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고라야 & 이디스 라이언스
Viktor Goraya & Edith Lyons
<이어즈 앤 이어즈(Years and Years)>(2019, HBO & BBC)
* 위 작품의 장면과 결말, <잇츠 어 씬(It’s a Sin)>(2021, 영국 채널4)의 핵심 전개 포함.
2021년 공개된 리미티드 시리즈 <잇츠 어 씬>은, 80년대 영국을 배경으로 퀴어 커뮤니티와 에이즈 위기를 다룬다. 마지막 에피소드, 에이즈에 걸린 주인공 리치 토저의 건강이 악화되자, 엄마 밸러리 토저는 아들을 외부와 단절시킨다. 리치의 베스트프렌드 질 백스터가 밸러리를 설득하기 위해 애쓰지만, 밸러리는 퀴어혐오적이고 회피적인 반응을 보이며 질의 호소와 리치의 고백을 무시한다. 리치는 적절한 치료를 받지도,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질은 밸러리에게 말한다, ‘당신이 심어놓은 수치심shame이, 리치와 그 모든 이들을 죽인 거’라고.
부러 암울한 톤으로 소개했지만, <잇츠 어 씬>은 리치와 친구들의 하루하루에 넘쳐나던 슬픔과 기쁨, 사랑과 우정, 눈물나는 연대를 담은, 시끄럽고, 신나고, 풍부하고, 무엇보다 아름다운 작품이다. 부족한 소개 대신 죽어가던 리치의 대사를 인용한다, “거짓말하기 싫어요, 왠지 아세요? 난 진짜 재밌었었거든요, 그 모든 남자들이랑.” 말하려던 건: 작가 러셀 T. 데이비스가 사회적 이슈와 긴밀하게 연결된 작품에서 메인 캐릭터의 목숨을 앗아가는 까닭은, 그저 다른 메인 캐릭터에게 동기를 부여하거나 시청자의 감정적 몰입을 유도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도록”(프랜 백스터) 돕는 스토리텔러다. 죽음이 발생하는 과정, 전후의 맥락, 당사자와 주변 인물들의 액션/리액션을 촘촘히 관찰하며 현실의 시청자가 사회와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2019년, <이어즈 앤 이어즈>에서는 대니얼 라이언스가 죽음을 맞이했다. 영국 공무원인 그는 수용 가능 인원을 훨씬 초과한 알루미늄 갑판 쪽배를 타고 남자친구와 바다를 건너다 익사했다. 이 글은 대니얼보다는 빅토르에 대한 이야기다. 여러 해 난민 신분으로 유럽을 떠돌던, 불법적인 일상이라도 얻고자 약혼자와 함께 바다를 건너다 ‘어쩌자고 홀로 살아남은’, 인간보단 ‘사건’으로 그려졌을 수도 있었던 그에 대해. 그리고 그 곁에 섰던 대니얼의 시스터 이디스에 대해, 기이해져만 가는 세상을 외면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그들의 필연적인 유대감에 대해, 사심과 디테일을 얹어 적었다.
<이어즈 앤 이어즈>는 2019년 기준 근미래 영국을 배경으로, 이후 10+a년 동안 대가족이 맞닥뜨리는 변화들을 다룬다. 말하자면 SF이나, ‘매년 다시 봐야 한다’, ‘거의 다큐멘터리다’, ‘예측이 무서울 정도다’ 등의 코멘트가 붙을 정도로 현실적이고,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상당히 서늘한데, 또 그렇지만은 않다. 인류의 앞날을 비관하다가도 결국 인간을 믿는다. 그 중심에는 거의 판타지적으로 아름다운 두 인물이 있었다. ‘중심’이라고 적으니 조금 어울리지 않는 듯도 하다, 그들은 늘 중심에서 벗어나 있었으니. 시리즈의 오프닝, 로지 라이언스의 둘째 링컨의 탄생과 더불어 메인 캐릭터-라이언스 패밀리-와 시대적 배경이 자연스럽게 소개될 때, 이디스는 일상적으로 부재하고 빅토르는 등장 자체를 않은 상태다. 이들은 ‘이야기 중간에 끼어드는’, 어떤 ‘노말’/‘스탠다드’가 아니거나 아니고자 하는 인물들이다. 이디스 라이언스는 세상의 변두리를 찾아다녔고, 빅토르 고라야는 ‘사회’에서 튕겨져 나가거나 울타리 안에 갇혀 ‘없는 사람’이 되기도 했다.
