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리 키오건 Barry Keoghan
배리 키오건: 불편과 불안을 유발하는 변수적 존재
Barry Keoghan …makes people ‘uncomfortable’.
<킬링 디어(The Killing of a Sacred Deer)>(2017,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
<그린 나이트(The Green Knight)>(2021, 감독: 데이빗 로워리)
<덩케르크(Dunkirk)>(2017,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아메리칸 애니멀즈(American Animals)>(2018, 감독: 바트 레이튼)
* 위 작품들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 <이터널스>의 핵심 전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Feat. <Mammal>(2016, 레베카 달리), <Candy Floss>(2016, 제드 하트). <For You>(2016, 브랜든 캔티), <Light Thereafter>(2017, 콘스탄틴 보야노프), <Eternals>(2021, 클로이 자오), <The Batman>(2022, 맷 리브스)
배리 키오건. 세상이 어떻게 기억할지 가장 궁금한 배우 중 하나다. 내겐 유독 ‘불편한’ 첫인상을 남겼다. 스크린 속에서- 타인이나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고, 세계의 변수나 이단이 되어 관객을 예측하기 힘든 방향으로 이끄는 모습을 주로 목격했다. 크거나 곧지 않은 신체, 뚜렷하지는 않은데 독특한 마스크, 그 조합은 순수하고 ‘미숙’한/ 위태롭고 위험한/ ‘의중을 알 수 없는’ 분위기의 원천이 되었다.
종종 괴롭히는 자(2011, <Stand Up>)나 살인자(2012, <King of the Travellers>)의 모습을 하고 나타났던 그는, 2016년의 장/단편들에서 주인공 여성과 ‘보편적이지 않은’ 관계를 맺으며 유사성이 있으면서도 다채로운 인상을 남긴다. <마멀>에서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여성과 유사 모자-연인 관계를 맺는 홈리스 젊은이였고, <캔디 플로스>에서는 가출한 소녀를 거두었다가 다시 ‘거두어지고’ 또 ‘버려지는’ 남자가 되었다. (두 작품 모두 시놉시스에 ‘unorthodox relationship이단적 관계’라는 표현이 있다.) 비주류적이고 ‘비정상적’이라고 여겨지기도 하는 감정적 연결의 한 축이 되어 위태롭게 흔들리거나 종종 위험해졌다. <포 유>에서는 비교적 ‘평범한’ 연인의 모습이나- 불안정한 상황에 놓인 주인공의 곁에 남아 기꺼이 함께 ‘길을 벗어나는’ 방식으로 위안을 선사한다. 세 작품 모두에서 ‘로맨스’의 ‘상대’였던 그는, 다음 해 제작된 <라이트 데어에프터>(2017)로 단독 장편 주연을 맡아, 세상의 변두리에서 불안하게 요동쳤다. 화자이면서도 이야기의 변수가 되었다.
‘범상치 않은’ 악의/선의, 세계의 변수이거나 기준이거나.
여태껏 일관된 방향으로 쌓아온 역할들이 한데 뭉쳐 기이하고 탁월하게 발현된 것이 <킬링 디어>(2017)의 마틴이었다. 그의 존재는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창조한 엄격한 디스토피아의 꼭대기에 얹혀 타 인물들과 훌륭하게 불화했고, 전 세계는 이 소년의 낯설고 불편한 얼굴에 주목했다. 입가에 묻은 소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스파게티를 잔뜩 쑤셔 넣는- 마틴이 생성한 불쾌한 공기는 스크린 밖으로 흘러넘쳐 관객의 마음에 잠입했다.
