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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에서 끌려나온 보이트

일라이어스 보이트의 서사

by 않인


<Criminal Minds: Evolution>(시즌16, 2022, Paramount+), 약간의 <MIU404>(2020, TBS)

Feat. <악인의 서사>(듀나 외, 2021, 돌고래)

* 작품의 장면과 결말, 연쇄살인에 관한 묘사 포함



힘을 잃고 날아간 쿠즈미


<악인의 서사>는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는 근래 창작물 소비 움직임에서 출발하는 기획 평론집이다. 이 문장 그대로가 재현의 윤리적 원칙으로 받아들여지는 현상에 물음을 던지며, 해당 문장과 관련되지만 거기 한정되지는 않는 다양한 주제를 논한다. 저자들이 구체적인 사례와 함께 풀어낸 고민들을 읽는 동안, 나역시 숱한 악의 얼굴들을 떠올리며 때로 재해석의 필요성을 느끼기도 했다. 그중 하나는 ‘악인에게 절대로 서사를 주지 않겠다’며 납작하게 누르는 게 아닌, ‘이 악인의 서사를 우린 모른다’며 비워두는 방식이었다. 일본 드라마 <MIU404>의 쿠즈미다. 펜데믹 탓에 잘렸다는 분량 안에 그의 과거가 있었을까를 궁금해하면서도, 역시 공란인 편이 마음에 든다는 결론에 이른다. 쿠즈미의 서사 부재가 (바람직하다기보단) 마음에 들었던 한 까닭은, 그 점이 특유의 신비스러움을 증폭시켜 종종 감정이 과잉되는 작품의 균형을 맞추고 분위기를 가라앉힘으로써-살렸기 때문이다. 쿠즈미는 말하자면 ‘철학자’ 유형의 악인이다. 인류를 ‘믿을 수 없음을 믿는’ 그는 인간을 “인형”처럼 조종하며 범죄를 유도해 왔다. 두 주인공 시마와 이부키가 강제로 약물을 흡입하고 보는 환각 속에서 내면의 갈등이 쿠즈미로 형상화되는 연출 또한 이러한 “메피스토펠레스”(시마)적 캐릭터성 덕에 적절하게 다가왔다.


이어, 그의 서사가 없는 작품 속 이유가 프로타고니스트들이 귀를 막아서가 아닌 ‘악인 본인이 입을 닫아서’라는 점을 짚어본다. 체포되기 전 염세적인 가치관을 순순히 털어놓던 쿠즈미는, 그러한 가치관 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과거에 대해선 한 마디도 않는다. 시마와 이부키는 심문을 시도하고, 쿠즈미는 “나는 너희들의 이야기가 되지 않을 거야”라며 본명조차 밝히길 거부한다. 두 형사는 ‘죄다 연결돼 있고 쿠즈미도 거기 휩쓸렸을’ 가능성을 점쳐보지만 추측일 뿐이다. ‘뻔하지 뭐’라고 작가 선에서 자르는 것이 아닌 물음표로 남겨두는 태도, 인물 스스로 작가의 펜을 떠난다. 이로써 쿠즈미는 줄곧 빠져나가다 잡혀 갇힘에도 다시 날아가는, 연출에 종종 쓰이기도 했던 나비 이미지 빌런의 존재감을 완성한다. 단, “인형”들의 행동이 쿠즈미의 예상을 빗나가며 체포당하는 전개를 통해, 작품이 그를 파우스트의 악마에서 인간의 자리로 끌어내리며 상징적 힘을 앗은 상태에서다. 힘은 사라지고 매력은 남은, 서사가 부재하는 악인의 괜찮은 예,라고 해도 될까. 더불어, <MIU404>가 특정한 범법자들에게 상세한 뒷이야기를 부여해 그들이 타고난 악인보단 ‘범죄를 저지른 시스템의 피해자’에 가까울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도 범죄의 심각성을 흐리지는 않았다는 점, 법 집행자의 윤리와 법 테두리 밖 사회적+임의적 단죄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하였다는 점이, 이러한 선택에 무게를 더한다.




