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2023)
<괴물(怪物)>(2023, 고레에다 히로카즈)
* 위 작품의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노네>(2018)에는 일부 어른들에 의해 “쓰레기” 취급받는 어린이들이 등장한다. “아노네(있잖아)”로 시작하는 ‘쓸데없는’ 질문을 ‘너무’ 많이 하거나, 등하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그들은 보호자로부터 버림받거나 ‘바른 아이’가 되도록 지속적으로 관리당한다. 그 기억을 안고 스무 살이 된 주인공은 ‘그래도 괜찮다’고 일러주는 어른, ‘아노네’를 만난다. <괴물>, 초등학교 5학년인 요리는 “외계인”이라 불린다.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는 요리의 부친과 동급생들. 그들이 요리와 미나토의 ‘비정상성’을 판단하는 잣대는 비논리적이고 엄격한 ‘남자다움’과 연결된다. 이성에게 끌리지 않는 것, “여자애 같은” 외모, 특정하게 걷거나 말하는 투, 집단 폭력에 동참하기를 거부하는 제스처… ‘비정상성’의 지표는 다채롭게 엉터리다.
그것은 루카스 돈트의 <클로즈>(2022), 두 주인공의 관계를 재단하던 집단의 시선과 닮았다. 어려서부터 단짝으로 지낸 두 소년 레오와 레미는 외부의 언어에 상처받고 서로 단절된다. <클로즈>가 레오와 레미 사이의 친밀감을 규정하지 않거나 우정에 가깝게 다루었다면, <괴물>은 미나토와 요리 사이에 우정과 차별되는 애정이 존재함을 분명히 짚고 넘어간다. 유럽과는 다른 차원으로 가부장 중심적이며 퀴어혐오가 만연한 일본에서, 미나토와 요리는 더욱 고립된다.
운전석에 누가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오리에게 교장은 질문을 회피하는 책임자, 마트에서 뛰어다니는 어린이의 발을 몰래 걸어 넘어뜨린 사람이다. 호리에게는 “학교를 위해 당신이 희생하라”고 말하며, 죽은 손녀와 찍은 사진을 학부모 앞에 전시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미나토에게 그는, “행복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것이기에 행복”임을, “말할 수 없는 것을 해소하는 법”을 가르쳐 준 어른이다. 인간과 사건은 그처럼 다면적이다. 교장과 남편, 그들의 손녀에게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관객은 영원히 모른다. 그가 카메라를 향해 입을 열지 않았으므로.
영화는 사오리, 호리, 이어 미나토의 시선으로 같은 날들을 되풀이해 재생한다. ‘각자의 입장 들어보기’보단 점점 진실에 가까워지는 과정이다. 사오리는 전해 들은 이야기로 사건을 파악할 수밖에 없다. 그는 일단 전부 믿는다. 아들의 말을 믿고, 동료 학부모의 말을 믿는다. 거기서 출발해 진상에 다가가려 하지만 닿지 못한다. 그의 분노가 호리에게 날아가는 것은 그말고는 딱히 대상이 없어서다. 그 화는 ‘아무도 내게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다’는 갑갑함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결국 학교가 제시한 ‘그럴듯한 해결책’을 받아들인다. 호리가 겪은 일이 화면에 흐르며, 관객은 그의 억울함을 알게 된다. 학교는 호리의 입을 막은 채 사오리로부터 떼어 놓고, 사오리의 분노를 호리에게로 수렴시켰다. 그는 거짓말을 잘 못하는 약자라서 타겟이 되었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인해 사건을 묻어 ‘해결’하도록 길들여진 교사들은 살아남기 위해 “죽은 눈”을 한 채 호리를 묻었다.
사오리가 호리를 오해했듯, 호리 역시 단편적인 장면들만 보고 미나토를 오해했다. 그는 우연한 발견으로 그 오해를 깨닫는다. 모든 현장에 있었던 장본인, 미나토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진행될 때에야 관객은 비로소 ‘진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된다. 호리를 겨냥하는 것보다 나은 거짓말이 있었을 테지만, 궁지에 몰렸다는 감각에 휘말린 열한 살에게는 아마 최선이었을 것이다. 미나토에게 있어 교사는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어른’이었을 터이나, 안타깝게도 그 짐작은 한참 틀린 것이었다.
