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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Sep 11. 2023

흰 드레스를 입고 샷건을 쏘는 여자들

<그녀의 취미생활>(2023)

 


<그녀의 취미생활>(2023, 하명미)

 

* 위 작품의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혼 후 박하마을 할머니의 집으로 돌아온 정인. 그러나 폐쇄적인 산마을인 그곳은 ‘리틀 포레스트’가 아니다. 곧 유일한 보호자인 할머니마저 잃은 그는, 최약자의 위치에서 마을 사람들의 무례하고 폭력적인 언행을 견디는 일상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정인의 윗집에 부유하고 세련된 여자 혜정이 이사오고, 그의 세계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폐쇄적인 마을에서 착취 당해온 여성이 다른 여성의 도움을 받아 가해자들을 응징한다.’ 딱히 새로운 플롯은 아니다. 허나 <그녀의 취미생활>은 작품만의 일관된 속도와 미학을 고수하며 인내심 있게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 과정에서 판타지를 삽입하는데, 현실 감각을 잃지는 않는다.



관객은 ‘취미생활’에 내포된 두 가지 의미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하나는 “취미 같은 거 없다”던 정인이 혜정과 함께 ‘돈벌기와는 상관없는 일’을 이것저것 해보는, 말그대로의 ‘취미생활’이다. 다른 하나는 가해자들을 해하는 행위다. 영화는 후자에 비중을 두지만 전자 역시 시간을 들여 다루고, 이 점은 중요하다. <그녀의 취미생활>은 인물을 한계까지 몰아가 폭발을 유도해 관객을 빠르고 ‘시원하게’ 만족시키지 않는다. 정인이 제 페이스대로 즐기고, 생각하고, 결론을 내리고, 계획을 차근차근 실행하도록 돕는다.


서두르지 않는 전개와 모든 것을 설명하려 들지 않는 대사. 함축적이거나 은유적인, 정적으로 다듬어진 장면들. 갑갑한 현실 사이에 느와르/판타지 풍 연출이 절묘하게 끼어들어 미적 만족감을 선사한다. 이를 테면 광재가 처음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내는 씬: 카메라는 설명 없이 어느 도박판을 슬로모션으로 포착하고, 술에 취해 흐트러진 모습으로 도박에 몰두하는 남자의 그늘진 얼굴을 드라마틱하게 클로즈업한다. 얼마 후 그는 단정한 수트를 입고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마을회관에 들어온다. 이때 관객은 그가 누구인지, ‘어떻게 사는 인간’인지, 그리고 ‘왜 갑자기 나타났는지’ 알게 된다. 후반부 등장하는 정인의 꿈 시퀀스도 있다.



작품은 정인이 겪는 폭력에 대한 직접적 묘사를 피한다. 등의 흉터나 눈가의 멍, 닫힌 문 뒤의 그림자와 소리, 대사, 특정한 인물과 독대할 때의 긴장감 연출로 드러내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대신 작품은 정인의 뿌리깊은 공포와 분노, 심리변화, 두 여성 사이 상호 유대감을 클로즈업한다. 정인은 커다란 가위를 곁에 두고 잠을 청하는데, 그가 두려워하는 대상은 전남편만이 아니다. 그가 세 남자를 경계하는 데에는 확실한 근거가 있다. 전남편 광재는 정인의 등에 커다란 흉터를 남길 정도로 심한 가정폭력범이고, 배달 일을 하는 재순은 전자발찌를 찬 성폭력 전과범이다. 창수는 정인이 십대였을 때 성폭력을 가한 전적이 있다.


작품은 박하마을 주민들을 거의 평면적으로 묘사하는데, 그렇다고 악마화하지도 않는다. 정인이 겪은 사건들은 극단적이나 있을 법하고, 가해자들의 전형성은 현실적이고 ‘평범’하다. 그들은 정인에게 고통을 주려는 의도를 갖고 괴롭히지 않는다. 다만 본능적으로 머리를 굴려 익숙한 방식으로 행동한다. 폐쇄적인 집단의 가부장들은 그저 ‘해 왔던 대로’ 한다. 과수원을 소유한 창수는 ‘아무 여자나 건드린’ 게 아니라, ‘내 과수원에서 일할 수밖에 없는/ 힘있는 보호자가 없는, 어린 여자애’를 타겟으로 고른 것일 테다. 광재도 크게 다르지 않다. 주변 사람들은 강자-가해자의 잘못을 짚기보다 약자-피해자를 탓하는 편이 쉬우므로 으레 그래왔던 대로 말을 얹고 범죄를 덮는다. ‘좋게좋게 넘어가라’, ‘좋은 게 좋은 거다’, ‘좋다’는 표현은 다양하게 악용되며 본래 의미를 잃는다.  


