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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May 20. 2022

에이타의 '좋은 사람들'(2)

에이타 in 사카모토 유지의 세계 (2)

    


* 이전 글에서 이어집니다.

 

에이타 永山瑛太 in 사카모토 유지의 세계 (2)


<그래도, 살아간다(それでも、生きて行く)>(2011, Fuji TV)

<최고의 이혼(最高の離婚)>(2013-4, Fuji TV)

Feat. <미스터리라 하지 말지어다>(2022, Fuji TV)


* 위 작품들의 구체적인 장면과 핵심 전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남의 불행을 자기 불행처럼 슬퍼하고, 남의 행복을 자기 행복처럼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야.”

“자기 장점을 잘 모르더라, 그런 점이 좋지만.”

하마사키 미츠오에 대한 유카와 아카리의 말이다. ‘그이의 장점’에 대해 대놓고 언급하는 장면은 후카미 히로키에게 역시 있었다. “당신의 장점을 아주 많이 알고 있어요.”, 헤어지던 날 후타바의 대사다.




하마사키 미츠오와 후카미 히로키는 닮았다.


히로키와 미츠오의 차이는 주로 미츠오의 특수한 예민함과, 히로키의 특수한 상황에 있다. 차이의 요소를 분명히 짚어낼 수 있다는 건 그 나머지가 상당히 닮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미츠오는 어쩔 수 없는 밉상이고 히로키는 의심의 여지 없이 ‘좋은 사람’ 이지만, 어쩐지 둘은 다른 타임라인의 동일 인물인 듯도 하다.


에이타가 이들을 소화하는 방식 중 하나는 ‘폼’의 포기다. 패셔너블과는 거리가 먼 핏의 수트와 안경, 늘 입는 누빔 재킷. 드물게 안경을 벗고 유행하는 헤어를 하고 나타나서도 그런 스스로를 못 견뎌하며 짜증을 내는 자, 하마사키 미츠오. 그에게 나름 고수하는 스타일이 있다면, 개인적인 취향을 형성할 심적 여유가 없었던 히로키의 스타일은 첫 화의 더벅머리가 말해 주듯 ‘신경 쓰지 않음’에 가깝다. 그러나 딱히 ‘달라질’ 생각은 없다. 사츠키에게 “나랑 있으면 부끄럽지 않냐”고 물었던 것은 제 외모가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상대를 배려해서였을  테다. 핏과 컬러를 고려하지 않은 티셔츠에 늘 받쳐 입는 낚시 조끼, 무릎이 나온 반바지, 노란색 양말에 구겨 신은 운동화. 나름 데이트 복장이래봤자 티셔츠를 구깃구깃한 와이셔츠로 바꿔 입은 정도다. 멋이라곤 없는데, ‘스타일리시한’ 미츠오와 히로키는 그다지 궁금하지 않다. 전형적 ‘성적 매력’(강한 남성성이든 료와 같은 부드러운 남성성이든)을 전혀 드리우지 못하는 것이 의도치 않게 매력으로 작용한다. 그 ‘꾸미지 않은 꾸밈새’를 에이타는 능숙하게 소화한다. 단지 외모적으로 잘 어울린다는 게 아니다. 사소한 표현법/제스처와 함께 완벽히 인물의 분위기/시그니처로 만들었다.


물론 미츠오의 것이 절대로 더 ‘시그니처’스럽고, 자잘하게 튄다. 히로키가 하는-길바닥에서 동생과 컵라면을 나눠먹는 종류의- 행동은 미츠오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그건 히로키가 특별히 털털해서가 아니라 미츠오가 특별히 까다로워서다(원래 개인의 성향을 이런 식으로 평가하면 안 되지만 미츠오이므로 예외로 한다). 작품 초반의 히로키는 전혀 까다롭지 않은 대신 멍하다. 그러나 어설픈 움직임이나 ‘연기’를 못하는 성격, 올곧고 섬세한 됨됨이까지, 종종 미츠오가 겹쳐 보이는 부분이 있다.


