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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Jun 14. 2022

이주영이라는 브랜드

이주영



<몸값>(2015, 감독: 이충현)

<삼진그룹 영어토익반>(2020, 감독: 이종필)

<액션히어로>(2021, 감독: 이진호)

<윤시내가 사라졌다>(2020, 감독: 김진화)

<메기>(2018, 감독: 이옥섭)

<걸스 온 탑>(2017, 감독: 이옥섭, 구교환)

 

* 위 작품들의 구체적인 장면과 전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몸값>(2015). 왓챠피디아.


어느 허름한 모텔방, 교복 차림으로 담배연기를 뿜고 있는 단발머리 여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화면에 적혀 있는 제목은 <몸값>(2015). 이어 중년 남자가 들어온다. 여자는 살갑게 남자를 맞은 후 다시 앉아 담배를 핀다. 허리를 굽히고 한 다리를 올려 적당히 흐트러진 자세다. 남자는 ‘처녀’를 원한다. 여자는 웃음기를 거두고 어떤 이야기를 털어놓고, 남자는 서서히 화를 내기 시작한다. 그런데, 여자가 웃는다. 시종일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참기 힘들다는 듯 얼굴을 돌리기도 하고, 남자가 소리를 지르자 고개를 꺾으며 폭소한다. 잠깐 긴장해 정색하더라도 금새 풀어진다. 그 여유, 대체 뭘까. 몹시 궁금해진다. 내가 작품을 보기 시작한 까닭은 이미 이주영이었지만, 그를 모르고 봤다면 이쯤에서 배우의 이름도 궁금해졌을 게다.


딱 적절히 평범하게 자연스러운 톤으로 시작해 ‘뭐지 얘?’라는 호기심이 왕창 생겨나는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이주영의 흐름엔 한 점의 어색함도 없었다. 상대역 박형수의 정돈된 능숙함과는 또다른 느낌이었다. 말의 톤이나 표정에 다듬어지지 않은 에너지가 있었는데, 그대로 매력적이었다.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비웃듯 날카롭게 응시하며 여자의 웃음은 잦아든다. 이후 상상도 못했던 반전은 최대로 효과적이고 만족스러운 형태로 전달된다. 과감한 상상력과 깔끔한 원테이크의 연출에 화룡점정을 찍은 것은 단연 이주영, 이주영의 여유로운 카리스마였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2020). 왓챠피디아.


이주영은 유독 담배와 함께 자주 등장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2020)의 송소라 역시 등장하는 대부분의 컷에서 담배를 들고 있다. 오프닝, 행진(?)하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맴버들 사이에서 송소라의 실루엣은 조용히 튄다. 이솜에 맞먹는 큰 키와 결코 ‘보통’ 단역일리 없음을 주장하는 대놓고 뚱하고 띠꺼운 표정. ‘을’인 척만 했던 <몸값>의 여자와 달리 송소라는 정말로 회사에서 ‘을’ 미만의 위치에 있지만 태도는 어쩐지 ‘최종적’이다. 그는 남에게 잘 보이려 애쓰지 않는다. ‘제 앞가림에 집중하는’ 유나와 닮아 있어 서로 동족혐오를 하는 듯 보이기도 하는데, 좀 더 건조하고 이기적인 투다. 힘을 뺀 눈을 날카롭게 뜨며 귀찮은 듯 말을 흘리고, 비웃듯 눈을 내리깔고 입꼬리를 올린다. 잘 보여야 한다면, 그것도 제 페이스대로 한다. “어머 무슨 말씀이세요, 저 담배 안 펴요.”라며 내숭을 떠는- 낡은 코미디 클리셰를 눈감아 줄 수 있는 까닭은 간단하다. 그 웃음과 대사를 이주영이 딜리버리하기 때문이다.


작품은 송소라를 결정적인 정보를 건네는 ‘다크호스’이자 장면의 매력을 끌어올리는 ‘약방의 감초’로 택했다. 어쩌면 당연하다. 만만치 않은 개성을 뽐내는 세 주인공이지만, 송소라가 등장하면 화면은 그의 것이다. 이주영은 성공적으로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짝다리를 짚고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연기를 후 내뿜는 그의 제스처는 과하지 않게 드라마틱하다. 천천히 담배를 건네는 손짓에 묻어나는 내공이랄까. 왜 송소라는 인생을 한 번 더 산 사람 같은 걸까. 유유히 프레임에 들어왔다 또 나가며 깔끔하게 선을 긋는 쿨함은, 이후 술에 취해 엎드려 있다가 정감 있는 욕을 내지르는 짧은 씬과 충돌하며 캐릭터를 더욱 살린다. 깊은 연기보단 타고난 분위기가 요구되는 역할들이었으나, 연기가 적절하게 맺고 끊어주지 않았다면 상당히 어색했을 터였다.


