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리플리와 프랭크 피어슨, 그리고 트랜스포머.
패트리샤 하이스미스, 리플리 5부작 (2023 을유문화사 번역본)
<리플리를 따라온 소년> 위주
Feat. Lou Reed, <Transformer>
* 위 작품의 내용 포함
영화에 대한 감상과는 별개로(별개인가?), 곡 ‘Perfect Day’가 빔 벤더스의 <퍼펙트 데이즈>에 삽입된 맥락은 내게 그다지 감흥을 주지 않았다. 영화를 보기 전날과 다음날, 나는 다른 픽션 속에서 루 리드를 접했다. <리플리를 따라온 소년>에서 패트리샤 하이스미스는, 퍼펙트 데이가 수록된 루 리드의 앨범 <Transformer>를 여러 번 언급한다. 시리즈의 다른 권과 달리 책의 첫 장에 “모니크 뷔페에게 바칩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각주는 뷔페를 하이스미스의 마지막 연인이자 문학적 뮤즈로 알려진 이,라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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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루 리드가 언급되는 씬은 프랑스에 있는 톰의 집 ‘벨 옹브르’에서 엘로이즈가 음악을 틀었을 때다.(p.75) “엘로이즈가 갖고 있는”, “톰이 듣고 싶었던”, 그리고 톰을 따라온 소년 프랭크가 좋아하는 음반이다. 각 권마다 톰이 유독 마음을 쓰고 결국 ‘잃는’ 인물이 하나씩 등장하는데: 디키 그린리프(톰이 죽인다), 버나드 터프츠(톰이 무의식중에 자살을 유도한다), 조너선 트레바니(톰이 ‘일’에 끌어들인 결과로 죽는다)에 이어 이번에는 프랭크 피어슨이다. 그는 백만장자의 차남, 아버지를 우발적으로 절벽에서 밀어 살해하고 전부터 (그 미스터리함, 도덕적 두루뭉술함에) 관심을 두었던 톰 리플리를 찾아 프랑스로 도망쳐 온다. 그의 정체와 저지른 일을 알게 된 후 톰은 프랭크에게 섬세한 지지와 보살핌을 건넨다. ‘자백하지 말라’고 설득하는 톰에게서 합리화와 성찰이 동시에 읽히나, 그게 다는 아니다. 일종의 ‘멘토’ 겸 자상한 보호자 역할을 수행하며 안팎으로 선을 철저히 지킴에도, 서사가 주로 톰의 입장에서 전개되므로 미묘한 순간들을 감지할 수 있다. 꼭 프랭크에게 성적으로 끌린다는 게 아니라(끌렸기에 더 분명한 선을 그었을 수도 있지만)- 그와의 동행을 통해 스스로의 성적 유동성/유연성fluidity을 탐구해본다고 할까. 프랭크의 눈빛에서 호감을 알아채거나, 그가 자신의 멋진 모습에 감명 받았기를 내심 바라거나, 베를린 게이바에 ‘같이’ 들어가며 괜히 뿌듯해한다거나, 프랭크가 선물한 자주색 나이트가운을 입어보며 고마워하는… 장면들이 있다.
엘로이즈가 ‘당신을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때를 톰이 회상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가 (동거인 말고 연인으로서 좋아한다는) 고백을 돌려주었다는 내용은 없다. 다른 글에도 적었지만 두 사람은 로맨틱한 커플보다는 인생 파트너에 가까워 보인다. 톰은 엘로이즈를 만나면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신나게 늘어놓곤 하지만, ‘어디서 선을 그어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다.(그리고 엘로이즈는 대부분 눈치챈다). 반면 프랭크 곁에서는 선을 항상 의식하지만, 비밀을 털어놓으려다 멈칫 하고 놀라는 등 저도 예상치 못한 태도를 보이며 무방비해진다. 프랭크가 자신이 그은 선을 넘어와주길 바라는 걸까. 이건 톰 자신도 모를 테다. (만약 그것이 맞고 스스로 깨닫는다면, 톰은 자기혐오를 느낄 것이다. 프랭크가 남자여서가 아니라 열 여섯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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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독일 베를린에서 톰이 납치된 프랭크를 구하기 위한 작전의 일환으로 ‘여장’을 하는 와중이다.(번역된 대로 ‘여장’이라고 옮긴다) 리브스의 친구인 에릭의 친구인 맥스,가 여장을 즐겨 하는데, 톰은 그의 옷을 빌려 입고 납치범을 미행하겠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아니 하이스미스는 참 이런 생각을 어떻게 했는지. 할리우드 시네마의 문제적 전통(?) 중 하나가 ‘여장남자’ 싸이코패스 아니었던가.(이에 관해서는 다큐멘터리 <Disclosure: Trans Lives on Screen>을 참고하면 좋다) 헌데 톰 리플리는 살인을 비롯한 범죄를 저지르는 자이나, ‘여장’을 한 상태론 납치된 친구를 구한다 이 말이다. 이 전 과정과 수행에 대한 묘사가 상당히 자연스럽고 바람직하다. ‘여장’은 ‘비밀스럽고 변태적인’ 욕망의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공개적인 놀이, 공연, 실험으로 그려진다. 