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비>(2023)
<바비 Barbie>(2023, 그레타 거윅)
*위 작품의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태초에 바비가 있었다’. <바비>는 어려서부터 ‘엄마’로 키워진 여자아이들의 손을 빌려 베이비돌을 깨부수며 시작한다. 가부장제가 지배하는 세상, 소녀들이 자신을 투영해 꿈꿀 수 있도록 바비가 만들어졌다,고 내레이터는 설명하는데…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는 아니다.
바비 월드에서 ‘바비는 뭐든 될 수 있고’ ‘켄은 바비가 봐 줄 때만 의미가 있다’. ‘남자에게서 여자가 파생됐다’는 (성경 기반) 가부장제patriarchy적 사고방식을 그대로 뒤집었다. 사실 ‘바비의 남자친구’라는 ‘상품’은 이성애중심주의와 자본주의가 결합된 결과물일 텐데, 바비 월드의 바비들은 켄의 존재를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켄들은 늘 서로를 견제하고 바비가 봐주기를 기다리며 일정한 거처도 없이 지낸다. 살짝 구시대 유물이 되긴 했지만, ‘남자만을 기다리는 여자들’을 그린 고전 픽션들이 떠오르지 않는가.
그리하여 바비 월드는 가부장제를 미러링한 판타지로 쌓아올린 여자들의 유토피아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위장이고 착각. 아무리 다양성을 포함했다 해도- ‘예쁘지 않고’ ‘여성스럽지 않은’ 물리적/정신적 요소들을 배제한 채 드레스와 하이힐과 반짝이로 꾸며진 핑크빛 월드에서 사는 바비들은, 그들을 가지고 노는 여자아이들의 롤모델이 될 수 없고, 어떤 환상조차 아니다. 현실의 여자들은 바비처럼 ‘예쁠’ 수 없고, 뭐든 될 수도 없다. “말라야 하지만 너무 말라서는 안 되며 마르길 원해서도 안 된다.”(기타 등등) 우울증과 공황 장애, 불안에 시달리기도 한다. ‘예뻐지’거나 ‘무언가 되’길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죽음’이라는 ‘예쁘지 않은’ 단어가 등장하자 파티는 멈추고, 그것을 입에 올린 바비는 곧 입냄새, 평평한 발, 셀룰라이트 등 ‘예쁘지 않은’ 것들을 겪게 된다. ‘평평한 샌들을 신고 현실 세계로 가서 너의 소녀를 만나라’는 위어드 바비의 제안은, 바비를 다시 ‘예쁘게’ 만드는 방향이 아니라 더욱 ‘안 예쁘게’ 만드는 방향으로 작용함으로써 결국 어떤 ‘해결책’이 된다.
켄이 현실 세계에서 배워 온 것은 ‘유해한 남성성toxic masculinity’. 켄 월드는 바비 월드와 조금 다르다. 자신감을 얻기 위해 켄이 필요치 않았던 바비들과 달리 그들은 바비를 자신들의 소유물, 장식품으로 만듦으로써 권위를 찾는다. 이 방식은 그들 자신에게도 유해하다. 늘 신체적으로 강해야 하고, ‘내 여자’를 만족시켜야 하고, 부드럽거나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니까. 바비들은 ‘각성’하여 켄 월드를 다시 바비 월드로 돌려 놓는데, 이때 켄의 유해한 남성성을 이용하는 것을 전략으로 삼는다. 켄이 꼼짝없이 당하는 건 그들이 ‘원래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스스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현실 미소니지스트들의 ‘여자는 원래 그렇다’는 논리를 역으로 적용한 것이기도 하다. 결국 켄에게 ‘원래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해주는 건 바비다. 켄의 ‘각성’은 ‘각성이라고 생각했던 중독’에서 깨어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바비는 엉엉 우는 켄이, ‘나는 내 옷이나 집, 애인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깨닫도록 돕는다. ‘중요한’ 자리를 바비들이 되찾고 켄에게 극히 일부만을 허용하는 전개를, ‘현실도 그렇게 되는 게 옳다는 주장’이라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현실 세계 불평등의 거울이라고 봐야지. ‘가부장제에서 여자와 남자의 위치를 바꾼’ 것은 (당연히) 페미니즘이 아니며, 이 점을 영화도 (당연히) 잘 알고 있다. ‘되찾은 바비 월드’는 당위적 모델이 아니라 판타지다.
켄에게 ‘리더가 되는 것보다는 말horse 영상을 보는 걸 좋아해도 괜찮다’고, ‘너는 케너프Kenough하다’고 말해주는 것이 페미니즘이라는 것을- 영화가 대놓고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바비>가 던지는 메시지는 ‘바비’든 ‘켄’이든 ‘뭐가 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충분하며,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레타 거윅의 <레이디버드>와 <리틀 위민>, 그가 함께 쓰고 주연을 맡은 노아 바움벡의 <프란시스 하>까지 모두-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독려하기보단 ‘무엇이 되고 싶어하지만 되지 못해도, 무엇이 되지 않기를 선택해도 (그리고 별나도) 괜찮다’고 하는 영화들에 가까웠다. 물론 주인공이 ‘전형적stereotypical 바비’여서 이입이 조금 어려웠지만, 마고 로비의 연기는 자신의 외모를 능가했다. 그렇게 <바비>는 ‘한물 간’ 인형에 잠깐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는 (풍자의 기운이 있는) 추신과 함께.
+
위어드 바비 이야기를 해보면: 그는 바비 월드가 배제한 것 중 하나다. ‘이상하고 못생겼다’는 말을 앞뒤에서 들으며 다른 바비들의 ‘예쁘지 않은’ 부분을 ‘고치는’ 역할을 한다. 그의 세이프 스페이스에는 ‘단종’된 바비/켄들이 모여 사는데, 슈가 대디를 비롯해 퀴어 코드가 들어간 이들도 있다. 끝에 스테레오티피컬 바비는 위어드 바비에게 사과하고, 그는 ‘난 이상한 (그대로 만족하는)걸’ 이라며 쿨한 톤으로 사과를 받는다. 페미니스트라면, 퀴어를 배제해선 안 된다. 이어, 현실 세계를 택한 바비가 산부인과 상담을 요청하는 마지막 장면을 언급한다. 아마 질을 만드는 수술bottom surgery을 받으려는 것일 게다. ‘여자’는 ‘생물학적 여성’과 같지 않다.
++
개인적인 첫 감상은 사실 다음과 같았다: [그레타 거윅 매우 사랑하고 도라이 같은 디테일들에 매우 웃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지나치게 친절한 입문서 느낌이라 살짝 지루했다. 퀴어 코드 잘 주워먹었는지 기사 읽어보고 위어드 바비만 따로 좋아하며 케이트 맥키넌 덕질이나 시작해야지.]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레타 거윅과 노아 바움벡이 이것보다 더 친절하게 설명했어야 했던 걸까? 아니 전혀. 영화를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픽션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어쩌자는 건가. 갑갑한 마음에 후루룩 쓴 글이라 앨런 얘기도 못 했고… 케이트 맥키넌 얘기도 제대로 못 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