<액션히어로>(2021). 왓챠피디아.


늘 그렇게 ‘머리 위에 있는’ 듯한 역할로 스크린을 차지했던 것은 아니었다. <액션히어로>(2021)의 윤선아는 차교수의 노예…아니 조교다. 그야말로 진정한 ‘을’ 미만, 너무 바빠 성실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을 이주영은 또 저만의 온도로 소화했다. 선아에겐 얄밉도록 친절하게 피곤하냐고 묻는 차교수에게 거짓 미소를 띄울 힘도 남지 않은 듯하다. 이주영 특유의 ‘말 하는 둥 마는 둥’은 여기서, 반복되는 과로와 불안에 치여 녹초가 기본값이 돼버린 이의 상태를 드러낸다. 선아는 주로 습관처럼 멍하게 이 일 저 일을 처리한다. 매 동작에 일상적 피로가 묻어난다. 화나 짜증을 낼 때도 눈을 부릅뜨고 곧게 내지르는 대신, 못 견디겠다는 듯 안면 전체를 찡그려 울상을 만들고 잔뜩 까지는 목소리를 흐물흐물 내보낸다.


그가 자신을 우러러보는 주성을 대하는 태도가 작품 전반부의 묘미 중 하나인데, ‘너에겐 내 에너지를 쓸 가치가 1도 없다’는 뉘앙스다. 성의없는 미소를 지어주며 발음을 흘려 대강 거절한다. ‘죠리퐁 라떼’ 사건 때도 일관되다. 화내는 진상에게 대충 사과를 반복하며 멍하니 있다가, 주성이 영웅이라도 된 듯 끼어들자 딱 ‘쟨 또 뭐야’의 표정으로 그저 눈알을 굴리며 지켜본다. 음료가 쏟아지자 눈을 꽉 찡그리고, 진상이 경찰을 요구하자 다시 스르륵 감는다. 이번엔 그의 속마음이 들리지 않지만, 관객은 거기서 각각 ‘내가 치워야 되잖아’와 ‘일 커지네’를 읽을 수 있다.


<액션히어로>(2021). 왓챠피디아.


왠지 마지막 선아의 선택을 예측할 수 있었는데, 그 실마리는 이주영과 장인섭 각자의 연기 그리고 그 합에 있었다. 선아는 교수가 시키는대로 성적을 조작하더라도 늘상 솔직한 표정을 내보였다. 그는 재우처럼 감정을 연기할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다. 피곤하면 피곤이 드러나고, 짜증나면 짜증이 드러난다. 재우의 상냥함엔 어딘가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다. 그러나 어설퍼 다 티가 나고, 배포가 작아 자주 제발을 저린다. 그역시 공감 가는 인물이지만- 붙잡히자 남탓으로 돌리고 필요 이상으로 굽실거리는 보잘것없는 모양은, 그를 적당히 가볍게 미워하도록 만들었다. 제가 일을 벌려놓고도 어쩔 줄 몰라하던 재우와 달리 ‘탈출’을 위해 ‘빌런’이 되기로 한 선아는 서늘할 정도로 확실하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망설임 없는 투로 작전을 지시하는 그에겐 오랫동안 쌓인 독기가 서려 있다. 장인섭이 능청스럽게 재우에게 드리운 분위기와 대조되는 아우라가 있다. 하면 제대로 하는 것이고, 아닌 건 아닌 것이다. 이주영은 그걸 강조하지도 숨기지도 않고 -지니고 있되 의식하지 않고 있다가 ‘그래야 할 때’ 멋지고 담백하게 꺼냈다. 굳이 비교하자면 재우가 그 줏대/바탕을 영영 잃어버렸다면(혹은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면) 선아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것이었을 테다.


다시 죠리퐁 라떼 씬으로 돌아가 본다. 선아는 잘못하지 않은 일로 사과할지언정 억지 미소를 짓지 않고, 잘릴지언정 무릎은 꿇지 않는다. 안그래도 억울한데 빌라는 점장의 말에 울컥, 그 말을 듣기라도 하려는 듯 다가간다. 그러나 말은 않고 입을 꾹 다문 채 저놈을 조용히 노려보다, 싸우기조차 귀찮다는 듯 주성에게 휙 시선을 돌리고 머리를 찰싹 때린다. 욕을 섞어 투덜대고 쿨하게 돌아서 터덜터덜 걸어간다. 거기서 살짝 비쳤던 것이, 차교수를 향해 옆차기를 하거나 경찰서에서 그의 부정을 폭로할 때 완전히 발견된다. 그럴 때면 선아는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사람이든 허공이든 한 점을 가만히 노려보다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결정적인 제스처를 날려버린다. 선아에겐 액션히어로다운 깡이, 선택의 기로에 놓인 순간 내던지지 않는 자존심과 잣대가 남아 있었다.


