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날드 하그리브스'조차 되지 못했나
<엄브렐러 아카데미>는 어쩌다 '레지날드 하그리브스'조차 되지 못했나
속이 뒤집어진 팬의 의식의 흐름적 리뷰
넷플릭스 시리즈 <엄브렐러 아카데미>, 주로 시즌4
* 위 작품의 장면과 결말 & 넷플릭스 시리즈 <다크> 결말 포함
<엄브렐러 아카데미> 시즌1은 별거였다. 두루두루 사랑받을 종류의 쇼는 아니었으나 마니아층을 형성하는 재주가 상당했다. 수퍼내추럴한 능력은 있는데 수퍼히어로는 못 되는 이들, 팀이라기엔 뭐하고 엉망진창 프로젝트 그룹 정도 되는 피붙이 아닌 시블링들. 그 미적지근함, 어정쩡함이 매력이었다. 거기 20(+21)세기 명곡들이 세상이야 망하건 말건 느긋한 리듬으로 흐르는, 거 참으로 물건이었다. 시즌2는 기대 이상이었다. 시즌1에서 아쉬웠던 긴장감을 시대극이라는 메리트를 활용해 훌륭하게 채워넣고 장점은 그대로 가져가며 사회적 이슈도 살짝 얹어줬다. 게다가 라일라(리투 아리아는 최고다.)라는 굉장한 뉴페이스를 등장시키기까지. 이제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그대로 스패로 아카데미와 마주치며 깔끔하게 엔딩을 내고, 한두편의 루즈한 스핀오프를 넣어 근황을 보여줬더래도 좋았을 것이다.
시즌3을 보며 불안해진 팬은 나만이 아니었을 테다. 시즌2, 빅터와 벤의 아름다운 이별에 한바가지 흘렸던 눈물을 멋쩍게 말려버리는 ‘다른 벤’, 아니 ‘남의 벤’. 막 <애프터 양>을 본 저스틴 민의 팬으로선 또다른 얼굴을 만날 수 있어 내심 기쁘기도 했으나, 벤 하그리브스의 팬으로선… 영 나빴었다. ‘넘버2 벤’이라는 캐릭터 자체보다 그를 취급하는 작품의 태도가 ‘나빴다’. 속상한 앨리슨을 배신자로 만들고, 임신 클리셰를 첨가해 라일라와 디에고를 전형적 일부일처로 묶어버린 작품이 ‘나빴다’. 한국에서 이슈화됐던 일본 문화 갖다붙이기는 귀여운 정도고.(시즌4에도 등장하는 걸 보면 연출자가 요상한 오리엔탈리즘/ ‘저패니즘’에 빠졌든가…) 그러나 시즌3으로 소란스러워진 팬들의 마음을 시즌4는, 잠재우진 못할망정 아주 뒤집어 엎어 놓았던 것이다.
이쯤에서 시즌1 프로모션 단계에서 불거졌던 인종차별 논란을 언급한다. 기억을 빌려 요약하면: 출연진이 무대에 한 줄로 서서 찍은 사진이 공식 소셜 미디어 계정에 게시됐는데, 맨 끝에 서 있던 저스틴 민이 잘린 채였던 것이다. ‘인스타그램 사진 규격에 맞지 않으니 아시안을 아무 생각 없이 자른 것이냐/ 또 아시안을 안보이는 존재로 만든 것이냐’는 골지의 비판이 뒤따랐다. 개인적으로는 주연 중 홀로 아시안 배우인 그가 등장한다는 정보 자체가 시즌1-1화의 루즈한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다는 판단에 슬쩍 가린 것으로 짐작했지만- 저스틴 민 글에도 썼듯 “팬들의 분노는 이제껏 할리우드가 아시안을 다루어 온 태도에 기반해 있었다”. 그런데… 시즌3은 옛날옛적 잠잠해진 그 이슈까지 돌아보게 만들었다.