<크리미널 마인드>의 진화


반대로, <크리미널 마인드: 에볼루션>의 일라이어스 보이트는 풍부한 서사로 해석된 악인이다. '어떤 악인의 서사는 필요한 이유'를 말해주는 예라고 볼 수도 있겠다. “동굴 밖으로 나오는 악의 서사”-공감이나 인과에 집착하지 않고 악을 바라봄으로써 환상과 공포를 제거하는 소설-들을 다루는 박혜진의 평론을 읽다가 그가 떠올랐다.(알리 아바시의 <성스러운 거미>도 좋은 사례이나 재관람 자신이 없다.) “악이라는 무지를 극복하기 위해 악을 재현하는 서사는 ‘앎’의 서사를 쌓아 올린다. 앎의 서사는 달리 보는 눈을 통해 구체화된다.”[-박혜진, “악이 동굴에서 나올 때: 오늘의 한국 소설 속 살인자들”, <악인의 서사> 72쪽, 돌고래] <크리미널 마인드: 에볼루션>은 FBI 프로파일러, 보이트 자신, 그리고 그의 와이프 시드니의 눈으로 그가 저지른 악행과 그 파급 효과를 바라본다.


<크리미널 마인드>는 FBI 프로파일러 팀 BAU(Behavior Analysis Unit: 행동 분석 유닛)를 중심으로 하는 범죄 수사물이다. 먼저 짚고 넘어가면, 몇몇 에피소드에서 ‘인과에 과도하게 집중함으로써 악행을 양해하는 뉘앙스의 연출’을 하거나, 거의 ‘신적으로 악마화’된 빌런을 여럿 등장시킨 전적이 있는 시리즈다. 그럼에도 기술적 짜임새만 그럴듯한 게 아닌, ‘잘 만든’ 작품이라고 여겼던 까닭은 그러한 허구의 묘사들을 따라가며 인간에 대해 사유하게 되는 일이 잦아서였을 것이다. 악을 탐구하며 그에 영향을 받기도 하는 프로파일러들의 내면을 신중하게 조명하는 데에서 나오는 스릴은, 쉽게 증발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소모적 자극만 양산하는 화들이 이어지는 시즌도 있었다.(<트윈 픽스>의 전설 레이 와이즈가 특별 출연한 화도 실망스러운 축에 속했다.) 에피소드마다 개별 사건을 다루는 작품, ‘시청자가 보지 않은 새로운 것’을 적절히 구상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을 터이다. ‘소재가 떨어지면 스펜서 리드를 괴롭힌다’는 반응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주인공들이 곤경에 빠지는 에피소드는 웰메이드인 편이어서 양가적 감정이 들곤 했다.(사실 스펜서 리드가 가장 고통 받았던 시즌은 여러모로 훌륭했다.) 다행히 각본가들에게 최소한의 예의가 있었는지, 사건사고의 망치로 캐릭터를 두드리더라도 그 뼈대를 깨버리지는 않았다. 주인공들의 캐릭터만큼은 (거의) 붕괴되지 않았기에, 재빨리 영광을 되찾고 나름 깔끔한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을 것이다. 불변한 부분은 적절히 변한 부분과 맞물려 빛났다. 초중반 시즌에서 여성 살해를 관습적으로 전시하거나, ‘기승전 엄마탓’ 서사를 여럿 넣거나, 크로스드레싱과 범죄심리를 직접적으로 연관짓기도 하던 작품은, 후반 시즌에서 혐오 범죄를 소재로 두거나 ‘용의자의 소수자성을 범죄의 원인으로 보지 말 것’을 강조하는 대사를 삽입하는 등 시대에 맞게 변화하는 제스처를 보였다.


