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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Apr 04. 2022

가스파르 울리엘이 되었을 존재

- 2022년까지의 스크린 속 가스파르 울리엘: 이방인과 관찰자.




* 언급하는 작품들의 핵심 전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완전한 변환이다. 이건 다른 거다.”


3 30 공개리미티드 시리즈 <문나이트> 한 케빈 파이기의 말이다. (2022.02.12, interview by. Ben Travis [empireonline.com]) 감독은 라이징 디렉팅 듀오 저스틴 벤슨 & 아론 무어헤드, 그리고 최근 아랍영화계에서 주목 받는 모하메드 디아브. 다중인격장애가 있는 히어로 스티브/마크를 오스카 아이작이, 메인 빌런은 에단 호크가 연기한다. “스티브/마크는 강력한 이집트 신들 사이의 치명적인 미스터리 속으로 던져진 가운데, 복잡한 아이덴티티를 탐색하고 조절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다.”([imdb.com])라니, 기대를 불러일으키면서도 예측할  없는 요소가 한가득인, ‘취향을 저격 것이 분명한, 설레는 작품이다.


그러나 <문나이트>는 또한, 떠올리면 안타까운 작품이기도 하다. 주인공의 적들 중 하나인 ‘미드나잇 맨’ 역의 배우 가스파르 울리엘의 유작이기 때문이다. 올해 1월 사고로 서른 일곱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는 데뷔 후 스무 해가 넘는 동안 50편 남짓의 작품을 남겼다. 프랑스의 스타, 샤넬의 뮤즈, 그러나 왠지 ‘스타’로 수식하고 싶지 않은, ‘배우’. 이 글에서는 그의 흔적들을 따라가며, 가스파르 울리엘이 스크린 속에서 무엇이었는지,를 돌아본다.

 

<문나이트>(2022). 왓챠피디아.



관찰되는 자, 선악이 공존하는 ‘이방인’, 욕망의 주체와 객체.  


<스트레이드>(2003), 이반은 ‘boy came out of nowhere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소년’이다. 화면 속에서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은 이 배우를 목격한 관객들이 인식한 이미지도 그렇지 않았을까 싶다. ‘선과 악’, 거친 면과 여린 면이 공존하는 마스크. 뺨의 흉터나 살짝 기울어진 어깨와 같은 요소는 그 ‘원앤온리’한 분위기에 일조한다. 이반은 주인공 여성과 가족을 돕는 조력자인 동시에 의심스러운 존재다. 이것이 가스파르 울리엘의 첫 주연작, ‘뉴페이스’-낯선 얼굴이라는 점은 이 ‘신비한 위험함’을 증폭 시켰다. 영원히 ‘다듬어지지 않을’ 듯한 야성의/섬세한 눈빛에 욕망을 드러냄으로써, 주인공과 관객에게 바라보아지고 ‘원해지는’ 대상이 되었다. 그렇게 성공적으로 눈도장을 찍은 이후 다수의 작품에서, 그는 (관찰자일 때조차) ‘관찰되는 자’였다. 욕망의 (주체일 때조차) 객체였으며, 때로 ‘이방인’ 이거나, 양면성을 지녀 판단하기 힘든 인물이 되었다.


<인게이지먼트>(2004)에서는 ‘죽었을지도 모르는’ 피앙세-‘장 피에르 주네 x 오드리 토투’의 전작 <아멜리에>(2001) 속 ‘니노’와는 다른 형태의 ‘님’-였고, <네가 모르는 세상>(2008)에서는 말 그대로 ‘간데 없이 사라져 버리는’ 남자였다. 주인공 여성과 로맨스로 엮이면서 ‘상상되고’ ‘바라보아졌다’. 단편들에서도 ‘낯선 이’이거나 (2007, <더 스트레인저>) 심지어는 시체(2012, <Mes amours décomposé>)였으며, <더 빈트너스 럭>(2009)에서는 ‘타락천사(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 네이밍인지.)’로 등장하기도 했다.


<인게이지먼트>(2009). 다음 영화.


