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디스 라이트(Judith Light)
*이전 글에서 이어집니다.
주디스 라이트(Judith Light) in 라이언 머피‘s
<더 폴리티션(The Politician)>(Netflix)
<베르사체(The Assassination of Gianni Versace: American Crime Story)>(FX) 3화
* 위 작품들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디디 스탠디시를 보며 확신했다, 나는 마릴린 미글린을 볼 때 이미, 주디스 라이트에게 반해 있었다는 것을. 그리하여 다시, <베르사체>로 돌아온다.
-피해자를 대상화하거나 범죄자를 악마화하지 않고 각자의 삶을 살피는 에피소드들이, 시간을 역행하는 흐름으로 얽혀 자꾸 왜? 라는 질문을 던진다…(………)….왜? 는 필요하지만, 그에 대한 답이 면죄부가 되진 않는다.-
<베르사체>를 다 본 직후 쓴 감상의 일부다. 작품은 실재했던 인물들을 철저히 픽셔널하게 극적으로 그림으로써, 오히려 대상화를 피했다. 각자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와닿았다. 마릴린 미글린 또한, 단순히 피해자의 와이프로 기능하지 않는다. 겨우 한 화 남짓 분량이지만, 화면에 잡히는 순간에는 중심이다. 3화는, TV쇼에 출연한 마릴린으로 시작해, ‘사건’ 이후 다시 TV쇼에 출연한 마릴린으로 끝난다. 한 편의 완전한 영화를 본 기분이 들게 하는, 이 화의 주인공은, 그녀라는 의미다. 몇 되지 않는 장면으로, 작품은 마릴린의 성격을, 삶과 일과 남편에 대한 태도를, 보여 주려 노력했다. 노력이 성공한 까닭은, 주디스 라이트다.
(어디까지나 캐릭터로서의)마릴린 미글린은, 디디에 비해 표정과 말투가 풍부하며 톤이 높고 가볍다. 더 따뜻하게 유머러스하고, 부드럽게 드라마틱하다. 아주 다른 일을 하며 살고 있지만 통하는 면이 있다. 둘 다 삶과, 사회와 싸워 왔다. 분명히 마릴린은 유머러스한 사람이다. 허나 쇼의 톤과 캐릭터가 처한 상황이 달라 종종 비치는 정도고, 그나마도 대개 고통을 덮기 위한 수단으로 쓰인다. 디디와 같은 코미디적 요소는, 없다.
마릴린은 일종의 셀러브리티다. 자신의 브랜드 향수를 들고 TV에 출연해 리얼리티를 연기한다. 배우와는 다른 종류의 연기다. 그녀가 하면 낯간지러운 말에도 매혹된다. 그 연기는 사교 모임에서도 묻어난다. 풍부하고 익살맞은 표정을 지으며, 식탁에서도 단상에서도 남편에 대한 사랑과 지지를 아낌없이 표출한다. 어느 정도 꾸며낸 것이겠으나, 진심이 담겨 있다. 그러나 혼자 있을 때는, 쓸쓸해 보인다. 작품은 ‘사건’과는 관계없는 이런 모먼트들을 통해, 각자의 캐릭터를 살아 있게 한다. 설명을 줄이고 템포를 늦춰, 장면을 배우의 리듬에 맡긴다. 천천히 우아하고 우울하게 화장을 지우는 모습으로, 주디스 라이트는 어떤, 관계에 대한 직감 같은 것을 드러낸다.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연 마릴린의 표정은 단호하게 굳는다.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패닉하는 대신 천천히 뒤돌아 이웃들에게 상황을 말한다. 침착하게 입을 꾹 다물고 기다린다. 경찰이 이웃과 함께 차고로 가고, 카메라는 가만히 서 있는 마릴린의 옆모습을 담는다. 눈은 머리카락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풀지 않는 팔짱과 차분하게 다물고 있는 입이, 예감을 전한다. 다시, 식탁을 천천히 두드리는 손이 화면에 들어오고, 카메라가 천천히 움직여 얼굴로 향한다. 이번엔 내리깐 눈이 보인다. 고개를 살짝 들고, 입은 여전히 꾹 다물고 있다. 이미 다 알고,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비명이 들리자, 몸을 움찔 하고 눈을 깜박 하는 것이 전부다. 다시 탁자를 한 번 두드린다. 얼굴이 정면에 들어온다. 미간과 입에 힘이 들어가며, 허공을 향한 눈에 물기가 어린다. 몸 전체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한다. 안간힘을 다해 참고 있다. 눈이 깜박이며 다시 떨림이 멈춘다. 속삭인다, “I knew it.” 건조한데, 아프다. 드러내지 않으려고 함으로써 드러내는 연기다. 배우를 여러 각도에서 천천히 찍는 연출은 탁월했다.