제작 소식에 기대보다 ‘잘 끝냈는데 굳이?’라는 의아함이 앞섰던 <크리미널 마인즈: 에볼루션>(시즌16)은, 동시대를 예리하게 반영하며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충분히 증명한다. 시간적 배경은 2022년으로 명시된다. 펜데믹을 거치며 범죄는 변형되고 ‘진화’했다. 홀로 움직이던 연쇄살인범들은 온라인 네트워킹으로 정보를 공유한다. 예산이 삭감되고 부서가 나뉘며 BAU 팀은 전처럼 협업하는 대신 각각 개별 사건의 자문을 맡는 일이 잦아졌다. 설상가상으로 성과주의자 FBI 부국장은 ‘돈이 되지 않는’ BAU 해체를 노린다. 요원들은 발전한 범죄와 맞서는 와중 딱히 발전하지 않은 내부 시스템과도 맞서야 한다.



보이트의 선택

1화 오프닝은 “2005년”, 한 남자가 납치한 피해자를 외딴 컨테이너에서 고문하는 시퀀스다. “2022년”, 이 컨테이너가 발견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작품은 따로따로 행해지는 듯 보였던 살인들의 연관성을 밝혀내는 프로파일러들의 여정을 촘촘하게 따라가는 한편, ‘언썹’(Unknown Subject: 신원 미확인 범죄자) “독거미”, 일라이어스 보이트의 관점을 서브 플롯으로 둔다. 그의 신원은 시청자에겐 미확인 상태가 아닌 것이다. 이는 <크리미널 마인드>에서 낯설지 않은 구성, 때로 ‘범죄를 설득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허나 1-2화 분량에 맞춰 편집된 범죄자의 시선과, 10화에 걸쳐 긴 호흡으로 심도있게 이어지는 서사는 서로 다른 감상을 불러일으키리라 생각한다. ‘사연을 요약’하지 않고 인물의 심리와 기억을 상세하게 풀어내면서 오히려 그 ‘인과’의 불확실함과 복잡성이 살아난다.


일라이어스 보이트는 복잡하다. 음험하고 신중한 범죄자 네트워크 리더의 얼굴로 먼저 등장하는데, 곧 다면성을 드러낸다. 그가 어린 시절 부모를 잃은 까닭은 자신의 방화 탓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특수하고 치명적인 성장 환경이다. 그는 문자그대로 ‘살인자로 길러졌다’. 유일한 친척이자 연쇄살인범인 숙부 사일러스로부터 학대 당하며, 타겟을 물색하는 법에서 시체를 유기하는 법에 이르는 각종 ‘교육’을 받았다. 숙부의 집을 탈출한 후 그보다 ‘뛰어난’ 연쇄살인범으로 거듭나, 여러 해 동안 수많은 사람을 다양한 방법으로 고문/살해하고 흔적을 은폐해 왔다. 현재는 ‘범죄 기술’을 공유하는 다크웹에서 후보를 물색하고, 연쇄살인범들과 시크릿 메신저로 소통하며 조언과 ‘킬 키트’를 제공하는 대가로 현금을 받기도 한다. 한편으론 사랑하는 아내 시드니와 결혼해 근사한 집에서 아이를 낳고 꿈꾸던 가정을 이뤘다. 범죄는 단순히 ‘위법한 부업’이 아니며, 가정은 정체를 감추기 위한 위장이 아니다. 두 가지 삶은 일단, 양립하는 것처럼 보인다.


보이트는 통제하는 가부장보단 부드러운 권위를 지닌 남편/아빠의 역할을 수행한다. 어쩌면 그보다 그와 그의 딸을 대놓고 모욕하는 이웃/인종주의자/성차별주의자 할을 더 싫어하게 될 수도 있다. 두 사람이 대립할 때 보이트에게의 공감은 (이를 테면)권장되기도 한다. 허나 이후 그는 무엇을 하는가, 할과 닮았고 자신과 무관계한 남자를 납치해 동물학대를 수반한 방법으로 고문살해한다. 이러한 장면에서 보이트는 피해자를 능숙하게 위협하고 해하는데, 죄책감과 마찬가지로 폭발적인 분노나 흥분 역시도 내보이지 않는다. ‘킬 키트’를 파묻거나 바닥의 피를 닦는 보이트는 무표정하고 건조하다. 절제된 표현은 캐릭터성이며, 인물의 표면을 두려워하고 싫어하기 전에 그의 행동과 심리에 주목하도록 유도하는 연출 디자인이기도 하다.