빅토르 고라야와 대니얼 라이언스
- “You are a beautiful person.”
링컨이 태어나고 몇 년 후, 작품 상 우크라이나에서는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러시아군이 키이우를 장악한다(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 공개된 시리즈다). ‘숙청’이 공공연하게 벌어지며, 성적 소수자도 그 대상이다. 우크라이나 난민 임시 거주지에서 근무하던 대니얼은, 게이라서 ‘불법인간’이 된 빅토르를 만난다. 흔적이 남지 않는 전기 고문을 당한 그는, ‘영국에 망명 신청을 했지만, 정부가 고문당했다는 증명을 요구해 진행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여기서 잠깐 오프닝으로 돌아간다. 아이를 낳으러 병원에 가던 동생 로지의 전화를 받기 직전, 대니얼은 연인 랄프와 함께 TV를 보고 있었다. 정치인 비비언 룩은 카메라를 똑바로 보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대해) 말한다, “I don’t give a f***.” “내 집 앞 쓰레기만 제때 수거 되면 족하다”는 비비언 룩이 “놀랍도록 멋지다”며 즐거워하는 랄프와, “저 사람은 괴물”이라고 걱정하는 대니얼. 이 커플은 시리즈가 시작하고 5분 만에 갈라설 조짐을 보이지만, 어쨌든 대니얼은 새해를 맞아 랄프에게 청혼한다. 수 해가 지나고, 이 부부는 ‘여전히 가족 모임에서 농담을 주고받지만 친밀한 대화를 나누지는 못하는 관계’가 된다. 랄프는 빅토르와 같은 이들이 ‘안 보이’는 자고, 대니얼은 ‘안 볼 수 없’는 자다.
빅토르 고라야의 첫인상을 어떻게 묘사해야 좋을까. 자연스럽고 당당한 태도, 반짝이는 눈동자와 유머감각. 대놓고 던지는 플러팅에 대니얼은 당황하면서 사로잡히고, 시청자도 마찬가지다. 거기엔 한 점의 위화감도 없다. 대니얼을 먼저 유혹함과 동시에 빅토르는 ‘착한 외국인’의 자격을 잃는데, 이야말로 바라던 바다. 빅토르는 자신의 처지, 대니얼의 “남자친구”(이건… 대니얼이 잘못했다.), 따위를 생각지 않고 그저 ‘나와 너의 끌림’만을 똑바로 응시한다. 누군가는 비꼬는 투로 ‘자유롭다’고 할 수도 있겠고, 비도덕적인 시작이었다고 수식할 수도 있겠으나- 두 사람의 첫 만남을 목격했다면, 그 사이 흐르는 공기가 숨막히게 특별했음을 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빅토르는 첫인상 그대로인 인물이다. “신변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희망과 유머를 잃지 않고, 타인을 이용하려 들지 않으면서 호의는 기꺼이 받아들인다. 곧은 잣대와 마음의 균형을 유지하며 날카롭고 유연하게 판단한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외면으로 투명하게 드러나는 현자.”[INDIEPOST] 전개상 자세히 서술되진 않으나 단편적인 언급들로 미루어 보면, 빅토르는 어딜 가나 스스럼없이 사람들과 연결되고 커뮤니티를 만드는 이인 듯하다. ‘햇살처럼 주위를 환하게 밝히는 이’, 뮤리얼의 표현대로 “아름다운 사람 beautiful person”이라고 할까. 이러한 설정은 그의 프레젠스와 엮여 버린 불행을 사적인 것으로 ‘느낄’ 여지를 완전히 걷어내려는 제스처로 보이는데, 작품은 그가 마냥 낙관하는 것이 아니라 타들어가는 속을 식히며 현재에 충실하려 애쓰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 또한 잊지 않는다. 빅토르가 화면에 잡히면 빛의 아우라와 어둠의 예감이 공존한다. 전자는 인간성과 로맨스, 후자는 그 외의 것들이다.
