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배웁니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제모름 Nov 18. 2022

어떤 순수 (그리고 여백)

프란츠 로고브스키 Franz Rogowski



<트랜짓(Transit)>(2018, 크리스티안 페촐트)

<운디네(Undine)>(2020, 크리스티안 페촐트)

<거대한 자유(Grosse Freiheit)>(2021, 세바스티안 마이저)


Feat. <프릭스 아웃(Freaks Out)>(2020, 가브리엘레 마이네티)


* 위 작품들의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대괄호] 안의 문장은 작품에 관해 쓴 글에서 옮겼습니다.

 

 

<트랜짓>(2018)의 세계는 이상하다. 어디서 본 듯 하면서 낯설고, 알지 못한다기엔 자주 낯익다. 2차대전 시기와 닮은 상황과 현대적 소품들, 의도적으로 시대성이 삭제된 대사들. 게오르그는 처음부터 관객이 마음을 주기 쉬운 주인공은 아니다. 건조하고 단호한 표정과 말투, 경계를 놓지 않으며 효율적으로 몸을 놀린다. 텅 빈 눈을 빠르게 굴린다. 바이델의 피에도, 호텔 주인의 이야기에도 별 반응이 없다. 하인츠의 죽음에도 감정이 들어설 여유는 없다. 좀처럼 파악할 수 없다. 아니, 그 반대로 단순하다. ‘생존’밖에 남지 않았다. 파악은 어렵지 않으나 판단은 쉽지 않다. 빨리 달려도 어딘가 휘청거리는 데가 있는 움직임, 딱딱하게 뱉어도 어물거리는 데가 있는 말투. 그런 틈들이 집중을 부르고 섣부른 평가를 막는다. 부고를 전하는 움츠러든 목소리와 어깨, 낡은 호텔 침대 위 웅크린 몸, 주섬주섬 원고를 꺼내는 움직임, 그리고 거짓말. 결국 오해를 바로잡기를 멈추는 얼굴을 보면,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이 떠오른다.  


옳지 못한 행동을 하는 주인공을 관객은 이해할 수 있다. 일단 그가 처한 객관적 상황, 그것에 이입하게 만드는 작품의 흐름 때문이다. [파시스트들과 수많은 공범들이 만든 그들만의 세상, 속하지 못하는 이들에겐 비정상적으로 긴장한 상태가 일상이 되었다. 만성적 피로와 불안을 느끼며, 짓지 않아도 되었을 죄를 짓고,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을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리고 하나 더, 프란츠 로고브스키의 독특한 존재감과 집중력 덕이다. 첫인상은 투박하나 갈수록 섬세한 구석이 보이는 마스크, 탁한 그늘이 있는 듯 했으나 들여다볼수록 맑은 눈빛, 약간 기우뚱한 특유의 자세와 몸짓… 단단히 발을 붙이고 서서 여리게 흔들리는, 진심이 감지되는, 어딘가 서툴러 정이 가는. 볼수록 마음을 쓰게 되고, 끝내 마음을 주게 된다.


<트랜짓>(2018)


게오르그는 마르세유를 배회하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자인 동시에 화자에게 관찰되는 주인공이다. 프란츠 로고브스키는 담음으로써 표현한다. 자신을 잊지 말라고 부탁하듯 여정과 괴로움을 늘어놓는 자들 사이에서 지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이. 그러나 결국 그 또한 정착할 수도 쉬이 벗어날 수도 없는 ‘지옥’(바이델),의 군상 중 하나였고, 누구에겐가 이야기를 털어놓아야만 했다. 그러나 다시, 그는 이곳의 본질을 홀로 알고 있는 자인 듯 보이기도 한다.


게오르그가 가장 그다워 보일 때는 드리스와 공을 차거나 라디오를 수리할 때다. 처음부터 조금의 위화감도 없는 그들의 만남. 티없는 웃음, 담백한 대화. 다른 사람 같다,고 느껴질 법도 한데, 그렇지 않다. 상대를 경계하며 대놓고 계산적으로 굴다 재빨리 도망가던 이도, 친근하고 가식 없는 태도로 드리스를 배려하며 웃음을 주고받는 이도 게오르그. 다만 살아남느라 지쳤을 뿐이었다. 독일어로 노래하거나, “학교 글짓기는 더 이상 안 해요”라고 선언하거나, 바이델의 지옥도를 읊는 순간. 타인의 언어 혹은 타인의 이름으로 하는 대사에는 게오르그 본인의 속내가 있다.


