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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May 07. 2022

에단 호크의 “God’s Lonely Men”

Ethan Hawke as tortured martyr/pioneer



<퍼스트 리폼드(First Reformed)>(2017, 감독: 폴 슈레이더)

<문나이트(Moon Knight)>(2022, Disney+)

Feat. <왓치맨(Watchmen)>(2009, 감독: 잭 스나이더)

 

* 위 작품들의 구체적인 장면과 핵심 전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God’s Lonely Men”은 본문에 인용된 인터뷰 중 오스카 아이작이 쓴 표현입니다.

 

 

대의추구형 빌런과 고통 받는 나르시시스트

 

<문나이트>, ‘악의 씨앗을 판단하여 벌하는 이집트의  암미트의 ‘목소리 알렉산더 대왕이었다는 설득력 있는 ‘반전 목격하며, 아서 해로우에게 느껴졌던 기시감 일부의 정체를 깨달았다. 파라오와 피라미드에 건배하던, “내가 유일하게 유대감을 느낀 사람은 알렉산더 대왕이라는 어록을 남긴, <왓치맨>  애드리언 바이트를  지금껏 떠올리지 못했는지 이상할 정도였다. 그의 정체성은 신념과 거시적인 목표로 구성되어 있었다. ‘인류 위의 존재 자신의 논리가 지구를 구하리라 여겼다.

 

그런 유형의 빌런들이 있다, 결과적 ‘선’에 집착하는. 구체적인 논리나 방법에는 차이가 있지만, 그들은 대개 자신에게 인간을 ‘관리할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사적 이익이나 세속적 권력은 추구하지 않는다. 본인이 믿는 정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폭력을 행사하고, 죄책감에서 면제된다. 이 금욕적이고 초월적인 인물들에 관객은 필연적으로 매혹되곤 한다. 애드리언 바이트가 음모를 꾸민 까닭은 세상을 ‘하나로 모으기’ 위함이었고, 아서 해로우는 세계의 ‘균형’을 이룩하려 했다. 그 과정에서 스타를 자처했던 바이트와 달리 제 목숨마저 버릴 준비가 돼 있었던 해로우에게, 나르시시스트라는 꼬리표는 언뜻 부당해 보인다. 그러나 ‘내가 짊어져야 한다’며 선지자를 자처하는 오만함은 나르시시즘이 아니던가. 영리하게 따지려 들거나 깊게 파고들수록 말려들기 쉬운 이들의 논리는, 오히려 가장 ‘보잘것없는’ 인간으로부터 반박될 수 있다. “그래서 당신들 모두 어린이 살해에 찬성하는 건가요?”라던 스티븐 그랜트처럼.



<문나이트>(2022). IMDB.


그러나, 해로우와 바이트는 사뭇 달랐다. ‘우월한 오지맨디아스의 계획대로 굴러가는 완벽한 세계’, 그 이상에는 논리와 이성만이 감지되었다. (적어도 잭 스나이더의) 애드리언에겐 고통이 비치지 않았다. <문나이트>의 오프닝은 문나이트가 아닌 아서 해로우의 몫, 그는 고통과 함께 등장했다. 밥 딜런을 들으며 주저 없는 손놀림으로 유리를 쪼개 샌들에 부어 넣고 발을 신중하게 밀어 넣는 일련의 동작은 경건하기까지 했다. ‘에단 호크가 <퍼스트 리폼드>의 톨러를 연기한 경험에서 영감을 받아 오프닝을 직접 구성했다는 사실’(에단 호크, [imdb.com])은 전혀 ‘놀랍지’ 않았다. 기시감의 나머지 반쪽은 거기에 있었다. 과연 해로우의 사고방식과 정서의 일부는 톨러와 닮아 있었다.

 

해로우의 계기는 콘슈의 아바타로 일했던 경험이었다. 신의 지시에 따라 죄를 지은 자들을 벌하며 괴로워했고, ‘악이 발생하기 전에 방지할 수 있다면’을 고민하게 되었다,가 그의 서사다. 톨러 역시 온갖 괴로움을 제 어깨에 죄다 얹는 자였다. 확신에 차 집단을 이끌었던 해로우와 달리, 톨러는 작품 내내 고민하고 속한 집단과 반목한다. 결국 악을 멸하는 선지자pioneer 대신 순교자martyr가 되기를 결심한다. 해로우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나, (자신이 믿는) 신의 뜻을-적어도 ‘신의 뜻이 아닌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고 여기며, 세상의 고통을 감히 다 짊어지려 한다는 점에서 역시 나르시시즘적인 데가 있다.