표면적 화자인 스티븐 역의 콜린 파렐은 늘 그렇듯 란티모스 작품 특유의 기계적 톤을 탁월하게 소화하는데, 마틴 앞에서 그 ‘무감정’은 흐트러진다. 난처해하고, 상냥해지고, 눈치를 보고, 후에는 이성을 잃고 분노한다. 배리 키오건 역시 이 세계의 무감정을 입기 위해- 힘을 완전히 뺀, 비음이 섞인 가느다란 톤과 미세하게 늘어지는 말투를 사용하는데, 말할 때는 머리를 흔들고, 말을 멈춰도 입을 완전히 다물지 않는다. 먹을 때도 그렇다. 적당히 흘리거나 묻히며 쩝쩝 소리를 내고, 와중 앞에 있는 상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아 식욕을 떨어트린다. 중심을 잡는 것은 늘 살짝 치켜뜨고 있는 눈. 주로 자기 얘기를 털어놓는 것은 마틴이지만, 그 눈동자 탓에 상대는 속을 꿰뚫리는 느낌을 받는다. 때로는 정확히 짚어내기 힘든 위화감이 서린다. 어깨를 자연스럽게 굽히고 고개를 든 자세로 걷는다. 별로 에너지나 카리스마가 없는 듯한 실루엣인데, 묘하게 상대와 관객의 심기를 거스른다. 그 요소들이 모여 꾸준히 화면 전체를 덮고, 탁한 공기를 형성한다.
마틴에겐 주로 나이에 어울리지 않도록 지나치게 어른스러운 예의가 있다. 드물게 ‘어린’childish 모습이 튀어나올 때면 왠지 당황스럽다. 그가 불쾌한 까닭은 일관되게 집요하고 태연하기 때문이다. 집요하게 시선을 두고, 집요하게 반복해 말하고, 집요하게 전화를 걸고, 집요하게 찾아온다. 음산한 배경음악과 함께 스티븐과 가족이 상황과 감정의 급변을 겪는 내내, 처음부터 끝까지 동요하지 않고 평정을 유지한다. ‘대가’를 설명할 때도- 이렇다할 적의가 없다. 처음부터 숨길 필요 없이 자신도 상대도 알고 있었던 결과인 듯. 그 태도는 지하실로 끌려와 맞거나, 스티븐과 자신의 팔뚝을 물어뜯는 동안에도 유지된다.
화면에 등장하지 않아도 마틴이 남겨놓은 존재감은 -오히려 없을 때 더- 불길하게 맴돌며 작품 전체를 지배한다. 꼭 불운의 인간형인 듯도 한 그는 때로 초월적이다. 킴의 두 손을 잡는 제스처는 신성한 의식과도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정의’의 심판자인지, 복수를 위해 저주를 부른 소년인지- 작품도 배리 키오건도 마틴의 진의와 정체를 정확히 알려주지 않는다. 머리에 총이 겨누어지자 잠깐이나마 진실로 공포를 드러내는 눈동자가 도리어 더 헷갈리게 만들었는데, 이것 참, 고작 열 여섯 소년의 얼굴이 아닌가.
마지막 장면- 레나와 킴은 마틴을 응시한다. 스티븐의 죄책감과 무력함으로 우위를 점했던 그는 ‘대가가 교환된 후’ 시선을 주는 대신 받는 쪽에 위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뻔뻔하게’ 맞받을 뿐이다. 미묘한 경계에 있는-텅 비어 있다가 갑자기 꽉 차버리는 눈빛이다. 그의 세계는 애초에 스티븐의 것처럼 뭔가를 감추며 완전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표면적 안타고니스트인 마틴은 엄격하게 구성된 란티모스 세계의 의도된 변수인 듯 했으나- 오히려 이야기의 화자이자 ‘세계’의 기준이나 법칙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그 악의적-이지조차 않은 태연함은 ‘목적을 달성’해도 사라지지 않고, 끝까지 상대와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린 나이트>(2021)에서도 배리 키오건은 어떤 변수다. 시련과 장애물, ‘신적 목소리’의 메신저로 이어지는 기능적 역할을 수행하지만, 결말이 정해져 있는 여정임에도 ‘그 과정의 단계들은 미지수인’- ‘모험’의 연속으로 만드는(혹은 가웨인을 방해해 돌아가라는 신호를 보내는) 첫 단추다. 네이밍도 고유의 이름이 아닌 ‘스캐벤저scavenger’, 특별할 것 없는 캐릭터가- 이 배우와 만나면서 화면 전체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스캐벤저는 폐허의 주인이라도 되는 듯 등장해 능청스럽게 다가온다. 연극적인 제스처로 인사하고, 말을 거는 내내 경쾌하게 뛰어다니며 땅에서 무언가를 주워 던지기도 한다. 풀샷으로 담기는 실루엣은 ‘너덜너덜’하다. 옷차림 때문만은 아니다. 불안정하게 들떠 있다. 말 위에 있는 가웨인을 따라잡느라 종종 숨차 하고, 소리 지르듯 목청을 높이기도 한다. ‘형 둘이 전쟁에서 죽었고, 엄마가 말리지 않았다면 나도 그렇게 됐을 것’이라는 대사에는 이상한 흥분이 있는데, 언뜻 신난 듯하지만 웃음에 공격성이 섞여 있다. 그 스스럼없는 붙임성에 숨어 있는 적의와 꿍꿍이는 ‘길을 알려주었는데 아무것도 없냐’고 힘주어 외칠 때 선명히 드러난다. 이 ‘보잘것없는 존재’의 얼굴이 비로소 화면에 제대로 잡히고, 뻔뻔한 태도와 의미심장한 눈빛은 공기에 긴장을 불어넣는다.