<트랜짓>(2018)


그의 눈가에 다르고 분명한 것이 어른거리는 순간은 바이델의 소설과 마리의 편지를 읽었을 때, 자꾸만 마리를 마주칠 때다. 자신의 어깨를 두드린 이가 누구인지 알 턱이 없지만 ‘저도 모르게 알아보는’ 것만 같다. 정식으로 대면하고부터는 바이델의 자리를 채우기라도 하려는 듯 사랑에 빠진다. 그 분명한 끌림은 의아할 정도다. 왜였을까, 생기 없는 얼굴들 사이로 누군가를 끈질기게 찾아 헤매는 이라서? 자신과 동류임을 감지해서? 게오르그 자신조차 설명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끝내는 이쪽을 바라보지 않는 마리가 남편과의 재회를 그리며 해맑게 기뻐할 때, 그는 애써 말을 삼킨다. 털어놓을 수 없었던 건- 편지를 읽었을 때부터 느낀 그 순수를 깨트리고 싶지 않아서였을지도. 다 해석할 수 없을지라도, 프란츠 로고브스키의 눈에 담긴 로맨스가 의심을 지웠다. 그 기쁨, 상실감, 기대, 무너짐, 기다림, 그리고 마지막 장면의- 알고 있었다는 듯 번지는 반가움. 그는 마리가 남편의 유령을 좇았듯 마리의 유령을 좇게 된 것일까.


사랑은 그가 생존(/경유의 지옥을 벗어나는 것)보다 우선하는 감정, 사랑과 그 상대방은 그 자체로 목적이고 전부였다.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였다. 논리적인 사고과정에 따라 내린 결론은 아니었을 테다. 직관이고 본능, 애초에 거기 자리했던 무언가다. 드물지 않은 줄거리와 캐릭터가 특별하게 다가오도록 만든 것은- 페촐트가 구성한 시공간에 걸린 마법이었고, 그늘지고 지친 그대로 순수한 프란츠 로고브스키의 감정이었다.


<트랜짓>(2018)



그래서 <트랜짓>은 ‘결국에는 사랑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을 영화다. 페촐트의 다음 작품 <운디네>(2020)도 그랬다, 멜로인 것만은 아니나 결국에는 사랑 이야기, 로맨스의 결말이 어떠하건 사랑을 말하는 영화. 이번엔 지옥이 아닌 물속에 떨어진 파울라 비어와 프란츠 로고브스키는 어딘가 닮은 모습으로 서로를 발견했다.  


게오르그는 캐릭터성보다 처한 상황으로 먼저 다가오는 주인공이었다. 크리스토프는 처음부터 자신을, 가지고 있는 사랑의 에너지를 스스럼없이 내보여도 괜찮은 이다. 그의 첫 등장 컷엔 별다른 장식적 연출이 없다. 영화는 운명에 걸려 심장이 멎은 운디네의 상태에 집중해 있다. 별로 위험하지 않은 불청객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게오르그가 그러했듯 존재감이 독특하다. 약간 기울어진 말투와 자세, 침착하고 맑은 눈빛과 엷은 미소, 쭈뼛거리는 걸음걸이. 최대한 덜 위협적으로 보이려 애쓰느라 매력을 어필할 여유 없이 긴장해버린 듯한 태도. 그 젠틀한 서투름이 진심의 증거로 작용해 자연스럽게 눈길을 끈다. 자리를 피해 주려 뒷걸음질치다 “멍청하게도” 진열대를 건드리고는 “멍청한” 효과음을 내고부터 크리스토프는, 운디네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고 관객의 마음을 무장해제 시킨다.


보이는 상황만 나열하면 전형적 로맨틱 코미디의 발단 같다. 역사학자는 연인에게 실연당한 카페에서 자신의 강의를 들었다는 남자를 마주친다, 남자는 커피 데이트를 신청하지만 상대가 반응이 없자 조심스럽게 자리를 뜨려다 진열대를 건드린다, 학자는 남자가 다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끌어당기고, 커다란 어항이 쏟아진다, 유리조각과 물로 뒤덮인 채 바닥에 쓰러진 그들, 관심은 상황이 아니라 서로에게 있다. 뒤늦게 들어온 카페 매니저가 “이 멍청이들, 보험은 잘 들어놨길 바란다.”고 투덜대는 와중 눈을 마주치고 웃는 두 사람. 좀 완벽할 정도다. 그러나 분위기는 흔하지 않고 묘하다. 애초에 성격과 의도가 다른 영화/장면이라는 점을 자세히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간단히 ‘크리스티안 페촐트, 파울라 비어, 프란츠 로고브스키’라는 이름들을 적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운디네>(2020)


