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일 (1)
<필름시대사랑>(2015, 감독: 장률)
<경주>(2013, 감독: 장률)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2018, 감독: 장률)
<은교>(2012, 감독: 정지우)
<헤어질 결심>(2021, 감독: 박찬욱)
* 위 굵은 글씨로 적힌 작품들의 구체적인 장면과 핵심 전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묘하다는 말조차 알지 못했던 시절, <살인의 추억>(2003) 속에서 발견한 박해일의 눈은 묘했다. 이십여년이 지난 지금, 송강호와 김상경이 들여다보며 읽어내려 애쓰던, 분명 무언가 있으나 아무것도 읽히지 않던 그 두 눈만은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다. 그의 눈동자는 깊고 여리다. 길게 빠진 눈꼬리는 사납거나 곱다. 살짝 기울어져 있는 입을 열면, 나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와 정확한 발음, 느린 말씨가 분위기를 중화시킨다-기보단, 양가적 느낌을 자아낸다. 느긋하고 멍하고 유한 동시에 예민하고 날카로운, “선악이 같이 있는”(<군산: 거위를 노래하다>) 이미지다.
그는 내 별난 차일드후드 크러시 탑 쓰리 중 하나였다. 아마 계기는 <국화꽃 향기>와 <인어공주> 정도였을 텐데, 느슨한 기억이다. 류승범이 <아라한 장풍 대작전>, 신하균이 <웰컴 투 동막골>이라는 뚜렷한 계기와 함께 마음 한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에 비해 박해일은 흐릿했다. ‘해며들었다’고 하면 맞을 게다(-최재욱, 2022.07.09. [IZE]). 취향이 잡히고 일부 영화에 대한 흥미가 점점 떨어지면서 자연히 그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n년 후, 온라인에서 <헤어질 결심> 포스터를 발견한 나는 알게 된다, 그의 자리가 마음 속에 항상 있었음을, 아주 사라진 게 아니라 다만 의식이 닿지 않는 저 깊은 곳으로 옮겨가 있었을 뿐임을, 영화는 잊혔지만 박해일의 잔상은 끝내 남아 있었음을. 드디어 장해준을 목격한 날, 극장에 가기 전 해야 했던 것은 <박쥐>를 볼지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장률의 박해일을 섭렵할 결심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필름시대사랑>(2015), <살인의 추억> 푸티지가 무성영화로 탈바꿈해 등장했을 때, <데드 돈 다이>(2019) 속에서 아담 드라이버가 지니고 있던 스타워즈 열쇠고리가 떠올랐다. <필름시대사랑>에는 필름과, 배우를 비롯한 ‘필름워커’들에 대한 애정이 독특한 형태로 그려져 있었다. 박해일의 역할은 조명부 스텝 최현, 별안간 “감독님 영화 그렇게 찍으시면 안 돼요!”를 시전하는 이다. 끝이 아니다. “감독님은 사랑을 믿으세요?!”, “니들이 영화를 알어?!”까지, 스크린 안팎의 청자를 몸 둘 바 모르게 만드는 대사를 입 밖으로 내보내고 만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 ‘기타’를 튕겨놓은 후 나직하게 다시 묻는 “사랑을 믿으세요?”는, 자동으로 과연 나는 사랑을 믿는지 돌아보게 만든다. 장률은 대사가 박해일을 거치는 순간 제 색을 입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을 게다. 이 임자들은 두 해 전 이미 한 차례 합을 맞추어 본 상태였으니.
<경주>(2013)에 홍상수가 비친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알겠으나, 정가영이 홍상수가 아닌 것 만큼이나 장률은 홍상수가 아니라고 느꼈다. 다만 <자유의 언덕>(2014)에 카세 료의 모리가 있다면 <경주>에는 박해일의 최현이 있다고 할 수는 있겠다. 위치와 깊이가 같진 않으나 캐릭터에 닮은 데가 있었다. 시끄럽고 어수선한 ‘보통의’ 인간들 가운데 홀로 고요하고 느긋한, 종종 ‘길이 아닌 방향으로 걷는’- 주인공이자 이방인. 다만 최현과 그가 찾는 것은 모리와 달리 모호하고 애매하다. 무언갈 적극적으로 하는 것이 불가능한, 여정의 말처럼 ‘책임을 잘 지지 않는’ 인간인 듯도 하지만, 그건 어쩌면 그가 사는 속도와 쓰는 음계를 주류/보통 세상이 그어 놓은 바운더리가 포괄하지 못해서다. 그를 따라가며 관객은 그저 답답해 할 수도 있을 것이고, 나처럼 이 리듬에 감길 수도 있을 것이다.
