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일 (2)
* 이전 글에서 이어집니다.
<은교>(2012, 감독: 정지우)
<헤어질 결심>(2021, 감독: 박찬욱)
<필름시대사랑>(2015, 감독: 장률)
<경주>(2013, 감독: 장률)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2018, 감독: 장률)
* 위 굵은 글씨로 적힌 작품들의 구체적인 장면과 핵심 전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품위가 있어서, (현대인 치고는)” 해준을 향한 서래의 표현은 박해일에게 해도 위화감이 없다. “그럼 서래씨는 어느 시대에서 왔길래, 당나라?”라고 묻는 투가 예스럽다. 박해일은 칠십년대생이고, <헤어질 결심>(2021)의 배경은 구체적인 동시대이니 장해준도 그쯤 태어났을 테다. 그러나 해일과 해준은 노인 같다. 아니 그보단- 몇백년 전 쓰인 옛이야기 혹은 몇십년 전 출간된 고전문학 속에서 튀어나와서는 현대적 감수성을 완벽히 습득한 인물이라고 할까. 박해일은 로맨틱한 선비 같다. 보고 있으면 종종 시대감각을 잊게 된다. 그 목소리와 미소의 조합은 향의 내에 취하는 기분을 선사한다. 그러고 보니 그를 모든 한국인의 첫사랑으로 만든 <인어공주> 속 진목 역시 옛사람이었다. 원작자를 좋아하지 않아 무관심했던 <은교>(2012) 속 노시인 이적요가 왜 그여야 했는지 보지 않고도 납득할 수 있었으나- 결국 보게 되었다.
장률의 박해일을 한데 모으기 위해 글을 나누며, 이 공간에 <헤어질 결심>과 <은교>만이 남게 되었다는 점이 걸렸다. 두 작품을 한 공간에서 다루려면 감히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없음을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한다. 십 년의 세월 탓만은 아니다. 아이디어부터 캐릭터와 서사의 짜임, 대사, 연출과 편집까지 모든 면에서 다르다.
이적요와 장해준에겐 표면적 유사성이 있다. ‘자신과 간극이 있는 이를 사랑하게 되면서 원래였다면 절대 않을 일을 하고 기꺼이 무너진다’는 것. 이렇게 요약하면 흔한 픽션 속 남성 주인공 서사로 들린다. 그러나 누구도 <헤어질 결심>을 흔한 영화라 하지 않고, <은교>와 함께 두고 비교하지도 않는다. 두 인물과 두 작품을 나란히 놓을 수 없는 핵심 까닭 중 하나는 한은교와 송서래의 차이다. 본질적이고 총체적으로 다른 상대방을 대하는- 박해일의 연기도 다를 수밖에 없다. <헤어질 결심> 엔딩크레딧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은 탕웨이가 아니었던가. 제목인 ‘은교’를 연기한 김고은의 이름은 박해일과 김무열 다음에 ‘and’ 없이 올라온다. 당연히, 이것만으로 인물에 대한 작품의 태도를 단정 짓기는 힘들다. 그러나… 박해일을 향하는 김고은의 시선에, 김고은을 향하는 박해일의 것, 혹은 서로를 향하는 박해일과 김무열의 것처럼 설명할 만한 깊이가 보이던가? 그렇지 않다면 과연, ‘김고은이 신인이라 능숙하지 않아서’만으로 설명되는가(사실 그는 존경스러울 정도로 충분했다.)? 이렇게 딱히 질문이 아닌 질문을 던져놓고, 이적요와 장해준을 살피기에 앞서 작품 선택 과정을 구구절절 풀어놓으려 한다.
배우에 대해 쓸 때 작품을 고르는 기준은 늘 바뀐다. 특정한 감독의 세계 속에서 그가 무엇인가 살피기도 하고, 유사한 특징을 보이는 캐릭터에 포인트를 두기도 한다. 경력이 꽤 쌓인 배우라면 특정한 시기에 집중하기도 한다. 그저 마음에 들어온 작품만을 골라 넣었던 적도 있다. 박해일은 유독 어려웠다. 애초에 필모그래피를 다 훑는 배우론이 되기는 그른 글이었다. 이제껏 접한 그의 영화를 정리했더니 예상보다 훨씬 여럿이었고, 그 말인즉슨 대부분이 기억에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시간이 지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당수는 ‘내가 쓸 까닭이 없는’ 작품들이었다.
