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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Feb 26. 2023

짐 파슨스의 오늘과 내일

짐 파슨스 Jim Parsons



<보이즈 인 더 밴드(The Boys in the Band)>(2020, 조 만텔로)

<오! 할리우드(HOLLYWOOD)>(2020)


* 위 작품들의 핵심 전개와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2018년은 <보이즈 인 더 밴드>가 반백년만에 브로드웨이 데뷔를 한 해였다. 1968년 프리미어 후 오프브로드웨이에서 오랫동안 사랑받은 마트 크롤리의 연극으로, 미국에서 퀴어의 이야기를 처음 다룬 전설적인 작품이었다. 조 만텔로가 감독한 브로드웨이 무대의 주연은 아홉 모두 오픈리 퀴어 배우들이 맡았고, 2020년에는 이 라인업을 유지하며 넷플릭스 영화로 제작됐다. 무심코 플레이 버튼을 누른 “일반” 시청자라면, 그다지 친절하지 않은 표현법과 연극적 대사가 조금 낯설게 느껴졌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알수록 와닿을 것이다, 이 위대한 퀴어 클래식이 메이저 플랫폼을 통해 동시대 불특정 다수 시청자에게 다가가게 된 의미가. 마이클과 친구들의 이야기를 현재 스크린에 올리기로 한 까닭은, 제작 다큐멘터리 <보이즈 인 더 밴드: 썸씽 퍼스널> 속 원작자와 감독, 배우들의 말에 담겨 있다.


“나이 든 관객이 지금은 별로 그렇지는 않은데,라고 하니까, 가장 어린 관객이 지금도 완전히 그래요,라고 말하는 거다.(웃음)”

-마트 크롤리, <보이즈 인 더 밴드: 섬씽 퍼스널>

“오랜 시간이 지났고, 우리는 먼 길을 왔다. 만약 세상이 더 나은 곳이 됐다면 -전 세계적으로 상황이 나아졌기를 바라는데- 그건 그런 일들과 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짐 파슨스, <보이즈 인 더 밴드: 섬씽 퍼스널>


오리지널 공연 당시 주연을 맡았던 게이/스트레이트 배우들은 “모든 걸 걸고 게이 캐릭터를 연기해야 했다”(마트 크롤리). 시대가 변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세상은 개인적이거나 조직적인 퀴어혐오의 움직임으로 가득하다. 소수적 성 정체성/지향성을 공개하고 목소리를 내는 유명인들의 존재는 필요하고 소중할 수밖에.


그 소중하고 자랑스러운 아홉 주연 중에, 짐 파슨스가 있었다. 글로벌한 인기를 누린 시트콤 <빅뱅이론> 속 쉘든 쿠퍼의 얼굴로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10년이 넘게 한 인물을 연기하는 기분은 어떨까. 감히 짐작해보자면 배우로서 긍정적이기만 한 경험은 아니었을 것 같다. 이미지 고착에 대한 우려를 비롯해 이런저런 불안감이 있었을 법도 하다. 그러나 <빅뱅이론>의 배우들은 관객1의 기우를 가볍게 누르며 커리어를 멋지게 넓히는 중이다. 최근의 작업을 살피면, 사이먼 헬버그는 레오 까락스의 메타 예술 영화 <아네트>에서 섬세한 뮤지컬 연기와 연주까지 소화했고, 쿠날 나야르는 웰메이드 수사극 <크리미널: 영국>에서 특별 출연으로 화면을 압도했다. 그리고 꾸준히 다양한 작업을 해 오던 짐 파슨스는, 빅뱅이론이 종영한 해에 <보이즈 인 더 밴드>와 함께 브로드웨이로 향했던 것이다. 종종 연극 무대에 서곤 했던 그의 브로드웨이 데뷔작은 <노말 하트>. 래리 크레이머가 1980년대 에이즈 위기를 배경으로 쓴 희곡의 2011년 리부트였다. 이후 인터뷰에서 “이 작품이 당신에게 더욱 큰 의미가 있었나요? 게이로서 말입니다.”라는 질문에 “맞아요.”라고 답함으로써 “커밍아웃” 했다고, 짐 파슨스는 비디오 시리즈 ‘Becoming’에서 돌이킨다. “내게 있어 옳은 커밍아웃 방법이라고 느꼈다.” (짐 파슨스)




<The Boys in the Band>(2020)


<보이즈 인 더 밴드>는 단 하루 동안 벌어지는 이야기다. 마이클은 자신의 아파트에서 친구 해롤드의 생일 파티를 열고, 손님들이 하나 둘 도착하는데… 이들이 “노말하게” 즐겁고 따스한 시간을 보낼 거라고 짐작했다면, 모르는 소리. 오랜 친구들의 자주 신랄하고 종종 따스한 대화 속에는 당시의 현실과 복잡한 고통이 담겨 있지만, 프라이드 역시 빠지지 않는다. 마트 크롤리의 주변 사람들을 베이스로 창조됐다는 풍부한 캐릭터들은, 작품을 충분히 이해하는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현대적인 감수성을 입고 생생하게 살아난다.