오히려 이후 강도의 모습으로 재등장 했을 때는 정체가 밝혀졌기에 긴장의 종류가 보다 ‘평범’하다. 예의 명랑함으로 비탈을 깡충깡충 뛰어 내려와, 이리저리 건들거리며 능숙하게 가웨인을 위협하고 상황을 통제한다. ‘훔친다’는 목표야 있지만, ‘정도’를 택하지 않는다. 비웃고, 어르고, 띠를 장난스럽게 걸쳐 보는 등, 의도적으로 상대의 심기를 거스르며 재미있어한다. 일부러 무례하고 못되게 굴며 미움 받기를 자처한다. 어떤, ‘잃을 것이 없는’ 자만이 입을 수 있는 ‘악의’. 그것을 즐기는 태도는 가웨인에 이입한 관객에게도 불쾌를 안긴다.
도끼를 들자 스캐벤저는 별안간 ‘다른 존재’가 씌인 듯한 상태가 되어 차분한 권위를 드러내는데, <킬링 디어>의 마틴과 유사한 데가 있다. ‘왕들의 싸움에서 가족을 잃고 폐허에서 쓰레기를 줍는’ 스캐벤저는 왕족인 가웨인을 위협하고, ‘수술 과정에서 아버지를 잃고 직업이 없는 어머니와 사는’ 마틴은 ‘손이 예쁜 의사’ 스티븐의 ‘불행’을 통제했다. 이들이 보이는 모습은 ‘비틀린 호의가 분명한 적의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단순화하기 힘든 구석이 둘 모두에게 있다. 킴에게 ‘너의 아빠에게 동정을 느낀다’고도 했던 마틴에게선 좀처럼 ‘복수심’을 찾기 어렵고, 별안간 ‘내가 네 여정을 대신하겠다’며 말을 달리는 스캐벤저가 그랬듯 ‘신성’하기까지 하다. 선의/악의가 혼란스러워지는 지점. 배리 키오건은 효과적으로 인물들에게 있는 ‘초월적인’ 분위기를 입었다. 그것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안정에 기반하며, ‘다 드러내지 않아’ 미스터리의 영역으로 넘기는 연기의 조절로 완성된다.
평범하고 순진한 영혼, 무해하거나 유해하거나.
배리 키오건이 ‘평범한’ 인물을 연기하면 유독 ‘순진한 영혼’이 비치는데, 나아가는 방향은 일관되지 않다. 먼저 <덩케르크>(2017), 태연하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는 조지의 실루엣은 너무나 무해해, 거절하지 못하는 미스터 도슨이 이해될 정도다. 전장을 지나며 있는 힘을 다해 살아남는 핀 화이트헤드의 토미가 작품의 중심에 있지만, 외에도 화자는 여럿이다- 허공에서 능숙하게 전투기를 조종하는 톰 하디의 파리어와 전장을 지휘하는 캐네스 브래너의 볼튼이 하늘과 바닷가의 전면에 있다면, 한켠에는 도슨 부자와 더불어- 가만히 바다를 눈에 담는 조지가 있다. 군인이 가득 탄 배를 신기한 듯 입을 벌린 채 바라보고, ‘저 군인이 겁쟁이냐’고 천진하게 묻는다. 비아냥이 아닌 단순한 질문, 순진함을 뒷받침할 뿐이다. 내내 바람과 햇빛으로 인해 찌그러져 있는 얼굴도 마찬가지다.