앞서 언급했던 ‘욕망의 주체일 때조차 객체였다’에 대한 예가 <몽펭지에 공주>(2010)의 앙리다. 마리를 분명하게 욕망하는 자이나, 카메라는 주로 그를 타인의 시선이 닿는 곳에 놓는다. 마리를 포함한 이들은 모두 그를 주시하며, 끊임없이 그에 대해 칭찬하거나 경고한다. 그리하여 관객도 그들을 따라 앙리를 지켜보게 되며, 의중을 궁금해하기보다는 어떤 형태로든-욕망하게 된다.


“(<몽펭지에 공주>) 감독을 만난 다음 날 Madame Lafayette의 원작을 읽었는데, 그녀의 이야기가 현대의 삶에 공명한다는 점이 정말 좋았다. 오늘날에 적용할 수 있는 주제들이 들어 있어서였다, 강제 결혼이나, 사회 속 여성에게 주어지는 불평등한 조건, 그리고 ‘신을 위한 싸움’ 같은 것들. 책과 역사적 면을 잊으려고 노력했다, 왜냐면 그 인물들, 그들은 현재에 있었으니까.”  

- 가스파르 울리엘, 2011.07.11, interview by. Ella Alexander [vogue.co.uk]


스크린에서 차지한 낯선/미스터리한/궁금한 ‘대상’의 포지션은 몇 해 동안 그의 필모그래피가 마를 일이 없게 했고, 이 배우는 기꺼이 피사체의 자리에서 이야기의 매력 포인트가 되었다. 어떤 ‘이미지’나 ‘분위기’가 주가 될지라도, 표면적 요소만으로 가능한 표현은 아니었다. 위 인용처럼- 작품의 시선을 공유하며 폭넓게 이해하려는 노력과 능력에서 출발한 인물들이었다.


<더 빈트너스 럭>(2004). 다음 영화.



<한니발 라이징>, 자쿠오에서 바질까지.


2007년, 그는 ‘커리어를 완전히 바꾸어 놓을 수도 있을’ 작품에 출연한다. 바로 <한니발 라이징>(2007). 이미 안소니 홉킨스의 역사적인 퍼포먼스로 온 세상에 새겨진 이 ‘빌런’의 젊은 날을, 아직 ‘베테랑’이 되기에 애매한 경력의 배우에게 맡기는 건, 상당한 우려가 수반되는 작업이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제작진은 반오십이 채 되지 않은 그에게 단독 주연 자리를 건넨다. ‘굉장한 기회’이자 ‘엄청난 부담’, 후자의 비중이 더 컸을 법도 한데, 가스파르 울리엘은 도전했다. (원작자의 각본으로 만든) 이 작품이 ‘아주 성공적이었다’고 하긴 무리가 있으나, 연기만은 제자리에 안착했다. ‘한니발이 아니’라는 평과는 별개로 ‘인상적인 주인공’이었고, 그 까닭은 단순히 ‘젊고 섹시한’ 외모에 있지 않았다. 가스파르 울리엘은 이 ‘예외적인’ 캐릭터를, 보편적인 심리로 이해할 수 있도록 연구해, 자신에게 있는 ‘이방인/아웃사이더’, 선악이 공존하는 ‘이미지’를 적절한 형태로 발전시켜, 색다른 연기를 시도했다.


한니발 렉터는 ‘보는 주인공’이자 바라보아지고 ‘이야기되는’ 자다. 화자의 입장에 있지만 관객도 그의 사고과정을 완전히는 알 수 없다. 경찰에 끌려가 관찰 당하는 위치에 있는가 하면, 반대로 질문을 던지며 형사의 속내와 반응을 관찰한다. 그리고 -그 ‘비범함’으로- 상대와 관객에게 다시, 관찰된다. ‘옳고 그름’의 잣대가 없으며, 그저 ‘다음 행동’을 자연스럽게 알고 있는 이다. 그러나 너무도 분명한 ‘광기’ 사이, 미처 감추지 못한 미세한 떨림들이 있다. 가스파르 울리엘의 한니발 렉터는 이미 ‘빌런으로 완성된’ 존재가 아닌, 괴로운 기억을 지닌 소년/사람을 죽여 먹는 남자-의 양면성을 지닌 인간이었다.


<한니발 라이징>(2007). 다음 영화.


