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않인 Aug 12. 2024

톰 리플리에 관한 메모 (2)

톰 리플리와 톰 리플리



패트리샤 하이스미스, 리플리 5부작 (2023 을유문화사 번역본)

<재능 있는 리플리> 위주.

넷플릭스 시리즈 <리플리>


* 위 작품의 내용, 책 인용 포함



하이스미스의 리플리 시리즈 전개 방식은 사건의 연속보다는 심리 변화의 연속에 가깝다. 전지적 작가 시점 형식으로 주로 톰의 입장에서 서술되며, 그의 불안과 망상, 충동이 구체적이고 자잘하게 묘사된다. 넷플릭스 시리즈 <리플리>는 첫 권 <재능있는 리플리>를 바탕으로 한다. 책의 문장들에 흐르는 공기가 상당히 그대로 영상화 된 듯하다. ‘내용을 알고 봐도 재미있다’ 보다는, ‘원작을 읽고 봐서 더 재미있다(황홀하다)’. 톰에게 동화되는 살짝 두렵고 불편하고 고요하게-짜릿한 기분, 스크린을 보는 동안에도 이를 거의 흡사하게 느낄 수 있다. 그 구체적인 표현법이 대개 비언어적이라는 점이 몹시 감동적이다.(그렇다, 실로 감동적이다) 아래는 그 감동의 일라보레이션이다.


하이스미스가 구성해 놓은 바를 정확하게 +알파를 절묘하게 추가해 연출한 장면들에 감탄했다. 대표적인 것이 톰이 디키의 옷을 입고 이별 시뮬레이션을 하는 시퀀스다. “마지 잘 들어 널 사랑하지 않아.”, “톰과 내 사이를 방해하는 건 너야.”(p.69) 따위의 대사는 책에 이미 있던 것이다. 디키를 향한 톰의 집착은 ‘그처럼 되고 싶다’와 ‘그와 함께하고 싶다(그가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다)’, ‘그를 없애고 싶다’ 사이 어딘가에 있거나 그 전부가 뒤엉킨 성질을 띠고 있다. 이어 적으면, 자신을 향한 디키의 (퀴어)혐오에 톰이 반응하는 장면도 섬세하게 포착됐다. ‘옷 입어보기 사건’ 직후 디키가 톰에게 ‘나는 퀴어가 아니’라고 말하며 혐오를 내비치는 씬, 그리고 두 사람의 여행 도중 해변의 남자들에게 환호하는 톰에게 디키가 “저 사람들은 페어리야”라며 비꼬는 씬(p.86), 둘 다 원작에 있다. 톰의 반응에는 ‘디키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와 ‘“페어리”면 뭐 어때서’, ‘너는 얼마나 잘났는데’ 등이 보이는데, 그 모양은 특수하게 뒤틀려 있다.


원작, ‘톰이 디키를 죽이고 싶다는 마음이 든 적은 처음이 아니’지만, 디키를 죽이기를 결심하고 실행하는 것은 바로 (위의) 그날이다. “애증과 조바심과 절망이 뒤섞여 미칠 것 같은 감정”(p.87)이라고 하이스미스는 적었다. 화면 속 톰에게는 그 훨씬 전부터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는 뉘앙스가 종종 비치는데, 이 점이 각색보다는 하나의 해석으로 와닿았다. 원작에서 세세하게 서술되는 톰의 내면이 어떤 면에서는 ‘일부’이기 때문이다. 인지하면서도 애써 부정하는 바, 무의식중에 구상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바… 는 독자로부터도 숨겨져 있다(근데 별로 꽁꽁은 아닌). [2권 스포일러] 한 예로 2권에서 톰은 저도 모르게 버나드 터프츠의 자살을 유도하는데, 일이 벌어진 후에야 자각한다.  


원작도 시리즈도 톰의 성 지향성을 명시하지 않으나 ‘퀴어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책에서 톰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나는 남자가 좋은지 여자가 좋은지 마음을 못 정하겠어요. 그래서 둘 다 포기할까 해요”(p.71) ‘미움을 사고 싶지 않아서’ 했던 일들을 회상하는 맥락이었지만 작가는 “사실 그 말엔 진실이 제법 많이 담겨 있었다.”고 잇는다. ‘그래서 톰이 무엇이냐’고 묻는 건 별 의미가 없다. 하이스미스는 톰의 퀴어함을 간헐적으로 언급하다 4권에서 본격적으로 탐구하는데, 여전히 명확한 정의는 피한다. 뭔가 잡힐 듯 아무것도 잡히지 않으나, 그 모호함과 물음표는 자체로 흥미롭다. 앞서 만들어진 영화들을 보진 않았으나, 원작의 뉘앙스를 스티븐 자일리언과 앤드류 스캇이 거의 흡사하게 살려냈음은 분명하다.


