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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Sep 02. 2024

오언 매디 이사벨 타라

<I Saw the TV Glow>(2024)


 

<빛나는 TV를 보았다(I Saw the TV Glow)>(2024, 제인 쇼언브런)

 

*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 인용에는 오역이 있을 수 있음

 

 

1996년 미국의 어느 교외, 오언은 매디를 만난다. 십 대인 그들에겐 마음을 터놓을 어른이나 또래가 없어 보인다. 마초적인 백인인 오언의 아버지는 TV 리모컨과 소파를 일상적으로 차지하고, 자녀의 취침 시간을 통제한다. 자상한 어머니는 남편과 부딪히고 싶어하지 않는다. 매디의 새아버지는 상습적으로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듯하다. 오언에겐 별다른 친구가 없고, 매디의 단짝은 오래가지 못한다.

 

두 사람은 TV 시리즈 <핑크 오페이크>로 연결된다. 영화는 종종 오언의 주위에 바이섹슈얼과 트랜스젠더 대표색을 드리우는데, 명확한 상징성보단 그럴 수도 있다는 은유와 미학적 의도가 비친다. 매디는 레즈비언, “나는 TV쇼를 좋아하는 거 같다”, “이 안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오언은 아마도 논바이너리이거나 에이섹슈얼 또는 둘 다인 듯하다. 규정할 필요는 없다. <핑크 오페이크>를 향한 이들의 집착은 ‘픽션으로의 도피’로 읽히지 않는다. 인터넷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대, TV는 그들이 스스로를 대입할 형상과 설명할 언어를 찾을 중요한 매체였으리라 짐작한다. 허나 <빛나는 TV를 보았다> 속 <핑크 오페이크>의 의미는 그 이상, 현실보다 ‘진짜’인 무언가다.

 

이 우정에 따스한 이심전심이나 신나는 박장대소는 없다. 드물게 대화할 때면, 주제는 주로 <핑크 오페이크>다. 그러나 (핑크 오페이크야말로 핵심이었으며,) 매디는 아버지 탓에 TV를 못 보는 오언을 위해 기꺼이 매번 테잎을 녹화하고, 오언은 매디가 친구와 절교했음을 털어놓자 토요일에 함께 TV를 보자고 제안한다. 일종의 무의식적이고 자연스러운 연대다. 매디가 녹화해 준 에피소드의 묘사가 스크린에 분홍색 펜라이팅으로 적히는 가운데, 카메라는 학교 복도를 걷는 오언의 쓸쓸한 뒷모습을 롱테이크로 따라간다. 머무를 곳을 찾아 헤매는 모습 같다. 그 끝에 도달한 장소는 매디가 비디오테잎을 놓아 둔 암실이다.


 

오언과 매디가 오랜만에 나란히 앉아 <핑크 오페이크>를 본 날 밤, 매디는 떠나겠다는 결심을 털어놓는다. ‘여기 있으면 나는 죽을 것’이라는 대사에는 과장이나 비유라기엔 이상할 정도의 확신이 담겨 있다. (그를 연기한 브리짓 런디-페인은 매디를 “거짓말을 하는 것이 불가능한 인물”로 묘사한다.[Vulture]) 매디는 오언에게 함께 가자고 제안하지만, 오언은 겁에 질려 ‘이제는 친구가 아닌 조니’의 집 문을 두드린다. ‘아빠에게 물어봐 달라’고 엄마에게 말했던 것처럼, 조니의 어머니에게 ‘엄마에게 내 잘못을 말해 달라’고 부탁하며 눈물을 흘린다. 그 절박함을 트랜지션에 대한 부정으로 해석해서는 (당연히) 안 될 것이다. 시스젠더 헤테로섹슈얼이 ‘기본값’으로 여겨지는 세상에서, 트랜지션의 기로에 놓인 이가 스스로의 정체성과 맺는 복잡한 관계를 표현하는 장면에 가까울 테다.

: 이런 식의 장면 분석을 하면 별로 ‘옳지 않은’ 기분이 드는 작품이나, 매디 말마따나 (아닌 것을) “확실히 해 두는” 것이다.