같은 해 나온 <자쿠오 르 크로캉>(2007) 속 자쿠오 역시 한니발과 유사하게 복수에 불타는, ‘운명’에 저항하는 인물이나, 캐릭터와 작품의 방향은 매우 다르다. 가스파르 울리엘은 ‘순응하지 않는 자’, ‘복수하는 자’로 묶이면서도 절대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없는 두 얼굴의 주인이 되었다.


말하거나, 걷거나, 말을 타거나, 음악 없이 춤을 출 때도- 자쿠오는 자주, 오랫동안, 눈을 부릅뜨고 정면을 응시한다. 시각으로 사물이나 상황을 인식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존재를 주위에, ‘저기 저 자’에게 인식시키려는 제스처에 가깝다. 어린 시절 자쿠오의 눈이 겪은 일을 똑똑히 지켜보고 기억한다면, 성인이 된 그의 눈은 담기보다는 뿜어낸다. 이미 판단은 오래 전 끝났고, 그것을 바탕으로 주장하고 행동할 차례. 모두가 자쿠오의 이름을 외치고, 그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도 무게를 잊지 않는다. “명심하세요, 여러분은 그저 따랐을 뿐입니다. 모든 책임은 제게 있습니다.” 주목 받기를, 입장을 드러내기를, 그 결과를 책임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저항의 최전선에 서서 그 핵이자 피부가 된다. 작품에서 배우가 차지하는 역할도 마찬가지. 화면의 정 가운데에서 중심을 잡고 압도한다. 화자이자, 등장인물과 카메라가 내내 주시하는 인물, 이야기가 전하려는 바를 체화한 주인공이다.


<자쿠오 르 크로캉>(2007). 다음 영화.


여기서 십 년 정도를 건너 뛰어, <원 네이션>(2018) 속 바질을 살필 필요가 있다. 자쿠오처럼 ‘가장 낮은 곳’에 있는 ‘혁명가’이나, 한가운데에 우뚝 서기보단 한쪽에 비켜서 있다. 프랑스 혁명의 열기와 주체들을 바라보며 ‘한 개인에게 혁명이 무엇이었는지’ 드러내는 인물. 오로지 ‘관찰하는 자’였다가, ‘이방인’으로서 그 안으로 들어가고, 서서히 ‘관찰+행동하는 자’로 옮겨가며 역사를 지난다. 아델 에넬의 프랑수아즈와 연인으로 호흡하는데- 그는 테이블에서 여성의 권리를 말하고, 경찰에 끌려가서도 할 말은 다 하는 이다. “바스티유 정복한 자 많고 많지만, 한 사람만이 바질을 정복하지.” 그가 바질을 ‘택한 후’ 흥얼거리는 노래는 상징적이다. 프랑수아즈는 열정적인 혁명가, 바질은 ‘내 사랑 그녀의 눈이 빛나는 방향’을 따라가다 동화되는 ‘연인’, 역사 속 ‘혁명가 남성’과 그를 ‘뒷바라지하며 걱정하는 여성’의 클리셰(’자쿠오-리나’처럼)를 약간 비튼 관계다. ‘비틀기’를 완성하는 것은 두 배우의 아우라. 아델 에넬은 분출하고, 가스파르 울리엘은 그것을 ‘보며’ ‘담는’다. 관찰자와 주인공의 경계에서, 바질의 눈은 관객과 파리 시민들을 잇는다.


작품 스타일과 방향의 차이, 시대의 흐름도 요인이 되었겠으나- 십 년 동안 이 배우가 겪은 일관된 포지션의 변화가 여기 녹아 있다. 특별한 ‘대상’으로서 응시되기를 거부하지 않았고, 그 과정이 이후 ‘관찰하면서 관찰되는’, 독특한 존재로 거듭나는 데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스스로를 피사체로 만드는 법을 터득했기에 자신만의 자리를 찾아내 중심을 잡을 수 있었겠다. 그리하여 <원 네이션>에 이르러서는- 역사마저 담아내었던 것이다.


<원 네이션>(2018). 다음 영화.



여전한 ‘이방인’, 관찰되는 자 / 그러나 관찰하는 자, 다양한 고민과 욕망의 주체.


