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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May 20. 2022

에이타의 '좋은 사람들'(1)

에이타 in 사카모토 유지의 세계 (1)



에이타 永山瑛太 in 사카모토 유지의 세계 (1)


<그래도, 살아간다(それでも、生きて行く)>(2011, Fuji TV)

<최고의 이혼(最高の離婚)>(2013-4, Fuji TV)

Feat. <미스터리라 하지 말지어다>(2022, Fuji TV)


* 위 작품들의 구체적인 장면과 핵심 전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까지만 해도 시리즈물의 대다수는 TV드라마였다. 구독자가 원하는 시간에 시청을 조절할  있는 OTT플랫폼과 달리 매화 시청자를 확보해야 하는 TV 세계에서 창작자들이 각본 설정과 연출을 ‘실험적으로하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을 테다. 특히 OTT플랫폼에서 선보이는 작품들에서조차 아직 이성애나 남성 가부장이 ‘노말 경우가 많은 일본이라면 말할 것도 없겠다. 소재가 신선한 편이어도 어느 정도 되풀이될 수밖에 없는 관계 구성 사이에서 돋보였던 , 캐릭터나 대사의 섬세한 디테일로 스토리를 살리는 각본의 힘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래도록 사카모토 유지는 유일했다. 그의 글쓰기는 ‘주류 시청자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선에서 다양한 관계와 가치들을 상상할  있게 했다.


사카모토 유지의 디테일한 캐릭터들은 배우의 얼굴을 만나 각자의 개성을 입었다. 작가가 캐스팅에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쓴 작품에 재출연한 배우들의 캐릭터와 연기에는 묘한 기시감이 있는 경우가 있었다. 그저 배우의 마스크나 인물과 관계, 대사를 구성하는 작가의 스타일 때문만은 아니었다. 가장 외면할 수 없는 유사성을 입고 등장한 배우가 2011년의 <그래도, 살아간다>와 2013년 <최고의 이혼>에서 주연을 맡은 (나가야마) 에이타였다. 그 사이 이곳저곳을 들렀다가 ‘히로키에서 미츠오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최고의 이혼>을 (여러 번) 보고 몇 년이 지난 후에야 <그래도, 살아간다>를 보았던 터라, 개인적으로는 ‘미츠오에서 히로키로 돌아왔다’는 느낌이었다.


오랫동안 각만 재보다 최근에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계기는 뜬금없게도 <미스터리라 하지 말지어다>였다. 주연 외의 출연 정보 없이 보기 시작했고, 실은 그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스트레이트 펌을 한 탈색모와 올블랙 착장 때문만이 아니었다. 입을 열고 나서도 특유의 웃음이 은근한 버전으로 드리워지며 보조개가 패이기 전까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그렇게 발견하고 나니- 이누도 가로가 미스터리하게 폼을 잡다 넌지시 심리를 드러내는 인물이라 알아채지 못했을 뿐 표현법이 아예 낯선 것은 아님이 감지되었다. 그런데도 히로키나 미츠오와 닮았다는 인상이 남지는 않았던 것이었다.  


어쩌면 그제야 히로키나 미츠오와 분리해 그를 배우로 떠올릴 수 있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조금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에이타의 연기가 얼마나 훌륭하고 섬세한가에 대해 감탄했다. 사실 그를 처음 만난 <최고의 이혼>에서 이미 깨달았던 바였다. 어쩌다 보니 이후 몇 년 동안 기억에 남은 그의 다른 얼굴은 마츠코의 더벅머리 조카(2006,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정도였음에도, 하마사키 미츠오의 기억은 에이타의 연기력과 매력에 대한 믿음을 내내 유지하게 해 주었다.




하마사키 미츠오는 성가시다.


‘기운이 없는 게 평소 상태인’, ‘늘 기분이 안 좋은’, ‘성가시고 귀찮은’ 남자 하마사키 미츠오. 그는 오프닝부터 끊임없이 말한다. 빠르고 성마르게 쏘아대다가 버릇처럼 괴롭다는 말로 마무리하는 모양이 매우 ‘없어 뵌다’. ‘띠꺼운’ 표정과 자세를 고정한 채 입만 움직이기도 하고, 반대로 뻣뻣하게 팔이나 고개 따위를 휘젓기도 한다. 저 혼자만의 에너지로 화면을 어수선하게 만들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불안하게 하고, 동시에 폭소하게 한다. 스스로를 우습고 하찮게 만든다. 안면 전체에 묻어 있는 짜증이 자잘하게 온몸으로 퍼져나가 종종 부들부들 떨며 움츠리기도 한다. 미츠오는 그 짜증의 원인을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문장들로 죄다 풀어낼 수 있는 사람, 화를 세분해서 내는 사람, 이름을 열 번 틀리면 열 번 고쳐 주는 사람, 말싸움 중에도 내내 설거지를 하거나 물건을 정리하는 사람이다. 종종 그가 말을 늘어놓고 있는 도중 장면을 끊어버리는 편집 역시 미세한 코미디 요소다.