긴장이나 화 등으로 인한 떨림이 그대로 묻어나는 목소리, 정신없이 울먹이며 언성을 높이기도 한다. 혼란스러울 때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이마나 정수리에 손을 얹거나,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곰곰 생각하다 갑자기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내는 모양도 비슷하다. 사소하게는 허리춤에 올려놓는 손, 이해가 되지 않으면 갸웃거리고 종종 가로인지 세로인지 알 수 없는 각도로 흔들리기도 하는 고개, 이가 드러나도록 활짝 웃거나 퉁명스럽게 비죽이는 입, 자주 힘이 꽉 들어가 있는 눈썹 따위가 있다. 닮아 있는 까닭은 연기하는 배우가 동일해서라기보단, 두 인물에 있는 유사성 때문이다.


다시 잠깐 이누도 가로를 데려오면, 그가 ‘내가 알던 에이타 같지 않았던’ 또다른 까닭은 눈썹을 가리고 있어서였다. 토토노의 머리카락 이야기에 반응하며 앞머리와 함께 올라가는 눈썹 근육에 비친 낯익은 민감함에서, 깨닫고 말았다. 배우를 더욱 좋아하게 만드는 디테일은 꽤나 다양한데, 에이타의 경우 그 중 하나가 눈썹의 움직임이었다는 것을. 만화적 요소가 다분한 세계 속 이누도 가로의 그것이 약간… 에이타적 모먼트, 배우가 지닌 표현법의 개성이었다면, 리얼한 세계 속 미츠오와 히로키의 몇몇 유사한 제스처들은 캐릭터의 성격과 개성이기도 했다는 뜻이다.


거짓말을 안한다기보단 ‘못’하고, 하더라도 얼굴에 다 드러난다. 순수하게 솔직하여 ‘연기를 못하는’ 인물들이다. 때문에 그들의 친절은 껍데기뿐인 예의일 수가 없다. 미츠오가 어쩔 줄 모르는 듯한 상냥함이라면, 히로키는 무심한 듯 사실 무지하게 섬세한 상냥함이다. 또한 그들은 관계와 진실을 똑바로 마주하는 이들이다. 남의 상처를 제 것처럼 새기고 먼저 손을 내밀던 미츠오처럼- 후타바를 만난 후의 히로키는 어머니가 자신과 타인을 갉아먹는 행동을 끊어내도록 설득하거나 미사키 가족을 선뜻 대면했고, 나중엔 후미야를 끝까지 믿으려 노력하기도 한다.


미츠오에겐 나르시시즘인 듯 자기혐오가 있고, 히로키는 언뜻 자격지심 속에서 사는 걸까 싶지만 저도 알아채지 못했던 곧은 중심을 지니고 있다. 미츠오가 ‘깨닫는’ 과정에서 그 됨됨이가 재발견된다면, 히로키는 처음부터 끝까지 ‘된사람’이다. 화난 채 뛰쳐나와서도 넘어뜨린 자전거를 열심히 다 세워 놓고 가는 이가 후카미 히로키다. 그에겐 본능적으로 무던하게 타인을 배려하는 태도가 있다. 예를 들면, 후타바에게 ‘엄마 일은 신경 쓰지 말라’면서 애매하게 찡그리고 훌렁하게 손을 저으며 발음에조차 아무렇지 않음을 묻히려는 듯 대강 말끝을 흘리는 것. 상대가 정말 괜찮다고 느끼게 만드는,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는 태도다.

  



후카미 히로키는 저도 모르게 좋은 사람이다.


