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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에 / 옛날 옛적에

<알레고리>(2024), <더 폴>(2006)

by 않인


*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알레고리(Allégorie Citadine)>(2024, 알리체 로르바케르 & JR)

'Chiroptera'(2023, 토마스 방갈테르 & 데미안 잘렛 & JR)


‘내가 아닌 것’, ‘나에 관한 것’


작년, 서울까지 날아와 준 ‘JR 크로니클스’ 전시를 관람하며, ‘한데로 모아주니 정말 편리하고 감사하다. 그러나 무대가 되는 지역, 머무르던 사람들이 이동하면서 달라지기도 하는 그 장소성까지가 JR의 작품인데, 그것들을 고정되고 규격화된 ’뮤지엄‘에 전시한다는 것이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이래놓고 신나서 봤다) 위화감의 또다른 원인은 JR이 그의 작품을 ‘내 것이 아니라 당신들의 것’으로 여긴다는 점에 있었다. 무슨 말이냐면: JR은 장소에 예술가의 메시지를 심는 대신, 장소의 메시지를 고유한 예술로 만든다. 누군가-인간이 아닐 수도 있다-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 그곳의 언어를 시각화한 다음, 자신은 거기서 빠져나오곤 한다. 늘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익명의 관찰자/번역가를 자처하는 예술가. 그의 작업은 대개 ‘It’s not about me’를 전제로 한다.


알리체 로르바케르와 JR이 공동 작업한 극영화로 레오스 까락스가 출연하는 <알레고리>, 그리고 레오스 까락스의 콜라주 영화 <잇츠 낫 미>를 붙여 상영하고 있었다. <잇츠 낫 미>는 까락스가 침대에 엎드려 다잉메시지를 쓰듯 토해낸 메모들에 전작 클립들을 포함한 이미지들을 쏟아붓고 적절(그것이 가능하다면)히 배치한 비디오 같아 보인다. ‘이건 내가 아니‘라는 서술의 반복은 ’이건 전부 나에 관한 것‘임을 뒷받침한다. 자기 연민과 비판, 시대의 단상이 담겨 있는 그의 작품들은, 결국 모두 ‘It’s ABOUT me’인 건가. 완전한 이해는 어려울 터이다. 사실 까락스에게 특별한 애정이 없는 나의 관심은, 처음부터 로르바케르와 JR의 예상치 못했던 만큼 기대되는 콜라보에 기울어 있었다.


알리체 로르바케르는 판타지를 매개로 역사와 동시대를 바라보고,(그에 대한 탐구는 아직 매우 부족하다) JR은 세상의 일부를 이야기로 만든다는 면에서 잘 통했을 수 있겠다는 짐작도 들었다. 물론 평범한 관객1인 나는 그대들 머릿속에 뭐가 있는지 전혀 모른다. <알레고리>는 두 예술가가 까락스의 작품 세계와 예술가로서의 태도를 비유하려는 시도인가,라는 생각이 얼핏 들기는 했다. JR이 참여하고 까락스가 주연한 극영화라면 “It’s about you”가 되는 것일까,라는 물음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 <잇츠 낫 미>와 묶는다면 아주 틀린 관점은 아닐 것이나, 이 ‘도시 우화’를 그러한 틀에 가두어 읽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여기의 도시 우화


강렬한 배경음악이 차가운 화면을 덮는다. 카메라는 ‘갑자기 열이 나서 엄마가 오디션에 늦게 만든 어린이 제이’를 클로즈업하며 그의 시선으로 도시의 소음을 담는다. 제이는 걸음이 느리고 키가 작은 거리의 불청객이자, 엄마가 ‘애 볼 사람이 없어서’ 데려 온 극장의 불청객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자인 감독-레오스 까락스-의 진정한 관심을 받는 유일한 인간이기도 하다. 감독으로부터 ‘동굴 우화’의 비밀을 들은 제이는 엄마가 오디션에 집중하는 동안 극장을 빠져나온다. “벽보 금지” 사인에 간 균열을 발견하고 틈새를 벌려 찢어내자, 도시가 거대한 동굴이었음이 드러난다. 벽으로 들어가 이차원이 됨으로써 오히려 자유롭게 거리를 떠도는 제이, 허나 타인에게 닿지 못하는 진실은 묵음 처리된 메아리로 돌아올 따름이다. 각자의 손안에 세계가 있으므로 아무도 주위를 둘러보지 않는다. 마침내 엄마는 동굴 입구를 응시하는 제이를 찾아내고, 이어 행인들이 고개를 들고 점점 모여들며 제이의 깨달음은 공유된다. 그들은 도시 구석구석을 탐험하며 제이처럼 틈새를 찾아 뜯어낸다. JR의 특기인 장소 예술의 극적 영상화는 평면의 스크린을 관람하는 관객에게 고차원적 해방감을 선사한다.


극장에 도착하기 앞서 제이는 행인과 부딪히는 바람에 손에 들고 있던 선물을 떨어뜨렸고, 담겨 있던 흑백의 종잇조각들은 바닥에 흩어졌다. 마치 그것들이 활동성을 얻기라도 한 듯- 양면 흑백 망토를 걸친 댄서들이 설치물에 올라 벌이는 행위예술 시퀀스가, ‘동굴 입구’에 모인 사람들의 컷 사이사이 삽입됐다. 군중이 무대를 목격하는 듯한 편집이다. 이 퍼포먼스는 작년에 공개된 ‘Chiroptera’라는 작품이다. 다프트 펑크로 활동했던 Thomas Bangalter와 안무가 Damien Jalet, 그리고 JR이 함께 구성하고 완성한 프로젝트다. 리나 쿠드리의 캐릭터가 오디션을 본 발레극은 아마도 이것, 레오스 까락스의 배역은 가상의 감독이겠다. ‘Allegorie Citadine(도시 우화)’은 기획부터 ‘Chiroptera’의 아이디어를 공유하며 제작된 것으로 보이고, 각본 크레딧 란에도 방갈테르, 잘렛, JR의 이름이 적혀 있다.