‘쓸 까닭이 없는 까닭’은 박해일의 연기나 분위기와는 전혀 관계 없다. 오히려 그는 흥행과 작품성을 모두 잡았다고 평가되나 나와는 안 맞았던 <괴물>이나 원작조차 질리게 만든 <이끼>를 견딜 수 있게 해 준 거의 유일한 요인이었다. 취향을 찾는 과정에는 취향이 아닌 것들을 골라내는 작업이 포함된다. 그가 출연한 상업 영화들은 주로, ‘나는 이것을 좋아하지 않는구나’를 깨닫게 한 것들이었다. 그럼에도-구체적인 기억은 남지 않았음에도, ‘나는 박해일을 좋아한다’는 인식과 그에 대한 인상은 남아 있었다, 이상하게도.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박해일은 연기 폭이 넓음에도 카멜레온 류의 배우는 아니다. <괴물>이나 <십억> 속 특수하고 극한 상황에 놓인 여럿 가운데 하나, <극락도 살인사건>이나 <이끼> 속 수사/추리물 주인공, 심지어는 <인어공주>, <국화꽃 향기>, <연애의 목적> 등 작품/인물의 성격/포지션이 각각인 로맨스/멜로 영화들 속의 그를 겪고 나서도 박해일은 박해일로 남았고, 결국 박해일‘만’ 남았다.
<헤어질 결심>을 본 후 한동안 서래와 해준의 눈동자 안에서 허우적거리며 박해일에 대해 써야 하는지 고민했다. 그러는 사이 글은 시작됐다. 매번 하는 착각이다, 내게 쓰기의 선택권이라는 게 있다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다룰 작품 뿐이었다. (전에 그의 영화를 본 적이 없음에도)장률은 필수임을 확신했는데, <경주>와 <군산>을 본 후 이것들과 <헤어질 결심> 외에 어디쯤의 연기를 참고해야 할지 고민했다. 현과 윤영, 해준과 닿아 있었으면 했다. 무엇을 하기보다는 하지 않거나, 별나고 예스럽되 속이 보이는, 되도록 제1화자의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으면. 또한 이야기 자체가 일부라도 내 흥미를 끌었으면 했다.
그 끝에 나는 눈물을 머금고 <짐승의 끝> 관람을 미루었다. 그리고 그가 정말로 노인으로, 게다가 시인으로 등장하는 작품 <은교>를 택했다. 박해일은… 이 작품의 치트키 같은 존재였다. 상상 속에서 그가 아닌 배우에게 이적요의 옷을 입히려 하면, 어울리지 않음을 감지하기도 전에 불가능함을 깨닫게 된다.
이적요는 존재 자체가 시 같은, 때문에 삶의 방식이 ‘시’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화면에 등장한 후 한동안 그는 말을 않는다. 일상 생활에 묻어나는 느릿함은 단순히 노쇠한 신체 탓은 아니다. 종이봉투도 김도, 아무렇게나 뜯지 않고 가위로 공예를 하듯 신중히 자른다. 밥솥을 열고 밥을 뜨거나 천천히 음식을 씹는 동작들은 느긋하게 끊어지는 그의 말씨와 닮았다. 그저 나이만 든 남자가 아닌 옛 문인 같은 말투다. 속세와의 타협 따위 하지 않는 그의 입에서 다음과 같은 대사가 튀어나오는 것은 별로 놀랍지 않다. “문학관은 나 죽거든 하시게. 근데 나 죽으려면 좀 오래 걸릴 거야.”, “저 사람들 아주 관뚜껑에다가 못질을 하려고.”