대니얼이 빅토르와 랄프를 두고 내적 갈등을 키울 무렵, 국제 정치적 갈등도 심각해진다. 중국은 인공 섬 홍샤다오를 짓고, 미국은 그 섬이 핵 군사기지라고 주장한다. 뮤리얼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가족들이 모인 자리, 트럼프가 핵미사일을 발사했다는 소식이 들리고 영국에서도 사이렌이 울린다. 세계가 끝날지도 모르는 날, 누구와 있을 것인가- 대니얼은 망설임 없이 빅토르에게 달려간다. 뮤리얼의 집도 빅토르의 거주지도 카오스인데, 두 남자의 사랑만 분명하다. 이후 빅토르는 일단, ‘대니얼의 외국인 남자친구’ 위치에 있게 되는데, 작품은 그를 거기 묶어두지 않는다.
이디스 라이언스와 세계의 균열
- “Tear the world down.”
미국이 홍샤다오에 미사일을 떨어뜨리기 직전- 시청자는 이디스를 처음 만나게 된다. 오랜 부재로 존재감을 먼저 드러낸 그는, 나쁜 소식을 들고 화상 통화 화면으로 등장한다. 그의 첫인상은 강렬한 감정들로 뒤덮여, 캐릭터를 파악하기 힘든 종류의 것이다. 가족들이 반가움을 쏟아내는 와중, 울먹이며 안부를 묻는 그의 실루엣은 이질적이다. 이디스는 ‘섬이 보이는 베트남에 시위하러 왔지만 이미 늦었다’고 설명하고, 곧 방사능에 피폭된다. 이디스의 두 번째 출연 역시 화면 속 화면이다. 그는 방송에 출연해 미국의 핵미사일 발사와 그 영향에 관해 이야기하고, 가족들은 그것을 보며 이디스에 관해 이야기한다. 빅토르는 대니얼에게 묻는다, “이디스는 어떤 사람이야?” 대니얼은 “조금 진지하다”고 답한다. 스티븐은 “어려서 갔던 여행에서, 이디스는 몰래 나가 담배를 사고 해변에서 자고 싶어했다”고 기억한다.
마침내 화면이 아닌 실물로 가족들을 만난 이디스, 그는 ‘훙샤다오 영상을 거액에 팔았다고 오해하는 무리’와, ‘정말로 거액에 팔자고 하는 무리’를 떠나 영국으로 돌아왔다. 빅토르는 그에게 “북극이 거의 녹았던데, 그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줘야 해요.”라고 말한다. 이디스는 시니컬한 유머를 섞어 “우리는 계속 호소해 왔고, 지금은 너무 늦었다”로 시작하는 스토리텔링을 늘어놓는다. 분위기가 가라앉고 모두 농담을 던지는 가운데, 화제를 꺼낸 빅토르만큼은 그 의미를 알아들은 듯하다. 스티븐이 “우리 태어나고 30년 정도는 살기 좋았잖아.”라며 동의를 구하자, 이디스는 “전쟁이 몇 번 있었지.”라며 쉽사리 동의해주지 않는다. 다시, 이디스는 어떤 사람인가?
비비언 룩에게 환호하는 로지 옆에서, 이디스는 삐딱하게 서서 눈을 부릅뜨고는 천천히 박수를 치며 말했다, “세상을 무너뜨려 버려. Tear the world down.” 비비언 룩의 ‘사성당’이 출마한 총선 투표, 그는 투표지 전체를 가로지르는 대각선을 긋는다. 이디스는 때로 세상을 냉소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누구보다 세상을 사랑하기에 다른 이들이 지나치는 장소를 들여다보게 되는 것에 가깝다. 이디스는 비비언 룩처럼 인간사가 굴러가는 방식을 꿰뚫어보고, 비비언 룩과 정 반대에 선다. 세계가 이미 ‘찢어지고’ 있음을 아는, 그 갈라진 틈에 빠진 것들을 테이블에 올려 놓으려는 자. 지구 곳곳의 균열을 찾아 몸을 던져 싸워 온 그는, 국가의 틀을 넘어 사유하고, 법이 아니라 정의를 따른다.
이디스는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만큼 상대방의 심리나 됨됨이도 빠르게 파악한다. 주변 사람을 아끼지만 덮어두고 응원하지는 않는다. 그는 오래 전 엄마와 형제들을 배신하고 새 가정을 꾸렸던 아버지의 장례식 뒤풀이에서, 용해된(작품에 등장한 새로운 장례법이다.) 아버지를 리쿼 샷인 양 마셔버린다. 그는 후에 빅토르를 강제 이송시킨 스티븐에게 실망하고, “스티븐은 내 우선순위가 아니”라며 칼 같이 잘라내기도 한다.