최현을 처음 본 ‘보통’ 사람들의 반응은 ‘좀 이상하다’와 ‘잘생겼다’로 갈린다. 표면적인 인상에 대한 평가다. 허면 최현은 어떤 이인가. 허허 웃고, 뭘 자꾸 주섬주섬 건드리거나 들여다보고, 뒷짐을 진 채 걷고, 느릿한 말씨를 쓴다. 현의 대사엔 ‘예스러움’이 있다. 단어 사이에 여백을 두고, 꼭 한 마디도 경솔하게 뱉지 않으려는 듯 예, 어, 저, 같은 소리를 섞어 말을 늦추고, 머뭇거리거나 끝을 흐리기도 한다.
현은 별안간 낯선 이의 곁에 멈춰 태극권을 함께하고, 취한 윤희의 행동을 어설프게 따라하고,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반복해 묻고, 농인지 아닌지 구분키 힘든 소리를 실없이 중얼거린다(“혹시 북한에서 포를 쏴대나.”, “저는 낫또를 좋아합니다.”). 팔짱을 낀 채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코에 가져다 대는 모양, 고개를 약간 빼고 안경을 슬쩍 올리는 모양, 입을 벌린 채 내려간 안경 사이로 상대를 보는 모양, 붕어를 보고 입을 뻐끔거리는 모양…. 나사 하나 빠진 도인 같다. 그림을 찾아 벽지를 들추며 부스럭거릴 때, 찻집을 빙 둘러가며 사진을 찍을 때, 촛불을 불어 끌 때, 현은 엉덩이를 뒤로 빼고 세운 허리에 힘을 준 채 어정쩡한 중심을 잡는다.
찻집이나 술집, 허리를 펴고 정자세를 해도 현은 불편해 보인다. 낯선 사람들과 한데 있는 것이 불편해서인가? 헌데 혼자 있어도 그다지 편해 보이지 않는다. 타인에게 비치는 자신을 의식한다기보다는, 제 존재 자체와 그것이 위치하는 공간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있는 것 같다. 나르시시즘은 아니다. 관심의 중심은 늘 저 외의 것에 있으면서도 끝없이 스스로를 돌아보는데, 그 방식과 방향이 별나다. 남들과 감각이 조금 다르다고 할까. 그가 가장 편안해 보일 때는 제 존재를 잊을 정도로 몰입할 때, 차, 그림, 붕어, 말린 꽃처럼, 사람이 아닌 것들에 사로잡힐 때다. 현이 적극성을 보이는 촛점 역시 이와 연결돼 있다. 춘화에 대해 집요하게 이야기하고, 무거운 대화를 나누던 도중 벽에 걸린 그림에 딸려가고, ‘이곳 전부의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고 묻는다.
늘 한 번 더 양해를 구하는 종류의 인간인 현이 말없이 사람을 찍는 순간이 있다. 몰래 불법촬영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핸드폰을 든 손을 멀리 둔 채 허락을 구하듯 상대를 향해 미소 짓거나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셔터를 누른다. 현이 호감 있는 이를 대하는 태도는 그림을 대하는 태도와 닮았다. 정녕 윤희에게 끌리는 게 맞는지, 그가 공씨라는 사실이나 ‘똑같은 옷이 두 벌 있다’는 디테일에만 흥미를 보이는 건지 헷갈릴 정도다. 가만히 앉아 바라보고, 아무런 ‘중요한’ 말도 꺼내지 않는다. 어쩌면 그건 사람에 대한 관심이 아닌지도, 현을 끌어당기는 것은 추억 속 공간과 시간-과거의 덩어리에 대한 집착인지도 모르겠다.
현의 ‘사교’ 포인트는 보편적이지 않다. 그는 상대가 자신을 중국인이라 여기면 중국어로 말하고, 상대가 자신이 일본어를 못한다 가정하면 일본어를 듣고 한국어로 답한다. ‘내가 어디 사람으로 보이는가’는 중요한 게 아니어서다. 현은 굳이 스스로에 대해 해명하거나 주장하지 않는다. 변태 취급을 받아도 그저 딴청을 피우며 허공을 바라본다. 호의를 주면 예의로 받고 의견을 물으면 솔직하게 답하지만, 저를 추켜세우는 말을 듣는 동안엔 온몸이 굳어서는 가만히 턱과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고 입을 꾹 다물어 버린다. 공기중에 사심과 허세가 감지되자 말을 아낀다. 이해되지 않거나 동의할 수 없는 것에 대강 수긍하지 않는다. 자꾸만 지적 우월 의식이 섞인 공감대를 형성하려 하는 박교수를 현이 꺼려하는 까닭은 어쩌면 그 자신에게 있다. 자만하거나 주제넘지 않고 늘 겸손을 유지하려 애쓰는, ‘제 존재를 의식’하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이 관계의 거절도, 중심을 자신에게 둔다. “제가 하고 있는 학문이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똥 같습니다.” 불쾌와 피로를 숨기지 않은 채, 화내는 박교수를 피하지도 상대하지도 않고 다만 가만히 있는다.