“이 작품이 훌륭한 점 중 하나는 매우 다양한 게이 캐릭터를 잘 묘사했다는 것이다. 클리셰라곤 없다.”  

-맷 보머, <보이즈 인 더 밴드: 섬씽 퍼스널>

“진짜 현실의 캐릭터들이다. 마트가 그렇게 썼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불완전하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니.”  

-마이클 벤자민 워싱턴, <보이즈 인 더 밴드: 섬씽 퍼스널>


작품의 오프닝은 파티가 열리기 전 각자의 낮을 보내는 친구들의 모습이다. 선글라스를 낀 채 거리를 걷는 실루엣 만으로 마이클의 성격은 어느 정도 파악된다. 예민한 긴장이 들어간 눈썹과 굳은 어깨- 성급하나 각이 잡힌 걸음걸이. 각자의 공간에 있던 친구들이 한데 모이기 시작하면 화면은 또다른 분위기를 입는다. 한정된 공간에서 움직이는 인물들의 동선과 대화의 핑퐁에는 원작의 매력을 살려 연극적인 톤과 절도가 있는데, 영화 스크린에 어울리는 방향으로 조절됐다. 짐 파슨스의 표현법도 그러했다. 맺고 끊음이 분명하면서도 자잘하게 섬세하고, 즉흥성도 있으며, 무엇보다 ‘맛이 있었다’. 카메라가 포착해 기록한 것들을 목격하면, 영화화 결정에 감사하게 될 정도.


<The Boys in the Band>(2020)


마이클이 긴 호흡으로 대화를 주고받는 이는 도널드, 해롤드, 그리고 앨런. 이들과의 다이나믹을 중심으로 캐릭터를 설명해 볼까 한다. 도널드에겐 비교적 편안하게 자신을 드러내는데, (꺼내지 않기로 약속한 것 같은) 섹슈얼 텐션이 깔려 있다. 그와 둘만 있을 때, 마이클은 시니컬한 톤의 대사를 줄곧 늘어놓으며 물건을 정리하거나 거울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중절모를 비스듬하게 쓴 채 주디 갈란드 흉내를 내기도 한다. 자기연민과 함께 가라앉았다가 금새 농담과 함께 미소를 던진다. 언뜻 어수선한 업앤다운을 입은 짐 파슨스의 표현법은 오히려 정리돼 있다. 코미디언 행세를 하는 와중 기본적인 우울과 불안에 지쳐 있는 이, 모두에게 독설을 내뱉지만 내심 모두를 걱정하는 이, 모든 것에 질린 척을 하며 뼛속까지 스며든 외로움을 감추는 이. 시선과 말이 잦아들거나 멎는 곳에 무엇이 혹은 누가 있어야 하는지,(때론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 짐 파슨스는 놓치는 법이 없었다.


마이클은 마트 크롤리가 본인을 반영해 쓴 인물이었고, 짐 파슨스는 그와 방대한 양의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캐릭터를 구체화했다고 한다. 해롤드 역시 마트 크롤리의 가까운 친구를 토대로 했다고. (메이킹 다큐멘터리 참고) 실재했던 인물을 얼마나 닮았는지는 작가 본인만 알 테지만, 픽션 캐릭터 마이클과 해롤드는 대놓고 복잡미묘한 신경전을 벌인다. 자신을 너무 잘 아는 해롤드를 향해 마이클은 집요하게 빈정댄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엔 설명하기 힘든 깊은 애정 또한 교환되고 있다. 그리고 앨런. 홀로 스트레이트(?I doubt that)이자 불청객인 그를 배려하던 마이클은, 앨런이 애머리의 “여성스러운” 제스처나 말투에 대해 혐오적인 험담을 하자 태도를 바꿔 차분한 공격성을 드러낸다. 그 공격성은 점차 사방을 향한다. 특유의 시니컬함은 더 이상 유머로 봐줄 수 없는 농도를 띠고 퍼져 나가 공기를 불쾌하게 만든다. 커다랗고 여린 눈에 잔인한 장난기가 번득인다. 고개와 손을 불안하게 흔들며 타겟을 찾는다. 그 사나운 리듬에 사로잡혀 말과 행동을 자제할 수 없게 된 것처럼 보인다. 걸음을 멈추면 쓰러져 버릴 게 분명한 위태로운 균형을 잡고 자학적 줄타기를 하는 것이다.