<퍼스트 리폼드 >(2017). IMDB.



해로우, ‘성공’하려는 ‘선지자’.

[Harrow the pioneer: “Save the planet kill all of them, maybe myself too.”]


해로우가 단지 잘 짜인 캐릭터 이상으로 다가왔던, 톨러의 사고과정과 정서를 이해할 수 있었던 핵심 키는, 베테랑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대배우 에단 호크의 존재감과 그들처럼 오만해지는 법이 없는 연기였다. 특유의 비음 탓에 방금 울고 난 듯한 습기를 풍기곤 하는 목소리에 든 것은 블루blue보다는 거대하고 아련한… 에고니agony에 가깝다. 여린 가운데 굳건한 심지가 있는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그 섬세하고 깊은 이마의 주름에 고뇌가 내려앉는 것을 목격하고 싶다는 욕심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곤 한다.


해로우는 세계의 고통을 해결할 방법을 찾았다고 결론을 내렸으므로 흔들리지 않는다. 신비하고 미스터리하지만, 컬트 리더이기 때문이지 딱히 숨기는 게 있어서는 아니다. 첫 등장부터 행동으로 성정을 암시했고, 생각하는 그대로 말했다. 앞에서는 유사성에 집중했으나, 망가지는 몸과 마음을 필사적으로 감추며 고민하는 톨러와, ‘망가졌broken’다가 고민을 끝내고 다시 태어났음을 전시하는 해로우는, 프로타고/안타고를 논할 것도 없이 캐릭터성이 다르다.


<문나이트>(2022). IMDB.


어쨌든 판타지 세계 속 ‘코믹 북 빌런’이기 때문에, 해로우에겐 공적인 자리에 있지 않을 때도 ‘일정한 태도/일종의 멋’이 있어야 한다. 에단 호크는 ‘독보적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데에 집착해 과장하지’ 않고, 오히려 톨러처럼 내면에 집중하는 방향을 택해, 그 아우라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도록 했다. 결정적인 요소 중 하나는 ‘말’, 늘 우아한 단어를 골라 서두르지 않고 씹어 뱉는다. 협박도 정중하게 들릴 정도다. 차분하게 내리깐 음성은 상대의 전신을 파고든다. 끓이듯 웅얼거려도 발음은 분명하고, 힘의 강약은 조절하지만 흥분은 거의 않는다. ‘내가 옳다’는 확신이 있으므로 힘을 과하게 줄 필요가 없다.

 

그의 목소리는 자주 잠기는데도 관리된 느낌이 든다. 끊임없는 갈라짐은 오히려 문장에 진정성과 설득력을 부여한다. 주로 나직하게 내보내다가 필요할 때 높이거나 떨어 매력을 첨가한다. 낯선 언어와 강렬한 발성으로 외는 주문보다, 상대를 자신의 논리에 감으려 늘어놓는 나긋나긋한 대사에 더 소름이 돋는다. 상체를 숙이고 눈을 치켜뜬 채 은밀하게 눌러 속삭이면 너무나 사적이어서 세상천지에 둘만 남은 기분이 들고, 그러다가도 배에 힘을 줘 권위적으로 내뱉으면(절대 소리를 지르는 법은 없다) 그는 공적인 위치로 멀어지고 별안간 주위가 눈에 들어온다.

 

<문나이트>(2022). IMDB.


