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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Sep 23. 2024

위선을 배제하는 리얼리즘 둘

<장손>, <딸에 대하여>



<장손>(2023, 오정민)

<딸에 대하여>(2023, 이미랑)

 

* 두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언급 순서는 관람 순서.

 


두 영화의 화자는 피 섞인 타인과의 마주침에서 살아보지 않은 세상의 단면을 목격한다. 작품도 그들의 시선에 머무르는데, 위선을 배제하고 일말의 진실을 포착하려는 한 방법으로 다가온다.



<장손>(2023)


<장손>, 성진은 관찰자일 수만은 없게 되었다

 

두부 공장의 자욱한 연기는 거의 초현실적이다. 카메라는 두부 한 짝을 들고 그곳을 나와 집으로 향하는 성진의 엄마를 따라간다. 집안에서는 제사 준비가 한창, 누나는 에어컨을 틀자고 하지만 할머니는 허락해주지 않는다. 와중 두부 공장의 현 대표인 아빠는 방문을 닫고 ‘노름’을 하는 중. 인물들의 호칭은 전부 성진의 기준에서 썼다. 택시비가 없다는 민망한 전화와 함께 등장하는 그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어서다.


배경은 성진의 조부모와 부모가 사는 집이다. 그가 살았던 집이기도 하지만 그의 공간은 아니다, 두부 공장이 그렇듯. 집을 ‘대표하는’ 남자들이 공장의 계승과 운영 방식을 둘러싸고 (대디 이슈와 무관하지 않은)비생산적인 '논쟁'을 벌이는 동안, 일은 여자들(+때로 그 남편들)이 다 해왔다. 그녀들이 제사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작은고모처럼 (‘사모님’이 되어) 물리적으로 그곳을 떠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일을 평생 해왔을 할머니는 대놓고 성진을 예뻐하며 차별한다. ‘제사를 일찍 지내자’는 제안은 내내 일한 누나가 아닌 늦게 도착한 성진의 입에서 나와야만 할아버지의 마지못한 승낙을 받을 수 있다.


택시를 타고 마을을 떠났던 성진이 무채색 옷을 입고 장례식장에 도착하기까지, 그 사이의 시간을 영화는 생략한다. 성진이 단체사진을 잘라 만든 할머니의 영정을 꺼내 올려놓을 때에야, 관객은 비로소 누가 죽었는지 알게 된다. 이렇듯 시차를 섬세하게 활용하는 연출은 <장손>의 리얼리즘에 영화적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대신 사실주의적 풍자에 수반되는 긴장은 유머가 늦춘다. 마이크에 대고 ‘성진이 왔으니 에어컨 틀자’고 외치는 할머니의 모습에, 관객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소리내 웃고 만다. 제사의 엄숙은 여자들의 웃음으로 깨지고, 할아버지와 아빠의 팽팽한 말다툼은 아빠가 엎은 국물이 매형의 사타구니에 쏟아지는 해프닝으로 마무리된다. 눈물바다의 장례식이 끝난 후엔 ‘누구 지인이 더 돈을 많이 냈나’ 게임이 시작된다. 한밤중에 깨어나 난리를 피우는 할아버지를 진정시키기 위해 한바탕 연극을 한 후 마당에 쪼그려 앉아 조는 성진과 부모는 또 어떤가.


성진은 언뜻, 그 사이 어딘가에 끼인 중립적 관찰자의 위치에 있는 듯 보인다. 가업과 유산에 관심이 없고, 그저 ‘내 일’을 하고자 할 뿐이며, 누구의 ‘편’을 들지도 않는다. 그러나 성진은 이미 그 문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임신한 몸으로 종일 전을 부치던 누나가 꿈만 꾸던 에어컨은, 성진이 집에 들어서자마자 켜진다. 당연하게 “엄마 물 좀”을 시전하지만, 엄마를 ‘도와’ 제기를 닦기도 하는 그는, 조부모와 부모의 애정을 독차지하는 가부장제의 수혜자다. 그러나 그 애정에는 기대가 뒤따른다. ‘미래가 안 보이는’ 일을 하는 것, 가업을 잇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 여자친구를 데려오지 않는 것은 심각한 문제로 다뤄진다. 물론 그 온도는 한참 다르다. 성진의 주위에 쌓인 갈등은 그가 자신의 작업을 완성하자마자 너그럽게 해소된다(응원은 아빠가 아닌 누나와 엄마로부터 온다). 그럼에도 성진은 언젠가 자신이 가족의 대표가 될 날이 오리라고 짐작하는 듯하다. ‘두부 공장은 누구든 하고 싶은 사람이 하면 된다’던 그는, 누나에게 “나 대신” 맡아주어 고맙다고 말하기도 한다.


