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보다는 글조각
* 각 작품의 장면과 전개 포함
<언데드 다루는 법(Håndtering av udøde)>(2024, 테아 비스텐달)
형식적으론 좀비 호러물인데, 장르에서 예상되는 타이트한 긴장감과 피튀기는 연출을 기대하고 가면 실망할 것이다. 화면에 맴도는 공기는 서늘하고 또 고요하며 애달프다. 영화는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슬픔을 묘사하며 천천히 그리고 담백하게 ‘언데드’를 등장시킨다. 이 좀비들은 무덤을 뚫고 나오지 않는다. 배회하거나 관을 톡톡 건드리는 정도로 소극적인 활동성을 보이다가, 아주 서서히 공격성을 드러낸다. 누군간 지루하다고 여길 수도 있겠으나, 자신만의 스타일을 유지하며 참을성 있게 나아가는 영화다. 대사 거의 없이 느린 리듬으로 보여주고 들려주는 편인데, 이 스타일이 맞는 관객이라면 깊은 몰입이 가능할 테다. 좀비물에 으레 있는 긴장감을 제하려는 듯하다가도 별안간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지만,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장면들에도 슬픔이 침범해 있다. 넘실대며 밀려오기보단 잔잔하게 찰랑이는 편이라 부담스럽지는 않다. 누군가는 언데드에게 뜯어먹히고, 누군가는 차라리 스스로 죽길 택하고, 누군가는 언데드를 놓아준다. ‘언젠가는 놓아주어야 함’을 말하는 작품으로 읽을 수도 있겠으나, 영화는 각각의 선택을 존중하며 묘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그 애도와 상실에 있는 두려움과 아름다움을 포착한다.
<다잉(Sterben)>(2024, 매티아스 글래스너)
- 엘렌, 베르나르트, 각자의 죽음
톰에게 도움을 청하는 목소리로 등장했던 엘렌은 세 번째 장에서 화자로서 얼굴을 보인다. 그는 ‘다잉’을 망각케 하거나 ‘다잉’을 촉진하는 알코올에 중독돼 있다. 술을 사기 위해 일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치위생사인 그는 환자의 이를 치료하는 것보다 눈앞의 연인과 대화하는 것에 더 집중한다. 우선순위와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태도로 보이지만, 엘렌에게 있어서는 정말로 그것이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인 듯하다. 영화 역시 불안해하거나 아파하거나 무방비하게 잠들어 있는 환자들의 모습을 아슬아슬한 코미디로 연출할 뿐, 이후 다른 사건으로 이어질 실마리를 남기지 않는다. 여기서 ‘다잉’은 아마도 엘렌이 매일을 보내는 방식이다. “living=dying”이라는 도식으로 이해하기보단, 언젠가부터 엘렌이 ‘죽어감’의 범위를 자신의 생 전체로 확장시켜 인식하고 있다고 하는 편이 어울릴 듯하다. 그는 ‘세상이 하라는 그 반대로 살며’ 스스로 “반물질/안티 메테리알”이 되고자 한다. 그런 그에게 “다잉”을 연주하는 무대는 구역질 나는 무언가일지도 모른다. 제바스티안의 “서프라이즈 선물”로 톰의 첫 연주회를 관람하게 된 엘렌은 알러지 반응을 보이듯 끊임없이 기침하다 결국 먹은 것을 게워낸다. 당시 베르나르트는 분노하고 패닉하여 엘렌을 번쩍 들고 그곳을 나가려 했는데, 어쩌면 이 일이 그가 작품을 다시 쓰고 죽음을 재고할 계기가 되었던 듯도 하다.
네 번째 장의 제목 ‘Thin line’은 톰이 미도에게 설명하는 베르나르트의 개념이다. 예술가의 창작물이 본래의 의미를 지닌 채 대중에게 가닿기 위한 형태를 취하는 경계선. 2장에서 그의 연주곡 “다잉”에 ‘희망’이 읽히지 않는다며 의문을 제기하던 단원에게 베르나르트는, ‘이 곡에는 희망이 없고, 있다면 여러분과 내가 이것을 연주한다는 사실, 그 연주가 타인에게 전달된다는 바로 그것에만 있다’고 답했다. “다잉”을 연주하는 행위는 죽어가고자 하는 욕구를 반영하는 것이거나 살아가고자 하는 욕구를 잊는 것이어야 한다고 베르나르트는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무 젊은” 단원들의 연주는 템포를 늦추어도 여전히 활기차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베르나르트는 죽음을 택한다. 그는 톰을 불러 ‘날 죽게 내버려두고, 미도가 발견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고민하던 톰은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다. 리프는 톰을 “냉혹하다”고 말했으나 톰은 오히려 냉혹해지지 않기 위해 베르나르트의 부탁을 들어준 것일 수도 있다. 베르나르트와 엘렌의 상태를 치료가 필요한 우울증이라고 진단하는 것은 오히려 그들 자신의 목소리를 피하는 행위가 아니냐고 영화는 묻는 듯도 했다.
베르나르트의 죽음은 오히려 예술가로서 불멸이 되고자 하는 욕망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그는 미도와 헤어지는 대신 미도의 연인인 채로 생을 마감하며 흔적을 남긴다. 유서처럼 건넨 “다잉” 최종본의 전면에는 미도의 첼로 연주 솔로가 배치돼 있다. 영화가 게르트의 죽음과 베르나르트의 죽음을 비교하며 후자에 힘을 싣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그것이 각자의 ‘다잉’ 방식임을 존중하려는 듯도 했다. 베르나르트는 자의로/일시적으로 목숨을 끊는 죽음을 택했고, 사람들로 둘러싸인 무덤에 누워 그 자신이 공연에서 빼고 싶어했던 합창으로 기려지기까지 한다. 치매에 걸린 채 요양원에서 홀로 맞이한 게르트의 죽음은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자연스럽게 잊히고 흩뿌려지는- 그 자신이 선택한 수목장과 일치하는 죽음을 추구한 것이 아닐까. 의존하고 잊히고 스스로를 잊어가며 서서히 끝을 맞이하는 죽음. 자신을 돌볼 사람을 고용하고 장례식 비용을 마련해 놓고는 아들에게 알리는 리지의 방식이 또 다르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