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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Jun 03. 2022

이토록 무해한 논휴먼의 얼굴

저스틴 H. 민 Justin H. Min



<엄브렐러 아카데미(The Umbrella Academy)>(Netflix) 시즌 1, 2

<애프터 양(After Yang)>(2021, 감독: 코고나다)

 

* 위 작품들의 구체적인 장면과 전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왼쪽부터 <애프터 양>, <엄브렐러 아카데미> 포스터.


<애프터 양>(2021) 포스터, 측면을 향해 있는 양의 형상은 다른 세 사람과 달리 흐릿하다. 안드로이드인 그는 작품이 시작되자마자 ‘고장나’고, 다시 깨어나지 못한다. <엄브렐러 아카데미>(Netflix), 아카데미 맴버는 일곱이지만 시즌1 포스터에는 여섯 사람만이 있다. 빠진 이는 넘버6인 벤, 그는 이미 죽었다. 1화 끝에 유령으로 등장하지만 대부분의 눈엔 보이지 않는다. 인간이 아닌 그들은 언뜻, 매력적인 픽션 캐릭터 설정인 뱀파이어나 뮤턴트, 마법사나 신처럼 ‘뛰어나거나 초월적인’ 자들이 아니라 ‘제약이 있는’ 존재들로 보였다. 허나 그들의 ‘내면’에서는 인간이나 초인간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가치가 발견되었고, 그것들은 ‘인간적’이라는 말의 한쪽에 닿아 있었다.  


굳이 역사책까지 꺼내 올 것도 없이 한 범인의 역사만 돌아봐도 ‘인간적’이라는 말의 정의를 새로이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비관하게 된다. 그럼에도 이 낡은 표현을 끄집어내 쓸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아닌 그들이 누구보다 ‘인간적이었다’는 아이러니가 어느 정도 당연하게 다가왔던 데에는 배우 저스틴 H. 민의 역할이 컸다. 그의 존재감과 연기가 지닌 고요한 설득력은 언어적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 글은, 그것들을 메모리에 소장하고자 하는 사심에서 비롯되었다 할 수 있겠다.


<엄브렐러 아카데미>(Netflix). IMDB.


배우와 함께 굉장한 사랑을 받은 벤 하그리브스의 시작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몇 년 전 <엄브렐러 아카데미> 시즌1 홍보가 한창일 무렵, 공식 SNS의 게시물이 부정적으로 이슈화된 일이 있었다. 끝에 서 있던 저스틴 H. 민이 잘린 채로 단체사진이 올라갔던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그 까닭이 논란의 방향대로 ‘대충 아시아계 배우여서’라기보단 그가 메인 캐릭터로 출연한다는 사실이 1화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 때문으로 판단했지만, 팬들의 분노는 이제껏 할리우드가 비백인, 특히 아시안을 다루어 온 태도에 기반해 있었다. 그를 유령에 캐스팅한 것을 할리우드 내 아시아계 배우의 입지에 대한 제작진의 작은 비판이 담긴 제스처로 봐도 되는 걸까, 혹은 자체로 그 예시가 되는 캐스팅이었을까.


문화적 정체성이 강조되는 방향으로 ‘디자인된’ 양과 달리 벤의 아시안 정체성은 딱히 언급되지 않고, 그건 ‘별일’은 아니다. 엄브렐러 아카데미의 맴버들은 특수한 환경에서 동일한 아동학대를 겪으며 자랐고, 벤은 아카데미를 벗어나 개인적인 삶을 경험해보기도 전에 죽었다. 60년대가 배경인 시즌2에서도, 과거에 떨어지자마자 레스토랑에 걸린 ‘WHITE ONLY’ 사인을 맞닥뜨려야 했던 앨리슨처럼 인종차별과 혐오범죄에 노출되지도 않았다. 신체 자체가 노출되지 않아서, 말그대로 ‘보이지 않아서’였다. 아시아계 배우를 ‘잘 보이지 않는’ 위치에 둔 것은 어쩌면 ‘편리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의도가 있었는지, 있었다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벤 역을 저스틴 민이 맡은 것은 쇼와 배우 모두에게 플러스가 됐다.



<엄브렐러 아카데미>(Netflix). IMDB.


