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배웁니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제모름 Jun 25. 2022

우리는 샬롯 램플링을 모른다

샬롯 램플링 Charlotte Rampling




* 참고 작품

<비엔나호텔의 야간배달부(Il Portiere di notte)>(1974, 감독: 릴리아나 카비니)

<듄(Dune: Part One)>(2021, 감독: 드니 빌뇌브)

<베네데타(Benedetta)>(2021, 감독: 폴 버호벤)

<아이 오브 더 스톰(The Eye of the Storm)>(2011, 감독: 프레드 쉐피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The Sense of an Ending)>(2017, 감독: 리테쉬 바트라)

<영 앤 뷰티풀(Jeune & Jolie)>(2013, 감독: 프랑수아 오종)

<스위밍 풀(Swimming Pool)>(2003, 감독: 프랑수아 오종)

<45년 후(45 Years)>(2015, 감독: 앤드류 헤이)


* 위 작품들의 구체적인 장면과 전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근 <트윈 픽스> 시즌3 시청을 시작했다. 동일한 인물을 연기함에도 25년의 간격을 건너 돌아온 배우들이 각자 축적해 온 아우라가 조금씩 다르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비엔나호텔의 야간배달부>(1974) 역시 최근에야 보았다.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정서를 지닌 작품이었으나 이입이나 이해 여부와는 별개로 루치아에게 마음이 쓰였다. 비명을 지르며 밀어내다가 웃으며 껴안는, 두려움과 호기심을 함께 느끼고 괴로움과 역겨움과 끌림을 함께 느끼는 루치아. 그는 경멸과 공포와 분노와 의문이 뒤섞인 눈으로 상대를 찬찬히 뜯어보거나 민첩하게 몸을 놀렸다. 복잡하고 특수하고 모호하고 ‘비정상적인’ 그의 심리를 (각본에도 참여한) 샬롯 램플링은 경계를 넘나드는 표현법으로 전달했다. ‘당신들은 영원히 모르리라’는 것까지.


젊은 샬롯 램플링이 화면 속에서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자니 낯선 기분이 들었다. 그의 외모와 연기에 세월의 흔적이 쌓여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던 세대가 살짝 부러워지기도 했다. 비틀즈 무비 <하드 데이즈 나이트>(1964)에서 단역으로 스크린 데뷔를 한 이래, 샬롯 램플링은 유럽 시네마의 역사와 함께해왔다. ‘전성기’나 ‘슬럼프’ 따위의 표현을 비웃듯 반 세기 동안 거의 해를 거르지 않고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를 오가며 백 편이 넘는 작품에 폭넓게 출연한 그는, ‘왕년의 스타’가 아니라 늘 현역이었던 배우다. 택하는 인물들 자체가 이미 예사롭지 않고, 설령 ‘예사롭거나’ 클리셰적이더라도 저변에 깔린 감정을 교묘하고 섬세하게 드러내는 연기가 다음 등장을 기다리게 만든다.


어떻게 아우르건 만족스러운 설명을 해내기란 불가능할 테다. 그러므로 이 글은 내가 동시대에 스크린에서 목격한 그를 -그 드넓은 스펙트럼의 극히 일부를- 묘사하며 함께 이 배우를 공부(숭배)해 보자는 일종의 맛보기 제안서다. (고전 영화를 그리 즐기는 편은 아니어서 직접 훑어보지는 않았으나, 시대를 고려했을 때 7-80년대에 비해 2000년대 이후의 인물들이 입체적이고 흥미로우리라 짐작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단적이고 거친 예로 램플링이 1976년도에 연기했던 아이린 애들러는 2012년의 <셜록> 시즌2에서 BDSM을 업으로 삼는 레즈비언으로 변신하지 않았던가. 아마 그는 뻔한 ‘여주인공’들마저 제식대로 소화하지 않았을까 싶기는 하지만, 아주 근거 없는 추리는 아니리라.) 캐릭터의 특징을 기준으로 나누어 살펴볼 텐데, 단순히 가독성을 위한 구분이다.


<비엔나호텔의 야간배달부>(1974). 왓챠피디아.