이처럼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보이트 입장에서 본 개별 살인들의 트리거이지 근본적인 원인이 아니다. 작품은 보이트의 성장 과정을 묘사하며 그에게 영향을 미친 사건들을 연결하면서도 ‘그게 살인하는 이유’라고 못박지 않는다. 사일러스를 향한 보이트의 ‘내가 이렇게 된 건 당신 탓’이라는 원망은 어느 정도 타당하다. 지속적으로 어린 시절 기억에 시달리는 보이트를 보고 있으면 본인 말대로 그에게 “기회”가 있었을 가능성을 질문하게 되고, 이 틈은 그를 ‘나와는 다른 종’으로 단정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그럼에도 연쇄살인은, 사일러스에게 조종당하는 ‘리 듀발’이 아닌, 그 스스로 이름붙인(훔친) ‘일라이어스 보이트’의 선택이다. 보이트의 살인은 노력해도 멈출 수 없는 고통스러운 비밀보다는 자발적이고 계획적인 ‘취미’, 더 나아가 ‘삶의 방식’에 가깝다.(당연히, ‘노력해도 멈출 수 없는’ 것이라 해도 양해해선 안 되나, 이해의 방법이 달라질 것이다.)



동굴에서 끌려나온 보이트


네트워크 엔지니어로 일하며 이중 생활을 해 온 보이트는, 포스트 펜데믹의 경영난 속에서 일자리를 잃는다. 동반자(여야 할) 시드니와 의논하는 대신 그는 범죄를 숨겼듯 실직을 숨긴다. 그리고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수입원과 스트레스를 해소할 창구를 범죄에서 찾는다. 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린 와중 FBI의 수사도 진척되자 그는 조바심을 내고, 조바심은 그가 분리해 왔다고 여긴 두 삶의 경계를 흐린다. 보이트는 가족들 앞에서 그들을 죽이는 상상을 하다 소리내 욕을 뱉고 만다. 바로 후회하고 사과하지만, 위화감은 남는다. 상상이 본심인가? 모르는 일이다. 가족에 대한 보이트의 사랑을 ‘거짓’으로 단정하며 그를 악마화하는 행위는 그다지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들을 죽이는 상상에 빠지는 보이트와 그들을 떠나며 눈물을 흘리는 보이트는 동일한 인물이고, 후자는 아마도 연기가 아니다. “내 생에 최고의 선물”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 굳이 “선물”이라는 비유에 물질적인 뉘앙스가 있다고 과해석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사랑이 진심이건 아니건(‘진심’은 당사자가 그렇다고 믿으면 그러한 것이므로 판단 기준이 될 수 없다. 3년 전 쓴 <프랑스> 리뷰에서 픽션이라는 전제 하에 ‘진심’을 강조했었는데, 픽션이라 해도 바람직하지 않은 감상이었다. 그 위험성을 언급해 두었으므로 삭제하지는 않겠으나 좋은 글이 아니었음을 고백한다.), ‘성실하고 자상한 가장’ 역할 수행은 두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가능하다. 범죄를 꾸준히 실행할 수 있는 환경이어야 한다는 것, 자신이 ‘통제 가능’한 가족이 그 범죄를 철저히 몰라야 한다는 것. 이 조건은 아마도 그의 무의식에 자리한다. 우리는 보이트 스스로의 인식이 가두지 못하는 언행을 관찰하며 이를 짐작할 수 있다. 기만을 딛고 선 두 삶의 양립은 애초부터 보이트의 판타지에 불과했다. 시드니가 제 정체를 알고 있다는 의심이 들자, 그는 몰래 총을 겨누고 재차 묻는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내 어두운 면을 보여주느니 차라리 (내가 아닌) 그녀를 죽인다.’ 이것이 보이트의 사고 방식이다.