1화가 끝날 무렵 플롯 트위스트와 함께 어둠 속에서 등장한 벤은 유령이라는 분류가 무색할 만큼 으스스함이나 사악함과는 거리가 먼 캐릭터였다. 뒤집어 쓰고 있던 후드조차 당시엔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위한 연출인가 싶었지만 돌이켜보면 그저 ‘다른 의미로 인간적인’ 캐릭터성의 흔적이었다.


저스틴 민은 대개 일정하게 깔끔한 톤으로 벤을 연기하는데, 감정이 배제되어 ‘로보틱’하거나 신선 같은 뉘앙스는 아니다. 적당히 해탈해 별 욕심이 없는 사람 정도다. 그건 유령의 특성이 아니라 ‘유령이 된 벤’의 특성, 우리가 픽션에서 주로 봐왔던, 또 클라우스 곁에서 맴도는 유령들-살아있을 때 못다한 일이나 겪은 고통에 집착하는 짙은 영혼들-을 떠올리면 바로 수긍할 수 있다. 그의 경험이 결코 덜 트라우마틱하지는 않았으리라 짐작되는데도, 벤은 죽은 이후 어떤 ‘과도기’조차 거치지 않고 그렇게 늘 클라우스 곁에서 (항상 거기 있으나 없어서는 안 되는) 공기처럼 맴돌았을 것 같다.


벤은 배경에서 탁자나 서랍장 위에 한쪽 다리를 세우고 비스듬히 누워 있거나, 어딘가에 걸터앉아 역시 한쪽 다리를 올린 채 책이나 잡지를 읽곤 한다. 기대어 팔짱을 끼고 엉망진창인 아카데미 회의를 경청하기도 한다. 대개 구부정하거나 삐딱한 자세들인데도 ‘바르다’. 흐트러져 있다기보단 신체에 구애받지 않는 듯 보인다. 사실 여기서 몸의 부재는 자유보다는 제약임에도, 벤이 ‘가질 수 없는’ 것에 집착하지 않기에 나오는 느낌이다. 클라우스와 대화하던 와중 포고가 들어오자 벤은 따스한 미소를 짓는다. 그 희미한 실루엣은 구석에 있다 사라지지만, 화면에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다. 벤은 나를 알아달라고 요구하기는커녕 보여질 수 없음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치지도 않는다. 그저 소중한 이들을 뒤에서 바라보고, 그것에 만족한다. 첫 등장에서 말없이 인상을 쓴 채 좌석에 파묻혀 있었을 때처럼 모든 게 귀찮은 듯한 제스처를 할 때도 있다. 가끔은 인간사에 얼마나 관여해야 할지 가늠하는 대천사처럼 조용히 모습을 감추기도 한다.


<엄브렐러 아카데미>(Netflix). IMDB.


벤은 클라우스의 ‘사소한 나쁜 짓’을 주시하다 익숙하다는 듯 걱정어린 핀잔을 던지거나 ‘거슬리도록’ 추임새를 넣곤 한다. 별로 기대를 않으면서 포기도 않는다. 주로 차분하고 시니컬한 투로 냉정히 판단을 내리곤 하지만, 위급한 상황에서는 시니컬을 버리고 단호해지고, 종종 간절해진다. 상대의 고통에 아파하며 감정적으로 힘을 북돋아주기보단 정신을 똑바로 차리게 하는 방향으로 돕는다. 그러고 보면 제 건강을 망치려고 작정한 주인 대신 몸이 완전히 중심을 잃지 않도록 잡아주고 있었던 것도 같다. 따스하고 정많은 벤은 클라우스를 귀찮아하면서도 기꺼이 스스로 귀찮은 자가 되어 끊임없이 그를 ‘건져내려’ 시도한다. 주로 상대가 귓등으로도 안 듣는 통에 늘 티격태격, 비슷한 패턴인데 매번 흥미진진하다. 몇 년 전 글에 쓴 ‘클라우스 효과’가 일어났기 때문은 아니었고, 오히려 벤의 존재가 클라우스의 다른 면을 열어 주었음에 가까웠다. 의식/무의식적으로 생각 없는 척을 해대는 클라우스가 본인의 어두운 면을 원하든 원치 않든 다 드러낼 수밖에 없는 유일한 친구다.


