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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Jun 13. 2023

전종서가 있었다

전종서


 

<버닝>(2018, 이창동)

<콜>(2020, 이충현)

<연애 빠진 로맨스>(2021, 정가영)

 

* 위 작품들의 핵심 전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연애 빠진 로맨스> 관람 직전 내 사고 흐름은 다음과 같았다. ‘정가영 없는 정가영 영화라니 서운하다, 바뀐 제목 대체 뭘까, 그렇지만 어쨌든 정가영이고… 손석구는 연기를 잘 하는(본 그의 작품은 <D.P.>와 <센스8> 뿐이었다) 배우이고 전종서도 궁금하니(그의 작품은 본 적이 없었다) 보기는 한다만 기대하지 말자(…라면서 기대를 했다).’


과연 정가영은 없었다. 그러나 거기 전종서가 있었다. 정가영의 빈자리를 채우기보단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고선, 원래 거기 살던 주민처럼 불쑥 튀어나왔다. 너무나 정가영스러운 대사들을 완벽히 자기화해 줄줄 읊었고, 정가영이 쓴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클리셰적 대사를 더할 나위 없이 자연스럽게 뱉어 ‘오글거림’을 최소화시켰다. 세상 무엇도 두렵지 않다는 듯한 직설적 당당함으로 주변 모두를 제 밥으로 만들었다가, 다음 순간 별안간 무방비하고 여린 얼굴을 드러내 나를 당황하게 했다. 필터 없는 대사들로 박우리가 술을 뿜게 했던 함자영, 그는 버스에서 꾸벅꾸벅 졸다 깨 어르신에게 부랴부랴 자리를 양보하는 인간이다. ‘새해’라는 식상한 핑계도, 그가 헌혈버스나 옆 테이블에 남은 음식 앞에서 천연덕스럽게 가져다 붙이면 어느새 설득력을 얻는다. 앞머리에 메모지를 붙이고 부스스 일어나 앉은 함자영의 ‘몰골’을 보고, 나는 배우 전종서를 사랑하게 되리란 것을 깨달았다.


<연애 빠진 로맨스>(2021)



<버닝>, 작품이 종수에게 이야기를 건네주기 위해 소비하고 증발시킨 해미, 그에게 혼을 불어넣은 것은 전종서다. 해미는 언뜻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벤과 그의 친구들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실은 모든 것을 알면서 기꺼이 순진한 얼굴의 광대가 되어 비웃음을 자처하는 듯도 하다, 유니폼을 입고 춤을 추며 경품권을 나눠줄 때 처럼. 종수의 해석을 따르면 그는 벤에게 있어 ‘재미로 태울 비닐하우스’였고, 해미가 사라진 후 벤은 다른 여자를 만나 유사한 상황을 연출한다. 그러나 “헝거” 춤을 추거나 맨몸으로 펜토마임을 하는 그의 실루엣은 특별하다, 종수에게만이 아니라 관객에게도. 부시맨에 관한 제 스토리텔링에 취해 결국 눈물을 글썽이는 해미를 보고 있으면, 홀린 듯 멍해졌다 끝에는 가슴 한구석이 우그러졌음을 느끼게 된다.


전종서의 해미는 이미 인생을 다 살아버린 자의 텅 비고 쓸쓸한 눈빛과 천진하게 상대를 꿰뚫어보는 눈빛을 모두 가졌다. ‘별난’ 그의 언행은 전부 연기이거나 전부 진심이다. 둘 다일지도 모르겠다.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그레이트 헝거”의 바닥 없는 독에 일시적 허상을 붓고 “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었”다가, 더 짙은 자조와 공허에 붙들리는 행위를 반복하는 것일까. 자신에게 ’흥미가 있다고 했다‘는 벤의 말을 전하거나 “문제는 항상 있지” 따위의 대사를 칠 때, 내리깔린 그의 속눈썹에 들러붙은 끈적한 냉소와 우울의 기운은, 비범한 동시에 보편성을 지니고 있었다.


<버닝>(2018)



이것이 스크린 데뷔 퍼포먼스였음을 새삼 인지하고 감탄하며, 차기작이었던 <콜>을 보았다. 2020년 당시 극장에 걸리지 못하고 바로 넷플릭스에 공개됐던 작품이다. 막 떠오르기 시작한 이 배우의 앞을 펜데믹이 가로막았…을 수 있을 리가. 과장하면 <콜> 관람 후 남은 것은 전종서 하나 뿐이었다. 이 아이코닉한 연기로 그의 이름은 더욱 단단해졌다.