압도하고 압도당하는 권위자


작년 개봉한 작품들 속의 조연들부터 가볍게 시작해 보자. <듄>의 모히암 대모와 <베네데타>의 펠리시타 수녀, ‘종교적’(베네 게세리트도 일종의…) 집단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고, 주인공을 의심하여 억압이나 시험을 제공하나 결국 어느 정도 ‘인정’하게 된다는 것까지 유사한 데가 있었다. 이런, ‘가볍게’라니. 적합하지 못한 단어였다. 그들에겐 무게감이 넘쳤는데, 자상하고 부드러운 종류는 아니었다. 샬롯 램플링은 특유의 분위기를 엄격하고 때로 독선적인 뉘앙스로 뿜어내 캐릭터의 핵심 요소로 만들었다.


<듄>(2021)에서 샬롯 램플링은 결과적으로 내가 티모시 샬라메의 폴을 완전히 납득하는 기준이 됐다. 팬이 된 이래 그의 연기를 의심한 적은 없었지만, 캐스팅 소식에 환호하면서도 왜 그가 폴 아트레이더스여야만 했는가에 대해 궁금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 물음표를 산산조각 낸 계기는 ‘곰 자바’ 씬이었다. 폴이 단순히 대모의 시험을 통과하는 것 뿐 아니라 상대를 압도하는 전개, 두 배우 각각의 표정 변화가 핵심이었지만 그 사이 다이나믹도 중요했다. 그 입체적인 흐름에 놀라며 티모시 샬라메에게 새삼 설득 당했던 까닭은 ‘THE 샬롯 램플링에 눌리지 않고’ 적절한 연기 호흡을 잘 맞추어냈다는 것. 샬롯 램플링은 자동으로 어떤 기준이 되어주는 경지에 있는 배우인 것이다.


<베네데타>(2021). 왓챠피디아.


<베네데타>(2021)의 펠리시타는 보다 입체적이며 ‘사적’이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는 베네데타의 말처럼 그는 수녀이기 전에 수녀원의 관리자, 그는 수녀를 어떤 생활의 방식, 직업으로 택한 것 같아 보인다. 지참금을 벌 기회가 생기자 바로 상대를 여유롭게 구슬리는 태도는 매혹적이기까지 하다. 나직한 힘이 있는 목소리는 엄격하고 분명한 투의 프랑스어와 만나 우아한 권위를 풍기고, 얼굴만 내놓는 수녀복은 그 눈빛에 더욱 집중하게 한다. 그는 대화할 때 얼굴의 각도를 바꾸어도 눈동자는 한 점에 고정해 놓는다. 신부 등 자신보다 높은 지위에 있고 키가 큰 인물과 서서 대화할 때는 턱을 살짝 치켜들고 말하는데, 물리적으론 올려다보고 있지만 오히려 깔아보는 느낌이다. 복종하더라도 비굴하지 않고 계산적이어도 얄팍하지 않다.


‘논란의 성녀’에 대해 완료된 평가를 내리기보단 과감하게 상상하고 묘사하는 데에 집중하는 이 작품의 시선은, 베네데타보다는 바르톨로메의 것에 가깝다고 느꼈다. 그가 바로 옆에서 베네데타를 관찰한다면 펠리시타 수녀는 거리를 두고 위 혹은 뒤에서 지켜보는데, 일단 행동을 보류하던 그가 결정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계기는 크리스티나의 죽음. 그가 뛰어내리는 것을 목격하곤 크게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곧 숨이 멎을 듯 꽉 막힌 발성으로 거대한 괴로움을 뱉어낸다. 귄위자로서의 태도를 완전히 내던지고 목이 갈라지도록 울부짖는다. 너무나 위태로워 보인다. 이후의 컷에서는 전처럼 흔들림 없는 얼굴로 돌아와 있지만, 정제된 권위가 아닌 독기를 뿜어내고 있다.


이후 복수심에 휩싸인 펠리시타는 전형적으로 주인공을 적대하며 위험으로 몰아넣는 역할로 고정된 듯 했지만, 말로는 다르다. 죽음의 침상에 누워 베네데타에게 애원하듯 묻고, 그가 화형당하기 직전 지지하듯 곁에 선다. 병의 흔적으로 뒤덮인 몸을 내보이며 연약하게 호소한다. 그 변화의 감정적 실마리는 베네데타를 바라보는 뺨에 어른거렸던 혼란이나, 크리스티나를 응시하던 복잡하고 여린 눈빛에 있었다.(후자는 베네데타를 향한 적대심의 설득력도 부여했지만- 그가 지닌 입체성과 어떤 가능성을 암시하기도 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성직자들은 겸손함이나 신성함과는 거리가 멀다. 베네데타를 옹호하는 신부든 탄압하는 대사든 딱히 믿음이나 공익을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제 안위를 최우선에 두고 가식으로 무장한 ‘한결 같은’ 남자들보다, 죽어가면서라도- 고민하고 돌아보는, 믿음도 없이 수녀원을 이끌었던 펠리시타가 결론적으론 개중 가장 ‘성스럽다’. 타오르는 불을 멍하니 지켜보다 걸어 들어가 스스로를 화형시키는 당당한 무표정엔, 회한도 공포도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다.