그리고 이와 유사하게, 저스틴 민의 담백하면서도 뚜렷한 벤 표현법은, 유일무이하게 재기 넘치고 화려한 만큼 어수선하게 다가오기 쉬운 로버트 시한의 클라우스 표현법과 만나 균형을 이뤘다. 로버트 시한의 창의적인 흐느적거림을 듣다가 저스틴 민이 정갈한 발음으로 흩뿌리는 비속어를 들으면 오히려 귀가 맑아지는 기분이 든다. 시즌 막바지에서 클라우스의 심화된 능력이 발현되면서 그 케미가 새로운 방향으로 뻗는 것도 소소한 재미다.


<엄브렐러 아카데미>(Netflix). IMDB.


벤은 의심 없이 일곱 맴버 중 가장 선하고 바른 성품을 지녔고, 정도 많다. 마냥 착한 것이 아니라 옳고 그름에 대한 잣대가 확실해 항상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다(파이브의 그것과는 다르다). 그러니,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던 ‘형제자매’들이 벤만은 앙금 없이 그리워하는 까닭이 ‘단지 죽었기 때문’일 리는 없다. 이와는 별개로, 미션 도중 일어난 그의 죽음이 모두의 심장에 구멍을 뚫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비교할 수 없이 가장 커다랗고 아픈 구멍은 벤 자신의 마음에 나 있을 테다.


작품은 벤이 겪은 비극을 뭉뚱그려 한번에 부각하기보단 군데군데 흩뿌려 놓았다. 납치당한 클라우스가 벽장에 갇혀 정신을 잃어가고 있을 때, 벤은 감정이 살짝 격해져 물기가 비치는 소리로 “내가 잃어버린 모든 걸 내 형제가 낭비하는 걸 지켜보는 것이야말로 진짜 고문이야.”라고 뱉는다. 그늘 안에서도 안타깝게 빛나던 눈이 이내 내리깔린다. 벤이 원해서 꺼낸 말이 아님을 저스틴 민은 알고 있다. 고통을 전시하지 않고 한구석에 숨겨 균형을 잡아 놓았다가, 잠깐 드러내곤 다시 감춘다. 그때 시청자는 그것이 늘 그 자리에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시즌1에서의 벤을 보고 있으면 ‘동등한 위치의 사이드킥’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클라우스의 능력이 그를 이승에 불러온 것이므로 벤의 등장은 (거의) 필수적으로 클라우스의 등장을 전제하는데, 클라우스의 등장이 반드시 벤의 등장을 예고하는 건 또 아니다. 몸이 없는 벤처럼 저스틴 민은 제약이 많은 연기를 해야 했다. 복장이 늘 같은 것은 물론, 행동 반경은 좁고 분량도 적다. 대화 상대도 하나뿐인데 그마저 주로 중심은 저쪽에 있다. 저스틴 민은 존재감과 개성을 유지하면서도 늘 로버트 시한을 보조하는 방향으로 조절해야 했고, 감정의 폭을 지니되 홀로 튀어서는 안 되었다. 배우로선 조금 갑갑하고 불안한 역할일 수 있다. 자칫 ‘꼭 내가 맡을 필요는 없는’ 캐릭터가 되어버릴 수도 있지 않겠는가.


시즌1에서의 한정된 범위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매력을 “증명”(그가 [씨네21] 인터뷰에 쓴 표현을 가져왔는데, 따로 ‘증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음에 가깝다.)했다. 그러나 어째서 벤 하그리브스가 저스틴 H. 민이어야만 했는가를 직관적으로 납득하게 하는 결정적인 컷들은 시즌2, 오히려 그가 등장하지 않는 장면들에 있었다. 벤이 클라우스의 몸에 들어간 상황에서 로버트 시한이 벤을 연기하는 부분들이었다. 같은 캐릭터를 세월의 흐름이 아닌 요인으로 다른 배우가 연기하는 흔치 않은 볼거리를 맞닥뜨리게 되면, 나와 같은 캐릭터/배우 중심 관객은 사심을 한가득 안고 집중하게 된다. 일단은 로버트 시한의 능청에 감탄했다. 제 분신과도 같은 역할들로 인기를 얻었으나 사실 연기 폭이 충분한 배우임이 새삼 와닿았다. 그럼에도, 어울리지는 않았다. 캐스팅의 기준은 연기력이 다가 아닌데다, 그 ‘연기력’이라는 것도 무슨 그래프로 그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연기는 배우와 작품마다 각각 다른 모양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예술’이므로--- 옆으로 샜는데, 클라우스가 로버트 시한 아니고선 상상할 수 없는 사람이듯, 벤 역시 저스틴 H. 민을 통한 유령이어야만 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몸을 만끽하며 과일을 따먹거나 맨발로 흙을 밟는 벤을, 모조리 다 저스틴 민의 연기로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나 버린 것이었다.