어딘가 불편한 듯한 표정, 엉거주춤한 자세에 다급한 걸음걸이. 머리카락은 뻗쳐가지고선 윗옷을 잠옷 바지에 야무지게 넣은 채 이를 열심히 닦고 세면대도 깔끔히 닦은 후 신중하게 아침을 요리하는, 행복한 듯 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화분에 물을 주는 모습. 야구복을 입고 삐딱하게 서 있는, 공을 향해 필사적으로 달리(지 못하)는, 허리를 삐끗해 어정쩡한 자세로 길 한가운데에 정지해 있는, 지압을 받으며 아파서 몸 둘 바를 몰라하는, 굳이 일직선으로 걷다 휘청거리는…. 이렇게 나열하다 보면 거의 모든 장면을 언급하게 되는데, 사실상 미츠오의 모든 움직임이 극도로 미츠오스럽다.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고독사 환영’이라고 하거나, 힘없이 다리를 모으고 앉아 ‘처음으로 내가 귀찮다고 느낀 건 유치원생 때에요’라고 하는 등 쓰는 언어의 조합이나 거기 담긴 사고흐름 역시 유별나다.


사카모토 유지의 세계엔 종종 ‘특별히 까다로운’ 자들이 있다. <콰르텟>(2017)에서 그것이 네 주연 모두에게 다른 형태로 분배돼 있는 가운데 이에모리 유타카에게 특히 더 있었다면, <최고의 이혼>에서 그것의 담당자는 주로 하마사키 미츠오다. 다만 그의 레이다망에 늘 타인이 자리하는 것은 아니어서, 예민함이 종종 섬세하지 못한 형태로 표출되는 것이 ‘문제’다.


<최고의 이혼>을 서류의 관점(?)에서 요약하면, ‘하마사키 부부가 이혼신고서를 쓰고부터 우에하라 부부가 혼인신고서를 (다시) 쓰기까지의 과정’이다. 그러니까 결국… 미츠오와 료가 깨닫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미츠오에 대한 시청자의 정서가 달라지는 까닭은 일단 열과 성을 다해 반성하고 바뀌기 때문이다. ‘반성하는 남자’에 너무 관대해 온 것이 픽션의 역사이긴 하지만, 하마사키 미츠오는 예외로 봐 줄 수밖에 없다. 이 변화는 사람이 달라지는 ‘개과천선’이 아니다. 그에겐 이미 남들에게 없는 배려심과 공감력이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위악을 부리지 않고 내면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또 ‘순간의 기분을 진심으로 착각하여 필터 없이 내뱉지 않는’ 법을 배운다는 뜻이다. 그 변화의 스피드나 퀄리티가 남다른 것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서, 애초에 그 ‘가치’들을 내면에 가지고 있어서다. 주로 미츠오의 ‘성가심’에 초점을 맞추던 작품은 후반부 에피소드로 갈수록 그의 예민함이 타인을 배려하는 섬세함과 함께 발휘되는 순간의 비중을 더한다. 그렇게 첫인상을 절대 밉상으로 남기며 시작해 결국 그 까다로움마저 사랑하게 만든다. ‘좋아하는 동물 베스트 10’을 몰래 적는 등의 순수함에 빠져드는 거야 뭐, 당연하다.


미츠오는 “내가 바람피우지 않는 걸 넌 높이 사주지 않는다”고 투덜대거나, 여성혐오적 묘사를 줄줄 늘어놓기도 한다. 그러나 전자는 료의 바람에 대한 근심걱정에 정신이 팔려 한 말이었고, 후자는 인기 많은 료를 보고 괜히 심기가 뒤틀려 공격하듯 한 말- 이 문장들은 <미스핏츠>(영국 E4)의 네이선과 유사하게 사실 제 것이 아닌 언어를 아닌 줄도 모르고 그저 뱉어내는 것에 가깝다. 그가 유카에게 내는 신경질에 ‘아내의 도리를 않는다’ 따위 가부장적 뉘앙스는 없다(그래서도 안 되고). 그보다는- ‘내가 정리한 곳을 어지른다’, ‘문을 닫지 않는다’, ‘내가 선물 받은 과자를 다 먹었다’는 둥의, 제가 생각하는 ‘기본적인 인간의 도리’, 그러나 그 기준이 너무 까다롭고 어겼을 때의 반응이 과해서 ‘미츠오적인 도리’가 되곤 하는 것들에 의거한다. ‘고객’ 남성들과 어울릴 때도 ‘남성연대’의 느낌이 나지 않는(그래서 겉도는 느낌이 나기도 하는) 것은, 상대를 ‘동료 가부장’이 아니라 오로지 ‘고객’으로 최선을 다해 열심히‘만’ 대해서다. 무리와 어울리는 일 자체에 서투른 탓도 있지만, 그 역시 특정한 ‘농담’이나 ‘유희’를 즐길 수 없어서인 면도 있으리라 짐작한다.