눈물은 고여도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 서두르는 법 없는 걸음걸이. 샌들에 담은 유리조각에는 전시하려는 의도가 없다. 그것을 밟아 세상의 고통을 체화해 제 균형을 맞추어야 하므로, 한 걸음도 가볍게 떼어서는 안 된다. 최대한 천천히 무게를 새기며 발을 옮긴다. 눈썹은 주로 팔자로 굳어져 있어, 대개 초월적인 슬픔이 묻어난다. 그 말투, 움직임, 떠오르는 표정의 조합은, 본능적으로 계산된 바인 동시에 내면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무장을 해제하게 만드는 평상시의 유쾌한 상냥함부터, ‘심판’을 전할 때의 기이한 비장함에 이르기까지. 감격에 찬 함성, 생명이 빠져나간 몸을 쉽사리 놓지 못하는 손짓, 우수에 찬 눈빛은, ‘관객’을 위한 과장은 들어갔을지 몰라도 전부 진심이다. 다시, 그 진심은 가장 효과적인 공연으로 전달되어야만 한다. 그래야 저들이 자신을 따라 새 세상의 일꾼이 될 것이므로.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던져 라일라의 마음을 휘저어놓거나, 마크가 ‘broken man’임을 주장할 때마저, 해로우는 저들의 혼란과 아픔을 연민하는 듯 보인다. 심지어 총을 쏘기 직전에도 고요한 안타까움이 묻어나는데, 죄책감은 없다. ‘내 탓이 아닌’ 것이다. 제가 든 지팡이의 ‘심판’에 타인의 생명이 사그라든 것도, 마크를 ‘살해한’ 것도, 모두 저들의 탓이다. 끝에 종종 덧붙이는 “I hope you find closure.” 따위의 문장은 형식적 인사말 이상이다. 거기엔 ‘내가 만들 세상만이 당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암시가 숨어 있다. 절대 신이 되려 하지는 않지만, 해로우의 태도는 이미 ‘신’을 자처한다. 신의 아바타들 앞에서도,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있으나 딱히 주눅 들거나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동등한 위치로 인식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문나이트>(2022). IMDB.


해로우의 ‘방법’이 예상만큼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상대는 스티븐. 컬트 리더의 일상적인 비장함과 진지함이 이 기념품 판매원...이 아니게 된 자의 ‘자그마한’ 태평함과 순수함에 튕겨나가는 모습은 꽤나 흥미롭다. 먼저 박물관, 해로우는 완벽하게 부드럽고 강압적인 리듬으로 속삭이는데, 스티븐에겐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의사(혹은 정신머리)가 없다. 먹히지 않는다. 훌륭한 코미디다. 그러나 바로 이어, 공기에 서서히 심각한 긴장이 차오른다. 해로우는 소리를 더욱 늦추고 서서히 곁으로 파고들며 자연스럽게 상대를 손에 넣고, 점점 스티븐의 공포는 무거워진다. 컬트 아지트 식당 씬도 유사한 흐름이다. 오스카 아이작은 그 ‘하찮음’을 깨뜨리지 않은 채 두려움에 떨거나, 떨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던지고, 에단 호크는 그 ‘아우라’를 유지한 채 묘하게 태도를 바꾼다.


마크의 뇌가 창조한 세계 속에서, 해로우가 정신과 의사라는 설정은 꽤나 그럴듯하다. 그러고 보면 현실 속 해로우의 수법은, 심리 상담을 가장한 세뇌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닥터 해로우’는 ‘보통의 인간’이다. 마크를 타인으로 존중하며 적당한 거리를 두고 연민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흥미로워한다. 때로 얼굴을 붉히며 동요하기도 한다. 그는 해로우가 아니라 마크의 정신 일부가 형상화 된, ‘과거를 마주 봐야 한다’는 무의식이 반영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퍼스트 리폼드> 초반, ‘희망을 설파하는 평범한 성직자’인 척이라도 할 수 있었던 톨러와 닮았다.


<문나이트>(2022). IMDB.



톨러, 실패한 순교자.

[Toller the martyr: “Save the planet kill…. whom? maybe only myself.”]

 

<문나이트>의 오프닝은 해로우의 고행이 열었다고 앞에 언급했다. <퍼스트 리폼드>의 오프닝은 톨러의 일기다. 주인공이자 화자, 세계의 관찰자인 그가 일기에 적지 않거나 못하는 것들이 관객에겐 보인다. 그 복잡하고 어두운 내면을 에단 호크가, 인물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깊이까지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까지- 은근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해로우의 영감을 톨러로부터 받았음을 숨기지 않았듯, 그는 굳이 두 인물의 ‘성직자 톤’을 아주 달리 하려고 애쓰지 않았는데, 그 유사성이 외려 차이를 두드러지게 했다.

 

마이클이 죽기 전, 그와 이야기하는 톨러에겐 확신이 있었다. 눈에 힘을 주고 부드럽지만 강하게 밀어붙이며, ‘설교’하는 투로 말을 늘어놓았다. 첫 단어를 살짝 더듬거나, 의문문이 아님에도 끝 단어를 묘하게 올리는 등의 말투, 차분한 손놀림은, 능숙하고 효과적이면서도 계산적이지는 않다. 말을 상대의 뇌에 스며들게 하는 해로우와 달리 톨러는 단지 열정적으로 주장할 뿐이다. 제 비극을 늘어놓는 그에겐 희한한 과시욕이, 논쟁에서 이기려는 인간적이고 치졸한 욕구가 비친다. 해로우라면 차분하게 ‘진심으로’ 사용했을 듯한 방법이다. 그러나 톨러의 의식 한구석은 이미 후회하고 있다. 용기와 희망 같은 것을 언급하며 설득을 마무리하는, 그 말끝이 흔들린다.