이디스는 직설적이고 시니컬하고 유쾌하다. 과감하면서도 무신경하지는 않으며, 그 섬세한 대범함을 타인에게 전염시키곤 한다. 링컨에게 처음 치마를 입히고 양갈래 머리를 해 준 이도 이디스고, “치마인지 티셔츠인지 모를” 옷을 입고 링컨이 신나게 뛰어다닐 때, “어느 쪽이든 상관 없다”고 한 이도 이디스다. 다 아는 듯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모르겠다I don’t know”, “아마도maybe”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자만하지 않음에서 오는 자신감와 여유, 올바른 감수성을 동반한 정치적 유머로 정곡을 찌르는 이디스. 그의 농담이 낡지 않는 것은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행하는 그의 삶에 닿아 있어서다. 마지막 화, 뮤리얼은 ‘세상이 이렇게 된 건, 1파운드 티셔츠에 가려진 것들을 외면한 우리 모두의 잘못’이라고 연설한다. 이디스 혼자만이 변명없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인다. 그 ‘잘못한 우리’에 미포함되는 자가 있다면 그일 터임에도.
미국 대법원이 동성 결혼을 금지하고 ‘로 앤 웨이드’ 판례를 뒤집자(후자는 작품 공개 이후 실제로 일어났고…) 이디스는 미국으로 날아가 시위대 맨 앞에 서고, 그 결과로 미국 출입금지를 당한다. 그가 “정부는 아무것도 안 한다”고 가족들에게 토로하자, 대니얼은 공감한다. 빅토르가 스페인에서 (또) 추방당할 위기에 처해 있는데, 스페인의 “극좌” 정권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물어도 영국 정부는 묵묵부답이기 때문이다. 대니얼이 사랑에 빠진 후 넘나들게 된 ‘갈라진 틈’, 이디스는 오래 전부터 거기 발을 딛고 있었다.
대니얼의 죽음과 ‘탓blame’
이 시점에서 빅토르의 존재는 우크라이나에서 비공식적으로 불법이고, 곧 공식적으로 불법이 될 예정이다. 그렇다면 영국, 프랑스, 스페인에서 그는 법적으로 보호 받을 수 있었는가? ‘망명 신청자’라는 그의 신분은 해당 국가가 정해 놓은 바운더리에서 조금만 벗어나거나, 그 법적 범위가 좁아지면 순식간에 박탈당하는 종류의 것이다. 몇 년이 흐르는 가운데, 빅토르의 거처는 내내 불안정하다. 우크라이나에서 고문당한 후 영국에 망명 신청을 하고, 영국에서 추방당하고, 우크라이나에 있다가 체포당할 뻔 하고, 국경을 넘고 또 넘어 스페인에서 다시 망명 신청을 한다. 마침내 재회한 대니얼과 그곳에 정착하기로 약속하지만, 곧 쿠데타가 발생하고 정책이 바뀐다. 프랑스의 우익 정권도, 스페인의 “극좌” 정권도, 빅토르와 같은 이들을 내친다.
대니얼은 빅토르를 영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이디스에게 도움을 청한다. 영원히 범죄자로 살게 되더라도, 살 수는 있지 않겠냐며. 이디스와 프랜은 그를 돕고, 대니얼은 빅토르를 데리러 간다. 홀로 오가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연인과 함께 돌아오기는 너무나 어렵다. (하나, 빅토르의 말대로 대니얼은 “여권을 도둑맞았다고 세관에 말하면” “Ok, this way sir.”이라는 안내를 받고 집에 갈 수 있었을 테다. 둘, 두 번째 ‘실패’는 브로커의 게이혐오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원했던 “지루한 삶”, 작품은 그 바람을 시스템의 실패와 의도적 부재가 죽이는 과정을 담는다.