 

매디는 사라지고, 오언은 남는다. 그의 디스포리아도 남는다. 일터에서 매니저의 섹스를 목격한 후 ‘눈도 못 마주친다’며 도리어 놀림을 당할 때, 집에서 여전히 TV와 소파를 차지하고 있는, 이제는 석상처럼 굳어 있는 아버지를 응시할 때, 그의 얼굴은 멎는다. 제 방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는 오언에게 스크린 불빛이 한가득 쏟아진다. 그 빛은 실물의 TV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핑크 오페이크>에 닿아 있거나 닿고자 하는 오언의 무의식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오언 앞에 매디가 나타난다. 매디-타라는, 얼굴에 별자리를 드리운 채 십 년 동안 있었던 일을 들려준다. ‘이름을 바꾸고 또 바꾸며 이곳저곳을 떠돌았지만 여전히 무언가 맞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기반 없이 홀로 서게 된 젊은이가 겪는 평범하고 팍팍한 일상에 대한 시적인 푸념 같기도 하다. 그러나 오언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되는 (심지어 카메라를 보고 제 삶을 요약하며 제 4의 벽을 두드리기도 한다.) 이 세계에서, 그와 매디가 발견한 <핑크 오페이크>는 디스포리아의 시각화일 뿐 아니라, ‘진짜’다. 매디가 녹화해 준 비디오테잎에 담긴 <핑크 오페이크>와, 신형 평면 TV 스크린 위에 재생되는 <핑크 오페이크>는 다른 작품이다. 이사벨과 타라는 매디와 오언을 통해 존재한다. 공유된 망상이라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과 동일해서다. 오언이 TV 속으로 들어가려다 아버지에 의해 현실로 끌어 내려진 후 “달 주스”를 억지로 마시고 ‘돌아오는’ 과정,은 상상이 아닌 실제다.

 

오언은 ‘그냥 TV쇼였을 뿐’이라 말하고, 매디는 ‘정말 그게 다였냐’고 묻는다. 오언은 매디가 그려준 뒷목의 표식을 벅벅 지웠던 그때처럼, 매디-타라를 거절한다. 이사벨이 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오언으로 사는 것은 숨이 막혀오는 일이다. 자주 숨을 몰아쉬며 흡입기를 찾는 그의 낯빛은 갈수록 창백해진다. 숲에 들어가 모닥불을 피워, TV를 보듯 오랫동안 들여다보곤 한다. 오언은 ‘매디가 나를 끌고 가 파묻어주길 바랐지만, 매디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내레이팅한다. 결정은 오언 스스로의 몫이다. 어느 쪽이 더 낫다는 판단이나 어떻게 해야 맞다는 강요를 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허나 ‘이사벨로 살 것인가, 오언으로 살 것인가’는, ‘의지’나 ‘선택’의 문제 역시 전혀 아니다.

 

<핑크 오페이크>가 그들로 하여금 현실과의 괴리감을 느끼도록 유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느끼는 괴리감이 <핑크 오페이크>를 발견하도록 한 것이다.(혹은 핑크 오페이크를 통해 발현된 것이다.) ‘내가 내가 아니고, 이 세계가 내 세계가 아닌 것 같은, 내 안에 다른 사람이 들어 있는 것 같은, 현실이 초현실적으로 어긋나 있는’ 기분, 이는 ‘나의’ 어긋남이 아닌 ‘현실과 나, 그리고 나 사이의’ 어긋남이다. 스스로를 드러내기도 전에 ‘네 존재/감정은 틀렸다’는 시선을 감지하게 만드는-시대의 기준은 유일하지도 절대적이지도 당연히 늘 옳지도 않다. 개인의 공포는 마음속에서 자연발생하지 않는다. 외부에서 주입된 상과 자신이 불일치하는, 그 불일치에 대한 외부의 반응을 맞닥뜨리는, 간극을 메워 ‘일치하려고’ 애쓰면 내면에 균열이 일어나는- 사건이 반복되며 오언은 점점 더 ‘자신과 멀어졌’을 것이다. 그것은 “심장이 도려내진 채로 흙에 파묻혀 있는 상태”라고, 영화는 말한다.


 

나이 든 오언은 다른 유니폼을 입고, 같은 매니저와 일한다. 평면 TV 박스를 든 채 카메라를 응시하며 언급한 ‘내가 꾸린 가족’은 등장하지 않는다. 동료들을 따라 생일을 맞은 어린 손님에게 축하 노래를 불러주는 오언은, 정신을 잃기 직전의 상태로 보인다. 별안간 그는 경악한다.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른다. 주위는 정지한다. 누구도 구조 요청을 듣지 못한다. 오언은 화장실 바닥에 널브러져 겨우 호흡한다. 커터로 가슴을 가르자 피 대신 빛이 새어나온다. 거울을 마주보며 가슴을 열어젖히더니- 오언은 곧, 유니폼을 다시 입고 일터로 복귀한다. 자신을 ‘거의 보지 않는barely see’ 모두에게 사과한다. (제인 쇼언브런과 브리짓 런디-페인의 표현대로: “…louder scream of a movie”, “Gut scream”), ‘속을 뒤집고 그대로 닫아버리는’, 클로짓 트랜스의 거대한 비명을 담고 있는 서늘한 마무리다.