의심의 여지 없이 ‘선한’ 자 일 때도, 그는 결과적으로 관객의 마음을 불편하게 조인다. 그의 선의에 ‘능숙함’이 수반되지 않는다는 점은 중요치 않다. 이 불편함은 인물 자체가 아니라 상황에서 출발한다. 군인들을 살리기 위해 바다로 나온 세 민간인은 PTSD를 겪고 있는 ‘쉬버링 솔져’를 배에 태우며 갈등을 맞이하고, 결국 조지는 자신의 탓이 아닌 까닭으로 부상을 입는다. 그 순간 그는 ‘지켜보는 자’에서 지켜봐지고 돌보아지는 대상이 된다. ‘따라오길 잘했다’며 힘없이 미소 짓고, 끝에 결국 “눈이 안 보여.”라고 고백한다. 떨리는 소리지만- 이미 ‘받아들인’ 뉘앙스가 있다. 순수한 존재가 전쟁의 피해자로 인해, 또 하나의 피해자가 되는 결말. 앞선 두 작품과는 상반된- 캐릭터의 ‘무해함’이 비극의 농도를 최대로 올린다. 입체적이거나 비중이 큰 인물은 아니었으나, 배리 키오건이 별다른 분장 없이 입은 완전히 다른 캐릭터성은, 이 배우의 가능성을 새삼 깨닫게 했다.
‘순진하다’ 하여 곧 무해한 것은 아니다. 혼란에 휩쓸려 순수innocent를 잃고 오로지 순진naive으로만 발현되는 경우, 의도와는 달리 타인을 해할 가능성을 지닌다. <아메리칸 애니멀즈>(2018)의 ‘스펜서’가 그렇다.
처음부터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게 아니라 실화 자체’임을 명시하며 시작되는 세미 다큐멘터리다. 픽션이 주를 이루기는 하지만, 당시 기억이나 심정을 서술하는- 실제 당사자들과 가족들의 인터뷰가 차지하는 비중도 상당하다. 목적은 분명하다. 이 모든 것이 멍청하고 끔찍하고 의미 없었음을 드러내기. 당사자들의 스토리텔링과 반성의 제스처가 그토록 자세히 담긴 것은, 범죄가 전혀 ‘멋’있는 일이 아님을 설득하기 위함이다. 당시 피해자였던 도서관 사서의 인터뷰에 이어, 형을 살고 나온 네 친구의 쓸쓸한 근황을 배치한 마무리는 적절했다. 다만 이러한 구성에서 배우가 차지하는 포지션은 살짝 ‘애매할’ 수 있는데- 겉으로 보이는 연기 방식에는 두드러지는 차이가 없더라도, 감독과 배우의 재량으로 해석 가능한 범위가 매우 좁아진다. 관객도 서사에 집중하거나 인물에 이입하기보다는 어디까지나 ‘재현’으로 바라보게 된다. 받아 적은 대로 ‘하면’ 되기 때문에 더 ‘쉽지’ 않을까? 에반 피터스와 배리 키오건이 파고든 깊이를 목격하면 이러한 예상은 자연히 잦아든다.
‘특별한 사건을 겪으면 무언가 달라질 것 같아’ 시작한 일. 자신이 던진 ‘미끼’로 시작된 일인데,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갈등하고, 내내 고민하고 주저하면서도 끝내 ‘벗어난 길로 계속 가고 마는’ 이가 ‘스펜서’다. ‘워렌’과 함께 범죄를 계획하는 그에게는 즐거움이 비치지만- 친구와 함께 ‘놀이’를 한다는 감각이 대부분이고, 행위의 실상에 대한 인식은 희미하다. 가담하는 사람들이 늘고, 점차 구체화되면서, ‘스펜서’는 진지하게 불안해하기 시작한다. 배리 키오건이 매 순간 보여 주는- 머뭇거림과 위화감, 그것은 스펜서 라인하르트가 인터뷰로 털어놓은 심리를 진솔하게 드러낸다. 특히 가족들과 식사를 하면서도 ‘완전히 그곳에 있지 못하는’ 흙빛의 낯은 보기 안타까울 정도다. 장난스럽고 능청스러운 자신감을 유지하다가 결정적인 순간 완벽하게 무너지며 패닉하는 에반 피터스의 ‘워렌’과- 완전히 극과 극인 듯 하다 끝에 한데로 모인다.