맥스가 옷을 골라주고, 메이크업을 해주고, 완성된 모습에 톰을 비롯한 모두가 반하는 등의 과정이 섬세하게 묘사돼서 꽤 재밌다. 맥스는 화장을 해주는 동안 톰의 가벼운 부탁으로 ‘Make Up’을 흥얼거린다.(p.192) 톰이 ‘여성스럽게’ 행동하려고 인식하며 게이바에 들어가자 다수 남자들이 그에게 주목하고… 이런 장면들. 톰은 롱 드레스, 가발, 핸드백, 하이힐 차림을 한 채 영웅적으로 프랭크를 구출한다. (톰 리플리다운 드랙 퍼포먼스라고 하면 큰일나려나. 역시 좀 아니지.) 이후 더는 ‘여성스러움’을 연기하지 않으며 택시를 타고 귀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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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은 프랭크의 부탁으로 다시 그를 데리고 제 집으로 돌아온다. 엘로이즈는 프랭크에게 “좋아하는 음반 틀어줄게”라고 말하는데, 이번에는 제목 <Transformer>와 함께 “뒷면 첫 곡”인 메이크업과 다음 곡 ‘Satellite of Love’ 가사가 인용된다.(p.256) 책에 인용된 부분은 아니나 메이크업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Now we’re comin’ out / Out of our closets / Out on the street / Yeah we’re comin’ out” 그 전 곡과 그 다음 곡, 다다음 곡… 앨범 전체에 섹슈얼 플루이디티가 자랑스럽게 흘러 넘친다. 루 리드와 트랜스포머의 반복되는 레퍼런스는 아마도 의도적이고, 톰이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자서전 <Christopher and His Kind>를 읽고 있었다는 언급 또한 그렇다.(굉장한 덕질 모먼트) 톰이 ‘무엇’이든 그가 남자에게 끌린다는 암시는 앞 권에도 나온 바 있는데, 규정하지 않고 모호하게 던져두는 방식이 예술적이다. “하이스미스는 톰의 퀴어함을 간헐적으로 언급하다 4권에서 본격적으로 탐구하는데, 여전히 명확한 정의는 피한다. 뭔가 잡힐 듯 아무것도 잡히지 않으나, 그 모호함과 물음표는 자체로 흥미롭다”고 앞 글에 적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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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포머는 미국에서 마지막으로 등장한다. 톰은 흔들리는 프랭크를 미국으로 ‘데려다 주’며, 피어슨 가 저택에 방문해 그의 가족들을 만난다. 프랑스로 돌아가는 날, 아버지를 민 바로 그 절벽에서 뛰어내리려는 프랭크를 간신히 붙잡고는(톰은 프랭크가 자신의 ‘안돼!’라는 목소리를 듣고 반사신경으로 멈춘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붙들어서 뛰어내리지 못한 것인지 자문한다.) ‘위기는 넘겼다’고 여기며 안심한다. 한 시간 후, 프랭크가 사라진다. 그가 없는 방, 전축에는 트랜스포머가 얹혀‘만’ 있다.(p.303) 톰은 절벽을 향해 달린다. 거기 아무도 없는 것을 인지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만, 내려다보니 프랭크의 시체가 있다. 그의 ‘유언’은 “테리사, 영원히 사랑해”라는 메모였다.
이내 진정한 톰은 프랭크의 방에서 ‘소년의 파란만장한 유럽 여행을 따라다닌 곰인형’을 챙긴 후,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고 저택을 떠난다. 뉴욕 거리를 헤매며 십대 소년들의 몸을 사려고 기웃거리는 늙은 남자들에게 혐오감을 느끼고, 술취한 젊은 선원을 내버려두는 동료들에게 화를 내기도 한다. 무엇을 보상하거나 보상 받으려는 걸까. 톰이 누군가를 ‘끝내 죽이고 마는’ 전개에서 누군가를 ‘구하려고’ 했으나 구하지 못하는 전개로의 변주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고 보면 전지적 작가 시점인데, 3권에서 톰과 조너선의 내면이 모두 드러났던 것과 달리 프랭크의 심리는 톰의 짐작으로만 설명되었다. 톰은 스스로가 생각했던 만큼 프랭크에게 큰 의미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파리에서 베를린, 함부르크, 다시 파리, 뉴욕까지 동행했지만 서로를 ‘구하지’ 못한 두 사람, 공중에 흩어진 관계의 허무함.
<리플리를 따라온 소년>의 오프닝은 톰의 집을 좀먹는 ‘목수개미와의 전쟁’이었다. 엔딩, 톰은 여전히 들리는 목수개미 소리에 “이러다가 미치는 거 아닐까?”라며 웃어버린다. 아마도 은유일 것이다, 내면의 균열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는. 프랭크에게 있어 헤어진 연인 테리사의 기억이었던 <트랜스포머>는, 결론적으로 톰에게는 (죽은) 프랭크를 떠올리게 하는 앨범이 되었다.
https://youtu.be/0aIsSWB2xRA?si=PDj6H32lv7-LAlaq
(다음 글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