덧붙이면: 이주영의 액션이 아쉽다는 평들이 보였는데, 능숙하진 않았지만 개인적으론 영화의 톤을 고려했을 때 그리 나쁘지 않게 다가왔다. 대강대강 그러나 열심히, ‘귀찮게 우이씨’의 느낌으로 날리는 발차기. 남은 어색함은 휙 뒤돌아 째려보는 완벽한 각도가 커버했다.


<윤시내가 사라졌다>(2020). 왓챠피디아.


<액션히어로>를 보며 어떤 ‘역할’이나 이미지 중심이 아닌, 개성을 유지하면서도 ‘평범한 주인공’으로서 입체적인 이주영을 목격했다는 생각에 기뻐했다. 그런 면에서 <윤시내가 사라졌다>(2020)는 더욱 기쁜 작품이었다. 장하다의 옷을 입은 이주영은 좀 다른 차원/방향으로 입체적이었다. (TV쇼는 보지 않았으므로)이제까지 중 가장 다채로운 그의 얼굴을 만났다.


장하다의 핸드폰 배경은 웃고 있는 장하다의 얼굴이다. 그는 소위 ‘관종’, 스스로 그것을 잘 알고 적극적으로 불특정 다수의 관심을 갈구한다. 헤어진 전 애인을 찾아가 ‘씬’을 만들어 몰래 찍어 올릴 정도. 셀카봉을 들고 활짝 웃으며 능청스레 애교를 부리고 몸을 흔든다. 매초 바뀌는 표정은 실감나면서 적절히 가볍다. 장하다의 컷들은 일단 ‘재미있다’. 그가 ‘연출하는 씬’들도 그렇고, 취해 눈을 꽉 감고 팔을 휘젓는 등 프레임 바깥의 의도치 않은 씬들 역시 그렇다.


그에겐 ‘어떻게 보여지는가’보다는, 보여지는 것 혹은 지워지지 않는 것 자체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 하다는 ‘남들이 뭐라든 아랑곳하지 않는’ 식으로 관종이 된다. ‘무플보단 악플’이라 말하고, 카메라 앞에서 표정이 굳어져도 신경쓰지 않는다. 그의 방송이 인기 있는 까닭은 단순히 소재의 화제성에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유튜버스러운’ 흔한 톤을 취하더라도 흔하지 않은 데가 있다. ‘이미지 관리’를 하지 않는, 날 것을 보여준다는 느낌인데, 부담스럽지 않고 유쾌하다. 콘텐츠에 집착해 자주 타인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방향으로 써먹는 게 굉장한 문제일 뿐. 하다에겐 타고난 끼가, 시선을 끌어모으는 재능이 있다. 그건 한층 풍부한 이주영의 재능이기도 하다. 카메라 앞에서 가식 없이 완전히 자유롭고 자연스러울 수 있는 재능, 이번 작품에서 그 ‘카메라’는 두 종류로 나뉜다.



<윤시내가 사라졌다>(2020). 왓챠피디아.


대개의 방송인이 그렇듯 하다에게도 방송용 마스크가 따로 있다. 이주영은 최선을 다해 열심히 노는 느낌으로 방송용 하다를 표현하는데- 계속 다른 자아를 연기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연기를 한다는 뉘앙스가 없다. 거기엔 왠지 낯익은 느낌이 섞여 있다: 어떤 일에 익숙해지면 일을 하는 중임을 잊고 그저 행위에 몰입하게 되는 순간을 맞이하기도 하는데, 하다가 그래 보인다. 그런 상태에선 일을 하는 까닭이나 옳고 그름에 대한 균형도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 애초에 하다에겐 그런 것들이 중요치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엄마처럼 가짜 이름을 걸고 진짜로 즐기느니, 거짓이든 진심이든 내 진짜 이름을 좋아해주면 족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카메라가 돌지 않으면 하다는 거의 웃지 않는다. 상냥하지 않은 것을 넘어 종종 기본적인 예의를 탑재하지 않은 사람 같을 때도 있다. 여기서 ‘이주영스러운’ 제스처들이 가장 ‘못된’ 방향으로 빛을 발한다. 흘기는 눈초리, 틱틱대는 말투,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건들거리는 자세, 총체적으로 ‘싸가지 없는’ 태도가, 이주영을 통해 너무나 흥미롭게 발현된다. 하나 남은 반찬을 기어이 준옥의 젓가락에서 앗은 후 시치미를 떼는 ‘만행’도 그저 웃기다. 장하다의 잘못을 나열하자면 할 수 있지만, 어쩐지 좀처럼 그를 미워할 수 없는 첫 번째 이유가 그것이다. 그의 컷들이 잣대를 들이댈 겨를 없이 재미나다는 것. 평가하기 전 일단 빠져들게 된다. 당연히 픽션이었기에-하다의 방송처럼 ‘실제 상황을 몰래’ 찍고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가능했던 몰입이었는데, 이주영의 존재감을 효과적으로 담아낸 재치 있는 연출이 영화관에 있다는 것을 잊고 몰입하게 했다.