어느 타이밍에 미츠오는 료에게, “결혼은 동성끼리 하는 게 더 맞지 않아요?”라고 묻는다. 애초에 성별의 문제가 아님을 본인도 알테다. 그리고 앞 문장은 이 대사가 성별이분법적이고 이성애규범적이라고 비판할 겨를도 없이 적을 수 있다(물론 비판은 해야 한다.). 무슨 말이냐면, 미츠오와 성향이 맞거나 적어도 ‘그대로 받아 줄’ ‘사람’이 상당히 드물다는 것이다.(료같이 그냥 무신경한 경우는 있다. 그들의 짧은 동거 역시 상당한 웃음 포인트.) 미츠오는 뭐랄까, 몹시도 ‘미츠오족’이라서 타인과 같이 살려면 결국 본인이 주로 맞춰야만 하는데, 그는 사실 의외로 마음만 먹으면 그걸 잘 해 나갈 수 있는 자다. 어쨌거나 이혼신고서를 쓰다 만 다음날 눈을 흘기면서도 습관대로 아내 몫의 오니기리를 식탁에 올려놓는 남편이니까.




하마사키 미츠오의 성가심은 귀하다.


자기 생활 면에서는 신경을 덜 쓸 수도 있는 미츠오가 신경을 ‘덜 쓰지 못하는’ 분야는 오히려 타인의 상태와 심리다. 제가 상처 받는 것보다 타인에게 상처 주는 걸 더 두려워한다. 거짓말을 못해서 남의 비밀이라도 알아버리면 전전긍긍. ‘신경 쓰지 말자’고 결심하면 ‘신경 쓰지 말자’는 생각에 신경을 써버리고 만다. 그 대가로 원형 탈모, 속쓰림, 구내염 등등에 시달린다. 료가 잊은 혼인신고서를 얼결에 떠안고 본인이 더 걱정하는 남자다. 사람의 감정에 둔해 보였던 미츠오는 사실, 몹시 여리고 세세하게 감각한다. 에이타의 감정이입 역시 그렇다. 완전히 ‘깨닫지’ 못했을 시기에도 헤어진다는 생각만으로 목소리를 떨고 눈물을 글썽였다. 유카를 떠올릴 때 저도 모르게 묻어나는 아련함, 하는지도 모르면서 잔뜩 표출하는 질투. 마구 쏘아대고 후회하고, 상처 받은 타인을 보고는 제가 더 아파서 어쩔 줄 모르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사과하는 사람. 물론 쏟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 ‘미숙함’을 변명으로 받아서도 안 되지만, 미츠오에겐 ‘가능성’의 흔적이 한가득이다.


그는 “그런 남자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는 아카리를 향해 “잘못한 것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진정성 있게 요청한다. 열심히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인상을 쓰고 눈을 굴리며 돌이키다, 어느 순간 안경을 벗고 생각에 잠긴다. 종일 고민하고 반성하고 또 어쩔 줄 모르며 사죄한다. 돌을 던졌다는 오해를 풀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누가 돌을 던졌는지’도 말해야 한다. 그래서 무기력하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리고 만다. 객관적으로 아카리 입장에서 판단하면 상당히 두려울 법한 상황인데, 미츠오가 ‘어떤 사람인지’ 아마도 잘 알고 있을 아카리가 화해의 제스처를 건네고 걱정까지 했던 건, 단지 ‘잘 지내기 위해서’만은 아니지 않았을까. 꼭 태엽이 풀린 장난감처럼 축 늘어져서 입만 겨우 달싹이는 미츠오를 시청자도 연민할 수밖에. 그 괴로움 역시 ‘타인의 일을 제 일처럼 느끼기에’ 생겼을 테다.