 

<퍼스트 리폼드 >(2017). IMDB.


톨러는 성직자의 역할만 하지 않는다. 교회를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업무’를 전부 한다. 기념품을 팔고, 건물을 관리하고, 행사를 기획하고 준비한다. 큰교회 목사와 대화할 때 그에겐 미묘한 위화감이 있다. 웃고 싶지 않은 말에 웃고, 억지로 눈을 맞추며 고개를 돌려버리지 않기 위해 입을 모아 힘을 준다. 그러다, ‘기념품 가게’라는 말을 입에 올린다. 들릴 듯 말 듯, 그러나 분명한 발음으로 속삭인다. 교회의 기업화를, 그 일부인 자신을 부끄러워하면서, 그것을 꽁꽁 감추어놓지는 않는다. 기어이 수치심과 그늘을 드러내고 만다.

 

그러나 톨러는 자신의 ‘망가진’ 상태에 대해서는 필사적으로 숨긴다. 일상적으로 술을 마시고, 일상적으로 아파하며, 사생활에 대한 물음에 방어하듯 몸과 입을 움츠린다. 의사와 상담할 때는 얼굴을 똑바로 두지 못한다. 걱정하는 에스더에게 위압적인 태도로 차가운 말을 쏟아내고, 그날 밤 일기에 ‘기분이 좋아졌다’고 적는다. 이어 그것을 전부 찢고, 폭탄 조끼를 꺼내 본다. 톨러는 위선을 떨기보다는 그렇게 위악을 부리는 자다. 스스로 완벽하지 않음을 알고, 종종 못난 행동을 질러버리며, 그것을 기억에서 지우지도 못한다.


<퍼스트 리폼드 >(2017). IMDB.


그럼에도 톨러가 ‘권위’있는 자로서 지닌 감수성이 참으로 ‘귀하다’는 것이, 메리의 창고에서 폭탄 조끼를 두고 하는 대화에 드러난다. “경찰에 신고하실 건가요?” 메리가 묻자 아니라고 했다가, “혹시 내가 신고했으면 하는 건가요?”하고 되묻는다. 두렵다는 말을 듣고 그냥 다독이지 않고, “마이클이 당신을 해칠까봐 두렵다는 건가요?”라고 다시 체크한다. 사소해 보이나 중요한, 이런 상황에서 꼭 필요한, 그러나 필요성을 잊기 쉬운 질문이다. 톨러는 인상을 잔뜩 쓰고 턱을 움켜쥔 채 당황스러워하면서도, 묻기를 잊지 않는 사람이다. 다만 상대가 메리였기에 그 감수성이 더 본능적으로 발휘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마이클의 죽음 후에도 메리를 향한 태도는 껄끄러움 없이 유일하다. 거리를 두고 조심스럽게 배려하는 와중 어쩔 수 없는 설렘이 새어나온다. 자꾸 궁금해하고, 무방비해지고, 기분 좋게 긴장한다.

 

톨러는 메리에게 ‘재봉헌식에 오지 말라’고 강하게 부탁한다. 마주 잡은 손에 무거운 긴장이 있다. 메리는 ‘순수한’ 호의를 공유하는 특별한 존재고, 재봉헌식은 부끄러운 자리다. 주의 뜻을 전하는 교회가 지구를 오염시키는 거대자본과 손을 잡고 돈자랑과 신앙자랑을 하는데, 자신은 뒤집어엎기는커녕 가만히 그 일부가 되어야 한다. 합리화하거나 얼버무리는 대신 솔직하게, ‘제발 당신은 오지 말아달라’고 요구하는… 톨러다움. 어쩌면 이미 그때 어둠으로 떨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을지도, 제 절망이 터트린 포자가 메리의 희망에 내려앉지 않기를 바라며 선을 그었는지도 모른다.