<엄브렐러 아카데미>(Netflix). IMDB.


시즌1에서도 ‘다른 것’을 기대하게 하는 순간들은 종종 있었다. 아이스크림 트럭 운전대에 걸터앉아 해맑게 신나하는 모습은 새로우면서도 왠지 당연하게 다가왔다. 저스틴 민이 그동안 절제하며 맞춰 놓은 리듬이 단조로운 듯 다채롭게 퍼져 있어서였다. 그것들을 바탕으로, 다음 시즌에서는 벤의 캐릭터가 보다 단독적이고 풍부해진다. 1화 초반, 시간여행을 한 직후 괴로워하는 클라우스 옆에서 벤은 “짜릿했어.”라고 중얼거린다. 그 톤의 미묘함을 눈여겨본 시청자가 나뿐은 아니었을 테다(얌전하게 돌아버린 모범생 같았달까). 보다 ‘개인적인’ 모먼트를 보여 줄 시즌2의 벤에 대한 예고였다.


(60년대인데!) 어쩔 수 없이 또 같은 옷을 입고 있음에 대한 아쉬움을 잠재울 만큼 저스틴 민이 풀어준 자잘한 근육들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클라우스와 아스팔트에서 퍼덕대고 싸우는 모습은 명랑할 지경이고, 그렇게 틀어져서 ‘안 도와주며’ 얄밉게 짓는 미소에는 ‘생기’가 넘친다. 여전히 무책임한 교주 대신 컬트 신도들을 걱정하는 그지만, 사적인 바람이 생긴 벤은 ‘다른 의미로 인간적’이다. 그것을 위해 심지어 클라우스의 몸에 빙의할 것을 부탁하기도 한다. 전에 없이 간절하게 얼굴을 구기고, 허락을 받자 신난다는 듯 씩 웃고 마구 뛰어들어간다. 무욕에 익숙해 보이던 벤이 이토록 무언가에 욕심내는 걸 보니 왠지 반갑다.


그렇게 벤은 잠깐이나마 타인과 체온을 나누게 된다. 너무 오래 붙어다녀서인지 지긋지긋하고 익숙한 애증 느낌인 클라우스와 달리 다른 형제들과의 만남엔 그저 애정만이 있다. 시즌1, 담백한 벤의 시선에 있던 그 애틋함이 쌍방으로 만나는 장면들은 벅차고 부족했다. 그렇기에 더, 바냐를 구하며 벤이 사라지는 전개는 완벽한 만큼 너무했지만, 저스틴 민의 연기가 몹시도 아름다워 제작진을 원망할 수조차 없었다.


<엄브렐러 아카데미>(Netflix). IMDB.


바이올린 속에 갇힌 바냐를 벤은 찾아낸다. 가장 부드럽고 상냥한 말투와 목소리로 속삭인다, 고요하게 눈을 맞추고 손을 포개며. 그 말이 바냐의 마음을 건드린 것은 내용과 태도가 모조리 진심이라서였다. 식상한 표현으로 들리지만 정말 그러했다. 벤은 머릿속에서 단어를 고를 필요도 없이 할 말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듯했다. 한 번도 바냐를 소중히 여기지 않은 적이 없으니, 그저 속마음을 그대로 꺼내 놓으면 되었던 것이다. 벤은 빛방울로 조각나기 시작하는 제 실루엣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애써 미소짓던 그가 “클라우스와 함께한 17년은 보너스 같은 거였어.”라고 하며 결국 목이 메일 때부터…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벤은 안아달라는 부탁이 담긴 문장을 다 끝맺지 못한다. 빛에 휩싸여 점점 흐려지는 얼굴에, 저스틴 민은 오래된 그리움을 담아냈다. 보통 사람은 닿을 수 없는 깊이를 지닌, 어느 한 곳 꼬이거나 어두운 데 없이 깨끗하고 환한 정서였다. 벤은 바냐의 품에 안겨 눈을 꼭 감은 채 푸른 빛으로 흩어진다.