<최고의 이혼>에서 에이타가 소화해야 하는 대사량은 다른 주인공들에 비해 두세 배는 많아 보였다. 미츠오의 뇌가 처리하는 언어는 대강 남들의 네 배쯤 될 테고, 그 일부는 ‘벚꽃나무가 죄다 메구로강에 떠내려갔으면 좋겠다’ 혹은 ‘저 인간들이 유통기한 지난 육포를 먹고 쓰러지면 내가 다 구급차에 옮겨야 하는가’ 등의 ‘쓸데없는’ 것들이지만, 다른 일부는 남들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깊이에 닿아 있다. 때에 맞게 ‘본인은 심각한데 보는 사람은 코미디’로 가벼워지거나, ‘주변 공기를 모두 감동시키는’ 무게를 지니곤 한다. 늘 완전히 구분되어 있는 것은 아닌데, ‘보잘것없이’ 시작해서는 어느새 시청자를 눈물짓게 만드는 그 유연한 집중력이라니. 늘상 날카롭게 말을 줄줄이 뱉어내던 그가, 나직하게 톤을 내리고 천천히 말하거나 반대로 몹시 고조되어 울먹이며 ‘옳은’ 말을 하면 사람이 달라 보이기도 하지만, 그게 미츠오 본연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걸 에이타는 자연스럽게 설득해낸다.


그 모먼트들은 종종 이상하게 뻗쳐나가 ‘펑키 몽키 패밀리즈’ 따위의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형태로 표출되기도 하지만, 그 어설픈 태도가 오히려 마음을 움직인다. 긴장해 곤두서 있다가 조금이라도 흥분하면 삑사리가 나버리는 목소리마저 진정성의 증거다. ‘힘내라는 말은 말로 하면 안 되는데’ 이야기를 하며 힘내라고 말하고는 고개 숙여 사과했을 때, 아카리는 정말로 힘이 났다.


네 사람이 모인 자리, 아카리가 유카를 비난하자 미츠오는 떨리는 목소리로 자꾸 ‘아니야’를 반복하며 ‘내 탓’임을 어필한다. 꼭 유카의 억울함이 제게 치밀어 오르는 듯, 인상을 쓰고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있는다. 눈치 없이 끊임없이 울리는 료의 핸드폰을 빼앗아 던지…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두리번거리다 서랍에 주섬주섬 넣는다. 울음 사이로 열심히 미소 짓거나 거의 소리를 지르기도 하며 ‘가능했던 미래’의 장면을 그답게 묘사한다. 부들부들 떨며 가라앉았다가, 마구 웃다 울고 또다시 고개 숙여 사과한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세 사람도 시청자도,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다음번 미츠오가 ‘울분’을 토하는 순간은, 유카가 “당신이 콘노 상 아이의 아빠가 되면 되잖아?”라고 했을 때다. 그게 뭐냐고, 그런 게 아니라고- 갑갑해하고 속상해한다. 그리곤 또 홀로 가라앉혀 여전히 떨리며 “당신이 걱정돼서 전화했다”고 마무리한다. 미츠오가 신경질이 아닌 ‘화’를 내는 건 그럴 때다. 진심이 전달되지 않아 상대가 상처 받는 게 안타까울 때, ‘이게 아닌데’라는 감이 끓어오를 때. 그 ‘이게 아닌데’란, 내면에 있는 잣대 같은 거다. 아무 사람에게나 있는 건 아니다. 그렇게 진짜 감정을 다 무방비하게 꺼낼 수 있는 용기, 그리고는 또 금새 하찮아질 수 있는 능청 역시, 아무 배우에게나 있는 게 아니고 말이다.


이제껏 주로 타인과 함께하는 장면들을 묘사했지만, 미츠오의 가장 ‘무방비한’ 명장면 중 하나는 혼자만의 모먼트였다. 유카가 전화를 끊자 미츠오는 그대로 혼자 말을 잇는다. 끊어진 전화에 대고 붕 뜬 채 일상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다, 두 손이 내려가고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는다. 천천히 몸을 옮기고, 여리고 나직한 톤으로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때 전화벨이 울린다. 물이 고인 눈동자는 아직 그 ‘모먼트’에 걸쳐 있는 와중, 입술만 달싹여 대답한다. 머리카락이나 잠옷 매무새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긴장과 넋과 힘이 다 빠져나간 얼굴은 낯설면서도 솔직했다. 타인이 아닌 자신의 내면에 완전히 집중하는-몹시 개인적인 미츠오는 다른 의미로 귀했다. 그 폭에 감탄할 새도 없이 가슴에 스며드는 연기였다.



*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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