나르시시즘이 감지된다. 보이트는 아내와 딸들을 사랑하지만, 그 이전에 자신을 연민한다. 가족과 별거 중이던 보이트가 남편과 아이가 있는 여성 리모나를 납치하는 사건이 이를 뒷받침하고 폭로한다. 그는 리모나를 감금한 채로 ‘아내와의 대화 시뮬레이션’을 요구하며 위협한다. 시드니에게 진실을 털어놓고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뒤틀린 연습 같은 것으로 보이기도 하나, 실은 자기 위안의 일환에 가깝다. 보이트가 만족하는 것은 리모나가 ‘그럴듯하지만, 결국 내가 듣고 싶은 답’을 내놓은 순간이다. 리모나를 선심 쓰듯 놓아주며 보이트는 가족을 들먹이는 협박으로 입막음한다.


이를 비롯해 보이트의 잔인한 악행은 나열되기보단 그의 자기 서술과 일상 사이사이 편집돼 일종의 주의 환기 기능을 하다, 후반부에는 메인 캐릭터와 엮이며 단계적으로 축적된다. ‘리모나 납치’ 위에 ‘데이비드 로시 납치’가 쌓이고, 곧 ‘더그 베일리 살해’가 얹힌다. 부국장 더그 베일리는 현실적 ‘직속 상사 빌런’ 포지션으로, 요원보다는 정치가의 옷을 입고 움직이는 자다. 팀원들이 범죄와 싸우는 동안 분과장 에밀리 프렌티스는 그의 성과주의와 싸운다. 허나 베일리는 주인공들과 부대끼며 변화하는 입체적인 인물이다. 우리는 대놓고 악행을 저지르는 자보다 결정적인 선은 넘지 않지만 ‘같은 편’에 서서 주인공들과 반목하는 인물을 더 미워하게 되기도 하며, 그가 마음을 돌려 완전한 아군이 될 때 꾸준히 호감형이었던 인물이 선행을 할 때보다 더 감동 받기도 한다. 이 시점에서 베일리에 대한 호감도는 상승하다 정체된 상태일 것이다. 협조하다 마지막 순간 수상한 행동을 하며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다. 그가 비밀스럽게 보이트와 독대하다 살해당하는 전개는 효과적으로 충격을 가한다. 안절부절못하며 가족들에게 우발적으로 분노를 터트리던 모습과 상반되는- 건조하게 방아쇠를 당기는 보이트의 태도는 캐릭터와 일치하며, 머리를 식히는 데에 도움을 준다. 베일리는 (다음 시즌에서 기려지기는 하나)영웅화되지 않고, 보이트는 괴물화되지 않는다. 여러 시즌에 걸쳐 시청자와 관계를 맺어온 주인공에게 직접적이고 계획적인 위해를 가하는 전개-‘로시 납치’가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결론적으로 ‘악이 패배’하는 순간의 통쾌함을 배가한다면, ‘베일리 살해’는 반대로 그 흥분을 차갑게 가라앉힌다. 이러한 장치들이 맞물려 이룬 균형이, 거리를 두고 허구의 악인을 바라보게 하리라 짐작한다.


못지않게 중요한 장치는 시드니의 시선이다. 시간을 되돌려, 클라이맥스 직전 삽입된 시퀀스를 살펴본다. 수사망이 좁혀질 무렵 보이트는 로시와 대면한다. 자신감 넘치는 보이트의 언행은 그의 관점으로 전시되는 것이 아닌 로시의 관점으로 관찰되고, 이즈음부터 서서히 카메라는 그에게서 빠져나오기 시작한다. ‘이만하면 충분한’ 것이다. 보이트의 시선이 나간 자리에는 시드니의 시선이 들어선다. 그는 궁지에 몰린 보이트의 거짓말을 믿고 FBI를 피해 도망치는 데 협조하지만, 점차 드러나는 남편의 폭력적인 면에 당황하며 의심하고, 끝에는 요원들의 도움을 받아 구출된다. 면회 장면, (오로지 가족만을 향한)죄책감이 그렁그렁한 보이트의 눈동자 맞은편엔 온갖 강렬하고 끔찍한 생각과 감정에 시달리는, 그리고 여지를 주지 않는 시드니의 눈동자가 있다. 프로파일러의 눈이 분석했고 보이트의 눈이 설명하고 변명했다면, 시드니의 눈은 그 변명을 무너뜨린다.