<장손>(2023)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본격적으로, 성진은 이 가족적 ‘재난’의 목격자가 된다. 사라진 유해와 사라진 통장, 싸우는 남매와 침묵하는 할아버지. 클라이맥스처럼, 큰고모가 살던 집에 불이 난다. 성진은 아빠의 실수라고 여겼으나, 곧 고모 자신이 냈다는 간접적 고백을 듣는다. 유교적 가부장제의 그림자가 거의 그대로 남아 있는 집안에서 (아이를 낳지 못한) 딸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성진은 알지 못한다. “고모가 왜?”는 때늦은 이해와 변화를 향한 첫 질문이 될 수 있을까. 그는 조금은 알았을 것이다, 조부에게 할 말을 자꾸 자신에게 미루는 누나를 보며, 공장에서나 집에서나 일하는 엄마와 일하지 않는 아빠를 보며, 자신을 유달리 예뻐했던 조모를 기억하며. 어느 선택도 하지 않으며, 성진은 스스로가 중립적 관찰자라는 착각 속에 남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는 성진이 몰랐거나 모르고 싶었던 것을 무시할 수 없게 만든다.


그가 알게 되는 첫 번째 비밀은, 아빠를 늘 못마땅하게 여기는 듯 보였던 할아버지가 내심 아들이 ‘이곳을 벗어나 훨훨 날아가길’ 바랐다는 것이다. 이는 두 번째 비밀과 연결된다. 영화는 큰고모가 반복해 언급했던 ‘몇천만원이 든 통장’을 성진에게 떠안기며 막을 내린다. 할아버지-자신의 부모를 기리는 제사가 아내와 딸, 며느리, 손녀가 한 노동의 결과물이었듯, 아들에 대한 은근한 사랑의 표현이 딸의 노동을 착취한 결과물일 수도 있음이 여기 암시된다. 오정민 감독은 “진실은 누구도 알 수 없다. 그저 집안에서 각자의 주장이 소문으로 떠돌 뿐이다”[씨네21]라고 했다. 맞는 말이나… 정말로, 알 수 없는가? 사실관계야 어떻든, 영화 초반 코미디 톤으로 묘사되던 일상에 본질이 있지 않은가.(아마 연출 의도에도 부합하리라 예상한다) 변화의 실마리를 손에 쥔 성진은, 자신의 특권에 대해 고민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다.  


엔딩, 두부 공장으로 향했던 할아버지는 천천히 발길을 돌려 산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꼭 자발적으로 역사가 되어 사라지는 듯하다. (감독은 “한 시대의 퇴장”이라고 말했다.) 카메라는 먼 곳에서 그 뒷모습을 담되, 따라가지는 않는다. 구시대적 가부장제의 마지막(이어야 할) 장을 영화는 그 뒷모습으로 애도한다.  


<장손>(2023)


<딸에 대하여>(2023)


<딸에 대하여>, 정은은 이해를 시도하게 되었다


<딸에 대하여>, 정은=‘나’는 그린과 레인, 제희를 관찰하는 자이기 전에 화자다. 정은의 집은 <장손>의 집과 달리 그가 ‘비롯된’ 곳이 아니라 다다른( 줄 알았던) 곳, 버리거나 떠날 수 없는 공간이다. 정은은 관찰자인 척조차 할 수 없고, 여러 사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고 또 주는 입장에 놓인다. 작품은 관객이 ‘부담을 느낄’ 위험을 무릅쓰고, 잦은 클로즈업과 함께 정은의 생활과 속내를 샅샅이 들여다본다.


짐을 한가득 들고 힘겹게 언덕을 오르는 첫 장면부터 영화는 정은의 고단함을 공들여 묘사한다. 요양보호사로서 일터에서 고된 육체노동과 감정노동을 하는 그는 이제 집에서도 편히 쉬기 힘들다. 전세 보증금을 다 써버린 탓에 갈데 없어진 딸과 그의 애인이 들어와 살고 있어서다. 정은이 겪는 불편과 피로에 집중하는 과정에서 그린은 엄마의 생활을 존중하지 않는 염치없고 무신경한 딸로 그려진다. 언질도 없이 애인과 짐을 먼저 엄마 집으로 보내거나, 얹혀 살게 된 입장임에도 “엄마 좀 치워놓지”라고 툭 던지는 식이다. 때문에 그의 말만 믿고 이사한 레인마저 무례하게 보인다. ‘내 딸의 이름은 그린이 아니’라는 말에 사과하고도 줄곧 문장마다 ‘그린’을 넣는 레인은 정은의 신경을 거스른다. 허나 ‘정말로’ 그의 신경을 거스르는 점은 이름도, 좁아진 공간이나 줄어든 욕실 사용 시간도 아닌, 레인이 여자라는 사실일 테다.


