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사소한 것들>(2024)
<이처럼 사소한 것들(Small Things Like These)>(2024, 팀 밀란츠)
*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엔딩 후 화면에는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착취당한 여성들과 빼앗긴 아이들에게 영화를 바친다’는 내용의 문구가 떠오른다. 그럼에도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개인의 시선을 빌려 실제 사건을 고발하는 이야기로는 읽히지 않았다. 영화의 관심은 “사소한 것들”을 무시하지 못한 빌리의 ‘사소한 행동’ 자체보다는 그의 동기와 심리에 있어 보였다.
겨울이 찾아온 마을을 천천히 돌아본 이후부터, 카메라는 오로지 빌리에게만 집중한다. 임금을 지불하거나 노동자들을 감독하거나 석탄을 배달하는 빌리, 펍에서 줄을 서서 식사를 기다리는 빌리. 펍 주인과 노동자들이 농담을 주고받을 때도 카메라는 말하는 이들이 아닌 조용히 미소 짓는 빌리를 비춘다. 영화가 담는 모든 장면은 그의 시야 안에서 이루어진다. 카메라는 타인을 관찰하는 빌리의 눈이 되거나 빌리를 관찰한다. 그는 도로변에서 땔감을 모으는 소년을 보고, 차를 세워 안부를 묻고 동전을 건넨다. 부모에게 이끌려 강제로 수녀원에 들어가는 여성을 먼 발치에서 목격하고, 가만히 지켜본다. 후자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아마 이 시점의 빌리는 믿고 있다.
빌리의 현재는 주로 두 가지 빛을 띤다. 푸른 계열의 차가운 햇빛/형광등의 빛, 그리고 붉은 계열의 따뜻한 전구/모닥불의 빛. 처음에는 노동하는 시공간과 휴식하는 시공간의 구분으로 보이기도 했다. 일과를 마치고 귀가한 빌리는 가장 먼저 손을 꼼꼼히 씻는다. ‘차가운 곳’에서 ‘따뜻한 곳’으로 넘어오기 위해 치르는 의식 같아 보이는 행위다. 그렇게 바깥에서 묻은 먼지와 상념을 긁어낸 후 식탁에 앉아서도, 빌리는 홀로 다른 곳에 있는 듯 멍하다(space out). 한밤중에 창밖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기고, 혼자 있을 때면 자주 숨을 가쁘게 몰아쉰다. 빌리가 겪는 증상은 과거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다투는 연인, 길을 걷는 여자들에게 추근대는 남자들, 그런 것들이 그의 시선을 잡아끈다. 거기서 빌리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어머니의 시절을 본다. ‘탄광에서 일하는 남자들이 네게 접근하지 않느냐’고 큰딸에게 묻는 순간조차, 그는 딸을 걱정하기보단 어머니를 떠올리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한 축을 차지하는 과거 플롯은 아마도 빌리가 회상하기 때문에 등장하는데, 두드러지는 효과가 입혀져 있지는 않다. 과거의 장면들은 밝은 햇빛을 받아 자연스럽고 다채로운 색을 띤다. 빌리가 단순히 추억을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기억을 반복적으로 ‘방문하고’ 있음을 뜻하는 장치일 수도 있다.
꽤 분명히 둘로 나뉘는 ‘현재’의 화면들은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두 종류의 빛은 빌리가 인보이스를 전하기 위해 들어간 수녀원 내부에서 기이하게 혼재한다. 영적인 공간을 채운 붉은 조명과 노동의 공간을 채운 창백한 형광등. 청소하던 한 여성이 빛의 경계를 넘어와 빌리를 붙들고 애원하는데, 이 조우는 빌리의 증상을 가속화한다. 그 여성들, 그리고 낮에도 밤에도 길거리를 떠도는 디어머드가 머무는 실내는 안식처가 아니다. 이들이 차가운 세계에 던져져 있는 존재들임을(빌리가 인식한다고) 영화는 암시한다. 빌리가 석탄 창고에 갇힌 세라를 발견한 새벽에도, 수녀원은 여전히(언제나) 두 종류의 색으로 나뉘어 있다. 원장 메리 수녀의 사무실은 모닥불이, 여성들이 노동하는 작업실은 형광등이 밝힌다. 그 영역들은 빌리의 일터나 집, 도로, 펍처럼 개방되고 연결되어 있지 않다. 고립된 채 은밀하게 분리되어 있다. 꼭 마을 다른 장소들의 개방성이 그곳을 망각하기 위한 위장인 듯 보이기도 한다. 그 내부로 초대된 빌리는 공범이 될 것을 은유적으로 강요당한다. 빌리 앞에서 원장 수녀는 세라를 모닥불의 영역으로 부르지만, 그것은 노골적인 연극을 위해서다. 엉엉 울며 거짓말을 마친 세라는 다시 차가운 주방으로 보내진다. 이번에 빌리는 자신이 경계를 넘어 세라에게 다가가 이름을 묻는데, 그는 앞서 애원하던 여성처럼 절박해 보인다.