작품은 중년, 노년 여성들을 젊은 여성인 정인, 흐엉과 분리한다. 한때 정인과 유사한 일을 겪었을지도 모르는 그들은, 가부장 중심의 낡은 커뮤니티에서 애매한 권력을 지닌  기꺼이 약자를 재물 삼아 입으로 죄를 짓는다. 정인에게는 가정폭력범인 남편에게 돌아가라고 ‘조언하고, ‘재순과 여자들 관한 거짓 소문을 퍼트리는 과정에서 성범죄의 가능성을 웃어넘긴다. 혜정의 부도 (그가 젊은 여성이기 때문에) 뒷담화의 소재가 된다. 후에 이들에 대한 응징은 조금 다른 농도로 이루어진다. 침을 뱉은 전복죽을 머리맡에 던져 놓거나, 살충제에 물을 섞어 농사를 망치는 . 부녀회장은 농약을  소주의 타겟이었으나, 거기엔 이장 또한 포함돼 있었다. 이들의 잘못은 마을의 관리자로서 따돌림과 폭력을 방관하고 재생산했다는 데에 있기도 하다. 아마 일부 ‘들은 ‘문제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하는  올바른 관리법이라고 믿고 있을 테고, 영화는   역시 인지하는 듯하다.



가난한 할머니가 키운 ‘여자애’를 희생양으로 두고 굴러가는 유해한 커뮤니티. 그곳에 갑자기 나타난 혜정은 기존의 룰을 무시하는 것을 넘어 거기 의문을 던지는 이방인, 재력과 ‘깡’이 있어 이쪽에서 외면하기도 힘든 골칫거리다. 그러나 어쨌든 혼자 사는 젊은 여성인 그가 마을 사람들의 무례와 재순의 ‘제스처’에 단호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모르는 일이다. 반대로 정인에게 혜정은 일종의 구원자다. 그는 정인의 집을 기웃거리는 창수를 처음엔 간접, 다음엔 직접적으로 쫓아낸다. 위화감을 감지하고, 행동을 취하며, ‘불편했으면 미안하다’는 섬세한 사과까지 남기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혜정을 향한 정인의 동경과 달리 정인을 향한 혜정의 호의에는 꼬집어 말하기 힘든 데가 있다. 동정이나 정의감, 호기심, 생존 전략, 어느 것도 다는 아니다. 그에 대한 설명이 충분하지는 않은데, 의도적인 불친절일 수도 있다. 거기 있는 감정이 무엇이든- 두 여자가 취미를 공유한다는데 더 설명이 필요한가,라는 되물음이랄까. 그럼에도, 상대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혜정의 대응은 ‘아는 자’의 것이라 짐작해 본다. 그또한 혼자 사는 젊은 여성이며 마을에 섞이지 않는다는 점과 더불어, 혜정이 ‘온실 속 화초’와는 거리가 멀며 정인과 유사한 사건을 겪었을 수도 있다는 암시는 이 관계에 설득력을 더한다. 위아래로 마주보고 있는 저택과 낡은 집은 언뜻 상하관계를 상징하는 듯하지만, 보이는 것과 달리 두 집은 ‘비밀 통로’로 연결된다. 두 여자는 곧 서로의 집을 오가며 일상을 공유하고, 정인에게 여유가 생기자 ‘취미생활’을 시작한다.


혜정과 정인이 함께하는 ‘취미생활’엔 옷 고르기, 십자수, 커피 내리기, 정원 산책, 밤낚시, 사격 등이 있는데, 전형적인 ‘가녀린 여성’의 외모로 ‘여성스럽다’/‘남성스럽다’고 여겨지는 행위를 모두 한다. 하명미 감독은 이들이 웨딩드레스를 연상시키는 흰 드레스를 입고 장총으로 남자를 쏘게 만들었다. (창작자의 환상이 반영된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원작자와 감독 모두 여성이다.)



정인의 손에 돈을 쥐여 주는 이유가 궁금했는데- 돈은 싫은 일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여유, 꿈꾸게 만드는 에너지가 되는 동시에, 그를 표적으로 만들며 주민들의 비굴한 민낯을 드러내는 역할 또한 한다. (정인은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습관적으로 정인을 무시하던 부녀회장은 돈을 빌려달라고 찾아갔다가 정인의 쌓인 분노를 목격하고 ‘그 성질을 어떻게 참고 살았냐’고 기겁하는데, 이후 자신과 타 주민들의 지난날을 돌아보기를 거부하고 성을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정인은 지금껏, 최대한 말을 아끼고 존재감을 지움으로써 살아남았다. 그러나 혜정에게 ‘배워가며’, 점차 참지 않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지키는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부녀회장 앞에서처럼 터트리는 대신, 신중하게 계획을 세워 영리하고 차분하게 실현한다. 관객은 정인의 시선을 따라가며, 연장을 풀밭에 숨겨놓거나 통장을 냉장고 위에 올려두고 기다리는 그처럼 참을성을 가지고 지켜봐야 한다.