미츠오는, 나름대로 꾸려 놓은 일상 속에서 이혼이라는 비일상을 경험하게 된다. 그의 남다른 가치들은 주로 그 일상이 어긋나는 ’특수한’ 상황들에 발휘되었다. 보편과 특수를 가르는 기준은 절대적이지 않다. 물론 ‘동생이 살해당했다’는 경험을 ‘보편’으로 보기는 힘들지만, 여기서 히로키의 상황을 특수하다고 봐야 하는 까닭은 그 자신이 ‘남들과 같은 것을 누릴 수 없다’고 인식하고 있어서이기도 하다. 의식을 하건 않건 ‘자격이 없다’는 느낌에 지배당하며 그날을 계속 떠올리는 동시에 외면했다. 후타바와 함께 과거를 직면하며 오히려 ‘남들 같은’ 생활과 행복을 꿈꾸게 된다. 그가 지닌 가치들은 그 비일상과 일상의 경계를 가르기 힘든 모든 순간에 발견된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잠시 동안 히로키가 보이는 확신에 찬 분노는, 단순한 복수심이 아니라 복합적인 의문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화도 효과적으로 내지 못해 새된 소리를 더듬으며 삿대질을 하거나 무작정 달려들다 넘어지곤 하는 히로키. 왜 그는 칼을 품은 채 돌진해도 위험해 보이지 않는 걸까. 왜 그 크기를 가늠하기 어려운 아픔이 남을 해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으리란 확신이 드는 걸까.


미사키를 만난 히로키는 단호한 투로 반복해 상대의 사과를 막는다. 화를 표시하려는 게 아니다. 의미 없는 말이라 여겨서다. 분노를 누르며 묻는 데에 집중한다. 눈은 확장되어 번들거리고 떨리는 목소리엔 어이없다는 웃음이 배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웃들이 (주제넘게도) 미사키를 비난하자, 가라앉아 제가 어쩔 줄 몰라한다. 아무렇지 않게 뱉는 ‘후미야를 죽여도 되냐’는 물음엔, 진짜 살의보단 (스스로 정말 죽이고 싶은 거라 여기더라도) 상대를 깨닫게 하려는 의도가 읽힌다. 그는 저도 모르게 그만큼이나 현자다. 후미야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안 직후에도 화보단 ‘사람이 또 다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더 비쳤던 사람이다.  


‘힘내라’는 부장을 저도 모르게 때렸다던 미츠오처럼, 히로키의 사람됨은 종종 ‘몸이 먼저 나가는’ 순간에 있다. 망설임 없이 달려가 물에서 후미야를 건져낸 히로키. 절규하는 후타바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죽이려는 목적으로 가져온 칼을 꺼내 후미야의 손에 감긴 테이프를 끊는다. 울분을 쏟아내며 심장을 압박해 결국 살려낸다. 왜 살렸냐는 물음에 잘 모르겠다고 답한다. 멍한 듯한 눈에 이내 초점이 돌아온다. “잘 모르겠지만… 후미야를 믿어 보려고요.”그가 사람의 마음을 믿는 바탕에는 몹시 바르고 넓고 선한 그 자신의 마음이 있다.


이내 히로키는 후미야를 설득하려 고요하게 진심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나직한 목소리에 누르고 또 누르는 감정이 감지된다. 말이 진행됨과 함께 점점 올라오기도 하지만 이내 진정하고 중심을 잡는다. 자신을 좀처럼 보지 않는 상대와 눈을 맞추려 끊임없이 시도한다. 물기와 빛이 번들거리던 그 눈이 갑자기 내리깔리고, 돌연 완전히 가라앉아 다른 이야기를 시작한다. 흔들리며 움직이는 눈동자에 확신과 진심의 무게가 있고, 그 초점은 상대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있다. 마지막 순간 분노나 슬픔조차 사라진 듯 벅차 후미야의 손을 잡는데, 결국 진심이 전혀 전달되지 않았다는, 그게 제 탓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고 만다. 화는 내지 않는다. 다만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린 채 굳어 있다. 이내 잘못 나온 샐러드를 퍼먹기 시작한다. 마구 먹으며 마구 소리내 웃는다.


그러했음에도, 히로키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후미야에게 손을 내민다. 후타바에게 “저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죠?”라고 묻기도 했던 그는 자신을 종종 부끄러워했다. 스스로를 자주 깎아내리던 후카미 히로키는, 사실 누구보다 좋은 사람이었다.