어떤 시기 이후의 작품들에서 그는 스크린 속 위치를 조금 달리 한다. 카메라에 담기면서도, 눈에 이런저런 것들을 담는다. 감독들은 그 ‘치명적인’ 분위기를 활용하기를 멈추지 않으면서, 이제는 ‘관찰되는 존재’에 더해 ‘관찰하는 존재’의 포지션 또한 부여한다. ‘이방인, 아웃사이더’의 이미지는 ‘다른’ 방식으로 발현된다. 보다 다채로운 욕망과 고민의 주체가 되고, 중심에서 벗어나기도 하며, 화면과 거리를 두고 타인이나 자신의 감정을 (때로는 시대를) 담는다. 배우로서 앞으로 걸어갈 길에 대한 고민이 얼핏 비친다. 이 글에서는 그 포인트를 <생 로랑>(2014)으로 보았다.


감정과 심리를 전면에 드러내어 돋보이고 싶은 욕심이 들지 않았을 리 없을 역할인데도, 가스파르 울리엘은 때로 한 발짝 물러나 지켜보기를 택했다. (칠 년 전의 한니발은 표면적으로는 숨어 모든 것을 보는 듯 하나, 관객과 주위에 바라보아지기를 ‘바라는’, 존재이기도 했는데, 그 안팎이 뒤집혔다.) 타인과 공간을 공유하면서도 홀로 다른 공기를 형성하며, 작품, 모델, 욕망하는 대상, 때론 자기 자신을- 생각에 잠긴 눈으로 ‘낯설게’ 보곤 한다. 스크린 속 ‘관찰하는 눈’은 어느 정도 현실에도 있는 듯하다. 아래는 당해 인터뷰에서 피에르 니니 주연 <이브 생 로랑>에 대한 질문을 받자 그가 한 답이다.


“<생 로랑> 촬영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브 생 로랑>을 봤다. 매우 긴장한 채 극장에 도착했던 게 기억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작품이 아주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안도했던 것도. 각각의 비전을 가진, 절대 겹치지 않을 두 영화였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는, 두 작품이 각각 존재 이유를 지녔다고 할 수 있겠다. 어쩌면 이게 생 로랑처럼 아이코닉한 인물의 다양한 면을 기리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피에르 니니는 매우 훌륭했고, 그가 드러낸 부분과 내가 결정한 방향이 꽤 달라서 마음이 놓였다.


<이브 생 로랑>이 더 클래식하고, 피에르 니니의 연기가 보다 정확하다. 목소리와 태도에 있어 생 로랑에 더 가깝다. 내 경우는 매우 초기 준비 단계에서 현실과 거리를 두기로 결정했다. 결국에는 캐릭터가, 내 성격의 깊은 곳으로부터 나온 것 같다. 어느 순간, 캐릭터를 풍부하게 하기 위해, 내 지각과, 감정과, 기억과, 삶의, 저 깊은 곳을 들여다볼 수 있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 가스파르 울리엘, 2014.12.16, interview by. Miriam Bale [indiewire.com]


<생 로랑>(2014). 다음 영화.


그해 세자르 영화제 주연상은 피에르 니니에게 돌아갔지만(위 인용에서도 서술되었듯 확연히 다른 작품이었고, 연기 ‘대결’이 아니었음을 다시 강조한다.), 2년 후 이 영화제는 가스파르 울리엘을 조명한다. <단지 세상의 끝>(2016), 루이는 ‘집 안의 이방인’이다. 화제나 분위기를 이끄는 대신 ‘반응’하거나,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한다. 가족들에게 끊임없이 ‘관찰되며’ ‘짐작된다’. 그러나 더 정확히는, ‘관찰한다’. 눈치를 살피며 상대의 속내와 감정을 파악하려는 듯도 하지만, 결국 피하려는 듯- 쏟아지는 말들을 ‘듣기’보다는 ‘본다’. 때로 낯익은 물건 앞에서 가만히 기억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대사와 감정으로 꽉 차 있는 작품, 유독 단독적 얼굴 클로즈업이 많은데, 감독은 다른 이들에겐 끝없는 대사를, 루이에겐 침묵을 배치했다. 대사는 대개 단답, 감정은 분출되기보다는 눌린다. 말하는 것은 그의 눈, 뺨, 목, 어깨, 손, 발걸음이다. 때문에 관객은 그 끝에 흘러나온 심리를 짐작하려 애쓰며 이입하게 된다.