<윤시내가 사라졌다>(2020). 왓챠피디아.


 번째이자 진짜 이유는, 왠지  속에 다른  있을 것만 같아서였다. 작품 초반 하다는 순이를 대놓고 무시하는데, 치켜뜬 눈과 튀어나온 입술에는 상처어린 독기 같은  묻어 있다. 작품은 장하다가 ‘관종  데에는 엄마의 애정과 관심에 대한 결핍이 작용했고, 본인이 내내 그것을 되새기고 있었다고 보았다. 하다는 화면  자신을 보며 짜증내는 엄마를 목격했던 시절에 멈춰 있었던 걸까. 힘줘 뱉는 ‘있잖아, , 하지 않으려 했지만 사실은 하고 싶었던, 이십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매일 떠올리던 말처럼 들렸다. 그렇게 모녀는 서서히 진심을 터놓지만, 엉엉 울고 껴안으며 극적으로 화해하진 않는다. 이주영은 감정표현에 서툰 하다의 속을 쉽게 내놓지 않았다. 하다는 아예 감추고 싶어한다기보단,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라 위악으로 어설프게 가리려 애쓰는  같았다. 그러다 마지못해 터져버리는 형태 역시 능숙하진 않았으나, 그렇기에 (순이 말대로) ‘진정성이 있었다’. 깊다기보다는 곧고 솔직했다. 노래하는 엄마를 찍기  망설이는 얼굴, 이후 윤시내를 쫓아나가 대화하다 울먹이는 , 저도 모르게 일그러지는 근육의 움직임은 진짜로, 진짜였다. 그건 의식적으로 만드는 표정일 수가 없었다.


순이와 순이가 하는 일에 대한 하다의 정서와 태도 변화는 그들이 직접 나눈 대화로만 표현되지는 않았다. 이주영이 사이사이 던져 놓은 표정들이 그 실마리를 조금씩 풀어갔는데, 결정적인 모먼트는 오히려 순이가 화면에 없던 장면들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저런 감정이 생겨날 때마다 익숙한 짜증으로 가려버리던 하다는, 준옥이 알아채자 또다시 대강 덮으려다 ‘당신이 무엇을 아냐’고 정면으로 묻는다. 약한 곳을 내보이고 싶진 않은 듯 상대를 노려보는데, 해묵은 상처가 새어나와 눈이 여리게 떨린다. 이후 준옥/운시내의 공연에 무방비하게 집중하는 얼굴, 준옥을 개인 소장용으로 찍고 싶다고 하는-방어적 적대심이 사라지고 스스럼없이 쭈뼛거리며 웃는 얼굴까지. 자잘한데 시원시원한 이주영과 소심한 듯 따스한 노재원의 다이나믹은 이주영과 오민애의 것 못지않게-또 다른 느낌으로- 흥미진진했다.


마지막 씬, 노래하는 엄마 옆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는 하다는 조금은 ‘진짜로’ 신난 듯하다. 타인을 찍는 까닭도 관심을 자신에게 쏠리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전과 달리, 포커스를 그냥 엄마에게 넘겨줘 버린다. 애써 즐거우려 하지 않아 한결 편안해 보인다.


<윤시내가 사라졌다>(2020). 왓챠피디아.