 방식이  ‘문자 그대로의 재현 아니다. 이를 테면 원작의 톰은 탐정에게 ‘디키가 내게 사랑을 고백했다 말하지는 않는다. 허나 각색에서는 빠진 엔딩을 살펴보자. 톰은 ‘디키가 자살하며 신탁을 톰에게 남겼다 서사를 꾸며내고, 그린리프 부부는 이를 납득한다.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스토리에 비치는 톰의 욕망을(‘디키를 원한다보다는 ‘디키가 나를 원했으면 좋겠다’- 비틀린 표현이라고 느낀다) 함축적으로 드러낸 씬이 ‘디키의 고백에 관한 거짓말이라고 해석해본다.


적었듯 다른 리플리 각색을 안 봤지만, 앤드류 스캇 하나로 족하다. 나는 지금부터 앤드류 스캇이 아닌 톰 리플리를 거부한다. 원작에서 톰이 디키를 찾아 이탈리아로 갈 무렵의 나이는 이십대 중반인데, 스캇의 리플리는 삽십대로 설정된 듯하다(지나가듯 언급된다). 수정한 까닭이 캐스팅이라면 아주 잘 한 선택. 관람 도중 무릎을 탁 치거나 숨을 헉 들이쉬는 행위를 자주 했는데, 하이스미스가 늘어놓은 톰의 심리가 귀에 들리는 듯해서였다. 1화 초반부 자잘한 사기를 치는 사무적이고 피로한 제스처들이라니. 디키를 향한 상대적 박탈감과 끌림, 후에 불어나는 애증, 마지에 대한 경멸과 숨기지만 결국 드러나고 마는 질투(이의 한 발현은 ‘마지가 우리 사일 질투한다’는 상상이다), 카를로나 리브스를 만났을 때 번지는 편안함. 미묘하게 어긋나는 순간들을 포착하는 예리한 눈빛. 프레디 마일스를 죽인 후 본인이 한 행동에 본인이 피곤해하는 그 태도, 디키 행세를 하며 전화를 받거나 편지를 쓸 때 예리하게 달라지는 말투… ‘디키 그린리프’인 채로 형사의 심문을 받는 동안, ‘톰’으로 돌아오는 찰나가 보이는 것도 재미있는데, 이를 테면 ‘톰이 프레디를 싫어했다’고 말하며 굳이굳이 늘여 설명하는 부분이다.  


페이버릿 씬은 고를 수 없다. 디키 옷을 입고 흉내내다 들키는 세기의 씬, 이탈리아어로 ‘디키와 여행을 갈 거예요’라고 하는 장면(책에는 아마도 없었던 듯하다), 미끄러운 이끼가 낀 강둑에서 마지의 신발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씬도 상당했다. 마지가 빠지기를 바라는 심리는 원작에도 서술돼 있는데, 영상예술의 장점을 탁월하게 살려 보여줬다. 절제된 연출+연기의 환상적인 조합에 감탄한 장면이 정말 여럿이었다. 아, 마지의 에세이를 첨삭하는 코미디 섞인 시퀀스도 있다.


이 작품이 리미티드라는 것이 너무도 아쉬워서 관람 중에 속편 제작의 희망을 조금씩 키워 봤는데, 엔딩까지 보고는 리미티드로 못박았음을, 혹시나 시즌2가 제작되더라도 원작의 방향을 따르지는 않을 것임을(헌데 그렇게 한다면 의미가 없으니 만들지 않겠지) 깨닫고 말았다. 과유불급이라 이건가. 리브스 마이넛의 등장을 앞당겨(아니, 존 말코비치라니. 예상치 못했는데 어울린다.) 톰이 신분을 바꿔 영국으로 숨어버리는 전개를 택하고, 카라바조와 교차되는 연출로 깔끔하게 끝냈다. RIPLEY 철자가 이탈리아 알파벳으로 천천히 흐르는 라스트 씬까지, 완벽한 마무리였다.  



(다음 글과 느슨하게 연결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