현은 화면의 가장 기이한 위치에 우뚝 존재함으로 이미 관객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그 말은 한국어나 중국어, 일본어로 되어 있지 않았고, 번역되지 않은 채로 마음에 닿았다가 흩어졌다. 과거의 한 조각을 곱씹으며 사는 사람, 세상이 빠르게 변하는 동안 느릿느릿 순간들을 돌이키다, 환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 고고하게 길을 잃은 남자. 현의 속도에 맞게 움직이다 결국 그를 내버리고 가는, 현과 음을 공유하는 듯 하다 그를 불협화음의 원인으로 만드는- 영화의 세계 안에서, 박해일은 두 시간 반 내내 흐르며 저만의 엇박을 찍었다.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2018), 장윤영의 첫인상은 최현의 것과 달랐다. 박해일은 오 년 전보다 어려 보였고, 보다 ‘보통 사람’ 같았다. 예민한 속을 현처럼 꾹꾹 누르거나 흘려보내는 대신 표출하는, 불만이나 욕망을 은근히 꺼내 놓는 윤영. 서투른 사랑에 빠진 늙은 소년이라고 할까. <경주>의 남자들을 떠올린다면 현보다 오히려 영민과 비슷한 듯도 했다. 그러나 그건, 안에 무언가가 들어차 윤영의 저다움을 가렸기 때문이었다. 그의 매력은 송현에 대한 간절함을 덜어내며 다시 점점 차오른다.
<군산~>은 과연 ‘편집의 마술’이 발휘된 영화였다. 서사의 반을 뚝 잘라 순서를 바꾸어 붙인 구조다. 윤영과 송현이 군산에 온 다음부터 시작해, 백화의 식당과 주은 부녀의 민박집을 오가며 이러저러한 일이 있은 후 윤영만 다시 돌아오고, ‘치과 야경’과 함께 비로소 제목이 화면에 떠오른다. 이후 윤영이 송현을 우연히 만난 날로 돌아간 작품은 그들이 충동적으로 군산으로 향하기까지 있었던 일을 그린다. 마무리는 군산 터미널, 어딘지 모를 허공에 멎은 박해일의 모호한 시선이다. 작품은 관객에게 기승전결을 차례로 설명하지 않는다. 인물 또한 차근차근 소개하지 않는다. 특정한 상황에 던져 두었다가 면면을 하나씩 보여준다.
그렇게 겪은 윤영은 결론적으로, 분명 현과 다른 사람이었으나 유사한 종류의 ‘이상함’을 지니고 있었다. 기합과 함께 빈집의 담을 넘고, 정좌를 한 채 국수를 먹고,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걷고, 벤치에 눕고, 둘둘 만 전단지를 통해 창을 내다 본다. 자세는 자주 어설프다. “추천해 주실 만한 약 있으세요?”, “저기 허락해 주시면 여기서 야경을 좀 보고 싶습니다.”….. 따위의 별난 대사를 친다.
그러고 보면 호감이나 욕망, 질투와 원망이 표현되는 형태도 좀 남달랐다. “넌 옷이 그거밖에 없냐.”는 핀잔과 함께 먼저 일어나는 송현의 뒷모습을 몹시 사랑스럽다는 눈길로 따랐고, ‘원장님’ 앞에서는 공손하고 이상하게 쭈뼛거렸다. 노래방 앞에 털퍼덕 주저앉아 해맑게 웃거나, 반말과 존댓말을 절묘하게 섞어 쓰는 자연스럽고 사소한 모먼트들부터- “뭐 좀 만져보게”라며 쇄골을 쓰다듬는 섬세하게 숨막히는 움직임, “계산은 저 여자가 할 겁니다.”라고 말하는-‘골이 났지만 감히 무례하지 못한’ 투 하며, 대나무 사이에 얼굴을 두고 뚱하니 노려보는 눈빛까지. 사람이 좀, 그렇다. <경주>의 그들이 현을 ‘좀 이상하다’고 했던 것에 비해 이곳의 사람들은 다양한 언어로 윤영을 수식한다. “젊은 사람이 옛날 정서가 살아있네?”(백화), “넌 하는 짓도 애매하고 하는 말도 애매하고.”(송현), “선과 악이 같이 있네.”(원장님) 이 말들은 작품을 넘나들며 박해일에게 적용된다. 제스처만 다르다고 남달라지는 건 아니잖는가. 천연덕스럽게 어정쩡한 몸짓과 묘하고 처연한 눈빛, 최현만큼 독특하진 않더래도 절대 ‘노말한’ 범주에 끼워 넣을 수 없는 윤영의 분위기는 박해일만의 것이다.