시즌2, 흑인 여성 앨리슨은 별안간 60년대에 목소리를 잃고 떨어져 인종차별에 성차별을 피부로 겪는다. 아시아인 벤은 어땠는가, 유령이라 말그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를 ‘보이지 않는’ 자리에 밀어 둔 것은: 아시안 아메리칸이 맞닥뜨리는 교묘한 차별을 풍자하는 제스처였을까, 아니면 그저 하나뿐인 아시안을 다룰 줄 몰라서 한 편리한 선택이었을까? (결과적으로 시즌1,2의 ‘유령 벤’과 저스틴 민은 시청자의 사랑을 무더기로 받았다. 시즌1에서는 거의 클라우스의 사이드킥 포지션이었는데, 저스틴 민이 잘 해줬고 두 배우 케미가 상당하여 2에서 비중이 늘며 보다 입체적인 인물이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시즌3을 돌이키면, 그리고 시즌4를 보면 후자에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고 만다.
시즌3, 스패로 아카데미의 벤(벤2)은 의도적으로 엄브렐러 아카데미의 벤(벤6)과 반대에 놓이도록 구성된 캐릭터인 듯했다. 벤6가 해탈한 듯 차분하고 마음이 넓고 시니컬하지만 바르고 희생적이라면, 벤2는 경쟁적이고 욕심이 많고 자격지심이 있고 속이 좁고 역시 시니컬하다. 스패로 아카데미에서 벤2의 자리는 넘버1,3,4,5,6,7- 그 누구보다도 불안정해 보인다. 시즌1의 루서, 디에고와 각각 유사한 데가 있는데도, 유독 벤2는 밉게 그려진다. ‘쫄딱 망하고’ ‘망가짐’으로써 루서와 디에고의 매력과 입체성은 오히려 살아났다. 그들은 비교당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들에겐 동일한 트라우마를 겪고 자란 콩가루 형제들이 있다. 벤2는 ‘빌런조차 못 되고’, 어울리려고 애쓰는 제스처마저 ‘안 예쁘게 어설픈’ 인물이다.(성질이 사나워서 차라리 다행이었다고 해야 할지…) 그는 시즌3에서 슬론을 비롯한 형제들을 모두 잃고, 자신이 아닌 벤6을 바라는 엄브렐러 아카데미 사이에 불청객마냥 끼워진다. 무엇을 위해? 아포칼립스를 위해.
시즌1과 2에서 아포칼립스의 원인은 빅터의 힘이었다. 시즌4에서는 벤과 제니퍼의 결합에서 비롯되는 파괴 에너지다. 역사는 하그리브스 시블링이 태어난 타임라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동학대를 일삼던 레지날드는 설명하지 않고 임무를 지시하는 행위를 반복했고, 그 결과 ‘대량 학살 무기’가 무엇이고 왜 위험한지 알지 못했던, 그날 미션에 빠지고 싶어했던 벤이 제니퍼를 밀폐공간에서 꺼내주게 된다. 두 사람은 레지날드에게 살해당하고, 나머지 형제들은 기억을 조작당했다…는 사연이다. 여기서 문제는 벤2가 쇼에서 차지하는 위치다. 그는 그때 제니퍼를 구하고 죽은 벤이 아니고, 빅토르를 구하고 사라진 벤도 아니다. 작품이 캐릭터의 입을 통해 닳도록 읊던 “our Ben”이 아닌, 애정결핍 밉상일 따름인 것이다.
시즌1과 2에서 시청자는 빅터의 과거와 그의 트라우마를 알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통제불가한 힘이 아포칼립스의 발단이 되는 과정에서 ‘네 탓’이라고 손가락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시즌4에서 벤2를 변호하는 이는 벤2 자신 뿐이다. 그가 ‘살면서 처음으로 행복하다’고 해도 그건 이쪽에 와닿지 않는 그의 언어다.(마음이 조금이라도 흔들렸다면 그건 저스틴 민 덕이다.) 작품은 제니퍼가 대체 어디서 왔으며 그 속성을 어쩌다 갖게 된 것인지 설명하려는 노력 역시도 하지 않는다. 멸망의 원인이 꼭 -서사가 결여된- 제니퍼와 벤의 ‘존재’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레지날드의 방식은 통제하고 숨기고 가두며 자신의 죽음마저 수단으로 삼는 것, 그의 태도는 ‘결국엔 내가 옳다’다. 헌데 작품도 자꾸, ‘결국 그가 옳다’고 말하려는 것만 같다. 대놓고 싫어하라는 듯 모습마저 변형시키며, 쇼는 그렇게 벤을(벤6 마저도) 내던진다. 시즌2를 연상시키려는 듯 빅터를 밀어 구하고 총을 맞는 장면을 끼워 넣지만… 비극적 ‘느낌’을 위해 이용하는 기분이 들 뿐이다. 작품이 사랑할 의지가 없는 인물을, 어떻게 시청자가 사랑할 수 있겠는가.