대니얼과 랄프는 법이 보호하는 결혼을 했었다. 대니얼과 빅토르의 로맨스는 법적으로 (어쩌면 사회적으로도) 영원히 ‘허용’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의 시간은 늘 충분치 않다. 그들의 사랑은 지속적인 싸움과 은둔, 체포와 탈출로 이어진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줄곧 방법을 찾고 다음 걸음을 고민한다. 이처럼 애를 태우는 관계성은 픽션 상에서 ‘매력적으로’ 다가오는데, 그 ‘매력’은 외국인/비백인/이방인이 ‘상대방’, ‘객체’의 자리에 위치하며 그와 관계 맺는 ‘주인공’의 자리를 위협하지 않을 때까지만 유효하다. 그가 ‘구출’ 된다면 주인공은 (죽더라도) 영웅이 되고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야 한다. 이방인의 죽음이 주인공의 ‘동기’로 작용하는 방향도 있다. <이어즈 앤 이어즈>의 경우는 둘 다 아니다. ‘영국인을 위험에 빠뜨리고 그에게 구해지는 외국인’, ‘인간이 아닌 사건’: 빅토르는 그것들이 아니다. 작품은 처음부터 그리고 갈수록 명확하게, 그의 대상화를 거부한다.
이 연인의 장면에서 상호 또는 대니얼 단독 시선을 주로 취하던 작품은, ‘구조 작전’이 잘 풀리지 않는 동안 빅토르의 시선에 주목한다. 그는 지폐를 세는 대니얼의 손을 바라보고, 좌절하며 욕하고 벽을 치는 대니얼을 바라보고, 값을 흥정하는 대니얼을 바라본다. 빅토르는 주장도 감정도 ‘차마 강하게 꺼내지 못한다’. 그에겐 돈도, 여권도, 집도, ‘존재할 자격’도 없다. 무기력, 근심, 자책, 주저- 그가 지닌 절박함의 속성은 희망에서 절망으로, 자신의 생존에서 대니얼의 상태에 대한 걱정으로 흐른다. 소중한 이가 ‘나 때문에’ 패닉에 빠지는 모습에 힘겨워한다. 그러나 끝내는, 사랑을 붙잡는다. 쪽배에서 내리자고 대니얼을 설득하지만- 다음 순간, 바다를 건너기를 고집하는 대니얼을 바라본다. 거기엔 상대에 대한 믿음이 비친다.
이어, 작품은 시청자가 ‘항해’의 카오스와 대니얼의 죽음을 빅토르의 입장에서 겪도록 연출한다. 빅토르는 대니얼의 시체를 초점 잃은 눈동자로 응시하며, 우크라이나어로 ‘모르겠다’고 반복해 중얼거린다. 그 상태 그대로 대니얼의 집으로 ‘돌아온다’. 그곳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가족 그룹 통화 연결이다. ‘대니얼의 전화’를 받고 가족들이 쏟아내는 -다양하지만 유사하게 일상적인- 노이즈를 받아내는 빅토르의 정서는, 이질적이다. 겨우 틈을 찾은 빅토르는 바짝 마른 톤으로 죽음을 전하고 상황을 설명한다. 그리고 묻는다. “나는 집에 왔는데, 여기가 집인가요?” 충격과 슬픔에 잠긴 가족들은 달려와 문을 두드린다. 빅토르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공포스럽다. 그것이 4화의 엔딩, 빅토르는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는가, 아니면 또다른 방식으로 존재를 위협받고 있는가. 서구적 표상에 길들여져 있던 시청자는 시험/갈등에 빠진다.[참고: 러셀 토비, VULTURE]
다음 화는 이전 화와 시간적 거리를 두고 열린다. 영국 총리는 이제 비비언 룩이고, “사라진 자disappeared”들에 대한 소문이 떠돈다. 작품은 대니얼을 애도하며, 그의 죽음에 집착하는 스티븐을 조명한다. 수용소에 갇힌 빅토르를 면회하러 온 스티븐, 다소 일방적인 대화 사이에- 대니얼이 죽던 날 라이언스 가족과 빅토르의 대면이, 짧은 컷들로 나뉜 플래시백으로 끼어든다. 비난을 퍼붓는 로지와 스티븐, 엉망으로 움츠러들어 무어라 답하거나 하지 못하는 빅토르, 대사는 뮤트 처리돼 있다.(짐작 가능하고, 중요하지 않다.) 그 끝에 로지와 빅토르는 서로를 끌어안고 엉엉 울지만, 스티븐은 ‘탓’에 사로잡힌다.