 

시체를 발견했을 때 톨러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아주 슬픈 얼굴을 했다가, 잠깐 두리번거리며 패닉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이후, 그 불안은 늘 거기 자리한다. 마이클이 짊어지고 있던 짐을 제 어깨에 옮겨 받기라도 한 듯이. 톨러의 ‘성직자 톤’에는 항상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소리 자체의 진동이나 갈라짐과는 다른, 감정의 흔들림과 불편함이 묻어나는 종류다. 마이클의 죽음을 기점으로 그 떨림은 점점 진폭을 키운다. 이제 기도하지 않을 때도 종종 눈을 꼭 감은 채 괴로움을 꿀꺽 삼킨다. 평범한 설교 중에도 목이 메이고,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밝게 이야기를 들려주다가도, 홀로 다른 세상에 간 듯 사로잡혀 어두워지고 만다. ‘주님의 뜻’으로 수렴하는 따스한 말들을 늘어놓는 대신 자꾸 질문한다.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요?”, “주님이 우리를 용서할까요?” 전엔 있는 ‘척’이라도 할 수 있었던 희망이 사그라들고, 절망이 점점 피부를 뒤덮는다. 마이클과의 대화를 복기하며 적었던, “자만이 발전하면 절망이 된다.”는 법칙이 스스로에게 적용되었던 것일까?

 

<퍼스트 리폼드 >(2017). IMDB.



사적인 ‘구원’과 공적인 타락

 

스토리텔러가 허구의 인물을 통해 말하고자 한 바를 판단하려면, 이야기가 마무리될 때까지 지켜봐야 한다. 톨러는 끝내 자신은 세상을 ‘구원’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연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우월하고 무고한’ 선지자로 착각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는 ‘내가 오만하지 않은가’라는 고민마저 놓치지 않는다. 그가 홀로 내린 결론을 뒤집도록 도운 것은 메리의 존재였다. 타인과의 연결을 통해 한 인간이 ‘구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 자신이라는 깨달음을 얻고, 고통을 공유하는 자와 유대하고 기꺼이 ‘불경해짐’으로써 ‘구원’받는다. 그의 가슴에 있던 감정 한 덩어리가, 심화된 자만-절망의 늪에 빠지지 않게 했다.  

 

순교자가 되려던 톨러는 메리를 보고 당황한다. 안절부절 못하다 입을 틀어막고 괴상한 비명을 지른다. 폭탄 조끼를 벗고 대신 가시철사를 두른다. 기이한 신음을 동반한 그 동작들은 성급하고 어수선하다. 주의 뜻이라고 생각했건만, 이토록 간단히 휘둘린다. 메리를 마주한 그는 결국 독배(하수구 세정제가 든 컵)를 떨어뜨린다. 가시가 박힌 몸을 주저 없이 움직여 단단히 포옹하고 깊게 키스한다. 4:3 비율 프레임에 360도 회전으로 담기던 그것은 보통의 입맞춤이 아니었다. 고통을 맞잡고 함께 하강했다가, 나락을 치고 상승하는 의식과도 같았다. 에단 호크의- 다시는 뜨지 않겠다고 결심한 듯 꼭 감은 눈과, 상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려는 듯 섬세하게 흐르는 손은... 이것이 절망과 희망의 만남, 세속적인 구원이고 성스러운 불경임을 설득하는 언어였다.

 

<퍼스트 리폼드 >(2017). IMDB.


해로우의 결말은 달랐다. 그의 선지는 일단 ‘성공’하여, 신을 부활시켰다. 그는 “네 저울의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암미트의 말에 동요하지 않고, 다만 차분히 떨며 슬퍼한다. 여기서 관객은 해로우가 정말로 ‘진심’이었음을, ‘힐링’을 위한 희생물-“우리가 만들 세상을 보았으면 좋았을 텐데.”를 속삭이는 대상-에는 그 자신마저 포함될 수 있었음을 새삼 알게 된다. ‘널 죽이지 않겠다’는 암미트를 설득하려는 시도까지 하지만, 결국 섬기는 신의 모순(‘균형’을 추구한다면서 ‘불균형한’ 영혼을 아바타로 삼는)을 수용하고 만다. 우아한 역할만 도맡던 그가 흥분한 채로 민첩하게 몸을 부딪히다 내동댕이쳐지는 모양을 보고 있자니, 왠지 서운하다. 그러나 고상함과 웅장함을 아주 버리진 않았다. 조급해하지 않고, 딱 필요한 정도로만 속도를 높인다.


