 심정을 표출하기보다 먼저 허대서를 진정시키는 데에 집중한다. 주로 ‘음 그거 문제네’ 류의 추임새를 던지고, 언성을 높이는 허대서 옆에서, 끼어들 타이밍을 잡지 못하며 입을 뻐끔거리고 손을 휘적거린다. 팔을 잡거나 말을 붙이는 데에 성공하면, 주도권을 가져와 느릿느릿 차분하게 진정시킨다. 주디스 라이트는 디디의 태도를 유머러스하게 그리면서도, 그 태평함이 절대 아무 생각 없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내공이며, 위기를 겪는 나름의 방법임을 은근히 드러낸다.


<더 폴리티션>(Netflix) 시즌2. 트레일러 캡쳐.


페이튼을 대하는 디디의 태도가 변하는 것을 관찰하는 것도 흥미롭다. TV로 출마 선언을 하는 페이튼을 보며 허대서의 어깨에 팔을 툭 얹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묻는다, “Should we be worried?” 약간 둔하고 느리다. 처음에는 그냥 “어디서 굴러온 부잣집 도련님 따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 점차 변한다. 위협이 되는 존재로 여기고, 괜찮은 상대 후보로 인정하고, 결국 자리를 양보하기에 이른다. 디디의 선택을 뒷받침하는 것은 대사나 상황뿐만이 아니다. 주디스 라이트의 얼굴은, 마음이 움직이는 과정을 읽을 수 있게 해준다.


페이튼과 정책 토론을 하는 디디는, 멋지다. 목소리와 언어의 흐름이 드라마틱하게 정확하다. 자신감이 넘친다. 상대를 똑바로 응시하며 차분하게, 절도 있는 삿대질을 지나치지 않은 정도로 하며 말을 잇는다. 다소 자극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쇼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진심으로 거슬리기 때문이다. 페이튼의 말에 몇 퍼센트가 진실이건, 그의 목적은 선거 캠페인과 승리 자체다. 뉴욕 시민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행정에 집중해온 디디의 입장이라면, 어이가 없을 만하다. 딱 그 정도다. 화낼 가치를 느끼지는 못한다.


삼자결혼 카드를 가지고 와서 도발적인 태도로 협상을 제안하는 페이튼을 보며, 디디는 재미있다는 듯 허허 웃는다. 그러다, 눈을 약간 풀어서 힘을 주고는, 씹어서 나직하게 비난의 말을 뱉는다. 적대적인 긴장감이 흐르지만, ‘이거봐라’ 하며 찬찬히 뜯어보는 눈길이 있다. 후보 토론회 때의, 전혀 관심도 흔들림도 없는 눈빛과는 달리, 흥미가 반짝인다. 흥미는 곧 인정과 일종의 유대감으로 발전한다. 허대서는 페이튼의 코스튬 사진을 보고, 거의 신나 하지만, 디디는 신중하게, 상황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그는 이런 전략이 불편하고, 싫다. 페이튼이 ‘애’이기 때문에 더 그렇다. 웃으며 슬슬 협박하는 허대서와 달리, 어색하게 툭툭 끊어 말한다. 불안해서 날뛰는 페이튼을 보고 약간 순수하게 재미있어하다, 허대서에게 하듯, 입을 뻐끔거리고 손을 어정쩡하게 휘젓는다. 끝내는 페이튼의 팔을 꽉 잡고, 안심시킨다. 이마를 약간 찌푸리며 웃는 얼굴은, 믿음직스럽다. 그녀가 하는 칭찬과 위로와 제안은 전혀 빈말로 들리지 않는다. 매번, 진심이 느껴진다. 비결은 진심 그 자체다. 언변이 아주 화려하거나 표정이 풍부하지는 않은, 디디의 말을, 모두가 듣고 믿는 까닭 중 하나다.


<더 폴리티션>(Netflix) 시즌2. 트레일러 캡쳐.


그 힘에 위기가 생기는 것이 4화, 디디 지지자인 엄마와, 페이튼 지지자인 딸이, 어떻게 서로의 후보자에게 실망하고, 결국 누구에게 표를 던지게 되는가를 상당히 짜임 있게 보여 주는 화다. 제임스가 디디 남편의 비리를 터트리고, 디디는 당황한 상태로 허대서에게 끌려 다닌다. 디디는 이런 류의 임기응변에 능하지 못하다, 그럴 필요가 있었던 적이 없었으므로. 행위 자체에는 떳떳하지만 전략적으로 숨겼던 삼자결혼과는, 아주 다른 문제다. 약간 어정쩡하게 굳어서 손을 내저으며 투표소를 나간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네요.”는, 단순한 부인이 아니라 진심이다. 정말로 무슨 말인지 모른다. 길이 막히자 불안해하며 유권자가 보든 말든 허대서와 평소처럼 티격태격하는 디디는, 돌격하는 허대서 옆에서 (또) 입을 뻐끔거리는 디디는, 허술해서 매력적이지만, 앤디 눈엔 아니었을 게다. 뭐 어쩌겠나, 사람들은 자기 멋대로 기대하고 평가하니까. 디디나 페이튼, 혹은 앤디의 잘못은 아니다.