타인을 몰아세웠던 날은 끝내 마이클 자신에게 꽂힌다. 내내 배회하며 일그러진 얼굴로 끊임없이 말을 쏟아내던 마이클은, “너는 죽을 때까지 동성애자일 거”(‘게이’가 보다 바람직한 워딩이지만 시대적 배경대로 ‘동성애자’라는 표현이 쓰인 것일 테다. 유사한 예로 FX 시리즈 <포즈>에도 ‘트랜스 젠더’ 대신 ‘트랜스 섹슈얼’이란 표현이 쓰인다.)라는 해롤드의 속삭임을 듣고 고장이 난 듯 멎는다.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그는 온 우주에 홀로 남은 듯 외로워 보인다. 친구들이 하나 둘 떠나고 거실에 도널드만 남자, 별안간 정신이 든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어쩔 줄 몰라한다. “내가 대체 뭘 한 거지?” 힘이 풀려 주저앉는다, 괴로움과 자기혐오가 견딜 수 없이 차올라 숨을 막고 어깨를 누르는 것처럼. 자신을 보듬는 도널드를 마구 때리고 밀어내다 결국 쓰러져 안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조금만 덜 혐오할 수 있다면.” 그 흐름 전체를, 자동으로 숨을 멈추고 관람했다. 짐 파슨스가 갈고 닦은 이 고유함을 ‘훌륭했다’ 따위의 하나마나한 말로 설명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훌륭했다고 적으련다. 스스로를 아주 놓아 던지는 연기였다. 몸과 마음을 잔뜩 긴장시킨 채 벼랑 끝에 서 있다가, 별안간 힘을 빼 무너져 버리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을 때조차 마이클이 내내 그 상태였다는 것을, 처음에는 밉살스러워 보이기만 했던 뺨이, 눈동자가, 사실 곧 무너질 듯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기 진득하게 들러붙은 자기혐오와 외로움. 해럴드의 말을 빌리면 “아무도 진짜 사랑한 적 없는” 자의 것이었을까. 특정한 대상을 향한 갈망이 아닌 공허한 외로움일 따름이었다. 사랑을 하고 또 받고 싶지만 버림받을 것이 두려워,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하고 아무데도 머무르지 못하는. 그 상태가 전혀 괜찮지 않아 자꾸 여행을 떠나지만, “정말 행복했던 곳은 비행기 안 뿐이었다”고 돌이키는. 그는 다른 친구들도 제 옆자리로 끌어내리려고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그보다는- 용서받을 수 없을 정도로 못되게 굴어 완전히 혼자가 되어버리려는 자학에 가까웠을지도. 오프닝과 유사하게, 엔딩은 파티가 끝난 후 각자 흩어진 친구들의 모습을 담는다. “백업 플랜으로 신을 믿는다”던 마이클은 자정 미사에 참여하고, 어딘가 어긋난 모양으로 축축한 밤거리를 터벅터벅 걷는다. 이내 마구 달리기 시작한다.



“거의 모든 순간 마이클은 별로 ‘인간적이지’ 않다. 비셔스vicious하지.(웃음)”

-짐 파슨스, in ‘Becoming’(2022.12.16), by [them]


여기 차원이 다른 ‘비셔스함’이 있다. 짐 파슨스가 유사한 시기 연기한 캐릭터 헨리 윌슨. 마이클의 ‘비셔스’에 ‘심술궂다’, 때로 ‘잔인하다’ 정도의 번역이 적절하다면, 헨리의 ‘비셔스’는 그야말로 ‘사악하다’. 계획적인 사악함이다.