라스트 시즌은 캐릭터를 ‘레지날드식’으로 다룬다. 작품은 벤2만이 아니라 다른 캐릭터들도 내던져 버린다. 클라우스와 앨리슨의 관계를 일방적 베이비시팅으로 만들고, 파이브의 기준을 억지로 헤집어 놓는다. 스토리가 캐릭터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을 때 나는 화가 난다. 배우들은 최선을 다하는데, 이미 캐릭터를 벗어난 각본이라 연기로 설득 가능한 수준이 아니다. 다른 타임라인에서 온 인간들인가? 클라우스가 앨리슨에게 독설을 퍼붓는 장면, 파이브가 라일라를 붙잡는 장면: 심리적 긴장감이 고조돼야 하는 씬들인데 머릿속에 물음표만 잔뜩 떠올랐다. 그와중 배우들의 연기는 흠잡을 데가 없어 더 이상했다. 파이브와 라일라의 로맨스를 보니… 부정적인 의미로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더라. 라일라를 사이에 두고 디에고와 기싸움하는 파이브라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라일라와 파이브는 클라우스와 더불어 내가 가장 좋아해 왔던 캐릭터들인데, 최악의 커플링으로 최애캐들을 망가뜨리다니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그래 뭐, 클라우스를 보는 자잘한 재미는 있었고, 파이브로 가득한 레스토랑 씬도 좀 좋았다. 근데 그게 다인.)
이러더니… ‘이들의 존재 자체가 문제’라며 ‘클렌즈’를 긍정하는 플롯 트위스트를 넣는다. 아, 지금까지의 전개엔 얘네들한테 정을 떼라는 의도가 숨겨져 있었나? 다른 시청자는 어떠했나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이들이 영웅이 되길 바란 적이 없었다. 그냥 뒤죽박죽 살기를 바랐다. 시즌1과 2에서 아카데미 맴버들은 뭉치지 않았다. 정면을 보고 달리는 대신 매 초 옆으로 샜다. ‘뭉치지 않는’ 것, 곁가지를 치는 것, 따로 잘 놀다 망하는 것, 그러다 가끔 느슨하게 뭉치기도 하는 것 - 캐릭터와 전개가 설정 클리셰를 설득력 있게 배반하는 것이야말로 엄브렐러 아카데미의 매력이고 정체성이었다. 시즌4는 클리셰가 아니라 이제껏 쌓아온 쇼와 캐릭터의 오리지널리티를 배반한다. 캐릭터를 자유롭게 풀어놓지 않고 갈등과 해소를 위해 억지로 여기저기 질질 끌어다 놓는다. (겨우 6화인데!)이야기를 늘리기 위해 인물들을 쥐고 흔들더니 별안간 희생하는(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벤은 그 클라이맥스 씬에도 없었다.) 수퍼히어로로 만든다. 목적을 위해 인간을 수단화하는 레지날드 하그리브스와도 같다. 그런데… 그 목적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겠다. 아, 맥빠지는 파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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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다크>를 보고, “아담과 이브가 살아남아서 ‘자신들의’ 세상을 되살리는 전개가 아니라 자신과 자신들의 세상을 기꺼이 포기하고 사라짐으로써 하나의 세상을 구하는 결말이 정말 좋았다”고 메모했다. 엄브렐러 아카데미 크리에이터들이 혹시 여기서 영감을 받은 걸까? 아닐 수도 있지만... 설마 처음부터 이런 결말을 바라보고 달렸나 싶어 코믹스 플롯을 찾아봤는데, 시즌4 핵심 콘셉트가 원작자들에게서 비롯되기는 했으나 해당 내용을 담은 화는 아예 없고, 코믹스가 끝나려면 아직 멀었단다.[Mirror] 같은 시청자이더라도 각 쇼에서 바라는 바가 다르고- 아니 그보다 이야기와 시리즈, 캐릭터의 일관성과 정체성이라는 게… 아 제대로 된 비판을 할 에너지가 없다. 비하인드 컷 관람이 가장 보람찼다. 안녕 엄브렐러 아카데미, 즐겁다 말았고, 배우들만 다시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