‘외계인’과 ‘괴물’의 세이프스페이스
오해가 불어난 계기는 ‘미나토의 거짓말’이나, 근본적인 원인은 ‘미나토가 진실을 말할 수 없다고 느껴서’다. 학교도 집도 그에게는 세이프스페이스가 아니었다. 호리와 사오리는 그를 품을 가능성을 지녔으나 스스로 그것을 알지 못했다. ‘소년을 좋아하는 소년’이라는 언어는 그들 안에 없거나 비활성화되어 있어서다.
사오리가 싱글맘이라는 사실, 호리가 싱글맘에게서 길러졌다는 사실은, 그들이 주류 사회로부터 떨어져나가는 순간 어떤 ‘지표’로 작용할 가능성을 지닌다. ‘노말리티’는 그토록 유동적이고 편협하다. 영화에서 ‘남자다움’과 ‘평범성’에 관한 표현을 읊어 미나토가 제 ‘비정상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건 (재활용도 못할 요리의 부친을 제외하면)주로 사오리와 호리다. “꽃 이름 외우는 남자는 인기 없다”, “남자답지 못하게”, “자, 남자답게 악수”, “평범한 가족을 이루는 거, 그거면 족해”… 악의는커녕 대개는 별 뜻조차 없었을, 사오리와 호리 역시 들으며 자랐을 말들이다. 작품이 그 대사를 두 사람의 입에 얹은 것은 아마도 의도적이다. 어린이들의 마음에 나름 진심으로/조심스레 다가가려 하는 어른들조차 갖고 있는 무의식적 편견. 영화는(이들마저 그렇다면) 일본 사회는 얼마나 많은 미나토와 요리를 ‘괴물’, ‘외계인’으로 다뤄 왔겠는가-를 묻고 있다. 미나토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TV ‘코미디’ 프로그램 또한 성별화돼 있거나 퀴어혐오적이다. 그것을 보고 사오리는 평범하게 웃지만, 미나토는 어느 순간부터 웃지 못한다. 그 이성애중심적 가부장제의 촘촘한 틀이, 미나토가 고민을 털어놓을 길을 차단한다.
가쿠와 같은 어린이들의 머릿속에 있는 ‘비정상성’=‘놀림거리’의 기준이 어디서 왔겠는가. 저마다에게 있는 ‘이상함’을 일찌감치 삭제하거나 숨긴 그들은 기꺼이 ‘정상사회’의 어린 대변자가 되어 ‘외계인’들을 재미로 밀어내고 비웃는다. 자신을 숨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요리는 자연스레 그들의 희생양이 된다. 그는 팽창하던 우주가 폭발하는 상상에 매료되고, 아빠가 다니는 “걸스바”에 불을 지른다. 모든 것을 잘 견디는 듯 보이는 그의 내면엔 (아마도 존재를 부정당함으로 인해 생긴) 파괴에 대한 동경이 있다. 허나 그의 마음을 잡아끄는 것은 종말 자체보다는 ‘세상의 끝일지도 모르는 날, 너와 함께 있는 것’이다. 미나토는 경계선에서 갈등한다. “내 뇌가 돼지 뇌와 바뀐 것이 아닌가” 걱정하고, 요리와의 친분을 들킬까 두려워한다. “나는 행복할 수 없을 것”이라며 슬퍼한다. 허나 그를 가장 두렵게 만드는 것은 요리와의 단절이다. 새로운 자신이 낯설지만 요리를 향한 감정이 그 공포를 점차 가림을 느낀다.
사오리가 괴롭힘의 증거라고 여겼던 것들-한 짝만 남은 운동화, 물통 속에 든 흙, ‘괴물’이 그려진 엽서, 귀의 상처,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리는 행동-은 모두 요리와의 시간에서 남은 흔적이었다. 두 소년은 버려진 열차를 찾아 그들만의 세이프스페이스를 짓는다. 기관사가 되어보기도 하고 종이 공예도 하며, ‘남자답다’ ‘여성스럽다’고 여겨지는 통념에 개의치 않고 움직인다. “돼지 뇌를 가진 인간”이라는 말에 전제된 종혐오에서도 벗어나 자유롭게 달팽이나 돼지가 된다. ‘괴물’마저도 놀이로 탈바꿈시킨다.