<아이 오브 더 스톰>(2011). 왓챠피디아.


이상하고 복잡하고 특별한 여자들


여기 남성 화자에 의해 관찰되고 회상되고 평가되기까지 하는 유별난 여자들이 있다.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거나 파악되길 거부하고 끝내 그들이 짠 프레임에서 빠져나가는.


“상류층 여자들은 죽고 싶을 때 죽을 수 있다는 믿음을 지닌”(바질),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복잡한”(와이버드), <아이 오브 더 스톰>(2011)의 엘리자베스 헌터는 작품 전체를 덮고 있다. 모두가 좋든 싫든 주변을 맴돌고, 그가 부재할 때도 그의 그림자를 느낀다. 제목대로 ‘폭풍의 눈’과 같은, 주위를 휩쓸면서 홀로 고요한, 그러나 그 본성으로 어떤 비난도 튕겨내는, 그대로 완벽하여 그 오만까지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여자다.


“넌 걸어다니는 백합 같아, 그러나 난 백합이 싫어.” 초반 거울을 보며 (릴리를 향해) 하는 대사의 내용과 뉘앙스에 엘리자베스의 캐릭터가 단적으로 드러난다. 나르시시즘이 비치는 중얼거림에 재기가 넘친다. 제 나이보다 들어 보이도록 분장을 하고 움직임을 늦추니, 샬롯 램플링의 차일디시하면서도 고고한 매력은 색다른 방향으로 빛을 발한다. 힘없는 목소리의 갈라짐도 품위를 지우진 못한다.


<아이 오브 더 스톰>(2011). 왓챠피디아.


자녀들을 대하는 감정은 복잡한 듯 단순하다. 울며 안기는 딸에 질색하다가도 토닥이고, 힘없이 속내를 드러낸다. 들뜨고 설레 한껏 연기하며 아들을 맞이해서도 평가와 함께 짓궂은 미소를 날린다. 여유롭게 군림하다 단호하게 밀어내는데, 중심은 그 자신에게 있다. 고용인들은 허물없는 호의로 대한다. 어쩌면 의무적 애정이 전제되지 않은 관계이기 때문이리라. 단적으로 짐작해보면: 결국 그가 진정 사랑한 것은 자기 자신 뿐이었고, 자기애가 흘러 넘쳐 주변에게까지 닿았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어머니의 ‘당연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바랐던 아들과 딸은 상처를 받았을지 몰라도, 직원들은 뭔가 ‘떨어지기를 바라서’만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엘리자베스의 표정들은 다채롭고 발랄하다가도 멍하게 지치곤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자주 과거의 어느 순간을 되풀이해 ‘산다’. 신체는 여기에, 정신은 다른 곳에 있는 상태, 눈을 허공에 두고 몸을 경련하듯 뻣뻣하게 움직인다. 그러나 중요한 건 ‘어떻게 보이는지’가 아니라 스스로의 삶과 그 마무리를 어떻게 대하는가다. 처음과 끝을 그의 가장 ‘완전한’ 모먼트로 장식한- 작품 전체가 바질과 함께 엘리자베스 헌터의 제멋대로이며 자유로운 삶을 기리는 듯했다. 관객은 행동을 평가하는 대신 존재에 매혹되고 이끌린다. 그 까닭을 설명하는 문장에 샬롯 램플링이라는 이름은 빠질 수 없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2017). 왓챠피디아.


엘리자베스가 바질을 통해 묘사된다면 베로니카는 토니를 통해 묘사된다. 바질이 기억한다면 토니는 넘겨짚음에 가깝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2017), ‘현재’의 베로니카는 음성 메시지로 먼저 등장한다. 감정이 묻어나지 않아 화난 것만 같은 톤. 토니와 마주해서도 상냥함을 연기하지 않는다. 단호하게 적대심을 드러내면서도 잘잘못을 따지지 않는다. 토니를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아마 웃음기 없이 고요하게 오랫동안 응시하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는 눈이다. 선을 긋고 경계하다가도 알 수 없는 미소를 올리고 어디 보자는 듯 다음을 기약하는, 그 눈빛엔 경멸과 흥미가 섞여 있다.


