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2022)
<한 남자>(2022, 이시카와 케이)
* 위 작품의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시카와 케이의 첫인상은 서늘했다. <우행록>(2016)에는 일본 영화 특유의 강박적 클리셰-뜨거운 감동 / 뜨거운 폭력성-가 없었다. 건조하고 신중한 카메라를 숨죽여 따라가다 보면, 뱃속에 들어선 영하의 공기가 식도를 타고 기어올라왔다. ‘울지도 못하게 하는 이야기’, 말하자면 그것이었다. <한 남자>는 예상치 못하게 따스하였으나, 여전히 서늘했다. 이입할 관찰자(인 줄로만 알았던)적 주인공을 다루는 냉정함에 기시감이 들었다. <우행록>이 끝내 주인공에 대한 관객과 그 자신의 판단을 모두 뒤집었다면, <한 남자>는 주인공의 내면을 뒤흔드는 데에 집중한다. 간헐적 진동, 찰나의 안정, 고요한 붕괴 순이다. 츠마부키 사토시는 감독과의 이전 작업에서와는 다른 종류의 모호함과 복합성을 품고, 여러 해에 걸쳐 켜켜이 쌓인 괴리감의 자리를 키도의 낯 한구석에 만들었다. 그만이 지닌 표현법으로.
타니구치 다이스케가 아니었던 남자
오프닝은 포스터의 그림, 누군가의 뒷모습이다. 형상은 거울을 마주하고 있으나 비친 상 또한 뒷모습이다. 격식을 차린 대화가 들리는 와중, 목소리의 주인은 보이지 않고 상황도 알 수 없다. 화면에 제목이 떠오르고, 영화는 시공간을 이동해 리에와 ‘다이스케’의 첫 만남을 담는다. 두 사람은 점차 가까워지고, 가족을 이룬다. 몇 년 후, 사고로 ‘다이스케’가 죽는다.
스토리 안에서 ‘온천집 둘째 아들 타니구치 다이스케’와 ‘리에의 남편 다이스케’가 동일인물이 아님이 처음으로 드러나는 것은, 그의 1주기에 ‘형’ 타니구치 쿄이치가 찾아와 영정사진 앞에 앉았을 때다. 쿄이치는 말한다, “그런데, 사진을 놓아두지 않으셨네요.”, 리에는 답한다, “거기 있는데요.” 그들은 서로 다른 얼굴을 알고 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 딱히 극적인 연출은 없다. “아닌데요”, “맞는데요”, 쿄이치와 리에의 주고받기는 코미디 단막극 같기도 하다. 표면적으로는 쿄이치가 맞고 리에가 틀렸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갈 무렵 우리는 문득, 정말 그런가,하고 묻게 될지도 모른다.
키도가 등장할 차례다. 그는 리에의 의뢰를 받아 ‘다이스케가 아니었던 남자’가 누구인지 조사할 변호사, 극에서는 일단 관찰자 포지션에서 출발한다. “지금부터 그를 ‘X’라고 부르겠습니다.” 키도의 대사다. 조사가 진행되고, ‘X’가 태어나며 받은 이름 ‘하루 마코토’가 드러난다. ‘타니구치 다이스케’, ‘X’, ‘하루 마코토’. 셋 중 무엇으로 부르든 틀리지 않으므로, 이 글에서는 맥락에 어울리게 섞어 썼다.
1년이 넘도록 죽은 남편이 쓰던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리에. 그는 ‘얼마가 들든 몇 년이 걸리든 내가 사랑했던 남자가 누구였는지 알아내 달라’는 극적인 제스처를 보이는 대신, “얼마나 걸릴까요?”라고 조용히 묻는다. 그가 궁금했던 ‘얼마나’는 비용이 아닌 시간의 양이었다. 이미 성이 두 번 바뀐 아들, 피가 섞이지 않은 아빠의 죽음을 목격한 유토의 몸과 마음이 그동안에도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어서였을 테다.
달리는 소년들의 이름에는 스스로 어쩔 수 없었던 과거가 얽혀 있다. 살인자의 아들인 ‘마코토’, 어쩌다 보니 성이 여러 번 바뀐 유토. 영화는 어린 유토와 십 대 유토의 달리는 뒷모습을 이어 편집했는데, 후에 어린 ‘마코토’도 유사한 구도로 담는다. 그리고 재일 조선인 3세로서 그 신분을 굳이 드러내지 않고 사는 키도가 있다. 영화는 ‘X’의 삶을 조사하던 그가 야구복을 입은 어린 ‘마코토’를 마주치도록 연출하나, 그가 거기서 자신을 겹쳐보았으리라는 서술은 희미한 추측일 뿐이다. (아마도 스스로 떠올리기를 거부하므로) 키도의 과거는 결국 등장하지 않고, 그는 제 것 대신 ‘X’의 기억을 마주한다.