그럼에도, 좀처럼 그와 관객 사이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가스파르 울리엘 역시 루이처럼 뒤로 물러나, 주변 사물과 사람을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호흡했다. 개성 강한 마스크이나 누구와도 무리 없이 어울려, 주위를 먹어치우는 대신 서로를 돋보이게 하는 방향으로 연기를 피워냈다. 폭발시키기보다는 안으로 눅이며, 공기 중에 넘쳐나는 감정의 조각들이 얇은 피부를 뚫고 들어오기라도 하듯 고요히 동요한다.


<단지 세상의 끝>(2016). 다음 영화.


<또 다른 시간>(2019) 속 뱅상 역시 루이처럼 말을 ‘응시하는’ 존재이며, 이쪽과 저쪽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이다. <인게이지먼트>나 <네가 모르는 세상>에서 ‘찾아지거나’ ‘사라지는’ 역할이었던 그는 이번엔 ‘찾고’ ‘갈망하는’ 주체로 등장한다. 작품 초반 뱅상은 이 집 저 집을 오가며 사람들과 대화하는데, 그들이 말하는 내용을 ‘듣기’보다는 표정이나 입을 관찰한다. 이후 솔직히 털어놓기도 하지만,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동생 뿐이기에, 항상 붕 떠 있다. 타인과 -그토록 갈망하는 연인과도- 완전히 마음을 나눌 수가 없고, 소속감을 느끼지도 못한다.


이쯤에서 언급해야 할 작품이 쥐스틴 트리에의 <시빌>(2019). 가스파르 울리엘의 최근 필모그래피에서 살짝 ‘예외적인’ 작품이다. 이고르는 <몽펭지에 공주>의 마리처럼 세 사람에게 욕망 되는 객체이자 그들을 욕망하는 주체이나, 작품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마리보다는 오히려 당시 자신이 연기했던 앙리에 가깝다. 게다가, ‘관찰되는 대상’도 딱히 아니다. ‘치명적 매력이 특징이나 캐릭터적 매력은 없다’. 고민하며 변화할 ‘필요가 없는’, ‘그래도 되는’ 권력을 지닌 남자 이고르- ‘배우’이나, 배우 가스파르 울리엘과 ‘가장 닮지 않았을 듯한’ 인물이다. 기능적이고 전형적인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화면의 중심을 두 여성에게 넘긴다. 서사 안에서 차지하는 입지는 좁지만, 작품 세계는 오히려 넓어졌다고 할 수도 있겠다. 여성의 다양한 욕망을 다루는 이야기들이 점점 더 주목 받는 시대에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앞서 언급한 <원 네이션>에서와는 다른 방향으로 ‘여성’을 ‘보조’하며, 이번에는 기꺼이 ‘관찰자’나 ‘이방인’의 포지션, ‘입체성’마저 포기한다. 어쩌면 스크린 속의 본인이 ‘특별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시빌>(2019). 다음 영화.



‘관찰자’와 ‘이방인’. 그리고,


오랫동안 ‘관찰되는 자’, ‘특별한 존재’였던 그가, ‘이방인’의 영혼을 간직한 채 ‘관찰하는 자’의 위치로 서서히 이동해 작품과 연기의 깊이를 더해 온 역사는 흥미롭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 2010년, 샤넬 커머셜 필름 속 헥토르. 그는 수많은 카메라에 둘러싸여 있다. 빈틈 없는 관찰의 울타리 속에서 이미지를 ‘관리’, ‘연기’하는 대신- 터지는 플래시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리거나, 커다랗게 뜬 눈을 굴리며 ‘피하고 싶음’을 숨기지 않는다. 끝에, “I’m not gonna be that person I’m expected to be anymore.더 이상 당신들이 기대하는 사람이 되지 않겠어.”라며 그곳을 빠져나간다.


https://youtu.be/nW335RrXUDM

샤넬 커머셜 필름 2010.


“샤넬은 프랑스의 위대한 패션 하우스지만, 처음에 제안을 받았을 땐 망설였다. 패션 캠페인을 하는 게 내게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였다. 난 브래드 피트나 제라드 드파르듀랑 다르다, 그들은 이미 배우로서 자신을 정립하지 않았나- 난 그냥 시작하는 단계다. 배우이기에 앞서 샤넬 모델로만 알려지고 싶지 않았다.”