관객은 순교자 아닌 톨러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가 일기에 적은 것, 적지 않은 것, 적음으로써 숨긴 것, 저도 깨닫지 못하거나 알려지기를 원치 않는 부분들까지. 그러나 해로우에겐 선지자 아닌 개인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종종, 오로지 제가 믿는 것들로 인해 존재하는 그럴듯한 허깨비처럼 보였다. 바이트가 겹친 데에는 그 탓도 있었다. 그러나 피라미드에 홀로 남겨진 애드리언 바이트의 실루엣에 ‘뛰어나서 외로운 남자’가 있었던 것처럼- ‘관객’이 없는 상황, 봉인된 콘슈를 향해 눈물을 글썽일 정도로 절실한, 개인적인 복수심을 내비치는 아서 해로우에겐, ‘미스터 해로우’ 아닌 ‘아서’의 실마리가 있었다. (콘슈가 ‘망가뜨려서’ 제 저울의 균형이 맞지 않는다고 원망했을 가능성도 있겠다.) ‘암미트의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의 맨 밑바닥에는, 사적인 어둠이 자리하고 있었다.


암미트는 해로우의 ‘불균형’이 과거가 아닌 미래에 있음을 예언했으나, 그는 결국 정체모를 ‘악행’을 저지를 기회를 얻지 못하고 죽는다. 마음껏 무방비하게 풀어져서는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리며 상스러운 웃음을 흘리고, 늘어진 몸을 좌석에 파묻은 채 자연스럽게 높인 톤으로 대충 손을 놀리고 말을 뱉는, 심지어 죽음을 두려워하는- 해로우는 낯설다. 어쩌면 그게 ‘진짜 아서 해로우’에 가까웠을지도 모르겠다. 길고 고단한 여정 끝에, 내면 깊은 곳에 숨어 있던 ‘망가진 남자broken man’만이 살아남았던 것일까.


<문나이트>(2022). IMDB.



“자기 자신과 그 죄에 너무나 미쳐 있어서 스스로를 고문하는”(에단 호크 [imdb.com]), 그들은 닮은 듯 달랐다. 묻어두려 했던 사적 애정에 ‘구원’ 받고 순교에 아름답게 실패한 톨러와, 선지에 ‘성공’하여 혼란과 폭력을 불러왔으나 가장 사적인 상태로 결말을 맞이한 해로우. 어쩔 수 없이 끌리지만 딱히 새롭지는 않은 인물들이었는데, 배우를 만나 묘한 개성을 입었다. 에단 호크는 그들의 공적 자아에 과하지 않고 섬세한 품위를 부여했고, 복잡하게 꼬인 사적 자아를 각자에게 필요한 만큼 드러냈다. 이는 작품의 매력을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핵심 키이기도 했다. 에단 호크를 만난 톨러는 <퍼스트 리폼드>에 있는 올드함을 고루함이 아닌 클래식한 멋으로 만들었고, 해로우의 존재는 <문나이트>의 분위기에 균형(!이라니!)을 부여했다. 청불까지는 가지 않은 이 픽션들의 어떤… ‘경계’는, 폭력의 기술적 묘사보단 인물들의 내면에 있는 어둠의 표현, 연기에 있었다.

 

<퍼스트 리폼드 >(2017). IMDB.



+

톨러는 큰교회 목사로부터 ‘파괴가 정말 신의 뜻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느냐’는 반박을 받기도 한다. 기업의 자본에 굴복하는 행태의 합리화였을 테지만, 의도와는 별개로 일리가 없지 않았다. 주제 사라마구의 <예수복음>은, 몇 장에 걸쳐 ‘신’이 저지른 살생을 나열한다. 애초에 ‘신의 뜻’이라는 말이 내포한 개념과 기준이... 인간의 편의에 따라 변형될 여지가 다분하다.

 

++

마이클이 메리에게 임신중지를 요구하거나(아내의 몸에 대한 결정권이 본인에게 있다고 여기는 것) 톨러가 ‘순교’를 결심한(제 죽음이 신의 뜻/절대진리에 부합하는 행위라고 여기는 것) 사고흐름에는 분명 자만이 있었다. 그러나 그 절망 전부를 나르시시즘으로 뭉뚱그리는 건 부당하다.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순교’를 통한 ‘구원’이 아니다.) 건, 주로 그들처럼 남들이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일에 아파하는 자다.

 

+++

“You know, who doesn’t love a cult leader?” -에단 호크 [imdb.com]



* 참고 인터뷰

https://m.imdb.com/video/vi1236648473/?ref_=ext_shr_l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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