후자는 자신을 따라 나온 서지우에게 하는 말이다. 이적요에게 있어 그는 ‘최측근 제자’인가? 아니면 말을 거를 필요가 없을 정도로 하찮은 중생인가. 서지우를 보는 이적요의 얼굴엔 시치미를 떼거나 벽을 치는 듯한 표정이 주로 떠올랐다. 대개 고집스러움과 무관심, 권위와 거리감이 자리했으나 가끔 안쓰러움이 섞인 복잡함이 묻어났다. 나는 자꾸 궁금했다. 이적요에게 서지우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러나 작품이 클로즈업하는 방향은 그쪽이 아니다.
이적요는 국이 짜도 만든 사람의 성의를 보아 먹을 만 하다고 해주는 종류의 인간이 아니다. 못되게 굴려는 것도 아니고- 원래 그런, 그저 말없이 수저를 탁 놓고 마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한은교는 달리 대한다. 먹지도 않는 샌드위치를 만들어 줘도 예술작품이라며 주섬주섬 칭찬을 늘어놓는다. 아부나 빈말이 아니라 기꺼운 애정표현이다. 조금 괴상한 방법이지만- 한은교와 (미성년자인) 그를 훑어대는 카메라를 인식에서 삭제한 채로 그를 향한 이적요의 긴장만을 관찰할 경우, 나름 마음에 닿는 것이 있었다. 애정의 대상과 나이의 간극이 있는 상황, 한은교를 향한 이적요의 시선이 그다지 소름 돋지 않는 건, 거기 이미 체념이 있어서다. 제 욕망은 원고지에 풀어놓으면 족하니- 선을 긋고 ‘할아버지’라 불리는 위치에 머무른다. 숨겨야 할 것은 철저히 숨겨 놓은 채로, ‘너의 문신을 봤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고, 태연히 가슴팍의 헤나를 내보인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그 체념은 아리고 아련해지며, 초반에 나체로 물끄러미 전신거울을 응시하던 순간처럼 종종 상대가 아니라 그 자신에게로 수렴한다. 꿈속에서 유리창에 비친 젊음을 본 순간, 이적요의 얼굴은 약간 이지러진다. 달리는 표정은 겁이 날 정도로 생기롭게 망가진다. 늙어보지 않은 박해일이 노인 분장을 한 채 늙음에 대해 사유하고 말하는- 그 연기엔 놀랍게도 이적요가 지나온 세월의 흔적이 있었다. 기묘한 설득력과 함께 다가오는 장면들이었다.
<은교>에는 손에 꼽을 정도의 코미디 모먼트가 있었는데, 그 웃음의 원인은 전부 박해일이었다. ‘헐’과 ‘할’을 큰 소리로 말하는 따위의 서투르고 고집스러운데 자상한 제스처들은 좀 귀엽기까지 했다. <헤어질 결심>의 경우 반 정도가 코미디고, 그 웃음의 다시 반 정도는 박해일로부터 나온다. 용의자를 따라 달리다 지치고 질려 살짝 고장난 실루엣, 뜬금없이 ‘바다의 사나이’를 외치는 (안어울리게 어울리는) 능청, 그놈의 “굿모닝”, 서래의 답장을 기다리며 가만히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는- 인자한 웃음기가 묻은 눈, 서래의 집을 청소하는 공손한 손길…. 구체적 발현은 다양하나, 그 온도는 일관되다.
다시 <헤어질 결심>으로 돌아왔다. 앞서 ‘감히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없다’며 <은교>를 깎아내린 바 있는데, 사실 그 어떤 영화를 가져와 비교하려 해도 내키지 않는 작품이었다. 각각의 요소에 기시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 조합은 이제껏 없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장해준 역시 박해일의 다른 인물들과 닮아 있었으나 그들과 한데 둘 수 없었다.