에반 피터스의 ‘워렌’이 사건의 가장 중심에 있는 인물이라면 배리 키오건의 ‘스펜서’는 사건의 제 1화자이자 ‘워렌’의 관찰자다. 작품에는 당사자가 배우와 마주치는 장면이 두 번 나오는데, 성격과 차지하는 역할에 따라 모양이 다르다. 에반 피터스와 워렌 립카의 대면은 직접적이다. 재현 씬에 워렌 립카가 갑자기 등장한다. 에반 피터스는 기억에 대해 묻고, 워렌 립카는 답한다. 반면 배리 키오건과 스펜서 라인하르트의 것은 데면데면한 스침에 가깝다. ‘동료들’이 탄 자동차가 집 앞 길에 서 있는 누군가(스펜서 라인하르트)를 지나친다. 해당 씬은 작품의 마무리에 스펜서 라인하르트의 시점으로 재등장 한다. 당사자이면서 기준 같은, 고민하고 괴로워하면서도 결국 잘못된 선택을 하고, 그것을 평생 짊어지고 사는 자. 이번에 배리 키오건이 불편하게 만든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캐릭터’였다.
스크린의 이단, 그의 넥스트
HBO 리미티드시리즈 <체르노빌>(2019)에 출연하기도 했던 그는, 최근 성공적으로 마블과 DC 유니버스 각각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터널스>(2021), 수퍼히어로-영생을 사는 외계인일 때조차 배리 키오건은 비스듬히 기대앉아 뭔가를 우물거리는 와중- 농담을 던지며 키득거리는 삐딱이 소년으로 등장한다. 마카리와 플러팅하는 장난스런 눈빛이- 거 제법, 매력적이다. ‘의외로’ 초능력은 마인드컨트롤, 이와 어울리게 차분히 상황을 읽어내는 수도승 같은 면 또한 있다. 역시나 가장 먼저 룰에 의문을 제기하고 ‘영원’에 반목하는 자가 되어 ‘이단적 세계’를 만들어 버리는데, 이번엔 아쉽게도(?) ‘빌런’은 아니다. 이 아쉬움에 답하듯 <더 배트맨>(2022)에서는 짧은 목소리 연기만으로 ‘광기’를 잔뜩 흘려 폴 다노에 뒤지지 않는 불쾌감을 안겼고, 최근 공개된 딜리티드 씬에서 비로소 비주얼을 드러내며 차세대 조커로서의 존재감을 증명했다.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빈둥거리고mess around 농담을 던지면서도 돈을 벌 수 있는! 그러나 더 깊은 단계에서는, 이것이(연기가) 내겐 매우 치유적이었다therapeutic.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이 되려면 스스로의 문제 몇 가지 정도는 내려놓아야 하는 것 같다.”
- 배리 키오건, 2018.09.03. interview by. Gwilym Mumford [theguardian.com]
스크린 속 그는 과연 어느 정도 ‘mess around’한다. 허나 그 표면적 태연함이나 천진함이 파고드는 깊이와 끌어내는 고민들은 진지하다. 특유의 ‘이단적’ 에너지를 다양한 범위와 형태로 꺼내어, 차분하게 통제하거나 고삐를 풀어버리는 배리 키오건. 위태롭고 위험한 관계의 상대방이 되거나, 적의와 호의를 능숙하게 저울질하며 프로타고니스트와 불화하거나, 그도 아니면- 무해하거나 순진해 타인이나 자신에 의해 ‘부서졌’다. 주로 관객에게 불안이나 불편을 안겼고, 때론 세계의 변수가 되었다, 그러나- 이 단편적인 요약은 이 배우의 매력과 가능성을 아우르지 못한다. 배리 키오건의 연기는 점점 더, 설명 가능한 범위를 벗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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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리 키오건은 아일랜드 독립을 다룬 TV 시리즈 <리벨리온>(2016)을 비롯해, 이름을 알린 후에도 꾸준히 아일랜드에서 작품을 해 왔다. <킬링 디어>로 만났던 아일랜드의 대배우 콜린 파렐과 다시금 호흡을 맞춘다는 소식은 유독 반갑다. 그것이 <쓰리 빌보드> 이후 마틴 맥도나의 차기작(<The Banshees of Inisherin>)에서라니, 더할 나위 없다.
* 참고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