‘히로키의 장면’이 아닐 때도, 종종 배경에서 구겨진 채 울고 있는 에이타를 발견하곤 했다.(<프라이드>(2014) 속 조지 맥케이처럼-) 그가 오래된 책가방에서 아키의 얼굴을 기억해내는 장면이 있다.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있다가, 눈에 눈물이 고인다. 다급하게 재료를 모아 신중하게 연을 만든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고요한’ 얼굴이 보인다. 마구 달려 연을 띄운 그는 아키의 환상을 보고 미소 짓다 점점 그늘져 엉엉 운다. 히로키는 종종 그렇다. 웃다가 멍해지고, 그러다 분노 혹은 슬픔이 치밀어올라 울다 진정한다. 눈과 입이 벌어진 채 뭔가를 열심히 떠올리다 아파한다. 확신에 차 있다가도 흔들린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다 갑자기 끓어올라 언성을 높였다가 끝에는 참고 꾹 누르는 등- 한 문장의 대사에 복잡한 감정의 흐름이 투명하게 드러난다.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은 시청자가 감히 다 이입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에이타는 때로 일관되지 않은 정서를 섣불리 수렴시켜버리거나 표현력을 과시하듯 화면에 들이밀지 않았다. 그 컴플렉스함을 체화해- 무던한 듯 매초를 세세하게 느끼며 보는 이들도 히로키의 마음에 약간이나마 닿을 수 있게 도왔다.




후카미 히로키와 토야마 후타바의 순간들


그 무해한 웃음과 우물쭈물하는 실루엣 때문이었을까? 아카리를 만나 설레하며 문자를 주고받아도 어페어의 느낌이 나질 않던 미츠오처럼, 십오 년 전 빌린 포르노 비디오를 발견하고 부끄러워하거나 연애를 해 본 적이 없다면서 내외를 무지막지하게 하는 등 전형적 ‘미성숙한 남성성’을 종종 드러내는데도, 히로키는 딱히 남자/소년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오히려 ‘좋은/순수한 어른/사람’으로 다가온다.


마땅히 놓을 데가 없는 커피 포트를 물이 끓을 때까지 공손하게 들고 있으려는 히로키, 물을 붓기 전 볶음면의 소스를 부어 버린 후타바, 첫날부터 이들이 함께하는 순간은 심상찮게 매력적이었다. 어느 정도는 그러한 경험과 감정이 처음인 탓도 있다. 히로키는 더벅머리를 긁적이며 안면은 굳은 채 방어적인 톤으로 빠르게 말을 늘어놓는다. “연어 맛은 생각도 못 했다”는 게 굉장히 죄송한 일인 듯 주눅 들어 사과한다. 타인의 존재가 어색하여 의식하지 않는 척 내내 의식하고 있는데, 그 와중 상대의 상태를 걱정한다. 이후 자신들의 탓이 아닌 까닭으로 필수적인 갈등을 겪지만, 이내 그 사이엔 애정어린 아련함이 자리하고, 종종 ‘라면 물 끓이기’ 장면 같은 엉뚱한 공기가 맴돌기도 한다.


“아키의 얼굴이 기억이 안 나요.”라며 어쩔 줄 몰라하는 히로키에겐 ‘이미 무리’라는 뉘앙스가 있다. 반쯤 포기한 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에겐 죽은 동생의 이야기를 낯선 이에게 늘어놓아버리는 무방비함이 있다. 허나 본인의 말처럼 처음부터 후타바에게 까닭모를 동질감을 느껴서이기도 하다. 히로키는 십오 년 전에 멈춰 있는 상태였다. 의문과 죄책감을 가슴에 얹고 하루하루를 흘려 보냈던 그에겐 후타바와 함께 찾아온 감정의 가능성이 새롭다. ‘미츠오의 좋아하는 동물 베스트 10 적기’ 같은 취향을 구축할 겨를이 없었기에, 히로키의 사소하게 매력적인 순간들은 주로 후타바와 맞물려 완성된다. 거기서 하마사키 미츠오가 탄생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들의 모먼트는 독특하고 무해하다.