다음 씬을 묘사하기 전, 시간을 약간 앞으로 돌려, 조지나와의 투샷을 살펴야겠다. 조지나 또한 진심을 그대로 말하는 캐릭터인데, 다르다. 디디의 바탕에 일관된 신념과 원칙이 있다면, 조지나의 바탕은 기분과 흥미다. 언뜻 비슷해 보이나, 전혀 맞지 않을 것 같고, 또 다시 보면 의외로 통하는 데가 있다. 첫 만남에서 디디는 약간 조급하게, 페이튼을 설득해 달라고 부탁하다가, 결국, 개인사를 털어놓는다. 부끄럽지는 않으나, 꺼내고 싶지도 않았던 듯, 요약해 빠르게 말하는데, 울먹임이 섞여있다. 조지나의 반응에, 눈물 때문에 찌푸려 있던 디디의 뺨이 갑자기 펴지며, 표정이 결연해진다. “I am a fighter.” 진지하게 의지를 표출한다. 여전히 가볍고 얄밉게 넘기는 상대를 보며, 한숨을 푹 쉬는 디디와, 약간 익살맞은 긴장감을 주는 빠른 배경음이 어울린다. 주디스 라이트는 디디의 다른 면을 내비치며 절실함과 깊이를 새삼 드러내지만, 쇼의 톤과 템포에 맞는 정도로 무겁지 않게 끝낸다.


다시 선거일로 돌아온다. 상황과 상태가 다르고, 대화 상대와 의도가 달라, 이번에는 완전히 속내를 드러내는 디디를, 더 마음껏 연기하는 주디스 라이트에 감탄해보자. 천천히 소파로 걸어오며, 디디는 낮고 굵게, 음절을 하나하나 씹고 늘여 뱉는다. 마지막 단어를 말함과 동시에 소파에 풀썩 몸을 던진다. “I am, SO tired 허대서, of- the- ga-me.”(삽입부호대로 말한다.) 정말로 질리고 지친 게 느껴진다. 흥미진진하게 둘의 대결을 지켜보던 중이었는데, 순간 갑자기, 속이 이상해진다. 이토록 유능하고 멋지고 자격이 넘치는 사람을 지쳐 나가떨어지게 하는 선거란 뭘까. 디디는 말한다, “일하는 건 좋아, 내가 지친 파트는, 선거 캠페인이지.” 티노의 러닝메이트 제안에 흥분했던 것은, 권력을 얻을 수 있어서가 아니라, ‘첫 여성 부통령’이라는 역사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부통령 자리를 아쉬워하며, 손을 꽉 쥐고, 숨을 쉭쉭 내쉬고, 눈에서 불을 뿜다, 마지막엔 눈물을 글썽인다. 주디스 라이트는, 대사 한 줄 한 줄을 뱉을 때 마다 언급하는 대상에 대한 디디의 태도를 보여주듯 드라마틱하게 제스처와 표정과 목소리를 변화시키면서도, 감정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한다. 그리하여 디디가 어떤 사람이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금 요약해 주는 훌륭한 장면이 탄생했다.    


<더 폴리티션>(Netflix) 시즌2. 트레일러 캡쳐.



방심하지 마라, 라이언 머피다. 이 선거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꺾이기를 거듭하더니, 결국 가위바위보로 뉴욕 주의 대표를 결정하는 상황에 이른다. 가위바위보에 유불리가 있겠냐마는-있다. 페이튼에겐 있는 것이 디디에겐 없다. 순발력이다. 사생활 캐내기, 남편의 비리 폭로, 어떤 네거티브 캠페인도 디디 스탠디시를 무너뜨리지 못한다. 몇 십 년을 잘 지켜왔던 자리를 포기한다는 말을 하면서도 꼿꼿했던 디디다. 그러나 가위바위보는 가능하다. 선거에서 질지도 모른다는 상황이 물론 바탕이 됐겠지만, 계속 말했듯, 이런 ‘사소한’ 문제가 바로, 디디의 약점이고 매력이다. 완벽해야 할 땐 완벽하고, 허술해도 될 때는 허술하다.