현이 홀로 공간과 제 마음속을 배회하는 이야기였던 <경주>는, 캐릭터로 보나 연기로 보나 압도적으로 박해일의 영화였다. 이번에는 보다 상대 배우와의 케미스트리가 돋보인다. 문숙이나 이미숙, 동방우와의 것마저 단순하지만 흥미롭다. 그리고 많은 씬을 함께하는 문소리가 있다. 문소리가 박해일을 잡아먹고 박해일은 기꺼이 문소리의 밥이 되는 케미. 그들은 끊임없이 뭔가를 함께 하며 -걷거나 물건을 사거나 방을 잡거나 술을 마시며- 의미가 통하거나 통하지 않는, 혹은 의미가 없거나 속마음과 다른, 몸짓과 눈짓과 말을 교환하다 결국 어긋난다. 마지막으로 박소담이 있다. 이 짧고 강렬하고 기이한 케미는 철저히 비언어적 의사소통을 바탕으로 한다. 확신할 수 없어 오히려 통하는 이들의 관계는 타인의 오해로 끝나는데- 실은 시작이라는 것을 했는지도 모호하다.
<경주>에 비쳤던 언어와 국적, ‘민족’과 역사에 대한 아이디어는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에 보다 구체적으로 등장한다. 현이 경계를 흐리는 이였다면 윤영은 ‘악의 없는’ 한국인이다. 조선족 말투로 시위하는 남성에게 ‘당신 조선족 맞냐’고 물었다가 욕을 한바가지 얻어먹고, 가사노동을 하는 조선족 여성이 윤동주의 후손인 것을 알고 반가워 손을 덥석 잡았다가 어색한 공기를 만나는. 그럼에도 장률은 역시나 박해일에게 경계성을 부여했다. 그것은 화교 학교를 다닌 윤영이 술에 취해 휘청거리며 ‘거위를 노래’하는 장면에서 두드러진다. 여기서 ‘윤영은 누구인가’라는 물음표가 떠올랐으나 몰입과 함께 사그라들었다. 그 순간 그는 한국인도 중국인도 아니었다. 거위춤을 추며 유창한 중국어로 시를 낭송하는 별난 인간, 장윤영일 따름이었다.
또 떠올랐다가 사그라들었던 물음표는, ‘웃으라는 장면인가’였다. 뻗친 머리카락과 풀린 눈, 벌게진 뺨. 진지한 태도와 심각한 표정은 우스우면서도 아련했고, 폼이라곤 나지 않아 묘한 멋이 있었다. 박해일의 ‘공연’엔 그런 게 있다. <경주>와 <군산~> 모두엔 그의 ‘공연’이 수반되는 옛 음악들이 있었다. 식당 한가운데서 거위를 노래했던 윤영은 노래방 구석에서 선곡집을 끌어안은 채 찾지 못한 노래를 무반주로 부른다.
최현은 노래를 부르지도, 딱히 춤을 추지도 않았다. 다만 흔들렸다. <헤어질 결심>에 정훈희의 ‘안개’가 있다면 <경주>에는 노고지리의 ‘찻잔’이 있다. 노래방에서 윤희가 찻잔을 부르는 동안 현은 우뚝 일어나서 천천히 앞으로 나간다.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다른 손은 보이지 않는 상대를 감싸듯 혹은 찻잔을 들고 있기라도 한 듯 구부려 허공에 두고는 그대로, 흔들린다. <아비정전>(1990), 장국영이 거울 앞에서 춤추는 장면을 기억하는가. 그 댄스가 왕가위 영화 속 장국영의 단면이라면, 이 무브는 장률 영화 속 박해일의 단면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리하여 감독 탐구를 게을리했던 나는 이제야, 장률의 세계에 빠져드는 중이다. 작가색이 강한 그의 영화가 박해일을 너무나 잘 보존하고 있어 황홀할 지경이다. 앞에 <데드 돈 다이>를 언급하기도 했었는데- 아담 드라이버의 팬으로서 짐 자무쉬에게 감사하듯, 박해일의 팬으로서 장률에게 감사하게 되었다.
*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