체포된 보이트는 편안하게 악한 면모를 드러내면서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버리진 않는다. 가족들이 자신 때문에 낙인이 찍힐 것을 걱정하고 미안해하며, (시즌17에서)자해하는 큰딸을 보살펴 달라고 요원들에게 부탁하기도 한다. 이 이중성, ‘다정함’을 단순한 ‘연기’로 말할 수 없다는 점이 보이트를 더 자세히 관찰하게 한다. 그것들은 본인 표현대로 그의 “한 부분part of me”이다. 보이트는 자기중심적인 악인이지만, 그의 ‘본성’은 악에 귀속되지 않는다. 다양한 얼굴과 단정 불가능성은 그를 ‘나와는 다른 종’으로 밀어두는 행위를 막고, 설명의 가능성은 그에 대한 공포와 환상을 지운다. <크리미널 마인드: 에볼루션>은 보이트가 ‘무엇인가’를 집요하게 물어 결국 그가 ‘무엇을 했는가’를 주목하게 한다. 그리하여 도달하는 장소는 그가 수많은 사람을 고문하고 살해한 컨테이너, 시체 수로 환산할 수 없는 악행의 무덤이다.




시즌16이 탐구한 보이트를 시즌17은 해체한다. 이미 ‘다 본’ 것 같았던 그는 베일리가 남긴 의문을 쥐고 다시 미지의 영역으로 숨었다가 서서히 끌려나온다. 현행범으로 체포됐음에도 FBI 윗선과 형량을 거래하고 ‘자문’을 자처하는 그는 교도소에 갇혔으나 ‘잡히지’ 않은 채다. 입을 걸어잠근 쿠즈미와는 반대로, 이리저리 궁리하고 모호하게 입을 놀린다.(‘내 딸들의 성장을 아빠로서 지켜보겠다’고 우기는 모습은 일관성 있고 여전히 자기중심적이다.) 전과 달리 그의 관점에서 진행되는 플롯이 없기에, 그 의도와 비밀은 가려져 있다. 이번에 그를 파헤치는 것은 온전히 프로파일러들의 몫이다. 시즌16이 그 자신에게서 출발해 일라이어스 보이트라는 인간을 파악해 나갔다면, 시즌17은 외부에서 베일을 벗겨내는 방식으로 그에게 드리워진 ‘천재적 범죄자 독거미’의 그림자를 걷어낸다. 작품 자체의 몰입감은 앞 시즌에 비해 아쉬웠으나, 보이트를 ‘완전히 가두는’ 작업은 필요했다는 생각이 든다. 파악된 악은 우상화되지 못한다.


(다만 그가 교도소에서 칼에 찔리는 엔딩은 씁쓸한 물음표를 남겼다. 물음표에서 그친 것은 서늘한 연출 톤 덕이었다.)




+

보이트가 리드하는 다크웹은 유해한 남성성들이 모인 집단이 ‘시너지’ 효과를 내 가장 끔찍한 결과를 낳은 사례다. 연쇄살인 네트워크 ‘까지는’ 아니더라도, 현실에 유사한 사건들이 존재한다. 보이트와 그 추종자들이 언론에 자주 노출됐던(+금발의 백인 여성인) JJ를 대상으로 딥페이크 성범죄물을 제작했다는 설정은 동시대를 날카롭게 반영한다. 작품은 시즌17에서 비중을 할애해 이를 다루며, ‘놀이’, ‘본능’ 따위 언어로 덮이며 심각성이 흐려지곤 하는 디지털 성범죄가 분명한 악의를 띤 행위임을 짚는다. 또한 JJ가 영상을 확인하는 장면을 넣되, 그 자체를 화면에 재현하지는 않는다. JJ는 자신을 흔들려는 보이트의 작전에 넘어가지 않고 오히려 영상에서 찾은 흔적으로 보이트를 흔들지만, 현실의 대다수 피해자는 훈련된 FBI 요원이 아니다. 그 ‘승리’가 절대 JJ의 고통을 덮을 수 없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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