154명의 댄서가 어두운 색 설치물에 올라 현대적 발레를 선보인다. 설치물-동굴은 고정돼 있지만, 댄서-박쥐들이 각자 어떻게 움직이는가, 더불어 어떤 흐름을 만드는가에 따라 공간이 요동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흑백의 의상은 춤의 일부가 되고, 움직임이 멎으면 문장 “DARKNESS HOLDS THE GRACE OF THE LIGHT”의 단어들이 차례로 드러난다. 빛은 어둠에 숨어 존재하므로, 누군가가 몸부림치며 찾아내야지만 보인다. 홀로의 그는 점일 뿐이지만, 갇힌 다른 이들과 나란히 몸부림친다면 빛의 메시지를 전하고 동굴을 흔들 수도 있다. 다시 <알레고리>, 작품은 도시였고 도시는 작품이 된다. 엔딩에서 제이는 제 4의 벽을 깨고 카메라로 다가와, 거기 비친 제 모습 / 혹은 관객의 시야를 가리고 있는 스크린을 걷어낸다. ‘나는 알레고리’라는 선언을 완성하며 관객의 시선을 ‘영화로부터 세상으로’ 돌리려는 것일까.


https://youtu.be/SCWRZ0wQHX8?si=kNkZhEhmBZ6qJsyM

'Chiroptera'




다음날, 이번엔 이야기 자체의 아름다움을 다루는 영화를 보았다. 오래 전 모니터 스크린으로 만났던 컬트 클래식이 극장에 걸린다는 소식은 반가웠다. 영화관은 아직 유효하다.



<더 폴(The Fall)>(2006, 타셈 싱)


‘픽션’은 말도 안 되게, ‘현실’은 그럴 듯하게. 실연 후 연기 중 큰 사고를 당한 로이. 그는 스스로를 파괴하는 행위에 우연히 만난 어린아이를 끌어들인다. 그러나 그 거짓말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고 그를 살게 한다. ‘자기연민에 휩싸인 남자를 관대하게 위로하는 고만고만한 영화’는 아니다. <더 폴>을 유일한 작품으로 만드는 하나의 비결은 그 공들인 터무니없음이다. 의도적으로 클리셰를 쏟아부은 로이의 이야기를 영화는 농담으로 사용한다. 낡은 전형을 답습한 모습의 비백인들과 “돈과 명예를 좇아 결혼하는 여자” 따위는 당연히 농담이다. 어떤 농담은 최선을 다해 장엄하고 진지하게 딜리버리 될 때 가장 효과적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상상을 스크린에 옮긴 것으로, 화려할 뿐만 아니라 세부사항에 몹시 신경을 기울인 연출은 그 황당함을 리얼하게 부각함으로써 성공적으로 관객의 몰입을 이끌어낸다. 몰입이 가능한 것은 그 허구가 (영화상) ‘진짜’라서다. 주변의 요소들을 노골적으로 반영한 캐릭터와 서사는, 별로 참신하지 않은 ‘실제’의 인물과 관계를 단순화/극화해 흥미롭게 재구성한다.


알렉산드리아를 다치게 만들고도 술과 죄책감, 여전한 자기연민에 절어 모두가 죽는 엔딩을 고집하는 로이, 이 못난 남자를 끝내 ‘구원’해주는 알렉산드리아-다소 ‘잔인’하다 싶은 클라이맥스에서 마저도 두 주인공은 몸 둘 바를 모르게 매력적이다. 작품의 진정한 묘미는 거대한 환상이 아닌 자잘한 일상에 있다. 각본보다는 배우에게 기댄 연출이 인물 간 자연스러운 역학을 구성하고, 카메라는 그것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천진하고 현명한 알렉산드리아 그대로였던 카틴카 언타루, 기꺼이 연약해지고 보잘것없어졌던 리 페이스, 그들의 만남과 우연한 연기는 아름답다. ‘발가락 건드리기’, ‘모르핀3’를 비롯한 주고받기와 해프닝, 엄마를 향한 의사의 당부가 너무 일찍 철든 알렉산드리아의 통역 사이에서 길을 잃는 장면처럼, 사소하고 소중한 순간들.


사실 영화의 시작 무렵, “옛날 옛적에…”(“Los Angeles, Once upon a time”) 류 문구가 들어갔다. 영화 속 ‘현실’ 또한, 감독이 들려주는 이야기다. 두 주인공과 그들이 지어낸 이야기를 귀여워하기, 그들 자신-다섯 살이지만 엄마를 따라 과수원에서 일하는 이민자 소녀와, 죽을 고비를 넘기고도 무시당하는 스턴트 배우-의 이야기를 응원하기,(로이의 ‘뒤통수 맞기’ 스턴트를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돌려보기) 그리고 영화의 유산과 이야기의 힘을 기억하기. <더 폴>은 관객에게 그러한 역할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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