역시 2020년 넷플릭스에 공개된 7부작 미니시리즈, <오! 할리우드>. <보이즈 인 더 밴드>의 감독 조 만텔로가 출연했고, <포즈>의 감독이자 오픈리 트랜스 우먼이기도 한 자넷 목이 라이언 머피, 이안 브래넌과 함께 총괄 프로듀싱을 하며 클라이맥스 에피소드 연출을 맡았다. 짐 파슨스와 대런 크리스, 데이비드 코렌스웻 등 주연 배우들 역시 프로듀서로 이름을 올렸다. 이렇게 ‘라이언 머피 사단’으로 불리는 여러 방송인들이 힘을 모아 2차 대전 직후의 할리우드를 각색하기로 한 까닭은, 작품 속에 명시되어 있다.


<보이즈 인 더 밴드>가 개개인의 서사와 관계에 중점을 두고 ‘허구이지만 있었을 법한’ 상황을 그렸다면, 2차 대전 직후의 할리우드를 현대적 감수성으로 재구성한 <오! 할리우드>는 있었던 인물과 사건을 바탕으로 하면서 당위성에 기반한 대규모 판타지에 한 발을 얹고 있다. 흑인 작가가 쓴 작품이 제작되고, 흑인 배우가 여우주연상을 받고, 안나 메이 웡이 조연상을 받고, 록 허드슨이 성 지향성을 오픈한 후 퀴어영화에 출연하는 등 ‘그래야만 했던’ 전개가 이어진다. 성매매를 긍정적으로 그렸다는 점이 걸리기는 하지만, 나름의 까닭이 있어 픽션적 허용으로 넘길 수 있는 정도. 이 판타지는 저절로 실현된 것이 아니다, 할리우드에 다양성을 뿌리내리려 온 힘을 다하는 주인공들이 낸 길에서 비롯되었다. 그 반대편에는, 완성된 필름을 태우라고 스튜디오 회장을 부추기는 변호사 같은- 전형적이고 평면적인 동시에 현실적인 ‘악당’들이 있다. 그러나 실재했던 인물에 바탕을 둔 짐 파슨스의 헨리 윌슨은 어느 한 쪽으로 분류하기 힘들다. 아마도 가장 복잡하고 입체적인, 관객이 판단을 보류하게 하는 인물이다.


<HOLLYWOOD>(2020)


배우를 꿈꾸는 젊은이 로이가 한 에이전시를 찾아간다. 헨리 윌슨은 비스듬한 뒷모습으로 처음 등장한다. 자세는 틀어져 있고, 실루엣은 연약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컷이 바뀌어 앞모습이 드러나면, 번득이는 눈동자와 얄밉게 다문 입술이 보인다. 헨리는 로이에게, 자신은 시청자에게- 압도적인 첫인상을 남겨야 한다는 것을 짐 파슨스는 알고 있다. 매력으로 사로잡는다는 뜻이 아니다. 묘하게 불쾌한 에너지로 얼어붙게 만든다. ‘넌 내거야’라는 메시지를 눈과 살짝 올라간 입꼬리에 묻힌 채, 당연하다는 듯 이것저것 통제하고 요구한다. 그 위압적이고 단호한 말투와 태연한 흐름은 순진한 로이의 머릿속을 휘저어 텅 비게 만든다.


파티를 즐기는 대신 불이 꺼진 방에서 술을 홀짝이며 사람들을 지켜보다 은근히 비밀을 캐내는 사람. 헨리는 그렇게, 타인에 대한 교묘한 폭력으로 권력을 축적한다. (그래서 주인공들의 해결사 역할을 할 때도 있기는 하다.) 잭의 절절한 고백에서 가능성과 빈틈을 잡아내는 저 탐욕스러운 눈빛을 보라. 그 눈이 빛날 때 시청자는 찝찝한 긴장을 느낀다. 성마른 얼굴에는 늘 악이나 오기가 들어찬 듯하다. 대사의 대부분이 협박이나 빈정거림이다. 기나긴 폭언을 완벽한 강약조절로 뱉기 위해 문장의 시작에 숨을 훅 들이쉰다. 짐 파슨스는 파워를 집중해야 할 때와 은근히 늦춰야 할 때를 구분해 캐릭터를 표현, 모두의 비호감을 얻는 데에 성공한다. 사실 약하고 외로운 인물, 표정과 태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신만만함의 바탕에는 자기애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혐오가 있다. 제 소수자성을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그는, 스스로 약하다고 느끼는 만큼 타인의 ‘약한’ 구석을 쉽게 들춰내 손아귀에 넣는다.