창수의 소식을 듣거나 병원에 실려가는 이장을 바라보며 정인이 짓는 미소는 합당하다. 모든 공격은 단순히 복수가 아니라, 더 이상의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한 방어다. 두리번거리는 재순을 피해 숨은 혜정, 숨은 광재를 찾는 혜정과 정인, 농도는 다르나 그들의 얼굴에 역시- 창문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날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가위를 집어들던 정인의 낯에 서려 있던 공포가 있다. 무거운 짐을 들고 밤길을 걸어가는 정인의 지친 뒷모습에서 시작해, 두 여자가 해변에 나란히 앉아 손을 맞잡는 장면으로 끝나는 <그녀의 취미생활>. 대놓고 판타지적 설정과 연출을 통해 극단적인 ‘해결법’을 묘사하는 이 영화는, 반대로 안전망이 부족한 공간에서 그녀들이 효과적으로 ‘반격’하는 방법은 “아무도 안 볼 때 꼬집는” 것 뿐 아니냐고 묻고 있다.





+

두 주인공의 대사에 숨은 의미와 무게를 부여하느라 살짝 작위적인 톤이 생겼다는 점이 아쉽다. 허나 두 사람의 장면에 자주 입혀지는 (로맨스?)판타지풍의 화사한 필터를 고려하면, 차별성을 부여하기 위한 선택이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에 두 사람이 손만 잡는 게 아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인과 혜정 사이엔 처음부터 미묘한 기류가 있었다.(오히려 키스했다면 의문이 사라졌을 텐데. 하긴, 영화는 이전에도 '그럴 법한' 씬들에서 자주 에로스를 배제했다. 근데 또 플라토닉하다고 로맨스가 아닌 건 아니어서… 이 부분은 원작을 읽어봐야 감이 잡힐 듯싶다.) 결과적으로 혜정은 구원서사 로맨스릴러의 상대방보단 정인이 스스로를 확실히 지킬 수 있도록 돕는 조력자에 가까운 위치에 자리잡았다. 정인과 자주 마주보는, 정인에게 제 것과 닮은 원피스를 입히는- 그는 정인의 거울/되고 싶었던 존재일지도 모른다. 다수가 영남쪽 말씨를 쓰는 박하마을에서 자란 정인이 서울말씨를 쓰는 것도, ‘그곳을 벗어나고 싶어서’일 수 있다. 그러나 혜정은 결코 상상이나 상징은 아니다. 영화가 혜정의 시선을 취하는 부분은 그가 정인을 관찰하는 순간만이 아니고, 그것은 그가 독립적 인물이라는 증거다. 어쨌든 ‘영화’ <그녀의 취미생활>은 두 여자의 이야기보단 정인의 이야기에 가깝다고 느껴졌다.


++

(이주여성 흐엉을 표현한 톤은 조금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찌하여 한국의 스크린이 ‘시골’을 그리는 방식은 대개 리틀 포레스트이거나 박하마을인가.)


+++

(한국 드라마 잘 안 보는 인간으로서) 정이서 우지현 개인적 입덕 코스를 짜 보았는데

: 헤어질 결심 -> 그녀의 취미생활 -> 더스트맨

나는 더스트맨을 먼저 봤고 그거 하나로도 우지현을 기억하기는 충분하였으나 원래 평면적 조연으로 봤다가 입체적 주연으로 봐야 덕심이 맥스가 되는 법이므로. ‘일하는 경찰 미지’는 적은 스크린 타임으로도 배우에게 호감을 갖게 만드는 인물이었고(물론 정이서의 깔끔한 표현법과 디테일 덕이기도), ‘전남편 광재’는 싫어하라고 만든 인물인데(물론2 우지현의 잘 ‘돌고’ 잘 ‘놓는’ 연기 덕이기도), 아무튼 그냥 믿고(?) 이 코스로 세 작품을 보면 분명 정이서와 우지현에게 빠진다. 각각 맡은 역할의 연기 톤도 상당히 달라서 범위가 굉장한 배우들이군, 하고 감탄하게 된다. 정이서의 포텐셜은 어마어마하게 다가오고, 우지현이 내면에 쌓은 깊이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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