- 가스파르 울리엘, 2011.07.11, interview by. Ella Alexander [vogue.co.uk]


결과적으로 이 커머셜이 포착한 가스파르 울리엘은 ‘모델’보다는 ‘배우’였다. 광고 컨셉이기는 하나, 이 인물은 현실 속 그와 닿아 있다. 마틴 스콜세지가 끌어낸 것은, ‘젊은 나이에 스타가 되고도 카메라 한가운데에 서고 싶어하지 않는 아웃사이더’다. 주목과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감내하며 고민과 갈등의 과정을 거쳐 결국 제 발로 걸어나가며 ‘기대를 저버리기’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더 이상 ‘관찰되기만 하는’ 위치에 머무르지 않겠다는 듯이.)


이번엔 2018년, 스티브 맥퀸의 샤넬 커머셜 필름. 회의를 하던 헥토르는, 테이블에 널려 있는 제 화보컷들이 갑갑한 듯 자리에서 일어난다. 유리벽을 통해 반대편을 ‘바라본다’. 이어 밖으로 나가, 광고판에 걸린 자신을 ‘바라본다’. ‘갇혀있던’ 스타는 탈출해 거리에 섞이려 하지만, 여전히 ‘이방인’임을 깨닫는다. 배회하다, 돌연 물 속으로 들어가 헤엄친다. 두 커머셜 다 포인트 컬러는 푸른색, 감독들은 그에게서 ‘블루blue’를 본다. 깊이 침잠해 들어가는 선명한 블루가 아닌, 자신/현재와 거리를 두고 싶어하는 종류의- 잔잔한, 어두우면서도 메탈릭한 쉐이드가 있는 블루다. 유사한 데가 있으면서도, 정면으로 맞서 ‘기대’를 따르기를 거부했던 그때와 도달하는 지점이 다르다. 삽입곡은 데이빗 보위의 ‘Starman’. 유일하고 특별한, ‘외계인’적 정서가 뚜렷한 곡이다. 주목을 피해 한 걸음 물러난 곳에서, 세상과 자신을 낯설게 보기를 시도하며, 여유와 균형을 지닌 채 저만의 자유를 찾아버린다.


https://youtu.be/tgetStLp1PU

샤넬 커머셜 필름 2018.



 그리하여 <한니발 라이징> 이후 십오 년, 다시 (영어를 쓰는) ‘빌런’으로 돌아올 그를 기다렸다. ‘코스튬을 입고 자정에 나타나 예술 작품을 훔치는 도둑’이라니, 이 배우에게 너무도 완벽하게 어울리는 역할 아닌가. ‘미드나잇 맨’은 오히려 본문 초반에 설명한 -미스터리한/양면성 있는/관찰되는-자에 가까울 것으로 예상되나, ‘관찰하는 자’의 시기를 거친 그가 완성한 ‘빌런’은 어떨지. 오스카 아이작과의 대립 ‘케미’, 후에 달라질 수도 있을 관계성, 어쩌면 말해 줄지도 모르는 과거사 같은 것들을, 안타깝고 설레는 마음으로 관람하려 한다. 알 것 같으면서도, 예측하기 힘들다. 그는 늘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더 이상 당신들이 기대하는 사람이 되지 않겠어.”, 십이 년 전 광고에서 가스파르 울리엘은 말했다. 관객의 손에서 빠져나가 스크린과 카메라의 경계에 발을 살짝 얹고 자신과 타인을 들여다볼수록- 그 눈빛의 깊이는 점점 더 아득해졌다. 십이 년 후의 그는 어떤, 얼마나 깊은 존재가 되었을까. 오지 않을 미래가 그립다.


<단지 세상의 끝>(2016) 비하인드 컷. 다음 영화.



* 참고 인터뷰


https://www.google.co.kr/amp/s/www.indiewire.com/2014/12/gaspard-ulliel-on-becoming-saint-laurent-and-kissing-louis-garrel-2-66931/amp/


https://www.google.co.kr/amp/s/www.vogue.co.uk/article/gaspard-ulliel-interview-chanel-and-the-princess-of-montpensier/a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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