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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가 걷히면

<노스페라투>(2024)

by 않인



<노스페라투(Nosferatu)>(2024, 로버트 애거스)

*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머리카락을 곱게 늘어뜨린 엘렌이 외로움에 눈물 흘리며 기도한다. 부름을 받은 영은 인간을 초월했으나 신이나 악마는 되지 못한 자, 뱀파이어다. 그와 올록은 혼인 서약을 맺는 대신 영혼 결합 의식을 치른다.(사기 결혼 같은데…) 홀린 채 한밤중에 땅바닥에 누워 성적 쾌감을 느끼는 듯 신음하던 엘렌은 돌연 비명을 지른다. 으르렁거리는 올록의 얼굴이 화면에 비친다. 깜짝 놀라기는 했으나, 그 낯을 다시 보게 될까 두렵지는 않았다. 썩어가는 나신은 초라했다. 영화의 세계에 적당히 어울리는 올록의 외모는 애초에 그 형태 자체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무언가로 디자인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당연한 소리이나, 빌 스카스가드의 신체에서 큰 키와 눈동자(중요하다) 정도만 남긴 듯한 올록의 분장은 현대적 뱀파이어보다는 고전적인 ‘드라큘라’다. 우아한 불로장생의 존재-햇빛을 받으면 불에 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가 아닌, 부패가 유예된 반사체다. 햇빛을 받으면 피를 쏟으며 말라비틀어진다. <노스페라투>에서 공포의 원인은 올록의 뾰족한 신체가 아니다. 가장 공포스러운 장면 중 하나는 올록의 성에 토마스가 도착한 날 밤의 시퀀스다. 커다란 코트를 입고 모자를 쓴 올록의 얼굴은 거의 드러나지 않고, 벽난로의 불은 방을 밝히기보다는 올록과 영화가 의도하는 대로 그의 몸 일부를 가리는 기능을 한다. 통째로 환상이었을 가능성이 있는 여관에서부터 차근차근 쌓인 토마스의 공포와 혼란은 극대화되고, 카메라는 니콜라스 홀트의 훌륭한 표정을 클로즈업하며 관객의 동일시를 이끌어낸다. 올록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토마스의 두려움은 증폭된다. 그가 올록의 관을 찾아내고 살해에 실패한 후 도망쳐 나오며 긴장감은 한 차례 해소되고, 성에서 뛰어내리며 그는 공포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다한다. 올록은 정체를 감추고 있기에 무섭고, 역병이 되어 인간을 포함한 동물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기에 무섭다. 관객은 올록의 성에 갇힌 토마스에게서 내 의지대로 몸이 통제되지 않는 상태의 공포를, 하딩 저택에 묶인 엘렌에게서 내 의지가 무엇인지조차 구별되지 않는 상태의 공포를 맛본다. 공포는 그림자에서 기인한다.

토마스가 끔찍한 경험을 하고 죽기 직전의 상태로 귀환하면서 엘렌은 오히려 더 이상 정신적으로 고립되지 않는다. ‘당신이 이야기하던 말도 안 되는 것들이 사실이었음’을 인정하는 토마스는 병상에 누운 지원군이다. 강건한 신체로 사랑하는 여자를 탐하는 괴물을 때려눕히는 남자가 아닌, 자신을 믿고 사랑하는 남자를 지키기 위해 죽음도 마다않는 여자, <노스페라투>의 로맨틱 히어로는 그쪽이다. 그리하여 사건을 해결하고 악을 물리치는 것은 프란츠의 ‘미신’과 엘렌의 본능이다. 엘렌의 물음에- 프리드리히처럼 단정하거나 지버스처럼 진단하고 설명하는 대신 프란츠는 침묵하고, 당신의 의지와 본능을 따르겠노라 선언한다. 픽션적 허용이 들어간 프란츠의 현명함은, 스스로의 무력함을 아는 데에서 오는 듯도 하다.

여성의 ‘본성’을 단정하는 근대 과학의 언어는 주로 프리드리히와 지버스 박사를 통해 전해지는데, 그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를 영화는 일종의 농담으로 소비한다. 그러나 또한 영화는 스스로 이성적이라고 여기는 두 사람을 조롱하기보단 그들이 지닌 낭만-각각 애나와 프란츠를 향한-에 주목한다. 당대 의학박사답게 엘렌의 피를 뽑는 처방을 내리던 지버스는 프란츠와 재회하자마자 그의 ‘미신’을 믿고 따르며 조력자 위치로 빠진다. 프리드리히는 애나가 병에 걸린 날 엘렌과 정면으로 대립한다. 근대 자본가 프리드리히의 위선과 우월감을 엘렌은 직설적으로 건드리며 비난하고, 프리드리히는 반박하기보단 고집을 피우며 엘렌이 꼬집었던 바로 그 태도를 대놓고 드러낸다. 올록과 전염병이 바다를 건넌 수단은 아이러니하게도 프리드리히 소유의 선박이었고, 그의 자본, ‘이성’, 무기, 그 무엇도 악에 대적할 수단이 되지 못한다. 애나와 두 딸이 올록에게 살해당하는 동안 주술에 걸려 총을 쥔 채 잠들어 있던 그는 (아마도 일부러) 역병에 걸려 아내의 시체를 끌어안고 죽기를 택한다. 자기파괴적 속죄를 허용하는 듯한 그 시퀀스는 끔찍하거나 변태스럽기보단 안타깝고 슬프게 다가온다.