우연히 “어스트와일”(‘골라낸’ 자들을 가두는 열악한 비밀 수용 시설)의 내부자가 된 스티븐은, 회사 네트워크에 접속해 빅토르를 이송자 명단에 넣어 “사라지게” 한다. 몇 년 전, 빅토르는 어쩌다 영국에서 추방당했던가, 대니얼에게 빅토르의 일터 정보를 들은 랄프가 보복성 리포트를 해서다.(규칙을 어긴 빅토르의 잘못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애초에 그 규칙은 ‘고문 증명’을 요구하는 이들이 만들었다고 답하겠다.) 두 사람의 행동은 겹쳐 보인다. 랄프는 작품이 ‘돌아보는’ 인간 유형이었다. 자발적으로 무지했던 그는 ‘행복’과 자극만을 좇았고, 안전하고 좁은 특권 바깥을 볼 의사가 없었다. 리포트 사건에 앞서, 랄프가 빅토르의 억양을 놀리듯 따라하는 컷이 있었다. 가볍게 지나가는 대사였으나, 그가 빅토르(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를 대하는 태도가 상징적으로 드러났다. 랄프는 남편에게 배신당했고, 크게 상처받았다. 그러나 ‘복수’의 구체적인 방법이 (아마 인지한 적 없었을) 특권을 이용해 누군가를 안전망 밖으로 내쳐버리는 것이라는 점이, 그 사고방식과 실행력이 무섭다. 랄프는 아마 제 행동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고, 궁금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스티븐은 어떤가, 빅토르가 ‘대니얼의 남자친구’였을 때, 그는 친절한 지지자의 태도를 보였다. 대니얼의 죽음 후 스티븐은 균형을 놓친다. 그는 빅토르에게, “전부 당신의 탓이다, 당신은 끔찍한 사람이다, 나는 당신이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동안 너무나 질렸다”고 말한다. “awful”, “bored”: 그 단어들을 빅토르에게 덧씌운다.(빅토르와 대니얼이 “boring life”를 바랐다는 점을 떠올리며 이 워딩을 씁쓸하게 곱씹게 된다.) 동생을 잃은 스티븐이 얼마나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겠냐만은- 랄프보다 훨씬 ‘똑똑한’ 그가 빅토르를 바라보았던 시선은, 어쩌면 랄프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어선다. (다행히 작품은 스티븐을 버리지 않고, 후에 내부고발이라는 기회를 준다.)
‘그 모든 일들이 꼭 빅토르의 탓인 것만 같은’ 이 모호한 감각. 만약 스티븐처럼 그 ‘탓’의 감각을 지우기 힘들다면, 분석을 시도해야 한다. 왜 그의 탓인가? 그의 탓이 있다면 무엇인가? 남자에게 끌리는 것? 그래선 안 되는 이와 사랑에 빠진 것? 살아남으려고 애쓴 것? 살아남은 것? 하나하나 살피며 걷어내다면,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거기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허면 그 감각의 원천은 무엇인가. 로지가 사는 곳을 ‘범죄 구역’으로 지정한 시스템은 빅토르를 범죄자로 만든 시스템과 다르지 않다. 문제를 해결하기보단 감추려는 권력자들이 온갖 지표를 끌어와 ‘보호 대상’과 ‘위험 요소’를 구분하고, ‘적절’한 그룹에 성공적으로 낙인을 찍은 결과다. 또한, 너무 피곤했던, 지나치게 절망했던, 현재가 충분히 안락했던- 개인들이 그것을 의심치 않고 받아들인 결과다.
빅토르는 그 못난 만남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고, 그저 스티븐을 ‘let go’한다. ‘당신의 탓’이라는 스티븐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대니얼의 죽음은 ‘나 때문이지만 내 탓은 아님’을 알고, 받아들인다. ‘내 존재를 골칫거리로 만든 시스템’을 인지하고, 애도에서 ‘거짓된 탓의 감각’을 분리해 낸다. “어스트와일”에서 재회한 친구가 ‘대니얼이 너를 꺼내 주지 않겠냐’고 묻자, 빅토르는 “할 수 있었다면 그랬겠지”라고 답하며 미소짓는다. 그에게 대니얼은 죄책감보다는 사랑의 기억이고, ‘내가 택한 가족’이고, 그를 살게 하는 동력이다.