영숙은 전화 건너편의 다급한 목소리로 처음 등장한다. 신체가 화면에 잡힌 후에도 한동안은 끌려가며 비명을 지르거나 별 특징 없는 대사를 할 뿐이다. 시청자는 일단, 인물의 성격보다는 처한 상황을 먼저 파악하게 된다. 곧 전종서는 영숙이 ‘어떤’ 사람인지, 맛을 보여준다. 초점이 나간 시선을 허공에 두고 손으로 풀을 집어 먹는-다기보다 입에 마구 쑤셔넣는 영숙. ‘엄마’에게 감금/학대당하는 피해자로 처음 등장했던 그에게 ‘광기’가 들어서는 순간이다. 이후 서연과 교류하는 영숙은, 양면의 이미지 모두를 벗고 순수하고 보편적인 감정을 입는다. 거기 전종서가 부여한 영숙의 입체성이 있다, ‘엄마’가 다른 방법을 택했더라면 사라지지 않았을 수도 있을 가능성의 조각이. 미래의 기술에 대한 묘사를 듣고 신기해하는 눈빛은 맑다, 허나 무언가 결여되어 있는 맑음이다. 서연과 같은 나이지만 거의 집에 갇혀 지낸 탓에 성장하지 못한 면이 남아 있는 것일까, 그게 다는 아니다. ‘무언가’의 정체는 곧 드러나며, 다채롭게 위험한 형태로 표출된다.


<콜>(2020)


서연에게 오래 전 죽은 아빠의 음성을 들려주며, 영숙은 이상하게 즐거워한다. 상대방은 북받쳐 펑펑 울고 있는데, 그가 전화기 저편에서 감지하는 것은 ‘당황’ 뿐. ‘네 아빠를 살릴 수도 있다’고 말하는 영숙의 정서는 묘하다. 한쪽 눈썹이 올라가고, 눈알이 구른다. 재미있는 게임을 계획하며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는 표정. 거기 있는 건 호의도 도의도 아니다.


영숙이 연약함을 보이는 경우는 오로지 제 안위가 불안할 때다. ‘반사회적 인격장애’라고 적힌 파일이 카메라에 잡히지 않아도, 타인에게 이입하거나 공감하지 못하는 그의 성향은 전종서의 싸한 눈빛과 이죽거리는 입꼬리에서 자연히 포착할 수 있다. 특정한 사건을 겪는 대부분의 인간에게서 기대되는 반응, 영숙에겐 그게 없다. 살아남기 위해 ‘엄마’를 찔렀지만, 숨이 끊어지는 장면을 목격한 그는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 어떤 스위치가 켜진 듯, 멍한 눈가가 살짝 떨린다. “다시 태어난” 영숙에게 있어 곰 젤리와 인간의 주된 차이는 그것을 가르며 느끼는 기분일 테다. 이후 전개에서 전종서가 질릴 정도로 납득시킨 면이다.


<콜>(2020)


통화가 설정의 핵심이다 보니 사운드에 신경이 집중되는 장면이 꽤 있는데, 영숙의 표정을 모르는 상태에서 소리만 들을 때 오는 색다른 섬뜩함이 있다. 전종서는 시원스럽게 툭툭 던지는 특유의 말투를 날카롭고 들쭉날쭉하게 사용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영숙의 캐릭터성을 반영했다. 비음을 잔뜩 섞어 흐느끼는 투와 적절히 섞어 하나의 흐름으로 만들기도 했다. 거기 욕이 섞이면 어떤가, 똑같이 흔한 욕을 해도 박신혜의 것과 전종서의 것은 다르다. 아마 그동안은 화나도 비속어는 입에 담지 않았을 박신혜의 서연이 패닉 상태에서 뱉는 욕/협박과, 스스로 ‘사람 몇은 거뜬히 죽일 수 있는’ 인간임을 잘 알고 있는 전종서의 영숙이 냉정하고 건조하게 뱉는 욕/협박은, 다를 수밖에.


사운드가 이미지와 결합되면, 공포는 더 기이한 형태로 발전한다. 옆으로 긴 눈을 크게 치켜뜨고 상대를 바르게 응시하곤 하던 해미나 자영. 영숙은 안면 근육에 힘을 모두 빼고 눈을 게슴츠레하게 두거나, 입꼬리를 내리고 눈을 뜨악하게 뜨거나, 아예 얼굴 전체를 구겨버린다. 거기 생기는 없다. 독기만 있다. 꺽꺽거리며 삼키거나 거슬리도록 날카롭게 터지는 웃음, 입 주위나 머리카락에 묻혀가며 음식을 우겨넣는 버릇. 불쾌한 인상을 완성하는 디테일들은 치밀한 계산보단 예리한 감각에서 비롯된다. 서태지의 곡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마룻바닥에 흥건한 피를 신나게 닦는 영숙을 보고, 헛웃음이 터졌다.