그러나 그곳은 출발점이다. 정은은 ‘퀴어는 행복할 수 없다’는 편견을 갖고 있고, 초반부 그린의 언행은 ‘퀴어는 이기적으로 자신의 행복만 추구한다’는 편견을 떠오르게 한다. 영화는 아주 천천히, 정은과 속도를 맞추어 그것들이 편견임을 밝힌다. ‘상호 이해’가 아닌 정은의 상황과 심리가 변화하는 여정이다. <장손>이 성진에게 큰고모의 시커멓게 탄 일부를 들이밀었듯, <딸에 대하여>는 정은이 두 사람과 부대끼고 대화하며 알지 못하던, 혹은 애초에 알지 않으려고 닫아놓은 세상의 단면을 느낄 수밖에 없도록 유도한다.


<딸에 대하여>(2023)


그 여정에서 정은 자신도 모르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담당하는 환자 제희와의 관계다. 그를 힘들게 하는 것은 치매 증세가 있는 제희를 돌보는 일 자체보다는 매번 ‘형평성’을 들먹이며 주의를 주는 관리인의 눈치를 살피는 일이다. 정은은 제희에게 특별한 유대를 느낀다. ‘내 미래가 보여서’라는 설명은 부족하다. 그는 제희가 받는 취급이 부당하다고 여겨 요양원 측에 반복적으로 항의한다. 언뜻 ‘내 일이 될 수도 있으니’ 윤지 선생님과 연대하는 그린의 행동과 겹쳐 보이지만, 다르다. 그린이 ‘부당한 일이고 차별이기 때문에’ 맞선다면, 정은은 ‘우리 선생님은 그럴 취급을 받을 분이 아니기 때문에’ 견디지 못한다. 그 편향적인 표현에 제희를 담당 환자 이상으로 여기고 있음이 비친다.(옳고 그름과는 별개로, 정은의 동기가 사적이라는 뜻이다) 스스로 ‘정상가족’의 범위를 벗어난 가족적 애착을 느끼고 있다는 점을 서서히 깨달으며, 정은의 시야는 넓어졌을 것이다.


대부분 정은의 입장을 취하는 이 이야기에서, 그린은 자신의 목소리를 낼 때조차 관찰된다. 그건 그가 보이는 그대로의 인물이라서일지도 모른다. 레인을 사랑하고 아끼는 연인, 부당함을 목격하면 망설임 없이 즉각 대응하는 활동가. 그의 언어는 스크린을 넘어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딸에 대하여>는 그린과 레인의 세상을 섣불리 아우르는 대신 화면에 조각조각 드리운다. 주로 정은을 통하지만 아주 드물게 두 사람만의 순간을 포착하거나 레인의 시선을 취하기도 하는데- 정은을 주인공으로 택했지만 그들을 대상/수단화하고 있지는 않음을, 독립적인 인물로서 소중히 여기고 있음을 영화 스스로 보여주려는 듯도 했다.


(창작자가 퀴어든 그렇지 않든) 고정된 전형을 소비하곤 했던 ‘한국형 퀴어영화’ 몇을 떠올리며, 영화관을 나와 걷다 혐오시위 현장을 목격하며, <딸에 대하여>는 과연 한국에 필요한 작품이었음을 더욱 납득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정은은 그린과 레인에게 사과하지 않고, 전 동료들에게 두 사람의 관계를 밝히지도 않는다. 네 ‘가족’이 모여 레인이 구운 빵을 나눠 먹는 판타지는 판타지로 남겨둔 채, <딸에 대하여>는 예쁜 포장보다는 서툰 진심을 향한다.


<딸에 대하여>(2023)




+ 떨어져 나온 메모들

 


 1

“It doesn’t excuse it, but it explains it.” - 이안 맥컬런, [attitude]

…를 뒤집어서, It explains it, but it doesn’t excuse it.


고성을 지르다 밥상을 엎고, 술에 취해 방문을 부술 듯 두드린다. <장손>, 모자가 힘을 합쳐 이불로 눌러야 진정되는 아빠의 폭력은 어쩐지, 평생 제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한 자의 안쓰러운 몸부림으로 다뤄지는 것만 같다. 그것은 상쇄되지 않는다. 평생 할머니의 노동으로 치러졌을 제사에 집착하는 할아버지의 구시대적 태도가, ‘공산당 색출’에 부모님을 잃은 역사적 트라우마로 상쇄되지 않음과 마찬가지다. 영화는 아마도 그 점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할아버지로부터 아빠에게로 계승된 폐쇄적이고 유해한 가부장제를 무너뜨릴 계기가 될 수도 있을 무언가를 성진의 손에 넘긴 까닭일 것이고.