관객은 주로 토니의 눈을 통해 베로니카를 목격하게 되는데, 예외적인 컷들이 있다. 일단 그의 얼굴을 (스토킹하는)토니가 볼 수 없는 각도에서 담는 모먼트가 있는데, 꼭 차오르는 감정을 겨우 누르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 홀로 토니의 편지를 읽는 장면이다. 그 표정에 있는 흔들림의 정체가 무엇인지 샬롯 램플링은 완전히 알려주지 않는다. 베로니카의 진심은 그러한 찰나를 통해 짐작할 수 있을 뿐이고, 어쩌면 본인도 다 알지 못할 테다. 작품과 애드리언이 역사를 보는 관점에 입각해 서술하면- 관객은 토니만큼이나 여전히, ‘정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개인적으론 ‘줄리언 반스의 원작을 좋아하기에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결말이었다. 토니 웹스터에게 가당찮은 희망을 허락한 것을 참기 힘들었다. 언뜻 사소해 보이는 각색이지만 이야기의 중심을 흐린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럼에도 베로니카의 모호한 옆모습엔 설득당했다. 겨우 몇 분의 스크린타임으로도 샬롯 램플링은, 책을 읽으며 상상했던 것 이상의 깊이로 베로니카를 구현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2017). 왓챠피디아.



관음하는 전지자와 관찰하는 화자


드디어 프랑수아 오종을 언급할 차례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작가를 반영하는 인물을 여성으로 두는 것이 더 편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여성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선호함을 샬롯 램플링과 <언더 더 샌드>를 작업하며 알게 됐다’고도.[2014.7.16, The Talks] 이 프랑스인 남성 감독은 종종 제 분신과도 같은 인물을 스무 살 정도 연상인 이 영국인 여성 배우에게 맡겼다. 2000년부터 시작된 그들의 인연은 2021년의 <에브리띵 웬트 파인>까지 이어지는데, 이 글에서 언급할 것은 그 사이의 두 작품이다.


‘오종이 담은 마린 백트’를 소재로 한 글에서 <영 앤 뷰티풀>(2013)을 다룬 적이 있었다. 그가 연기한 주인공 이사벨 역시 어느 정도는 작가가 반영된 인물일 테지만, 작품을 돌이키며 러닝타임이 십 분도 채 남지 않았을 때 등장한 알리스가, 가장 작가에 가까운 인물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 그는 이사벨이 만난 나이든 남자들과도 그의 부모와도 달랐다.


이사벨의 뒤로 다가온 알리스는 얼굴보다 목소리로 존재감을 먼저 드러낸다. 우아하게 나직하다. 모습을 보이고도 한동안 눈을 드러내지 않다 선글라스를 벗으면, 그 복합적 슬픔이 담긴 온화한 눈빛에 빠져들 수밖에. 웃음기가 사라지자 권위와 집요함이 비치기도 하지만, 돌이켜보면 일종의 욕망이었던 것도 같다. 결국 그마저도 사라지고 ‘어떤 시기만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어른의 얼굴이 된다.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이사벨의 뺨을 쓰다듬는-꼭 그것을 감싸주려는 듯한- 손짓. 마린 백트와 동세대인 나는 오히려 샬롯 램플링의, 그 세월을 다 지난 이만이 지니는-그러나 그 시간을 지나왔다 해서 다 지닐 수 있는 것은 아닌- 아름다움에 매혹되었다. 단순한 ‘beauty’와는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전부 긍정할 수는 없는 이야기였으나 샬롯 램플링이 함께한 마지막 7분만큼은 완벽했고, 감독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줬다.  


<스위밍 풀>(2003). 다음영화.


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스위밍 풀>(2003)의 사라는 보다 적나라한 작가의 분신이다. 창작자 캐릭터가 반드시 감독/작가의 페르소나인 것은 아니나, 사라는 스토리텔러로서의 오종을 닮아 있다. 이야기를 만드는 즐거움에 순수하게 이끌리는, 자유로이 풀어 놓은 인물들의 욕망이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는지 지켜보는. 애초에 존재감을 지우는 것이 불가능한 샬롯 램플링이 관찰자의 위치에 놓인다면 과연 사라처럼, 배경에 녹아들어 카메라가 되기보단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해 쌍안경을 든 관음자와 전개에 개입하는 전지자를 오갈 것이다.