‘안개’의 선율과 함께 그것을 음미하는 박해일이 화면에 흐르면, 관객은 그 덩어리의 순간을-음악과 박해일 전체를- 음미하게 된다. 근현대 소설에서 튀어나온 듯한 대사를 박해일이 치면 어색하지도 오그라들지도 않는다. “슬픔이 파도처럼 덮쳐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에 잉크가 퍼지듯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는 거야.”, “이번 알리바이는 차돌처럼 단단해야 할 겁니다.” 해준에 빙의해 정신없이 전개를 따라가다가도, 별안간 밖으로 튕겨져 나와 박해일을 감상하며 감탄하게 되는 작품이다. 해준의 러닝화를 신은 박해일은 그 어느 때보다 피곤해 보였고, 그래서 매력적이었다. 단단하게 부드러우면서도 연약하게 날카로웠다. 해준은, 샅샅이 파헤치듯 다루지 않을 것이다. 내 것으로 만들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음을 알고 있으므로, 차라리 최대한 쪼개지 않은 상태로 아울러 마음속에 저장해 놓으려 한다.
장해준의 사람됨과 성격을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는 ‘똑바로 보려고’ 노력한다. 원칙과 예의를 지킨다, 용의자에게건 부하 직원에게건. 형사로서 나름 연기를 할 줄 안다. 자상한 남편이다. 감각이 예민하다, 특히 후각이. 피냄새가 진동하는 현장을 무서워한다. 결벽증이 좀 있다. 모든 것을 똑바로 놓거나 타인이 머무른 곳을 물티슈로 훔치곤 한다. 그러나 감정적으로 까다롭게 굴지는 않는다. 불면증이 있다. 주머니가 잔뜩 달린 옷을 입는다. 거기 물티슈며 손수건을 넣고 다닌다(손수건, 젠틀맨의 상징 아닌가. 녹음을 들은 서래가 눈물을 보이자 정갈한 손수건을 스윽 내미는 그는 과연, 여정이 울자 테이블의 거친 휴지를 뽑아 주섬주섬 들이미는 최현과는 다른 남자다.). 각각의 특징은 서로 동떨어져 있지 않다.
해준은 흔한 주인공도 평범한 형사도 아니다. 깨끗하고 별나고 남달리 멋진 자다. 그것을 과시하지 않기에 그의 멋은 끝까지 유지된다. 예를 갖춘 태도와 섬세한 배려는 가식이 아니라 당연하게 몸에 밴 것, 그 품위는 그의 발성처럼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뿌리깊은 것이다. 그런 해준의 마음을 박해일이 불특정 다수의 관객에게 기꺼이 열어 보여주었다는 점이, <헤어질 결심>에 몰입하게 되는 까닭 중 하나다.
해준을 재울 수 있는 단일한 사람, 송서래. 그를 향하는: 의심과 함께 저도 깨닫지 못하는 관심이 드러나는 미묘한 눈빛, 일상적 예의와 특별한 배려의 경계에 있는 제스처들. 수줍으나 여유있고, 능숙하나 익숙하지는 않다. 요령은 없고 낭만은 있다. 배우자를 두고 다른 이와 만나는 스토리라인임에도 <경주>에서 그랬듯 순간의 로맨스에 집중하게 된다. 연출과 박해일의 존재감이 만나 부여되는 느낌이다. 해준의 로맨틱은 은근하면서도 직진형이다. “그래도 예뻤어요.”라 지나가듯 중얼거리고, 고집스럽게 증거사진을 붙든 채 눈을 맞추는. “맞아요, 기뻐요.”라 선선히 말하는. 절에서의 고풍스러운 데이트 시퀀스는 탕웨이와 박해일을 위해 특수하게 구성된 것만 같았으며,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분위기를 풍겼다. 서래가 제 주머니에서 꺼낸 민트를 내밀자 가만히 젓는 고개의 부드러운 선. 서래의 입에 물린 담배를 제 손으로 옮겨 재를 떨고 다시 물려주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자연스럽게 흐르는 일련의 움직임. 사소한 모먼트들마저 모조리, 가장 우아하고 담백한 형태로 박해일스럽다.