<애프터 양>(2021). 왓챠피디아.


<애프터 양>, ‘고장나’ 눈을 감고 늘어져 있는 양은 언뜻 벤과 반대의 상황에 놓인 듯했다, 무방비하게 보여지면서 자신은 상대방을 인식하지 못하는. 그러나 과거의 양은 벤처럼 늘 소중한 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회상 속의 양, 그리고 양의 기억 조각들에는, 사라지던 순간 벤의 정서와 유사한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벤의 경우 다 이해한다고 하기 힘듦에도 설명할 수는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면, 양의 것은 끝까지 다 알 수 없는 공백들로 가득했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들 자체가 양을 구성하는 요소였다. 저스틴 민이 비워 두기로 결정한 공간이었다.


앞서 벤이 갖는 특성들이 유령의 것이 아닌 (유령인)벤의 것이라고 했듯 양의 표정들은 양만의 것이었다. 그의 반응은 주로 느릿한데, 굼뜨거나 느긋하지는 않다. 섬세하고 신중하다. 인간에게 으레 있는 빈틈은 없지만 머뭇거림이 있다. 몸짓, 응시하는 눈빛과 각도, 말의 톤과 흐름… 하나하나의 깊이가 아득했다. 미카가 ‘양도 그렇겠다(붙은 가지처럼 가족이 된다)’고 말했을 때 양은 잠깐 눈을 내리깔며 그늘을 내비친다. 제작된 안드로이드인 양은 이상하게도 종종 무수한 감각을 기억하는 노인의 얼굴을 한다. 반대로 자꾸 이것저것 물을 때는 ‘안드로이드 같으면서’ ‘아이 같기도’ 한데, 거기엔 단순한 호기심 이상의- 상대에 대한 애정과 관심 같은 것이 살짝 묻어난다.


<애프터 양>(2021). 왓챠피디아.


제이크에게 기억에 관해 말하다 “생각의 끈을 놓쳤다.”고 할 때, 키라에게 “끝에 아무것도 없어도 괜찮을 것 같다.”고 한 후 “아마 그렇게 프로그래밍 되어 있나 보다”고 할 때, 양은 아련한 눈을 허공에 두고 목소리나 눈동자를 미세하게 떤다. 그 흔들림을 관객은 감지하지만 무어라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다. (‘인간적인’ 정서를 느껴버린 순간들이었을까?) 그럴 때면 양은 기억을 차곡차곡 저장하듯 감정도 가슴에 쌓아 놓으려는 것만 같다. 그의 슬픔은 -이를 테면 ‘인간이 아니라’는- ‘결핍’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에이다가 말했듯). 오히려 그만이 기억하는 것들이 벅차 생기는 것으로 보이고, 행복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One moment.” 낡은 카메라 뒤에서 양은 세 사람을 가만히 바라본다. 햇빛 탓인지 살짝 인상을 쓴 채다. 엷고 희미한 미소에는 행복과 슬픔이 조화롭게 섞여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은 묘하게 아려온다. 그저 보는 것이 아니라 저장하는 것이라서였을까, 양의 모든 응시는 정적이면서 풍부하다. 그의 기억들이 화면에 흐를 때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까닭 중 하나는, 거기에 관계로 자신을 채우려는 욕심이 전혀 비치지 않아서다. 상대방이/세상이 거기 있다는 것 자체에 만족하고 있음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그의 응시와 닮아 있는 정서다. 어쩌면 양은 행복하다, ‘이제 됐다’고 여겨 무의식적으로 움직임을 멈추었는지도 모른다. ‘모른다’고 적었듯 확신할 수 없는 문장이지만, 저스틴 민이 간직한 결들이 상상을 도왔다.


<애프터 양>(2021). 왓챠피디아.