허대서와 디디의 가위바위보 연습 씬은, 과연 장관이다. 이 쇼에서 가장 아무 생각 없이 배가 아프도록 웃은 장면 중 하나다. 디디는 집중하느라 어깨를 살짝 숙인 채 열심히 팔을 흔들어 가위바위보를 한다. 계속 진다. 영원히 진다. 얼굴을 굳히고 미간을 찌푸린 채, 질 때마다 나직하고 맛깔나게 “Damn it.”이라고 속삭인다. 그러다 세상 근심을 다 짊어진 듯 이마에 주먹을 가져다 대며 스르르 상체를 숙인다. ‘으어어….’하고 끝이 꺼지는 신음을 내쉰다. 고개를 들고 손을 팍 펴는 동시에 거의 울먹이며 외친다, “This is a disaster!이건 재앙이야!” 첫 등장 때처럼, 패닉해 숨을 쉰다. 매번, ‘Oh god’, ‘What the fuck’, ‘Son of a bitch’를 비롯한 다양한 욕과 감탄사를 뱉다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가위/바위/보를 내는 대신 검지로 허대서를 가리킨다. 이를 갈며 낮고 굵게 씹어 뱉는다. “Mother,fucker.” 다 포기한 듯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며 말한다, “This is insane.이건 정신 나간 짓이야.”. 포인트는 다음 순간 또다시 애써 설명하는 허대서의 말을 들으며 열심히 고개를 흔들흔들 끄덕이는 모습, 또 지고 온 힘을 다해 외치는 “Motherfucker!!!” -아니 이건, 봐야만 한다.


가위바위보를 그만두고 술을 마시러 간 디디는, 다시 원래의 텐션으로 돌아와 있다. 풍부하고 인자한 표정을 짓고, 나직하게 허스키하고 호탕한 목소리로 농담과 조언을 번갈아 던진다. 상대의 말을 들을 땐, 탁자에 팔을 올리고, 약간 비스듬하게 찬찬히 보며 머리를 정확하게 끄덕인다. 페이튼이 공연을 시작하자, 입에 미소를 올리고 살짝 내리뜬 눈으로 지켜보기 시작한다. 표정이 점차 변한다. 미간이 찌푸려지고, 눈에 물기가 어리고, 입술은 꾹 다물린다. 술잔을 든 손은 집중하느라 정지해 있고, 다른 손은 쇄골 근처에 놓았다가, 입 근처로 가져갔다가, 허대서의 손을 잡는다. 노래가 끝나고 다들 기립박수를 치는 와중, 디디는 가만히 앉아 손을 모으고 눈물을 글썽이다 조용히 엄지를 올린다. 미안한데 페이튼의 노래 스타일은 전혀 취향이 아니라서, 내겐 그것을 듣고 감동받은 디디의 표정 변화가 더 감동적이었다. 주디스 라이트가 준 감동은, 앞으로 할 디디의 선택을 설명하고도 남았다.  


가위바위보로 당선자를 결정하는 날, 디디는 홀로, 여유롭고, 평온하고, 꼿꼿하다. 반박하려는 페이튼을 제지한다, “페이튼, 페이튼, 닥쳐.” 디디의 연설에서는, 진심이 잔뜩 느껴진다. 애초에 페이튼과 디디는 여러모로 다른 인간이다. 나이, 경험, 성향, 성격, 젠더, 출신 배경 - 그러나 이 쇼의 제목은 ‘The Politician’. 손목시계를 보며 초조해하는 페이튼과, 디디의, 정치인으로서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페이튼이, 말을 한 다음 그것을 믿는다면, 디디는, 자신이 믿는 것만 말한다. 주디스 라이트는 상대 배우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비중과 기회로(물론 벤 플랫도 훌륭했다), 그 차이를 클리어하게 드러낸다. (결국 내 눈에서 눈물을 끌어낸)연설의 막바지, 디디는 양보하겠다고, 쿨하게 말한다. 눈물을 약간 글썽이고, 목소리에 미세한 떨림이 있지만, 망설임 없이 당당하다. 재치 있는 장난으로 마무리하고, 페이튼과 악수하며 “Now the hard part starts kiddo이제 진짜 힘든 부분이 시작되는 거야, 얘야.”라고 나직하게 속삭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더 폴리티션>(Netflix) 시즌2. 트레일러 캡쳐.



디디에게 중요했던 건, ‘내가, 이끄는 변화’가 아니라 변화 그 자체였다. 선거에만 집착하던 페이튼이, 비로소 일과 삶과 사람을 우선시하게 된 바탕에는, 디디와의 경험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쇼를 이대로 끝내는 게 깔끔하지 싶으면서도, 디디가 대통령에 취임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욕심이 자꾸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쇼에 사실 딱히 등장하지 않았던, ‘행정’을 하는 모습도. 선거 후 다 놓은 상태에서, 안경을 쓰고 영상통화를 하는 씬에서, 달라진 조지나와의 케미를 보니, 포커스를 좀 달리해 시즌3을 구성해도 괜찮을 것 같다. 디디가, 주디스 라이트가 뿜어내는 빛에 더 완전히 물들고 싶다.


<더 폴리티션>(Netflix) 시즌2. tvline.com 이미지.



*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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