사오리는 이미 불신하는 교사의 입에서 나온 “당신 아들이 친구를 괴롭히고 있어요”라는 말을 듣고 그 ‘친구’ 집에 찾아가 보는 이다. 호리는 요리의 글을 읽고 상황을 파악할 정도의 감수성과 그 길로 달려가 사과할 용기가 있는 이다. 거기 무엇이 있는지 아직 모른대도, 그들에겐 두 소년의 마음에 닿기 위해 태풍을 마주할 의사가 있다. 창을 덮으며 안쪽을 가리는 진흙은 열차 안이 아니라 바깥 세계로부터 온다. 그들은 간절한 손길로 그것을 걷어내고 내부를 들여다본다.
하지만 <괴물>은 그들의 이야기이기 이전에 미나토와 요리의 이야기다. 두 소년이 어른들의 시야를 벗어나 내달려 만난 빛은 이세상의 것이 아닌 듯 환하다. 장소는 중요치 않았다, 둘만 남은 곳이라면 어디든, 세이프스페이스다. 어쩌면 비극일 결말을 작품이 아름답게 묘사한 까닭이리라 짐작한다. “다시 태어난 걸까?”, “그랬을 리가.”, ‘내가 나라서, 네가 그대로 너라서 다행’이라고 느끼는, 너와 나면 족함을 깨닫는- 그 값진 순간을 요리와 미나토는 서로를 통해 맞이한다.
요리와 미나토는 이마에 그림을 붙이고 ‘내가 무엇인지’ 맞추며 놀았다. 그들은 노래했다, “괴물은 누구, 괴물은 누구?” 오래된 사회로부터 나온 언어인 ‘괴물freak’, ‘외계인’, ‘병든 자’는 결국 인간 모두였고, 그러므로 아무도 아니었다. 그러나 영화에는 다른 의미에서의 ‘괴물monster’들이 등장했다- ‘타인을 괴물이라 손가락질함으로써 괴물이 된 자들’. 오리지널 포스터에는 두 소년이 무표정으로 이쪽을 응시하는 컷이 담겨 있다. 관객의 이마에 붙은 ‘괴물’이라는 단어를 보고 있는 걸까, ‘우리를 괴물이라 낙인찍은 당신’, ‘제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우리의 존재를 삭제하고 있음을 깨닫지도 못하는 당신’, ‘우리의 이생에서 세이프스페이스를 무너뜨린 당신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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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본이 풍성하다고 느꼈다. 다루는 주제가 넓고 시선이 다각도이며 인물들이 입체적이고 디테일이 살아 있는… 아 10년쯤 전 <최고의 이혼>에서 ‘남자/여자 는/니까’로 시작되거나 끝나는 대사를 자주 썼던(한계는 있지만 명작임) 사카모토 유지가 이런 이야기를 쓰다니 감격스럽다. 시대에 적응하며 발전하는 스토리텔러는 좋아할 수밖에 없다.
++(덕질 주저리)
호리 약간… 하마사키 미츠오가 까다로움 덜어내고 교사로 환생한 것 같지 않은가. 사카모토 선생님 에이타 대사 더 길게 쓰고 싶었는데 영화라서 참으셨습니까? 우리의 아노네 상 다나카 유코는 아노네에서랑 아주 다른 듯 뭔가 비슷한데 나가야마 에이타와의 다이내믹은 아주 바뀐 것 좀 재미나다. 그리고 나가야마 에이타 팬으로서 참으로 뿌듯하다고 말해야겠다. 물론 안도 사쿠라도 최고였고 연기 디테일이 자주 덕심을 건드렸으나 캐릭터 특성 탓인지(나름 발전하는 스토리텔러들인 사카모토 유지와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모성’에 대한 묘사에 있어서만큼은 기존의 문법에서 크게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고레에다 감독 최근작에 관심을 안둬서 문장 끝을 못맺음) 에이타가 더 기억에 남았다. 사오리 파트에서도 관객은 에이타 연기를 통해 저 인간 뭐 있군,을 알 수 있다. 사탕 먹고 우물쭈물하는 그… 패닉어택 온듯한 연기 보셨읍니까 그러다 갑자기 뭐 하나 뚫을 거 같이 절실해져버리는 그 눈알 보셨냐구요 에이타 팬 하면 늘 연기로 보답받음 미스하는 씬이 단 하나도 없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