태연하고 단호한 말투로 톤까지 풍부하게 상황을 분석해 설명하고, 미소와 유머도 살짝 섞는다. 마릴린이 특이한가,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이는가, 전혀. 그녀는 죽은 남편을 자신의 방식으로 위하는 것이다. 경찰 고위 간부에게 연락하고, 단서를 찾고 기억해 진술한다. 범인을 잡기 위해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총감의 “We all here for you.”에, 마릴린은 잠깐 멈춰 고개를 살짝 흔들고는, 마디마디 끊어 답한다. 목소리가 먹먹해지고, 눈에 눈물이 고인다. “Lee was alone, in the house, he was vulnerable.” 게이 포르노 잡지가 있었다,고 총감이 전하자, 마릴린은 눈을 깜박이고 입을 약간 우물거리긴 하지만, 그 정도가 다다. 당황하거나, 수치스러워하지 않고, ‘그 자가 뭘 갖다 놨고 의도가 뭐였건 관심 없다, 잡으라’는 의사를 분명히 한다. 마지막엔 이를 악물고 경고한다. 목소리가 나직하고 걸걸해진다.
쇼에 나가기 전 화장을 하며, 마릴린은 “I know what they’re saying about me.”라고 말을 시작한다. 턱은 살짝 들고, 눈은 내리깐 채, 말의 흐름에 맞춰 브러쉬를 터프하게 휙 휙 쓸며 뺨을 좌우로 움직인다. 화장 도구를 퍽 퍽 내려놓는다. 립스틱으로 삿대질을 한다. 리와의 추억을 말하면서는, 목소리와 얼굴이 떨리기 시작하다, 눈물이 미처 다 고이기도 전에, 묵직한 울음이 “I, loved, him, very much.”와 함께 푹 하고 떨어진다. 양손으로 눈을 세게 문지른다. 창가로 가 앉아, 얼굴이 일그러지도록 아랫입술을 꽉 문다. 천천히 걸으며 말한다, “I will fight.” 다시 화장대에 앉아 진정한 후 하는, “It was a robery, and a random killing.”은 차갑고 건조하다.
대사와 빛의 사용, 카메라 이동, 편집 모두 완벽했다. 그러나 주디스 라이트가 완벽 이상을 만들었다. 대사와 동작을 적절히 끊고, 배치하고, 매치했다. 위의 묘사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것을 창조했다. 공기를 인물의 감정으로 가득 채웠다. 남편에 대한, 범인에 대한, 수군거리는 사람들에 대한, 각기 다르고 복합적인 감정들이, 하나씩 그리고 한꺼번에 드러났다. 그녀가 살아온, 아니 싸워온 삶이, 얼핏 보였다. 그 장면은, 온전히 마릴린 미글린의 것이었다.
TV쇼에 출연한 마릴린은 애써 웃는다. 눈을 들지 못하고, 숨을 자주 쉬고, 말이 막힌다. 그러다 눈물이 터져 나오지만, 멈추지는 않는다. 향수병을 만지작거리며, 열심히 화면과 호스트를 번갈아 보며, 천천히, 끊임없이, 이어간다. 입술에 아름다운 미소를 올리지만, 눈은 그렁그렁하다. 그녀는 프로다. 남편이 죽은 후에도, 자기 자신이기를 멈추지 않는다. 허나 보인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버티고 있는지가. 때로 고통은 오열보다, 가만히 다문 입이나 떨리는 속눈썹에서 더 깊고 저리게 드러난다. 마지막 컷, 마릴린은 카메라 앞에서, 고통을 ‘음미하듯’ 눈을 감는다.
마릴린 미글린의 태도는 확실하다. 남편과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며,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남편의 성 정체성에 대한 가십에는 대응하지 않으며, 자신이 바라본 그대로 기억한다. 살인자는 남편을 죽였기 때문에 증오하는 것이다, 불필요한 혐오는 하지 않는다. 마릴린이 단순히 비통해하는 유족 캐릭터가 아니듯, <베르사체>는 단순히 범죄 수사물이 아니다. 인물의 삶에 있는 특정 부분을 추측하고 상상해 픽션으로 재구성하며, 당시 게이들이 처한 위험과 맞닥뜨린 혐오를 정면으로 다룬다. 주디스 라이트는 배우로서, 쇼와 시선을 공유한다.