하지만,

 

오언은 아마도 일단은, 이사벨을 꺼내지 않았다. 이사벨이 사라진 게 아니라 묻혀있을 뿐이라는 것, ‘또다른 세계’를 영원히 의식하고 애도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공포일 수 있다. 그러나 내면의 빛을 마주한 오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는, 거기 어떤 (아직 거기 있구나라는)안도가 비쳤다는 건 착각일까. 클로짓에 넣고 가두었다가 열어본 그 장소에, 아름다움과 가능성이 남아 있었다는- 그것이 오프닝과 엔딩 무렵 각각 삽입된 “아직 늦지 않았어” 메시지 씬과 연결된다는 해석을, 조심스럽게 해 본다. “각본을 썼던 2020년 10, 11월, 초기 트랜지션 시기에 겪었던 강렬한 일들이 영화의 원천에 영감을 주었다”[GQ]는 감독의 말을 기억하며,(그렇다고 해서 꼭 자전적인 이야기라는 건 아니지만) 이는 영화의 끝이지 오언의 끝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작품은 아리 애스터와 티 웨스트 대표되는- ‘A24 호러 영화 묶이기 힘들며, 그러한 기대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제인 쇼언브런은 호러로 분류되곤 하는 자신의 영화들이 ‘거기서 비롯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작업은 그보단 예술영화의 방언이나 슬로우 시네마 계통이다. 캘리 라이카트 스타일의 커밍오브에이지 필름이나, (데이비드)린치식이나 (데이비드)크로넨버그풍 초현실주의 같은, 그러나 관객을 충격의 질주로 데려가려는 목적을 갖고 있지는 않은.”[GQ]

 

<빛나는 TV를 보았다>는 이러한 영향과 할로윈-픽션 스타일을 흡수하여, 유일한 우주를 창조했다. 무엇과 닮은 듯 한데도 선뜻 떠오르지 않았고, 라이카트, 린치, 크로넨버그, 그렉 아라키 등이 언급된 인터뷰를 읽고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결국, ‘이런 건 어디에서도 본 적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우리가 깨어 있어서는 안 되는 시간에 가장 효과적으로 상영되는play best”, “두려움을 느끼게 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아름답고, 위안을 선사하는”- <빛나는 TV를 보았다>는 쇼언브런이 만들고 싶었다던 “자정의 영화”, 바로 그것이다.

 

 


 

+

<트윈 픽스> 시즌3의 로드하우스 공연들처럼, 슬로피 제인과 킹 우먼의 공연은 영화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트윈 픽스와 달리 모든 사운드트랙은 영화의 세계에 (어느 정도) 머무른다. 쇼언브런은 “사운드트랙이 오리지널이길 바랐”고, 사랑하는 아티스트들이 “영화의 세계 안에 존재하는 새로운 음악을 만들었으면 했다”고 말한다. 사운드트랙 디렉팅의 마지막 단계는 “모두에게 맞는 순서와 영감을 부여하기”, 이를 테면 Jay Som에게 “1994년에 빅 히트를 쳤을 만한 싱글을 써 주세요” 라고 한다거나, Frances Quinlan에게 “포티쉐드 식의 트립합 드럼 비트로 당신이 무엇을 할지 너무 듣고 싶어요”라고 하는 일이었다고.[GQ] 

더불어, <핑크 오페이크>의 타라를 연기한 인디 아이콘 스네일 메일(어쩐지 너무 닮았다 했다… 연기 크레딧은 ‘린지 조던’으로 올라가 있다.)은 스매싱 펌킨즈의 ‘Tonight Tonight’ 커버로 참여했다.

 

++

잘 몰랐던 배우들이라 연기에 대한 기대는 없었는데… 놀라고 말았다. 저스티스 스미스, 브리짓 런디-페인, 두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게 되었다. 캐스팅 과정은 ‘이 사람이 이 역할에 완벽하겠다’ 보다는 ‘이 캐릭터가 이 사람에게 완벽히 어울리겠다’에 가까웠다고 한다. 두 주연 배우와 감독 인터뷰 비디오도 다 흥미롭다. 덕질할 맛이 나…



* 참고 인터뷰

https://www.gq.com/story/i-saw-the-tv-g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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