사츠키를 대하는 태도에 역시 후타바를 처음 만난 날의 어색한 조심스러움이 있지만, 예의와 고마움- 딱 그 정도지 후타바가 놀렸듯 ‘쑥스러움’은 아니다. 무신경 역시 아니나 눈치 빠른 사츠키가 알아챌 정도의 사적 무관심. 그래서 다시 첫 화를 돌아보면, 후타바와는 그 외의 ‘뭔가’가 있다는 걸 새삼 느낄 수 있다. ‘정체’를 알게 된 후 한 번 부딪히고 나서 점점 편하게 대해도, 여전히 그 ‘뭔가’는 존재한다.


인상을 쓰고 있어도 후타바를 보는 눈엔 화보단 의문이 묻어나고, 화가 앞섰다가도 금방 연민과 공감이 자리한다. 껄끄러워는 해도 예의를 지키고, 거리를 두면서도 친절하게 대한다. 숲에서 격한 고성으로 내지르는 위협에조차 울음이 잔뜩 섞인 응어리가 있었고, 결국 정신을 차리고 (내가 무슨 짓을 한거지) 힘이 빠져버렸다. 이후 오히려 후타바를 위로하기도 하는 그의 정서엔 ‘참는’ 뉘앙스가 전혀 없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배려고 걱정이다. 그늘을 감추지 않아도 되어 한결 편안해진 듯 속내를 조용히 털어놓기도 한다. 낯선 타인을 대하는 어색한 조심스러움이 사라진 곳에 나직하고 차분한 솔직함이 들어섰다.  


“당신을 원망하는 마음이 생길 만도 한데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아요.” 머뭇머뭇 말하고,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는다. ‘이해할 수 없다’ 혹은 ‘대단하다’는 감상이 뒤따를 법한 말인데, 사실 히로키에겐 ‘별 것 아닐’지도 모른다. 동생을 살해한 건 후미야지 후타바가 아니고, 히로키는 후타바라는 ‘사람’을 ‘가해자’라는 단어에서 떼어놓고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계속 마음을 쓰는 건 후타바가 가해자의 동생이라서, 처음 만난 날 느꼈던 대로 어느 정도 ‘같은 것’을 겪어왔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라서다. ‘피해자 가족이라서’, 그리고 ‘후카미 히로키라서’ 쓸 수 있는 마음이다. 히로키는 의도를 의심하지 않고 기꺼이 후타바가 내민 손을 잡고 함께 의문을 풀어나간다. 서로의 가족을 만나고 과거와 현재의 사건에 얽힌 진실들을 마주하며 점점 마음을 쌓는다.


칼을 들고 후미야를 따라간 후타바를 기어이 찾아낸 히로키는 억장이 무너지는 듯 입을 내밀며 “당신이 혼자 짊어지려고 하는 게 화가 난다”고 내뱉는다. 그것이야말로 히로키가 후타바에게 내는 가장 진짜 ‘화’. 괴로워하는 상대를 보며 무겁게 눈을 내리깔고 한숨을 내쉰다. 후타바가 아프면 자신도 아픈데, 결국 완전히 같은 것을 느낄 수는 없기에 섣불리 위로하진 못한다. 서로에게 “내가 살인자가 되는 것보다 당신이 되는 게 더 싫다”고 말하는 두 사람. 그들이 처한 상황은 드물지만, 그들의 성정 역시 그렇다. 그리도 솔직하게 털어놓고 배려하며 진심을 나누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너무나 세상에 없는 ‘선’을 지닌 사람들이었기에 서로를 알아봤던 것일 테다.


사실 이미 어떤 타이밍에 히로키는 고백 비슷한 걸 해 버렸다. 담백한 투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데로 가서 살고 싶다, 당신과 함께.”라고 중얼거렸다. 클리셰로 들리기도 하는 그 문장이 그토록 마음에 닿았던 것은 평범할 수 없는 관계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었지만, 그것을 뱉는 자가 히로키이고 에이타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마지막 화, 히로키는 잔뜩 쑥스러워하며 다시금 진심을 전한다. 후타바가 결정한 바를 이해하지 못하고 당사자 대신 억울해한다. “잊을 수도 있다”고 눈을 맞추고 고요하게 답한다. 아키가 덜 소중한 건 절대 아니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후타바가 무엇보다 소중하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울다 마구 달려나와 절박하게 데이트를 신청하고 또 해맑게 웃는다.