양은 작품의 중심에 자리하기보단- 그의 메모리들처럼 <애프터 양>의 우주에 흩뿌려져 있는 것만 같았다. 저스틴 민의 연기도 그랬다. 크지 않아 넓고 깊었다. 양처럼 은은하게 빛났다. <콜럼버스>(2017)에서도 느꼈지만 코고나다 감독이 포착하는 감정들은 주로 잔잔하게 흐르고 때로는 모호한 것들이다. ‘혼란과 여백’을 남겼다고 저스틴 민이 말하기도 했듯(2022.05.01, [씨네21]), 감독과 배우 모두 양이 지닌 것들은 특히 더 규정하지 않으려고, 완전히 다 드러내지 않으려고, ‘모르는 것은 모르려고’ 애쓰며 조심스럽게 균형을 잡아 내려놓은 듯했다.


작품은 제이크와 키라의 기억 속 양을 그릴 때 카메라 앵글과 무브, 사운드에 변화를 주며 컷을 잘게 쪼개고 다른 형태로 반복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종종 양의 측면 얼굴을 클로즈업하는데, 정면일 때는 드러나지 않던 감정의 결이 비치는 찰나가 있었다. 그게 무어라 묘사하려니 어떤 언어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애프터 양> 속 저스틴 민의 연기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자주 막혔고,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어쩌면 멈추는 것이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현할 말이 없다.”던 차의 맛과 닮은 듯도 했다. 저스틴 민은 그렇게 경계에 있거나 알 듯 말 듯한, ‘모호한 채로 완전한’ 여백들을 신중하게 흘려보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좀처럼 접하기 힘든 종류의 것들이었는데, 참신하다거나 낯설다는 수식은 왠지 어울리지 않았다.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지만 마주하는 순간 낯익음을 감지하게 되는, 말하지 않음으로 모든 것을 말하는, 그래서 너무나 귀한 움직임들이었다.


<애프터 양>(2021). 왓챠피디아.




실은 저스틴 민이 SNS에 포스터를 올렸을 때에야 <애프터 양>을 알게 됐다. 이제껏 존재도 몰랐으면서 기다려왔던 작품임을 깨달았다. <엄브렐러 아카데미> 시즌2의 끝에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등장한 벤이 못내 아쉬웠음에도, 저스틴 민의 팬으로서는 설레기도 했던 차였다. 트레일러를 보다 ‘Yang’과 함께 ‘fix’, ‘buy’, ‘core’와 같은 단어가 들렸을 때, ‘또 사람이 아니구나’라고 무심코 중얼거리며 넉 달 정도 미리 이 글을 기획했다. 벤과 양, 이 ‘비인간’들은 저스틴 민이 지닌 무해한 에너지를 통해 가장 ‘인간적’이고 아름다운 형태로 전달됐다.


“할리우드에서 아시아계 배우로서 살아남는 일은 사실상 끊임없이 자기를 설명하고 증명하는 과정에 가깝다……….나도 모르게 나와 내가 맡은 캐릭터가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믿는지, 또 외양적으로 어떤 모습이어야만 하는지 제작진을 설득시키는 것에 그냥 익숙해져 버린 거다. <애프터 양>의 촬영장에선 그런 곳에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괜찮았기 때문에 배우로서 어느 때보다 안심이 됐다. 안전지대에 있다는 느낌,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 저스틴 H. 민, 2022.05.01, 인터뷰 김소미, [씨네21]


벤 하그리브스 만으로 충분히 그에게 빠져들었고, 벤을 더 좋아하게 될수록 이 배우의 다른 표정들이 궁금해졌다. 인터뷰 등의 콘텐츠를 보고 배우 본인은 벤과 닮아 있지 않을까 지나가듯 짐작했었다. <에프터 양>을 보고 갑자기 그에 대해 전혀 모르게 됐다. 그래서 기뻤다. 이제야 목격한 저스틴 민의 두 번째 얼굴은, 눈물나게 특별했다. 그가 앞으로도 ‘안심할 수 있는’, ‘다른 것에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되는’ 현장에서 일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시안이 아니어야 하는’ 것도 ‘오로지 아시안이기만 한’ 것도 아닌, 다양하고 입체적인 역할들을 연기하는 저스틴 H. 민을 꾸준히 보고 싶다.


출처: GQ Magazine



*참고 인터뷰

http://m.cine21.com/news/view/?mag_id=100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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