사실, 나는 그가 누군지 전혀 몰랐었다. 아벳 나디르가 분석했던 <Who’s The Boss?>의 그유명한 안젤라였다는 것도. 실제 베르사체 살인 사건이 일어나기 훨씬 전인 80년도부터 LGBTQ 엘라이ally로서 목소리를 내 왔다는 것도. 라이언 머피와 작업하기 이전, 그는 TV시리즈 <Transparent>(Amazon)에서, 주인공 트랜스 여성 마우라의 전 와이프, 쉘리를 연기했다. 이 쇼는 출연진과 제작진에게, 단순히 일 이상의 의미였다. 내가 말을 덧붙이는 것보다, 첫 시즌 무렵의 인터뷰를 통해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게 나을 것 같다. 쇼 방영 이후 일부 시청자가 ‘이상하다’는 반응을 보였던 것에 대해 주디스 라이트는, ‘이들이 이상하다고 지칭하는 대상은 쇼가 아니라 트랜스 커뮤니티’라면서, ‘이 쇼의 가치는 ‘문제 있는 사람들(트랜스 커뮤니티가 이상하다고 하는 사람들)’을 훨씬 뛰어넘는다‘고 말한다.
"아직도 사람들이 집에서 쫓겨나고, 그들을 향한 혐오범죄가 일어나고 있어.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해고당하고 있어. 지금은 2015년이잖아. 우리는 정말로, 옳은 일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껴."
-주디스 라이트, interview by Chris Azzopardi [pridesource.com]
당시에는 LGBTQ 엘라이로 활동하는 셀러브리티가 정말 극소수였는데, ‘느낌’이 어땠냐고 묻는 진행자에게, 주디스 라이트는 답한다. ‘뭘 느끼고 한 게 아니라, 해야 할 일이므로 한 것뿐’이라고. ‘사람들이 집에서 쫓겨나고 병원에서 죽어가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고. 그리고 답변의 마무리에는 여전히, 커뮤니티를 언급한다. “난 커뮤니티가 날 이끌도록 했어. 그들이 바로 리더였어. 내게 그들은, 아직도 리더야.”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도록 영감을 준 게, 바로 LGBTQ 커뮤니티였거든. 난 진실되고, 용기 있는 사람이고 싶었지만, 오랫동안 그러지 못했어. 80년대 초반 HIV 보균자나 AIDS 환자들을 지지하는 활동을 시작했을 때, 커뮤니티의 존재를 봤어, 이 커뮤니티가, 모든 말도 안 되는 일들에 대항해, 그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고 모욕한 세상과 사회와 나라에 대항해, 굴러가는 걸 봤어. 커뮤니티를 위헌으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이들은 그냥 일어나서 외쳤어, “우리는 병든 친구들이 있을 공간을 만들 거야, 우리는 장례식을 치를 거야, 우리는 그들을 병원으로 데려갈 거야, 우리는 그들의 IV와 침대보를 갈 거야, 그리고 우리는 배울 거야.”하고. 그러자 레즈비언들이 와서 말하더라고, “게이 맨들아, 너희는 우리의 형제들이야, 우린 너희를 돌볼 거야.” 그리고 드랙퀸들이랑 바이섹슈얼 커뮤니티랑 트랜스젠더 커뮤니티- 모두 다 마음을 모으는 거야. 난 이 커뮤니티를 보고 말했어, “숨 막히게 굉장해. 이런 게 내가 속하고 싶었던 세상이고, 옆에 있고 싶었던 사람들이야. 내가 함께 일하고 싶었던 게 바로 이런 사람들이야.” "
-주디스 라이트, interview by Chris Azzopardi [pridesource.com]
진행자가 <Transparent> 첫 에피소드의 라스트씬을 언급하며 인터뷰를 시작하자, 주디스 라이트는 굉장히 마음에 들어하며 감사를 표한다. 마지막에도, “인터뷰를 그렇게 아름답게 시작해줘서 고마워.”라고 언급한다. 진행자는 주디스 라이트에게, ‘항상 당신을 우리 식구라고 생각해 왔다’고 말한다. 그 주고받는 유대감이 아름다웠다. 주디스 라이트의 말들은, 따뜻하고 바르게 반짝거렸다. 단편적이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살짝 알 것도 같았다. 잘 알지 못하지만, 짐작을 해버리고 싶었다.
주디스 라이트는, 라이언 머피의 작품 속에서, 가장 올곧은 ‘어른’의 얼굴로 빛난다. 인물과 연기에 있던 그 멋의 바탕은, 배우의 삶과 내면에 있었다. 앞장서 변화를 만들어왔고, 변화의 흐름에 따라 뒤로 물러나기도 했던 디디 스탠디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기 자신이기 위해 세상의 시선에 맞선 마릴린 미글린,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았던 시대(지금도 방식과 정도가 다를 뿐 여전한 이슈지만-), 당연해야 하는 가치를 위해 곧게 서서 각자의 방식으로 싸웠던 두 사람의 모습은, 주디스 라이트와 닮아 있었다. 글은 이미 열 페이지가 됐지만, 묘사한 작품은 고작 두 개라는 것이, 아쉽고도 설렌다. 이제 시작이다. 멋진 그의, 멋진 연기가 담긴 작품들을 찾아볼 생각을 하니,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