작품을 다 본 후 돌이키면 사라에게 필요했던 건 (존을 포함한)실물의 사람보단 캐릭터였다. 그의 삶은 자신이 창작한 이야기로 굴러간다. 전화를 서둘러 끊고 일어나는 찰나의 제스처로 미루어- 그에겐 아버지에게 하는 안부전화가 오히려 해결해야 하는 ‘일’인 듯하다. 책을 쓰는 것은 그렇지 않다. 일이고 업이지만 하고 싶어서 하는 것, 아니 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생계수단이어서 의무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자동으로 하게 되는 일이다. 아이디어가 빠져나갈까 두려운 듯 마구 움직이는 손가락, 저도 모르게 벌어져 있는 입술은 완벽한 몰입의 증거다.


사라의 감정에 실제로 영향을 주었던 인물은 존 뿐인데, 그에 대한 태도 역시 이야기를 만들며 변한다. 그의 사무실에서 대화하는 처음과 마지막의 장면을 비교하면: 초반에 찾아갔을 때는 불안 섞인 애정이 비친다. 욕심과 질투를 숨기지 않고 시니컬하게 비아냥거리다가도 금방 흔들리며 연약해지고 만다. 그 솔직한 감정엔 차일디시한 데가 있다. 반면 존에게 완성된 작품을 보여주는 순간에는 예의 ‘늘 지는 사람’ 같은 태도가 없다. 다른 방향의 차일디시함이 있는데, 장난꾸러기처럼 얼굴을 흔들며 약간 흥분해 만족스럽게 웃는다.


<스위밍 풀>(2003). 다음영화.


도착하자마자 십자가를 서랍에 숨기는- 사라의 일탈은 상상이다. 그 속에서 그는 스스로를 관찰자의 위치에 두는데, 관찰하고 묘사하는 대상에는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 사라와 닮은 ‘사라’는, 혼자 있으면 완전히 평화롭고 편안한 상태가 된다. 존이 오지 않으리란 것을 깨닫자 그늘이 비치나 서운함일 뿐 외로움은 아니다. 사생활과 루틴이 방해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지만, 한편으론 누군가 침범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듯한 그는, 약간 ‘고양이과’다. 눈을 감고 햇빛을 음미하며 고개를 젖히는 제스처나 요거트를 대접에 가득 부어 퍼먹는 모습부터, 줄리가 도착하고 존에게 몰래 메시지를 남길 때의 캬악거리는 속삭임, 분노를 표출하듯 음식을 단호하고 빠른 동작으로 마구 퍼먹은 후의 만족스러운 미소, 줄리의 술을 맛본 후 부모의 술을 훔쳐 마신 십대처럼 물을 채워 넣곤 혀를 내밀며 야무지게 병을 톡톡 두드리는 모양…들에 고양이가 겹친다. 마음먹으면 기꺼이 친절할 수 있으나 내키지 않는 건 절대 하지 않고, 파악되지 않은 인간은 경계하고 보며, 쭈뼛거리며 어색한 그대로 당당하고 우아하다. 의도적으로 고립되는 듯하면서도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이기도 한다.


‘사라’는 줄리에게 거부감과 끌림을 동시에 느낀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하지만 표정에 다 드러난다. 질투, 걱정, 어쩔 줄 모름…. 관심을 두었던 프랭크가 자신에게 끌리자 조용히 승리의 미소를 짓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줄리는 그의 ‘주인공’이다. (이야기를 위해서이므로)답지않게 자동으로 나오는 가식, 은근한 질문을 던져 상대의 과거사를 듣-기보단 흡입하-는 순간의 여유롭고 탐욕스러운 미소. 줄리와 대화한 날 밤, 그는 홀로 어둠 속에서 바람을 음미한다. 적당한 긴장감을 부여하는 미스터리한 음악에 맞춰 카메라가 줌 인 하자, 살짝 돌아버린 눈동자와 완벽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보인다. 이처럼 홀로 생각에 잠겨 있는 그의 모습이 서서히 클로즈업될 때면, 숨을 죽이게 된다.