어느 날 헨리는 로이 앞에서 연인이 죽은 과거를 털어놓으며 눈물을 보인다. 그 얼굴에 엉망으로 울던 마이클이 겹친다. 그게 헨리의 ‘스토리’, ‘그날 이후 내 안의 무언가가 사라졌다’는 것. 가슴 밑바닥의 상처를 드러내는가 싶더니, 태연히 삼키고 또다시 폭력적인 요구를 한다. 이처럼, 헨리에게도 어떤 리듬이 있다. 주로 성급하기만 한 마이클과 달리 자유자재로 속도와 강도를 조절하며 상대를 쥐락펴락한다. 풀었다 조였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되돌리는 능숙한 흐름은 거의 경쾌하기까지 하다. 작품 톤이 항상 진지하지만은 않기에, 로이의 천연덕스러운 해맑음에 홀로 갑갑해하는 장면이나, 괴상한 아이디어를 내고 편집자에게 핀잔을 듣는 장면 등에서는 코미디의 요소로 쓰이기도 한다. 그 촘촘한 리듬이 붕 뜨는 찰나들이 있다. 바에 홀로 앉아 술잔을 든 뒷모습, 잠에서 막 깨어났을 때의 무방비하고 멍한 얼굴, 잭에게 “퀴어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성공한 이야기는 드물다”고 할 때의 그 미묘한 자조와 우울. 그걸 감지한 순간… (그가 그렇게 ‘사악’하게 구는 근간에는 퀴어혐오적 사회가 있다는 것이 새삼 인식됐고) ‘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까지 할까’라는 물음표가 떠올랐다. 그건 작품과 배우가 남겨 놓은 실마리 같은 것이었다. 허구의 캐릭터 헨리 윌슨이 지닌 입체성, ‘빌런’으로 몰락하지 않고 ‘다른 길’을 찾을 가능성의 실마리.


실존 인물 헨리 윌슨은 록 허드슨의 결혼을 주선하는 등 다른 길을 걸었지만, 이 픽션은 그에게 속죄의 기회를 제공한다. 로이는 시상식에 애인 아치와 손을 잡은 채 등장하고, 욕을 퍼붓는 헨리에게 “당신처럼 살지 않겠다”며 멋지게 맞대응한다.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는 사실(나는 끔찍한 사람이다)을 제 손아귀에 있다고 여겼던 상대에게서 듣게 되자, 헨리는 고장난다. 꼭 인물의 상태를 반영한 듯 슬로모션으로 편집된 다음 장면, 그는 웃어달라고 외치는 기자들을 향해 몸을 돌리며 입꼬리만 겨우 올린다. 거기, 짐 파슨스는 헨리의 공허한 인생 전체를 담았다.


이후 헨리는 뉘우치고 변화하는데, 작품은 로이와 그를 대강 예쁘게 화해시키지는 않는다. 이미 일어난 가해의 상처는 어떤 말로도 치유되지 않으므로. 그리하여… 헨리가 이제껏 자신이 저지른 만행의 값을 조금이나마 치르는 방법은, 할리우드 역사상 처음으로 두 남자의 로맨스 영화를 기획하고, 일거리를 잃은 로이를 주연으로 세우는 것이다. 자기혐오를 타인에게 독으로 퍼트리기를 멈춘 헨리는, 살짝 주눅이 들었으나 비로소 편안해 보인다. 신경질적 종류의 것이 아니라- 타인의 마음을 살피고 자신을 돌아보기 때문에 생기는 긴장이 묻어 있다. 로이에게 사과하고 거절당할 때, 에이비스에게 영화 제작을 제안할 때, 흐르는 눈물에는 진심이 있다. 마지막 시퀀스, 헨리는 그답게 아치와 로이와 그 동료들이 움직인 세상에 대해 시니컬하게 투덜댄다. 그건 ‘행복하다’는 표현, 이곳을 더 나아지게 만드는 일에 기여하고 싶다는 뜻이다. 영영 잃어버린 줄 알았던 “삶의 목적”이 생긴 것이다.