과연, 크리스토프와 운디네의 장면들은 ‘보통’ 로맨틱 코미디의 그것 같기도 하다(그러나 관객은 영화가 그렇게 두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파울라 비어와 프란츠 로고브스키는 그들만의 방식대로 사랑스럽다. 기차와 속도를 맞추어 달리며 웃는, 따라가겠다고 잠결에 옷을 주섬주섬 입는, 그렇게 따라 나와서는 운디네의 어깨에 기대 조는, 부은 눈을 갑자기 뜨고 ‘사랑해’라고 건네는 크리스토프. 그리고, 꼭 평생을 함께하자고 고백하듯 “나를 위해 강의해 줘”라고 말하는 크리스토프가 있다. “전혀 지루하지 않아, 똑똑한 말을 멋지게 아주 많이 해.” 그건 어떤 로맨틱한 게임도 아니고 운디네에게 끌린 까닭을 암시하는 것도 아닌, 그 자체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강의 내용만도 운디네의 실루엣만도 아닌, 그 전부다. 다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무슨 내용이든 상관없는 것도 아니다)- 그는 강의하는 운디네를 듣고 바라보는 상태를 원한다. 상대의 입술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힘을 뺀 눈은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처럼 반짝이고, 입은 살짝 벌어져 있다.


함께 있지 않을 때에도 크리스토프의 눈동자엔 운디네가 어른거린다. 거기엔 완전히 닿을 수 없는 것을 향하는 듯한 아련한 그늘, 혹은 꿈꾸는 듯한 몽롱함이 있다. <운디네>는 운디네가 시작해 크리스토프와 함께 완성하는 이야기, 크리스토프는 운디네가 사랑하는 대상이자 그를 사랑하고 기억하는 자이기에 공동 화자로서 의미가 있다. 때문에 그가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으면서도 중요하다. 먼저, 운디네가 사랑하는 자이므로 ‘어떤 사람이든’ 상관 없다. 그러나 다시, 그였기 때문에 운디네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랑에 진심인, 또 거대하고 신비로운 것들이 자리할 공간을 가슴속에 마련해 두는 이였으므로.


시간이 흐르고 다시 돌아간 물에서 운디네를 목격한 크리스토프는 촬영 영상을 돌려본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으나, 얼굴엔 실망이 없다. 그는 작가의 카메라조차 포착하지 못한 것을 볼 수 있는 이일지도 모른다. 운디네의 말을 ‘헛소리’로 받아들인 요하네스와 달리 운디네의 존재를 ‘볼 수 있고’ 사랑을 믿는 사람. 그는 운디네가 ‘무엇’인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더라도 가슴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강의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듯. 그렇기에 제대로 된 이별을 (사랑을) ‘나눌’ 수 있었을 것이다. 운명이 갈라놓은 두 존재는 서로를 영원히 사랑하고 기억할 것이다.


<운디네>(2020)


나도 모르게 <운디네>의 첫 이해를 크리스토프의 것과 닮은 방식으로 하게 된 것 같다. 영화가 주인공을 통해 이미 “아는 만큼 보인다”고 선언하고 들어가는 이 작품을, 몹시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말았다. 둘 사이 놓인 죽음과 물의 운명을 짜맞춰 보기 전 이미 과몰입해 엉엉 울어버린 상태였다. 그들이 눈빛과 손짓으로, 울먹임과 발걸음으로, 단지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말하는 것들이 마음 깊은 곳을 건드려서였다.



한 감독의 영화에 다시 등장한 배우를 보며 다른 상황에 놓인 한 영혼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작품 세계’라는 말도 있고… 멀티버스가 흔한 픽션 소재가 된 시대이기도 하니, 아주 엇나간 상상은 아니리라. 크리스티안 페촐트 작품 속 파울라 비어와 프란츠 로고브스키가 그랬다. 떠남을 전제로 하는 곳에서 만난 시인의 아내와 그 시인을 사칭한 남자, 물이 고향인 역사학자와 물에 끌리는 잠수원. 프란츠 로고브스키의 얼굴로 관찰된 게오르그와 크리스토프는, 사랑만 먹고도 살 수 있을 것 같은 로맨티스트였다. 그들의 진심을 프란츠 로고브스키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전했다. 요령도 없고 에둘러 표현하는 법도 없는, 곧고 순수하고 귀한 감정들이었다.