호불호가 갈리지만, 프랑수아 오종은 완성도와는 별개로 여성 배우의 매력을- 단순히 바디나 페이스의 ‘예쁨’이 아닌- 그 분위기와 깊이를 색다르게 잘 담아내는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스위밍 풀> 속 사라 역시 그에 부합하는 캐릭터였다. 샬롯 램플링에게 최대한 집중한 것은 영리한 선택이었다. 그의 매력과, 그것을 어떻게 담아야 할지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특별하다. 다시, 이 작품이 특별한 까닭은 샬롯 램플링 덕이기도 하다.


<스위밍 풀>(2003). 다음영화.



마무리로 다룰 것은 비교적 평범하나 그만큼 깊고 개인적인 샬롯 램플링을 만날 수 있는 작품이다. <45년 후>(2015)가 택한 화자는 케이트, 이것은 반백년만에 사랑했던 여자의 시신을 찾았다는 연락을 받은 남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러한 남편을 바라보며 결국 몇십년의 결혼 생활을 전부 돌이키게 되는 여자의 이야기다. 카메라는 거리를 두고 그의 심리를 관찰하듯 조심스럽게 움직였고, 샬롯 램플링의 케이트는 그 고요한 화면 속에서 상대와 자신을 관찰하며 저만의 리듬으로 요동쳤다.


케이트는 일상적으로 상냥한 태도를 유지하지만, 저변에는 불안이 깔려 있다. 그것은 드러났다가 숨기를 반복하며 그를 맴돈다. 자신을 보지 않으며 ‘그녀’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남편을 응시하는 눈엔 웃음기가 없다. 어느 순간 그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진다. 사다리를 성급하게 내리는 뺨은 적나라하고 연약하게 흔들린다. 카메라는 케이트의 시선을 취해 리처드가 찍은 ‘그녀’의 사진을 담는 대신, 교묘한 위치에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거의 온몸이 얼어 있는 와중 힘을 주고 스크린을 응시하는 눈이 떨린다. ‘눈을 떼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줌 인과 함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진다. 숨과 함께 진해지는 감정에서 감지되는 것은 분노보다는 공포, 꼭 유령을 보고 있는 듯도 했던 그는 카메라를 서둘러 끈다.


<45년 후>(2015). 왓챠피디아.


찾아온 감정을 보다 분명하게 깨달은 케이트는 더 이상 상냥하지 않다. 불안과 공포를 서늘한 분노로 정제해 전면에 드러낸다. 미세하게 올라가 있는 입꼬리는 화로 인한 떨림에서 비롯된 것이다. “난 당신한테 충분했어, 다만 당신이 그걸 알고 있는지 궁금할 뿐.” 샬롯 램플링은 실망이나 화를 표출하는 연기를 할 때 폭발시키기보단 착 가라앉힌다. 눌린 감정을 차분히 흘려보내므로 화면 전체의 밀도가 높아진 느낌이 든다.


리처드가 마치 그동안의 ‘방황’을 끝낸 듯 자상하게 행동하자, 케이트는 놀라 눈을 굴린다. 선물을 발견하고 물기어린 미소를 짓기도 한다. 그러나 거기 ‘무언가가’ 남아 있다. 결혼 기념 파티에 있는 케이트는 고요하다. 눈이 촉촉해진 채 남편의 애정표현에 조용히 응답하는 와중 여전히 한구석에 존재하는 그늘, 그것은 이제 상대방의 상태나 행동을 향하는 대신 자신의 마음으로 수렴하는 듯 보인다. 마지막, 혼란스러운 듯 두리번거리는 얼굴에 담긴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헷갈렸다. 어쩌면 그저 감동의 일부였을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는, 해석의 여지가 있는 표정, 완벽한 마무리였다.


이처럼 샬롯 램플링의 케이트가 드러내는 감정과 심리는, 인물도 배우도 다 설명하지 못하리라 짐작될 정도로 풍부하고 복합적이었다. 분명한 결론을 내리지 않아 정확했던 그 연기가 작품을 완성했다.


<45년 후>(2015). 왓챠피디아.