영숙이 ‘엄마 신딸이라는 설정은 있으나 신기가 있는지 여부는   없었다. 그러나 스크린  전종서에겐 과연 뭔가가 ‘들려있었다. 움츠러들거나 날뛰거나, 중간이 없던 영숙의 상태는 ‘지속가능한 자유’를 위해 드라마틱하게 안정된다. 불안하게 넘실대는 감정과 욕구를 태연히 숨긴  사람들을 대하고, 그림자 밑에서 민낯을 드러내는 영숙의 연기- 연기하는 전종서는 놀라웠다. 나이든 영숙의 풍부한 저음이 분장한 전종서의 얼굴과 매치되는 순간,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으나 유사성을 간직한, 전혀 인위적이지 않은  음성. 스물 여덟의 영숙보다 무감하고 무거워진 낯빛이며 몸가짐은  어떤가.  배우에게 한계는 없음을, 겨우  작품을 따라가며 알게 되었다.


<콜>(2020)



전종서의 인물들은 예측을 거부했다. ‘제멋대로인’ 혹은 ‘미스터리한’ 전형성을 띠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정말로 ‘예측을 할 수가 없었’다. 단단한 방패를 두르고 있는 것 같다가도 여리고 상처 받은 마음을 내보였고, 아무런 생각 없이 매일을 흘려보내는 듯 하다가도 가슴 밑바닥에 뿌리내린 고민의 그늘을 얼핏 드러냈다. ‘싸이코 킬러’ 영숙처럼 픽션적 전형성이 있는 자를 연기한대도, 전종서는 절대로 이제껏 쌓인 데이터를 답습하지 않는다.


필모그래피 역시 예측이 어려웠고, 흥미로웠다. ‘이창동 작품에 캐스팅 된 신인’으로 한때 스타보다는 화젯거리가 되었고, <버닝>의 스크린에 가뿐히 녹아들며 소음들을 잠재웠다. 다음 작업에 부담을 느꼈을 법도 한데, 그는 장르물로 모험을 택했다. 이충현 감독의 스릴러 <콜>로 모두의 심장을 흔들어 놓은 그는, 정가영 감독의 로맨틱 섹스 코미디 <연애 빠진 로맨스>에 출연하며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심장을 흔들었다. 그 사이 할리우드로 날아가 초능력을 지닌 모나리자가 되기까지. 감독색 강한 작품들 안에서 그의 개성은 살아남았고, 때로는 영화의 전부가 되기도 했다.  


세 작품을 살피며 전종서는 연기 예술의 과정에서- 작가가 만든 캐릭터를 완벽하게 구현하기 위한 습득보다는, 카메라/상대 배우와 상호작용 하는 순간의 에너지를 흡수해 제 것으로 구체화하는 작업에 더 비중을 두는 배우임을 깨달았다. 인터뷰에서 “동물처럼”([씨네21]) 이라는 표현을 몇 번 쓰기도 했던 전종서. 그는 자신의 직감과 타인과의 교감을 중요시하고, 현장의 공기를 민감하게 감지하며, 그것들을 몸에 밀착시켜 최고의 결과물로 내놓는 배우다.



<발레리나>(2023) 스틸.


<발레리나>에서 보여줄 ‘착하지 않은’ 주인공의 모습은 또 어떨까. 미니시리즈 <몸값>의 원작자가 이충현이라는 점까지 끌어오면 이번이 그와의 세 번째 만남이다. 영화 자체는 어떨지 잘 모르겠고, ‘친구의 복수를 하는 전직 경호원 전종서’는 다른 의미로 ‘잘 모르겠’다. 그의 퍼포먼스 만큼은 마음껏 기대해도 좋으리라, 전종서는 예상과 전형성의 바운더리를 무너뜨리거나 그 틀을 이제껏 없던 모양으로 바꿔 버릴 테니.





+

<모나리자와 블러드 문>은 전종서 in 할리우드~ 아티클의 실마리를 남겨 놓기 위해 일단 관람을 보류한다. <몸값> 리메이크와 <종이의 집> 리메이크는 보지 않았고 아마 앞으로도 보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만, 만약 보게 된다면 까닭은 전종서 단 하나일 것이다. 이주영과 우르술라 코르베로 각각의 배우를 위해 쓰였을 것만 같은 이 매력적인 인물들이 어떻게 전종서화 되었을지 궁금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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