<거대한 자유>(2021)


<거대한 자유>(2021) 속 그의 역할에도 이와 통하는 데가 있었다. 한스 호프만 역시 사랑에 진심인 이였다. 그러나 다를 수밖에 없는 인물이기도 했다. 게오르그가 도망치고 숨고 속이는 와중 마음껏 드러냈던 사랑의 감정, 그것은 한스가 ‘불법인간’으로 낙인찍히지 않기 위해 숨겨야 했던 단 하나였다.


그러나 재판을 받거나 옷을 벗고 신체를 내보이는 한스의 행동에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은 없었다. 단지 익숙하기 때문은 아니었을 테다. 종종 자조와 피로가 어른거리지만 그는 항상 자신이 틀리지 않았고 변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1945년의 한스는 수용소에 갇혀 있다 바로 교도소로 옮겨진 상태, 한동안 입이 아닌 눈빛과 몸짓 언어로만 말한다. 온몸에 긴장이 들어가 있어 근육이 자주 굳거나 강한 반응을 한다. 확장된 채 멎어 있는 눈은 줄곧 미세하게 떨린다. 그럴 때조차 그에겐 존재에 대한 의심이 없었다. [영화가 이 이상한 시대와 국가와 법을 고발하는 방법은, 한스라는 인물로 중심을 잡는 것, 그 눈에 세계를 담고 세계가 그를 관찰하게 하는 것이다.] 흔들리지 않는다 하여 상처 받지 않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마음을 건네고,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다. 단단하게 존재함으로써 관객의 중심을 잡아 주는 동시에 마음을 찢어 놓는다.  


한스에겐 별 망설임이 없다. 늘 원하는 바를 알고 ‘방법을 찾아낸’다. 남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고, 교도소 안에서 데이트할 궁리를 하고... 행동은 언뜻 비슷하지만, 레오를 보는 눈빛엔 오스카를 향하곤 했던 절박함이 없다. 따스하고 로맨틱한 와중 아리송하다. 오랫동안 숨어 혹은 묶여 지내다 지쳐 사랑을 포기한 걸까. 그러나 빅토르와 재회했을 때의 눈은 빛났다. 그때, 그의 빛은 거기 있었다. 두 사람 사이 감도는, ‘남다른 우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긴장감. 세상에 하나 뿐이라고 할 수도 있을 무언가. 작품이 진행됨과 함께 그 정체를 조금씩 파악할 수 있었고, 극장을 나오며 감탄했다. 프란츠 로고브스키의 눈에 어린 찰나의 빛이- 말로는 다 표현되지 않는 관계와 감정을 얼마나 명확하고도 풍부하게 드러내 주었는지.  


<거대한 자유>(2021)


그가 어둠 속에서 발견한 불빛은 사랑이었고 상대방이었으며 곧 ‘거대한 자유’였다. [오스카의 죽음을 알고 무너져내리는 자신을 끝까지 놓지 않았던 빅토르가 십 년 후 마약중독으로 괴로워할 때, 한스는 그 포옹을 돌려주었다. 당신의 괴로움을 다 내 피부에 새기겠다고, 내가 붙잡을 테니 당신은 놓아도 괜찮다고 선언하듯 촘촘하고 단단한 그 포옹들.] 한밤중에 절박하게 벽을 긁는 빅토르를 보며 한스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를 제지한 것이 과연 포기의 제스처였을까? 복잡한 아픔을 품은 채 상대를 보듬는 행동은 아니었을까.


이 글에 앞서 영화 감상을 완성했다. 한스의 마지막 선택에 대한 두 해석과 함께 글문을 열며, 그의 심리를 정확히 짚어내려 한 것부터가 잘못된 행위일지도 모르겠다고 적었다. 관람하는 와중 느낀, 그리고 고민 끝에 ‘택한’ 해석을 바탕으로 묘사한 것이 위 문단들이다. 그에겐 ‘나의 미래와 신체의 자유’보다 ‘너와 함께하는 현재’가 중요했으리라는 짐작. 쓰고 나서도 망설였다. 담배를 사던 얼굴에 비친 후련함은 포기였나, 의지였나. 억압에의 중독이었는가, 사랑의 기대였는가. 프란츠 로고브스키의 연기에 있던 여백 ‘덕분’이었다. 결정을 내리는 그의 표정은 해석의 여백이 있는 채로 분명했다. 관객이 결론을 받아들이고 잊는 대신 자꾸 돌이키며 고민하게 만드는 연기였다.