여전히 지울 수 없는 개성은 있지만, 사뭇 다른 온도와 스타일의 이주영을 접할 수 있는 작품이 바로 <메기>(2018), 지연의 스크린타임은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송소라보다 짧을 듯도 하지만, 그또한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 중 하나다. 그는 윤영의 애인인 성원의 전여친, 그러나 어쩌면 성원보다 더 윤영과 ‘가까이 있는’ 사람이다. 흔한 로맨스 드라마 데이터가 뇌에 축적된 탓에 윤영의 ‘경쟁자’로서 성원을 빼앗으려 거짓을 꾸며내는 전개를 자동으로 예측했을 수도 있는데, 지연의 무해함은 그 의심을 금새 다 지운다. 그건 손에 든 봉지 위로 튀어나와 있는 파 줄기나 알밤을 닮은 모자만으로 만들어진 분위기가 아니었다.


위화감이나 적의, 꾸며낸 구석이 하나도 없는 미소로 윤영을 맞이한 지연은 분위기를 풀려는 듯 갈매기 이야기를 하고는 쑥스러운 듯 다시 웃음을 흘린다. 거기엔 형식적 예의보단 순수한 호의가 있다. 왠지 그는 가식이 불가능한 사람 같다. 그 미소가 사라지며 그늘이 드리워진다. 지연은 빙빙 돌리지 않는다. 끝이 웅얼대듯 잦아드는 것이 이주영의 말투지만, 필요할 때는 나름의 분명함이 생긴다. 이어 지연은 허공에 눈을 두고 한숨을 푹 내쉬기도 하며 오래 망설인다, 상처에 여러 겹으로 감아놓은 붕대를 풀어내는 시간이 필요한 듯. 그러더니 정작 말은, 상대의 눈을 똑바로 보며 담백하게 툭 뱉는다. 거기에는 무게가 있었다. 그건 거짓일 수가 없었다. 지연의 눈가에 담긴 아픔과 그 순간을 대하는 윤영의 진지한 태도, 두 이주영 배우의 연기가 말했다. 카메라 역시 지연을 조심스럽게 존중했고, 이주영은 작품에 어울리는 가장 적절한 톤으로 그의 마음을 내려놓았다.



<걸스 온 탑>(2017). 왓챠피디아.


목격한 순간부터 좋아하게 되리란 예감이 드는 배우가 있다. 외모의 취향만으론 설명할 수 없는 끌림이 생겨나고, 화면에 등장하는 시간이 얼마든 그 동안에는 감각을 뺏겨버린다. 이주영과의 첫 만남은 2X9 유니버스 안에서 이루어졌다. <걸스 온 탑>(2017), 핸드폰 화면으로 겨우 몇 분 동안 본 그는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처음 보는 느낌의 배우여서 잊을래야 잊을 수 없었다고 할까. 온통 번쩍이는 원피스를 입고 천우희 옆에서 외발자전거를 타..기보단 굴리다가 넘어지는 이주영, 서커스 분장을 하고 카메라를 응시하는 이주영. 와중 투정을 부리거나 투덜대듯 대사를 뱉으며 입을 쭉 내밀거나 씩 웃는 그의 에너지는, <뎀프시롤: 참회록>(2014), 조현철 옆에서 장구를 치던 구교환의 것이 그랬듯 유일했다.


그는 자체로 이미 브랜드다. 개성있는 실루엣과 마스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거기 있는 것만으로 독보적인 존재감을 뿜어낸다. 그러나 독특한 제스처가 조합되어 이주영이라는 브랜드를 완성한다. 높낮이나 발음의 정확도가 종종 일정치 않아 웅얼거리기도 하는 말투를 이주영은 ‘고치지’ 않았다. 되려 그것을 시그니처화 했다. 눈에 힘을 빡 주기는커녕 확 빼버리고, 야무지게 입을 다물거나 예쁘게 미소짓는 대신 멍하게 벌려 놓거나 대놓고 뚱하게 입꼬리를 내렸다. 삐딱하게 서 있었고, 터덜터덜 걸었다.


이주영이라는 배우를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개성있다/ 독특하다/ 독보적이다/ 유일하다... 앞에서 사용한 어떤 수식어도 그의 여유 앞에서는 맥을 못 추고 평범해진다. 혹시라도 아주 만약에, 자기주장 강한 이미지가 서사를 뚫고 나와버린다는 느낌을 받았대도 그건 그의 탓이 아니다. 작품이 이주영을 다 담지 못한다면 담아낼 수 있는 캐릭터를 새로 써야 한다! 앞의 두 문장은 반 농담, 그는 능숙한 배우이므로 언뜻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인물이래도 저만의 방식으로 소화해낸다. 제 특징들을 그대로 두고 유연하게 옷을 바꿔 입어,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역할과 어깨동무를 해버린다. 그래서 나는 아직 소식이 없는 그의 차기작에 미리 설레고, 팔자에도 없는 한국 드라마 시청을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윤시내가 사라졌다>(2020). 왓챠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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