이방인들의 연대와 사랑
낙인이 찍힌 당사자인 빅토르, 그리고 이디스는, ‘의심치 않는 것이 불가능한’ 이들이다. 첫 만남부터 공감대를 형성했지만 주로 ‘대니얼이 이디스에게 빅토르와 관련해 도움을 청하는’ 식으로 연결되던 두 사람은, 대니얼이 죽은 이후 본격적으로 한 화면에 잡힌다. 거기엔 단순히 가족-지인 간의 친밀감과는 다른 무언가가 섞여 있다. (대니얼-이디스의 것이 그러했듯 퀴어 피플 간의 유대도 포함돼 있을 테다.)
1화 엔딩, 까마득한 해안에 홀로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던 이디스. 흥분과 분노로 범벅된 축제가 열리는 가운데, 빽빽한 군중 사이에서 고개를 떨군 채 멍하니 있는 빅토르가 거기 겹쳐 보였다. 하나 더: 홍샤다오에 미사일이 떨어지기 직전 화상 통화를 건 이디스와, 4화 엔딩에서 대니얼의 죽음을 전하기 위해 가족 그룹 통화를 건 빅토르가 있다. 앞서 두 장면을 각각 묘사하며 동일하게 ‘이질적’이라는 수식을 붙였다. 구도가 다른 두 시퀀스에 작품이 부러 유사한 뉘앙스를 부여했다는 해석은 비약일 테지만, 역시 겹치는 데가 있었다.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불운과 불안의 기운이, ‘나쁜 뉴스’가 된다. 빅토르와 이디스는 ‘분위기를 깨는 자’[Sara Ahmed]들이다.
난민인 빅토르와 피폭당한 이디스의 신체는 이디스의 조모 뮤리엘보다도 죽음에 가까이 있다. 빅토르는 살아남을 방법을 고민하는 와중 오늘을 소중히 즐기고, 이디스는 죽음을 예감하며 세상의 그림자들을 조명한다. 이디스는 가족들이 모일 때마다, 잊지 말자는 듯 갇혀 있는 빅토르를 언급한다. 그는 ‘분위기를 깨기를 자처하는 자’, ‘비밀’을 끄집어내는 자, 자발적 아웃사이더다. 불평등하고 부당한 룰에 순응하길 거부하고, 불평하기도 전에 무너뜨릴 궁리를 시작하는 그는, 제 어머니의 딸인 동시에 누구의 딸도 아니다.
빅토르는 ‘그 자리에 있거나 언급되는 것만으로 분위기를 깨는 자’다. ‘햇살처럼 주위를 환하게 밝히는 이’ 임에도 그렇다. 비자발적 아웃사이더인 그는 둘 이상의 국가가 솎아내고 감춘 그림자, 비밀 그 자체다. 그는 자신을 고발한 친부모의 아들이 아니다. 그의 가족은 그를 숨겨 준 우크라이나의 친구들이고, 대니얼이고, “너의 부모는 역겨운 사람들”이라고 해 준 뮤리얼이다. 곁에 나란히 서서 손을 내미는 이디스다. 어떤 면에서 그는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지만, ‘아웃사이더’적 판단력을 유지하는 채로다. “우릴 가둬 놓고, 전염병을 들여와 퍼지게 내버려 둬. 아주 영국적이야.”, “영국에 있는 가족들이 날 찾을 거야.”: “어스트와일”에 갇힌 빅토르가 한 시퀀스에 각각 던지는 대사다. “고향에서도 타국에서도 기득권층의 룰에 들어맞지 않는 자였던 빅토르는, 라이언스 가족relatives을 자신의 가족family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섞여 용해되지 않고 ‘당당히 아웃사이더로 남는다.’”[INDIEPOST]
<이어즈 앤 이어즈>에서 혁명적 변화는 한쪽이 한쪽을 구하는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디스는 바깥에서, 빅토르는 수용소 안에서, ‘비비언 룩 정권 하에서 사라진 자들’에 대해 수소문한다. 빅토르가 전한 “어스트와일”이라는 이름은 중요한 단서가 된다. 스티븐에 의해 그가 “사라진 자”가 되자, 이디스와 프랜, 빅토르의 변호사 이본, 동생이 “사라진” 아흐메드, 아빠의 행동을 온라인으로 목격한 스티븐의 딸 배서니… 많은 이들이 모여 ‘빅토르를 건져내는 김에 세상을 뒤집는 작전’에 동참한다. 여기서 빅토르는 ‘구해지는 자’인 것 뿐 아니라 함께 세상을 뒤집는 자다. ‘구해진’ “어스트와일” 수용자가 카메라를 들어야만, ‘가로막힌’ “레드존” 주민들이 펜스를 들이받아야만, 그들이 “보여져야”만 혁명은 성공한다-고 작품은 말한다.