<거대한 자유>에서 나는 아마도, 가장 단단하고 맑은 프란츠 로고브스키의 눈빛을 보았다. 어쩌면 가장 지친 눈 또한 본 듯도 했다. 그래서 한스 호프만의 모든 장면을 다시 훔쳐보고 싶었다. 거기 있는 사랑과 욕망과 고통을, 체념이었을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또 한 번 확신할 수 없을지라도, 설령 더 모르게 될지라도.


<거대한 자유>(2021)



프란츠 로고브스키를 주목하게 된 계기는 <프릭스 아웃>(2020)이었다. 2차대전 시기 이탈리아, 나치 휘하 서커스의 단장 ‘프란츠’는 주인공인 프릭 초능력자들을 모아 세계를 지배(?)하려 하는 자다. 거대한 야망을 가진 악당처럼 들리지만, 사실 애정결핍과 자격지심, 인정욕구로 뒤범벅 된 채 성장을 멈춘 인물로, 몸과 마음은 대개 흐트러져 있었다.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타자에 대한 폭력으로 발현되었다. 끝내는 위태롭게 붙들고 있던 제 세계와 함께 자멸했다. 억압자 주제에 몹시 연약하게 흔들렸던 그를, 프란츠 로고브스키는 폭발적이면서도 부담스럽지 않게 표현했다. 섬세하게 엉망이 되는 그를 보며 언젠가는 이 배우에 대해 쓰게 되리란 것을 알았고, 그날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반 년쯤 후, <거대한 자유>를 보았다. 한스 호프만은 억압당하면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사랑의 힘으로 강했다. 자신이 다칠지언정 타인을 해하지는 않았다. 그가 사랑을 단단하게 붙들수록 내 가슴은 무너졌다. 유사한 시대를 아주 다른 톤과 형태로 다룬 두 작품, 정 반대라고 할 수도 있을 두 인물이 같은 배우에게 담겼다. 한 연기를 보면서는 감탄의 숨을 뱉느라 입을 다물지 못했고, 다른 한 연기를 보는 중에는 감탄조차 잊고 숨을 죽이거나 눈물 사이로 겨우 몰아쉬었다.


<거대한 자유>(2021)


<트랜짓>, 화자는 마리의 글씨체에 대한 게오르그의 감상을 전하며 “순수pure”라는 표현을 쓴다. 캐릭터성에 대한 암시로 받아들였고, 끊임없이 “my man”을 찾아다니는 마리를 보며 그 뜻을 고민했다: 세상 물정을 모른다는 뜻도 ‘때묻지 않았다’는 뜻도 아니고... ‘숨기는 바 없이 있는 그대로’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상하게도, 진실을 숨긴 채 진심을 드러내는 게오르그에게서도 비슷한 종류의 순수를 발견했다.


내가 목격한 프란츠 로고브스키의 인물들에게는 일종의 순수,가 있었다. 다 내보이지 않더라도, 찰나의 눈빛이나 손짓, 뒷모습, 한 마디의 대사를 치는 입술 같은 것이 화면에 잡히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심지어는 파시스트(인 척 하는) 빌런일 때조차 그랬다. 그의 연기에는 또한, 여백이 있었다. 파악되어도, 쉽게 판단하지는 못하게 만드는. 불확실함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자체로 완전하고 분명한.


<트랜짓>(2018)



하여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세 작품의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특별상영으로 관람했던 <프릭스 아웃>과 영화제에서 관람한 <거대한 자유>를 정식 개봉작으로 다시 만나고 싶다. 그리고 후반 작업 중인 <패시지>가 있다. 아이라 잭스, 벤 위쇼, 아델 이그자쇼풀로스, 그리고 프란츠 로고브스키. 네 사람이 각각 함께 하는 첫 작품이다. 이 이름들이 한데 모이다니,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림이어서 더욱 기다려진다. 세 배우의 앞선 작업들로부터 자동으로 유추하게 되는 캐릭터가 있다. 어느 정도는 들어맞을 것이고, 대부분은 깨질 것이다. 배우를 좋아하게 되는 까닭의 일부가 거기 있다. 손에 넣고 싶어 자꾸 돌려보고 분석하고 묘사하지만 결국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감을 느끼는 데에서 오는 희열.


<트랜짓>의 게오르그를 따라가다 <운디네>의 크리스토프를 만났을 때, <프릭스 아웃>의 프란츠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리고 <거대한 자유>의 한스에게 다다랐을 때. 일관성이 있으면서도 다른 깊이와 섬세함이 있는 연기를 겪었다. 설명을 시도해보지만 결국 채워지지 않는 여백을 감지하며, 나는 매번 더 프란츠 로고브스키가 궁금해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해일이 밀려와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