네드를 떠올리며 이발소에 들어간 빌리는 이발을 하기 직전 눈물을 흘리며 그곳을 나온다. 그 길로 수녀원 석탄 창고로 향해, 쓰러져 있던 세라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다. 영화 초반 빌리는 차를 후진해 디어머드를 불러 세우는 대신, 차를 세우고 걸어가서 말을 걸었다. 그처럼 이 여정은 트럭을 통한 드라이브가 아니라 먼 길을 걷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무의식적 동일시나 일종의 수평성을 암시하는 연출로 보이기도 하는데- 디어머드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동전만 건넨 것과 달리, 이번에는 세라를 적극적으로 부축해 기꺼이 온 동네의 주목을 받으며 걷는다. 집에 도착한 빌리는 세라를 욕실 문 앞에 잠시 세워두고 손을 씻은 후, 석탄 범벅인 세라의 손을 잡고 따스한 세계로 이끈다. 이후 필연적으로 발생할 갈등을 생략한 채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표면적으로: 에일린은 ‘나와 우리 딸들은 그런 여자들이 아니니 상관 없다’고 여겼다. 빌리는 ‘내 어머니는 그런 여자였음’을 알고, ‘누구든 그런 여자일 수 있음’을 이해하는 듯했다. 부부는 단지 자신이 배워 온 대로 행동하는 것인가. 윌슨 부인-어머니 세라의 관계를 메리 수녀-세라 사이 것과 대조해 볼 수도 있겠지만, 전자는 사실 빌리의 기억일 따름이다. 그리고 기억은 빌리가 패닉을 겪는 주요 원인으로 보인다. 빌리의 동기는 부채감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영화가 준 단서가 모호하여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빌리는 한편으로 네드가 제 아버지였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의 행동을 윌슨 부인에게 받은 것을 세상에 갚으려는 제스처로 해석하기는 힘들다.
본질적으로: 에일린의 외면과 빌리의 외면하지 못함은, 그들 각자가 ‘살기 위한’ 방식일 가능성이 있다. 빌리의 동기는 정의감이나 동정심보다는 그의 증상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디어머드를 자신의 가능했던 과거로 보았듯, 그는 이름마저 같은 세라에게서 어머니를 겹쳐보았을 것이다. 잃을 것들을 감수하고 건네는 ‘호의’는 빌리에게 있어 생존일 수도 있다. 작은 친절들을 베풀며 그는 ‘숨을 쉬어 온’ 것일지도 모른다. 이 관점으로 살핀다면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빌리가 세라를 세탁소-수녀원으로부터 꺼냄/구함으로써, 어머니를 추모하고 스스로를 과거로부터 꺼내는/구하는 과정’이라고 적어 볼 수도 있겠다.
흥미롭고 의아하게도 빌리를 제외한 핵심 발언자는 전부 여성이다. 메리 수녀는 수녀원과 거기 딸린 세탁소, 학교까지 운영하며 종교적, 금전적, 정치적 권력을 모두 지니고 있는 존재다. 신부 없는 교회에서 설교를 하며 빌리에게 굳이 ‘이름을 이어받을 아들이 없어 아쉽지 않느냐’고 묻는 그는 마을의 가부장, 명예남성으로 보인다. 메리 수녀의 측근들, 그리고 빌리를 걱정하며 수녀원을 방관하는 와이프 에일린과 펍 주인 등 비교적 나이든 여성들 / 세라를 비롯한 젊은 여성들 사이 거리를 영화는 벌려 놓는다. 여성들은 서로 연대하지 않고, 약한 여성을 착취하거나 착취의 수동적 공범이 된다. 빌리를 제외한 남성들은 편리하게도 디어머드의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처럼 부재하거나, 서사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고 지나간다. 이 관성을 거스르는 유일한 것은, 과거에 사로잡히고 심리적으로 고립된 한 남자의 패닉 뿐이다. 작품이 바라보는 곳은 오히려 희망의 반대편에 가깝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어떠한 제안도 아니고, ‘이랬더라면’ 하는 대리 후회나 사죄도 아니고… 다만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애도였다. 영화는 되돌릴 수 없는 사건을 허구적/사적으로 돌이키며, 어머니를 애도하는 빌리와 함께- 만 명에 달하는 여성들이 갇혀 보낸 세월을 애도하려던 것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