마음을 깨달은 후 ‘패’를 다 내보이며 다가가는 해준은 이토록 매력적이다. 그는 자신이 ‘무얼 하는지’ 안다. 저와 ‘같은 종’의 사람을 만나 설레는 만큼 편안해한다. 반면 ‘서래가 간 길’을 오른 날 밤, 지치고 무너진 채 상대와 자신에 대한 원망과 사랑의 고백을 뱉어낼 때는, 제가 하는 말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리고 이포에서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로 시작되는 수사를 진행할 때, 해준은 스스로 무엇을/무슨 말을 하는지 확실히 알고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않다. ‘똑바로 보려는’ 눈빛은 혼탁하고, 서래에게 ‘넘어가지 않으려고’ 애쓰는 그는 위험하고 위태로워 보인다.
박해일이 인물에게 파고들어 끝내 그를 제 속에서 꺼내는 방식은, 어쩌면 남다른 감으로 관찰하고 정직하게 걸음을 내딛는 해준의 수사법과 닮아 있지 않을까. 결정적인 순간 박해일은 멋져 보이는 대신 절실하고 적나라해지길 택했다. 예로 눈산에서의 “서래씨는, 몸이, 꼿꼿해요.”의 딜리버리가 있다- 예상치 못한 투였다. 속에 응어리져 있던 것을 토해내는 듯한, 드러내고 싶지 않은데 둑이 터진 눈물처럼 쏟아낼 수 밖에 없는 듯한. 가슴속에 치는 파도가 자꾸 눈알과 피부와 입술과 팔다리로 비어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
위치추적을 하며 통화하는 다급한 목소리도, 마지막에 파도를 맞으며 서래의 이름을 절규하는 갈라진 목소리도 그랬다. 그리고 그 직전 클로즈업으로 담긴 얼굴은.....이제껏 목격한 적이 없는 무언가였다. 서래는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라 했는데, 그 순간 해준은 깨달은 사랑과 함께 기꺼이 무너지고 깨어지기를 택함으로써 스스로를 다시, 다른 형태로 쌓아올린 듯 했다. 울음과 웃음이 단순히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뒤섞여 새롭고 독립적인 형태가 된- 그 복합적인 표정의 흐름을 겪는 동안, 여운이 별안간 밀려 들어와 크레딧이 올라간 후에도 좀처럼 빠져나가지 않았다. 엔딩은 서래와 함께 꽉 닫혀버렸는데 해준은 홀로 열려 있다. 풍부하게 열린 얼굴에는 그들의 역사와 사랑이 가득 소용돌이쳤고, 아직 완전히 찾아오지 않은 이별이 어른거렸다.
좋아하던 배우를 사랑하게 되는 계기 역할을 하는 작품이 있다. 그러니까, 마침내 그에 의해 완전히 붕괴되도록 만드는. <헤어질 결심>은 내게 그런 영화였다. 대부분의 박해일이 (내 마음을)‘잉크가 물에 퍼지듯 물들였다’면 장해준은, ‘파도처럼 덮쳐왔다’.
두 시간 반 거의 내내 화면엔 박해일이 있다. 웃고 울고 설레하고 혼란스러워하고 고통 받고 붕괴되고 의심하고 사랑하고 절망하고 희망을 보는 동안 그는, 멋지고 웃기고 로맨틱하고 예스럽고 여리고 강인하고 예리하고 둔하고 고고하고 솔직하다. 수식어가 여럿 따라붙었으나 어쩌면 더 중요한 건, 박해일의 해준에게 없는 것들이다. 그가 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척 하는 것’, ‘간절해야 할 때 폼을 잡는 것’이고, 그가 아닌 것이 있다면 껍데기다.
박해일의 품위는 거기에 있다. 박해일은 제대로 망가져 웃길 줄 알고, 그래서 ‘없어 보일’ 때조차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 완전히 무너질 줄 알고, 관객도 함께 무너뜨린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수면은 잔잔하고 사방은 고요한데 저 심해로부터 물보라가 끓어오르고 있음이 낱낱이 전해진다는 것을. 가만히 있는 채로 흔들리는 박해일을 보고 있으면, 더 큰 진폭으로 요동치다 산산조각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욕심이 피어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