이제 히로키의 웃음 끝에 있는 그늘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있다. 끝까지 납득하지 못하지만 설득은 시도해도 화내거나 우기지는 않는다. 슬픔을 감추고 선택을 존중하려고 노력한다. 마지막으로 머뭇거리며 “안 가면 안 되냐”고 묻고는, 허공에 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입꼬리를 올리다 목이 메인다. 엉성한 미소와 손짓은 몹시도 순수한 동시에 아프다. 작별의 순간 상대를 거의 노려보며 우뚝 정지해 서 있던 히로키는, 갑자기 그러나 부드럽게 후타바를 당겨 끌어안는다. 무언가가 가슴속을 파고들기라도 하는 듯 입을 벌리고 눈물을 흘린다. 발을 밟고 서 있는 것도 모를 정도의 상태로 이별을 받아들이며-그러니까 결국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며- 히로키는 애써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다 결국 주저앉는다.  


후미야를 찾아가기로 한 까닭은 ‘후타바와 같은 목적지를 바라보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다. 어머니의 사진을 보고 엉엉 우는 후미야를 응시하는 차분하고 상냥한, 그리고 붉게 지친 눈.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히로키는 그제야 화가 올라오는 듯 마구 달린다. 아키의 살지 못한 삶도 떠올렸을 테지만, 아마 후타바의 남은 삶 역시 떠올렸을 테다. 작가의 입장에서 옳은 결말이 아니라 후타바의 입장에서 옳은 결말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역시 납득은 할 수 없었다.) 후타바의 ‘이미 정한 마음’을 표현하는 미츠시마 히카리의 연기와, 히로키의 ‘납득할 수 없음’을 표현하는 에이타의 연기, 그 사이에는- 절대 평범한 이별의 정서일 수 없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련하고 깊은 아쉬움과 아픔이 있었다.  


후타바를 대하는 히로키의 미소엔 동물 영상을 보는 미츠오의 그늘 없는 순수가 비쳤다. 자꾸 뭘 ‘밟았고’ ‘갈아 끼웠다’는 안부 묻기나, 주로 후타바가 엉뚱한 말을 하면 히로키가 에?하고 되묻거나 허허 웃는 대화들의 무해함에 목이 메이고 가슴이 아렸다. 결국 끝까지 말조차 놓지 못했던 ‘토야마 상’과 ‘후카미 상’. 편지를 쓰느라 숙인 머리 군데군데 보이는 때이른 흰머리들이 새삼스러웠다. 히로키는 그렇게 청춘을 누리지 못하고 늙어버린 것도 같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말하려는 듯, 작품은 십오 년 전 빌린 비디오를 반납하며 연체료가 얼마냐고 묻는 에이타의 세상 해맑고 상냥한 얼굴을 엔딩으로 택했다.




<최고의 이혼>(SP까지)의 엔딩은 유카에게 다시 한 번 청혼하는 미츠오의 편지다. 문장들에 미츠오다운 감수성이 절제된 채 정갈하게 묻어난다. 담담한 목소리, 쓸쓸히 걷다 갑자기 생각난 듯 편지를 쑥 넣는 손, 우물쭈물 웃음기가 묻어나는 입가, 토박토박 걸어가는 뒷모습. 이번에도 작품은 에이타를 엔딩으로 택했다.


‘서로 떨어져 있다고 해피엔딩이 아닌 건 아니’라는 사카모토 유지의 지론에 또다시 설득당하면서도 줄줄 울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후카미 상의 상냥함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요.”라는 후타바의 대사와 무관하지 않았다. 사카모토 유지의 ‘현실적으로 엉망이어서 안 예쁘지만 결국 아름다운 이들이 사는’ 세계 속에서, 에이타의 순수하고 어색하고 솔직하고 선한- ’좋은 사람‘들은, 서투른 듯 사려 깊은 솜씨로 타인의 마음을 보듬었고, 휘청대고 넘어지면서 작품의 중심을 잡았다. 하나도 안 멋져서 멋졌고, 제가 상냥한 줄도 몰라서 그 상냥함에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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