<HOLLYWOOD>(2020)




<보이즈 인 더 밴드>와 <오! 할리우드>. 몇십년 전 당시 소수자들의 상황을 현대 시청자가 메이저 플랫폼을 통해 ‘이야기’로 접하게 됐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여러모로 다른 작품이었다. 마이클과 헨리 역시 서로 달랐으나, 닮아 있기도 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싫어했기에 타인을 싫어하는 척 했다. 약한 부분을 꼭꼭 숨기고 있다가 별안간 터트렸는데, 엉망으로 무너졌다가 추스르면서도 그 망가진 상태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짐 파슨스는 불쾌하고 미운 자가 되었다가 다음 순간 이해할 수 있는 불쌍한 남자가 되었다. 더 나아가 관객이 자신의 ‘예쁘지 않은’ 구석을 투영하고 이입할 수 있는 틈을 남겨두기도 했다. 우울하게 꼬인 이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한 두려움은, 작품과 장면에 적절한 톤으로 감지되었다. 스스로를 완전히 놓아 내면의 공포와 연약함을 꺼낼 용기가 있는 배우, 자신을 잘 알고 사랑하는 인간인 짐 파슨스의 연기 덕이었다. 그 딜리셔스한 몸짓/말투와 섬세한 표현법을 목격하면 천재, 타고난 연기자, 따위의 수식이 저절로 튀어나오지만, 그것만으로 짐 파슨스라는 배우의 현재를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보이즈 인 더 밴드> 이야기를 하며)

“처음 연기를 시작했을 때 내게 있어 가장 커다란 허들 중 하나는, 섹슈얼리티를 드러내지 않은 채로 무대에서 솔직해지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가끔은 나의 “게이”가 스트레이트 캐릭터의 순간을 망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 때문에. (……) 그 두려움은 분명, 나 자신에 대한 믿음에 영향을 미쳤다. 내 선택들 속에 스스로를 내버려둔다면 결국엔, 진실이 드러나게 되니까. 그렇게 드러난 진실이, 어떤 단계에서 내가 사랑이나 지지를 받지 못하고 홀로 남겨지도록 만들 것이라고 느꼈다. 그건 내게 매우 중요했고, 내 작업을 시청하는 모두에게 중요할 것이다, 경험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 말이다. 그러니까… 캐릭터가 게이이건 아니건, ‘내가 게이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 혹은 누구든 그것에 대해 안다는 것. 그건 내가 연기하는 무엇에건, 다른 층의 풍성함을 부여해 준다."

-짐 파슨스, in ‘Becoming’(2022.12.16), by [them]


그의 최근작 <스포일러 얼러트>가 작년 12월 미국에서 개봉했다. 실제 겪은 일을 쓴 마이클 오시엘로의 책이 원작이다. 여기서 ‘스포일러’란, 오시엘로의 남편 키트의 죽음을 뜻한다. 짐 파슨스가 맡은 역할은 바로 마이클 오시엘로. 아직 관람 기회를 얻지 못했지만, ‘비극’으로만 표현될 수 있는 작품은 아닐 테고, 픽션 속에서 구현될 ‘마이클’ 역시 ‘죽어가는 남편의 곁을 지키는 남자’로만 수식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닐 테다. 포스터에 적힌 문구 “사랑은 늘 당신을 놀라게 한다, 그 끝을 알고 있을 때조차.”와 짐 파슨스의 말(아래에 인용)을 바탕으로, 그보단 사랑과 삶으로 가득한 작품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사랑에 대한 갈증과 외로움을 숨긴 채 타인을 괴롭혔던 마이클과 헨리보다는, 이번 역할이 배우 본인과는 훨씬 가까울 듯하다. 극 안에서건 밖에서건 한 순간도 당당히 자신으로 존재하기를 멈춘 적이 없는 짐 파슨스, 진심을 다해 사랑하고 살아가는 인물을 연기하는 그를 얼른 만나고 싶다.


“키트와 마이클 사이 매우 많은 것들이 나 자신이 가진 관계를 돌아보게 했다. (……) 그 누구도, 누구에게도, 이런 식의 비극이나 슬픔이 일어나길 바랄 리는 없다. 그럼에도, 모두에게 인생을 바꿀 만한 여정이 있었으면 한다. 그는 그걸 얻었다. 하나도 안 예쁘고, 하나도 쉽지 않은 과정이지만, 그렇게 진정으로 삶의 형태를 그리는 것들은 거의 없다, 그렇지 않나? 만약 사람들에게 지금의 당신을 만든-자기 자신을 긍정하게 만든being happy who they are 서너가지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 답은 대개 비극이다. 그게, 내가 이걸(이 영화를 찍는 것) 정말로 하고 싶게 만들었다. 고유하고 슬픈, 한 방식으로 들여다본다면, 그건 잘 살다 간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짐 파슨스, in ‘Becoming’(2022.12.16), by [them]





* 참고 인터뷰 (&위 스크린샷의 출처)

https://youtu.be/2-bQnjgU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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