<딸에 대하여>, 관객은 정은의 일상을 따라가며 그가 그린과 레인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던 까닭을 어느 정도 알게 된다. 정은이 그렸던 이상적인 행복의 상은 옆집에 세들어 사는 젊은 부부와 두 아이의 모습이었던 듯하다. 늙어 혼자 남겨진 제희, 혼자 남겨질 자신, 남편과 자식이 없는 딸-은 행복할 수 없다고 여겼다. 정은의 ‘바람’이 당사자에게 전달되는 형태는 혐오, 행복에 구체적인 서사가 있다고 단정했던 그에겐 그린과 레인의 삶을 이해할 의사가 없었다. 그린과의 언쟁 끝에 정은은, “너는 내 딸이니까”라고 말하는데, 그린은 그에 수긍하지 않고 상처받은 얼굴로 자리를 피한다. 다행히도 정은은 이런저런 사건을 겪으며 닫았던 문을 조금씩 열기 시작한다. 영화가 그리고 싶었던 바도 그 어렵고 괴로운 과정일 테다.  



2

그럼에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물음표


<장손>, 여자들의 서사는 결국 남편과 아들을 향하는가

할머니가 ‘같은 배에서 나왔는데 어찌 그렇게 달리 사는지’라고 혼잣말을 하며 두 딸의 삶을 서글픈 눈으로 곱씹는 장면, 엄마가 ‘어머니가 왜 나를 처음 봤을 때 눈도 안 마주쳤는지’ 털어놓는 장면이 있다. 그 교감은 일방적이고, 독립적이지도 않다. 할머니가 낳은 두 딸의 삶을 ‘다르게’ 만든 것은 남편들이다. 엄마의 기억은 큰고모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져, ‘아들을 낳은 며느리’가 ‘딸조차 못 낳은(,“남편을 잡아먹은”) 딸’에게 갖는 미묘한 우월감에 다다른다. 후자의 못난 언어를 듣는 자는 성진이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 후에 큰고모는 성진에게 ‘네가 내 아들이었으면 했던 적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초반의 기세가 무색하게도) 성진의 누나는 아내/엄마의 역할로, 큰 비중 없이 화면에서 나간다. <장손>은 많은 영화가 그래왔듯 평생 남자들을 위해 일해 온 여자들의 이야기를, 그들의 남편과 아들에게로 수렴시키려 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살짝 들었다. 단편적인 장면들이므로 무엇이라 단정하기는 힘들고, 여자들이 서로 연대하지 못하게 막는 ‘전통’에 대한 비판일 수도 있지만, 영 개운치가 않다. 


<딸에 대하여>, 레인은 정말 괜찮은가

정은의 상황이 강조되며 상대적으로 레인이 당하는 무례는 가려졌다. 그린의 소통부족 탓에 환영받지 못하는 공간에 던져진 레인은, 정은의 ‘인정’을 기다리는 동안 너무나 잦은 인내를 수행한다. 보자마자 하는 일을 묻고 평가하며 불편함을 꾸준히 티내는 정은, 알려야 할 정보도 제대로 알리지 않고 호모포빅(한지 모를 리 없을 텐데)한 엄마 곁에 레인을 자주 방치하는 그린, 집주인을 통해 조율하지 않고 주차 문제를 대뜸 면대면으로 꺼내는 옆집 남자까지. 허나 레인은 색안경도 걷어낼 만큼 영리하고 예의 바르고 당당한, 모범생 같은 퀴어다. 그린이 포기한(그에게도 엄마를 설득할 의무는 없지만) 설득의 역할을 꼭 레인이 맡고 있는 듯도 했다. ‘7년 동안 만났고, 제가 생활비와 대출금을 댔는데, 확신이 없었다면 그랬겠느냐’고 묻는 레인은 흔들리지 않는다. 차분히 설명하고, 정은에게 매번 거절당하면서도 먼저 말을 걸며, 동거인의 도리를 다한다. 제희가 집에 들어오고 나서는 그를 돌보는 일마저 나눠 한다. 영화는 (거의 ‘매닉 픽시 드림 퀴어’인 듯한) 그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가를 담백하게 그리는 와중, 그의 상태가 괜찮은가는 살피지 않는다. 관심이 처음부터 거기 있지 않았으니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일단 겉으로는 잘 지내는 듯 보이지만… 레인은 정말 이대로 괜찮은가.


<딸에 대하여>(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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