시네마 내 여성 캐릭터가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는 추세이나- 여전히 특정 연령을 넘긴 여성 배우에게 주어지는 역할은 한정되어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동시대에 목격한 샬롯 램플링의 인물들은 늘 흥미로웠다. (표면적으로 본다면)그들은 유사한 관계의 다른 포지션에 놓이기도 했는데, 엘리자베스가 딸의 애인과 바람을 피웠다면 베로니카는 반대로 엄마가 자신의 애인과 사랑에 빠졌고, 케이트가 남편이 오래 전 사랑했던 여자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베로니카는 반대로 바로 그 ‘과거의 여인’ 입장이다. 이 역시 여성 캐릭터의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반증일까. 그들을 겪고 나면 그리 단정짓기 힘들다. 작품은 그들에게 입체성과 깊이를 부여했고, 그 핵심은 배우에 있었다. 샬롯 램플링을 거쳐간 그녀들은 남자와의 관계로 정의되는 ‘그런 여자’가 아니라, 엘리자베스, 베로니카, 케이트로 와닿았다.


어느 정도는, 그의 마스크가 뻔함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를 보고 있으면 자연히 기록하고 싶다는 욕심이 든다. 그가 배우라는 직업을 택해 자신을 합법적으로 관람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준 것에 감사하게 된다. 거기 배어 있는 것은 전형적 ‘미beauty’와는 조금 다르다. 눈썹과 눈 모두 꼬리가 쳐져 있으나 부드럽기보단 날카롭다. 옅고 탁한 눈동자 아래 드러난 흰자는 사용법에 따라 미스터리함을 자아내기도 한다. 단호하게 다물린 입은 미소를 띄우지 않으면 까다로운 방향으로 내향적인 사람이라는 짐작을 불러일으키곤 하는데, 이 역시 배우가 쓰는 방식에 따라 성격이 달라질 수 있다. 핵심은 외모 자체보다는 분위기에 있고, 그것은 캐릭터와 인간을 대하는 자유로우면서도 확고한 태도에 닿아 있다.


“배우라면, 인간을 구체화해야 한다. 만약 용기가 있고 정말로 경험하고 싶어한다면, 정말로, 발전하는 배우이자 발전하는 인간이 동시에 되어야 한다. 그 두 가지는 항상 함께이므로. 배우로서 발전하지 않고 인간으로서 발전할 수는 없고, 그 반대도 그렇다.”


“표면보다 더 나아가서 이 인물들이 진실로 누구인지에 대해 알게 된다면, 믿거나 말거나, 이들이 걸어나와 인간의 언어로 당신에게 말할 것이고, 결국 인간이 될 것이다 -어떻게 보이든 어떻게 행동하든 어쩌면 얼마나 지독하든- 결국 근본적으로는 당신들 모두와 똑같다. 왜냐면 그게 배우들이 하는 일이니까: 우리는 당신들 모두가 된다.”


- Charlotte Rampling, 2012.4.18 interview, [The Talk]


<비엔나호텔의 야간배달부>(1974). 왓챠피디아.


그의 연기들이 공개적인 기록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굉장한 일인가. 50년 전의 그와 20년 전의 그를 현재에 볼 수 있다는 것은. 앞서 <스위밍 풀>의 사라를 ‘고양이과’라고 수식했다. <비엔나호텔의 야간배달부>의 루치아에게서도 ‘고양이스러움’을 발견했으나 그 느낌은 동일하지 않았다. ‘인간스러움’(인간다움/인간적임과 구분한다)의 형태가 개인마다 다르듯 사라와 루치아가 담고 있는 고양이스러움은 각자의 것이었다. 도입부에 언급한 <트윈 픽스>의 배우들처럼, 1974년과 2003년의 그는 같은 사람이자 다른 사람이었다. 2022년의 그 또한 그렇다.


그에게 축적된 아우라는 매해 다르고 유일한 색으로 빛난다. 그것은 타고난 모양으로 고정된/고여있는 것이 아니다. 픽션과 현실의 경험들을 오가는 동안 다이나믹하게 흐르며 끊임없이 변형되는 성질의 것이다. “내 일이 내 삶이고 내 삶이 내 일이다. 그게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라고 샬롯 램플링은 말했다. 그는 믿음과 안정을 주면서도 가슴을 묘하게 쿵쾅거리게 하는 배우, 곧은 중심을 유지하면서도 유연하게 흐르며 변화하는 배우, 영원히 파악되지 않는- 늘 다음 연기가 궁금한 배우다.  


<주니퍼>(2021). 왓챠피디아.



+

<Everything Went Fine>을 보고 나면 <Under the Sand>까지 포함해서 ‘샬롯 램플링 in 프랑수아 오종’을 더 체계적으로 써 볼 수도 있겠다.  


* 참고 인터뷰

https://the-talks.com/interview/charlotte-rampling/






매거진의 이전글 이주영이라는 브랜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