“지루한 일상”을 갈망했던 빅토르와 “지루한 일상”을 의심하던 이디스는 닮아 있었다. 빅토르는 (아마 난민이 되기 전부터) 안전망 바깥에서 살아 왔고, 이디스는 그 안팎을 오가며 균열을 가시화해 왔다. 그들은 ‘으레 그렇다고 믿어온 것들’ 너머의 세상을 꿰뚫어보며, 그것을 외면하지 않는다. ‘감시카메라 위치를 교묘하게 피해 입모양을 숨길 줄 아는’ 두 사람은, 빅토르가 대니얼의 남자친구가 아니었더라도 어디에선가 만나 ‘일을 꾸몄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디스에 대한 서술이 끝내 프랜에 닿듯, 빅토르를 설명하다 보면 대니얼을 돌이키게 된다. 그들은 연인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한다, 이방인으로 불리며, 기꺼이 이방인인 채로.
* 사라 아메드가 쓴 <행복의 약속>(2021년 후마니타스 번역본)을 읽다 쓰기 시작한 글이다. 빅토르와 이디스의 ‘이방인성’을 종합하는 데에 특히 도움을 받았다.
+ 마무리의 마무리
인류를 사랑하여 끊임없이 싸움에 말려드는 이디스, 대니얼을 통해 만난 그의 연인 프랜은 투덜대면서도 그의 곁에 남아 ‘문제에 휘말리’는, 자신보다는 세상을 돌보는 그,를 돌보는 이다. 비비언 룩이 체포되고 병 악화로 죽을 고비를 넘긴 이디스는, 기억과 의식을 용해해 네트워크로 옮기는 실험에 참여한다. ‘당신의 의식이 살아남을지 모르겠다’는 연구원들에게, 이디스는 그럴 것이라고 장담한다. “프랜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마침표가 될지도 모르는 순간, 그는 가족들과 세상에 대한 사랑을, 마지막으로 프랜에 대한 사랑을 떠올린다. 그리고 말한다, “I am love.” 새로운 형태로 돌아올 이디스를 기다리며- 빅토르는 프랜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프랜은 그 손을 잡는다. 카메라는 그 유대를 포착했다.
++ 하고많은 명대사 중 몇
1. 스페인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극좌 정권이 들어서고, 빅토르와 대니얼의 신혼 계획이 틀어진다. ‘좌익 정권이라고 하지 않았냐’고 의아해하는 대니얼에게 빅토르는 차분하게 답한다, “극좌익과 극우익은 결국 만나게 돼 있어.”
2. “어스트와일”을 빠져나가던 이디스와 프랜, 빅토르는 총을 든 가드들에게 가로막힌다. 빅토르가 “끌어들여서 미안하다”고 말하자, 이디스는 또 하나의 명대사를 날린다. “빅토르, 당신을 사랑하지만, 당신이 그 정도로 중요하진 않아요. 당신을 구하러 온 것도 있지만, 우린 전쟁을 시작하러 온 거거든요.” 이디스는 단호하고, 빅토르는 알아듣는다. 그리고 전파 방해탑이 폭파된다. 세 사람은 “어스트와일이 보여지도록” 낱낱이 촬영하며 호소하고, 배서니와 동료들의 연대로 라이브 영상이 퍼져나간다.
3. 과연 이디스는 칼 같은 데가 있고, 칼을 잘 쓴다. 그는 동생 로지와 연인 ‘존 조’의 로맨스가 깊은 관계로 발전할 무렵, 존 조의 목에 과도를 들이대며 ‘잘하라’고 경고한다. “세상엔 끔찍한 남자들이 있지만, 내가 지켜보고 있어요.” 다행히 존 조는 “커다란 감자칩을 찾으면 기뻐할 사람”, “음흉하지 않은” 남자다.
4. 첫 만남, 서류철을 들고 문을 연 대니얼에게 빅토르가 던진 작업 멘트는 다음과 같았다, “룸메이트로 온 줄 알았어요. 방을 같이 써야 한다고 들었거든요. 와우 운도 좋지,라고 생각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