‘마코토’는 거울 속 아버지의 상에 집착해 괴로워하며 ‘내 껍데기를 때리기 위해 복싱을 했’다. 영화에는 상대와 몸을 맞대던 그가 거울을 보고 발작을 겪는 씬이 두 번 나온다. 그날처럼 뛰쳐나가지 않을 수 있었던 까닭은 이름을 바꾸어서였을까, 상대가 리에였기 때문일까. 받은 위로를 돌려주듯 리에는 ‘다이스케’를 다독였고, 그는 피하지 않았다. 과거의 공유는 일방향이었으나 교감은 쌍방향이었고, ‘마코토’에게 생물학적 아버지의 흔적이 있었다면 외모와 예술적 기질이었지 폭력성은 아니었다.
어떤 이름으로 알았건, ‘다이스케’는 제 그림처럼 “소년이 그대로 어른이 된 것 같은” 남자였다. 소년 시절을 평생 되새기며 산다는 뜻만은 아니다. ‘유리벽 너머로 기웃거리다 결국 들어와 말을 거는 사람’, ‘만나면 해주고 싶은 얘기가 아주아주 많은 사람’. 리에가 유토에게 말했듯- 그 정도의 상냥함은 ‘잘해주기로 결심하는’ 것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다이스케’는 유토를 아들로서/한 인간으로서 있는 그대로 좋아했고, 그 마음을 상냥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리에에게도 그런 이였고, 리에도 그에게 그런 이였다. 조사 보고서를 받아든 리에는 조심스럽게 말한다. “알았으니 하는 소리겠지만, 몰랐으면 뭐 어땠을까 싶어요.” 리에는 사랑했던 남자가 누구로 태어났는지는 몰랐지만,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영화는 초반부 ‘다이스케’와 리에, 유토의 삶을 공들여 담은 후에야 ‘사건의 발단’인 그의 죽음을 다루었다. 관객이 ‘X’를 만나는 첫 통로는 리에의 눈동자여야 했다. 거기 비친 상, 그것이야말로 이름이나 과거로는 알 수 없는, 가장 그다운 모습이었기 때문이리라. 마지막 시퀀스의 두 남자가 나누는 대화-‘인간은 제가 심은 나무가 자라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 아버지가 나무를 심으면 자식이 벤다’-를 들으며 ‘다이스케’의 죽음이 떠올랐다. 그는 수많은 ‘아버지’들이 심은 나무를 베다 거기 깔려 죽었으나, ‘제 아버지의 나무’에 깔리지는 않았다. 그는 ‘마코토’였을 때처럼 매일을 견디다 몸을 던져버리지 않았다. 일상을 살다 생을 마감했다. 쓰러지는 나무를 보며 그는 ‘이제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을까,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을까. ‘죽고 싶다’는 아니었으리라고, 감히 짐작해 본다.
관객은 리에와 함께 ‘다이스케’에게 정들고, 키도와 함께 ‘X’를 의심하거나 궁금해하고, 비로소 ‘마코토’ 본인의 기억을 바라보게 되었다. 키도와 리에의 대화, 리에와 유토의 대화, 타니구치 다이스케로 태어났던- 역시 이름을 지우고 싶었던 남자와 오랜 친구 미스즈의 만남으로, 여러 이름을 오가다 죽은 남자의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그러나 영화는 끝나지 않는다.
키도 아키라로 불렸던 남자
주로 사회적 약자에게 의뢰를 받는 변호사로서 부유한 집안의 딸과 결혼해 사는 키도 아키라는, 균열되고 위태로워 보이는 인물이다. 의뢰인이 건넨 선물을 거절하는 키도 대신 넙죽 받으며 ‘그냥 좋아하라’고 툭 던지거나, 미스즈와의 만남을 ‘데이트’로 칭하는 동료 나카키타. 그는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한(어쩌면 괴리감마저 느끼는) 키도의 상태를, 가벼운 농담을 가장해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
키도가 처음 솔직하게 폭발하는 것은 오미우리(가 아닐지도 모르는 자) 앞에서다. 그는 신분을 세탁하는 브로커. ‘자이니치는 얼굴만 봐도 안다’를 비롯해 ‘내가 못생겨서 성격이 삐뚤어졌다’, ‘사형수의 아들이라 별 볼일 없다’ 등, 입만 열면 거의 위악적인 차별을 뱉어낸다. 타고난 과거에 묶이지 않으려는 이들의 호적을 바꾸었던 그는, 타고난 것들에 사로잡혀 뒤틀려 있다. 결국 과거를 놓아주는 것은 스스로다,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재일 조선인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고 사는 키도는 ‘X’를 좇는 과정에서, 또 일상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소수자 혐오를 맞닥뜨린다. ‘자이니치는 얼굴만 봐도 안다’처럼 직접적으로 그를 겨냥해 날아오기도 하고, ‘북한 공작원 음모론’처럼 발언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심기를 건드리기도 한다. 그 순간마다 카메라는 타인을 관찰하는 입장에 있던 키도의 측면을 클로즈업하고, 그의 목구멍을 타고 끓어오르는 무언가가 화면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쳐진다. 삼켜도 튀어나오는 분노는 그가 사실 소수자성을 의식하며 산다는 뜻이기도 하다. 경험과 감정은 의지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과거를 놓아주었’다 해서 분노하지 않을 수 있는 것 또한 아니다.
역시 재일 조선인을 혐오하며, 과로로 자살한 청년을 이해하지 못하는 키도의 부유한 장인. 그는 바로 그 청년을 변호한 자이니치 3세 사위 앞에서 ‘악의 없는 의견’을 거리낌 없이 펼친다. 장모가 무마하려 던지는 말은, “아키라는 거의 일본인이지 뭐.” 그들과 미묘하게 닮은 태도를 지닌 와이프 카오리는, ‘아빠에게 지원받아 주택을 사자’는 제안을 쉽게 꺼내거나, ‘사형수 자식의 삶에 관심을 두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한다. 집은 때로 키도의 숨이 막히는 공간이 된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내보이기 힘든 자들 곁에서 숨기고 누르며 사는 데 익숙해진 그는, 한동안 아버지의 그림자에 지배당했던 ‘X’에게 어느 정도의 동질감을 느꼈을 것이고, 어쩌면 부러워했을 것이다.
TV에는 혐오 시위 보도가 흐르고, 어린 아들은 폭격 놀이를 한다. 키도는 두 영역을 가르는 소파에 앉아 ‘X’에 관한 자료를 테이블에 펼쳐 놓고 있다. 양쪽의 소음은 기이하게 겹쳐 고조되며 신경을 거스르고, 아들이 던진 장난감이 소파를 넘어와 테이블의 잔을 건드려 음료가 쏟아진다. 순간 키도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들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이내 후회한다. 가정과 사회의 압박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잡은 채, ‘X’의 삶으로 도피하며 은근히 공감하던 키도. 그가 애써 갈라놓은 선, 영원할 수 없었던 경계가 사라지고 영역들이 상징적으로 뒤섞이는 찰나, 균형을 잃고 이성을 놓은 것이다.
사과하는 키도에게 카오리는 말한다, “원래의 당신으로 돌아와.” 키도의 반응은 묘하다. ‘원래의 당신’, 거기서 위화감을 느꼈을 테다. 카오리가 아는 ‘원래의 당신’은 ‘원래의 키도’와 같은가, 그건 ‘있는 그대로의 키도’가 맞나. ‘원래의 마코토’와 ‘원래의 다이스케’, 둘은 다른 사람인가. 우리는 묻게 된다, 한 인간을 그로/그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조사를 마친 후, 키도는 아들과 함께 어항을 들여다본다. 그는 아들이 물살이들에게 붙인 이름을 자꾸 틀리고, 아들은 그에게 이름을 다시 가르쳐준다. ‘이 안에서 나름 행복하다’고 여긴 그의 환상은, 자신을 의심하던 와이프의 외도를 우연히 알게 되며 깨진다. 그는 전처럼 폭발하지조차 않는다. ‘그러면 그렇지’의 톤으로- 고요하게 무너진다. 홀로 찾은 바에서 키도는, 이제는 누구의 것도 아니게 된 ‘온천집 둘째아들’의 인생을 빌려 낯선 남자에게 털어놓는다. 자리를 뜨려고 일어난 그는 벽에 걸린 그림 앞에 선다. 그리하여 영화의 엔딩은 오프닝과 맞물린다. 돌고 돌아 마침내 키도는 제 삶과 대면하는데, ‘다이스케’와 그 생부가 그린 인물화처럼- 거기엔 얼굴이 없다.
그림에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있다. 형상은 거울을 마주하고 있으나 비친 상 또한 뒷모습이다. 다시 보니 액자인 듯도 하다. 그림 안에는 프레임이 하나 더 있다, 형상과 그가 바라보는 거울/액자를 감싸는. 키도의 실루엣은 공교롭게도 그림 속 형상과 흡사하다. 그는 그렇게, ‘X’의 흔적에서 거울로는 보이지 않던 자신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상대는 명함을 건네고, 키도는 명함이 떨어졌다며 곤란한 미소를 짓는다. 남자는 이름을 묻는다. 키도, 아니 ‘키도 아키라로 불렸던 남자’의 답을 들려주지 않은 채, 영화는 잘리듯 끝난다. 남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그는 허무해 보였나, 자유로워 보였나. 그가 입에 올린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이었다면, 달라지는 것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