(혹은: 올록이 지시한 희생물인 애나를 제외하고 주인공 중 아무도 걸리지 않은 역병에 프리드리히 혼자 걸린 까닭은, 그의 어리석은 오만함이 올록과 가장 닮아 있는 탓에 전염에 취약해서였을까? 과해석일 수도 있지만… 엘렌을 적대하는 프리드리히와 소유하고자 하는 올록 둘 모두에게서 미소지니스트의 악취가 풍기므로.)

<노스페라투>의 인물들은 이다지도 로맨틱하다(딱히 긍정적인 워딩은 아니다). 서로를 사랑해 목숨도 아끼지 않는 엘렌과 토마스, 친구 엘렌을 낭만적으로 보살피는 애나, 그런 애나를 ‘거부할 수 없다’고 버릇처럼 말하더니 결국 죽음도 거부하지 못한 프리드리히, 올록의 관심이 자신이 아닌 엘렌에게 쏠리는 것에 실망하고 관에 누워 쇠말뚝을 대신 받아들인 크녹, 학문적으로 대립하지만 스승-제자 간 암호를 주고받더니 금새 포옹하는 지버스와 프란츠 박사, 그리고 카운트 올록까지. 마지막 밤, 엘렌과 키스한 직후 화면 한가운데에 노출된 올록은 아직 옷을 입고 있으나 벌거벗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덴티티를 지우는 분장에서 살아남은 배우의 눈이 빛을 발하는 장면이 이쯤이다. 미스터리가 부재하는 낯에는 혼란이 자리하는데, 거의 연약해 보인다. 전능한 그림자이길 포기하며 그가 간절히 원한 것은 전애인-비슷한 인간과의 동침이다. 초인간인 그를 무너뜨리는 것은 집착과 소유욕, 지극히 인간적인 동기다.

엘렌은 악의 실체와 마주하고, 함께 끝을 맞이한다. 햇빛을 쐬고 피를 토하며 엘렌의 몸 위에 쓰러진 올록, 이어 숨이 끊어진 엘렌, 프란츠는 그들의 시체를 꽃으로 장식한다. 수명을 다한 두 몸은 겹쳐져 그로테스크한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엘렌의 부름으로 등장한 올록은 엘렌과 하나된 채 죽는다. 노스페라투의 비롯됨에 관한 설정이야 있지만, 영화 안에서 올록은 엘렌 없이 존재했던 적이 없다. “악은 내면에서 태어나는 걸까요, 외부에서 들어오는 걸까요.” 엘렌의 오래된 물음에 프란츠는 답하지 못했다. 영화는 결국 여성의 ‘본성’에 악과 혼돈이 내재함을 긍정하는 것일까? 아니면 여성을 ‘순수하고 희생적인’ ‘본성’으로 환원시키는 것일까. 글쎄, 그보다는… 욕망하는 여자가 불러주지 않는다면 관에서 나올수조차 없는, 그 여자가 마음을 돌리니 주변을 파괴하며 협박하다 몰락하는, 유해하고 보잘것없는 남성성의 화신에 관한 이야기라고 보는 편이 더 설득력 있을 테다. 혹은, 멋대로 짐작하면… 로버트 애거스는 그저 영화사에 예쁜(?) 호러 하나를 보태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달빛을 환하게 드리우며 어둠 속에서 관객의 시선을 따돌리지 않는 화면은, 전하는 핵심 정서가 무엇이든 자체로 아름답다. 그뿐인가, 부들부들 떠는 니콜라스 홀트의 섬세한 안면 근육, 두려움에 질려 있는 동시에 스스로 두려운 존재가 되는 릴리 로즈 뎁의 관능적인 흰자위, 줄곧 기능적인 역할을 수행하더니 머리카락과 함께 크레이지한 실소를 풀어헤치곤 퇴장한 엠마 코린, 단단한 척 하지만 누구보다 취약한 영혼을 눈동자에 투명하게 담는 애런 테일러-존슨… 여기까지만 하자. 사심을 잔뜩 채운 관객1은 재관람을 고민한다.

+

로버트 애거스 영화를 다시 보고 싶어졌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며 휘갈긴, 어쩌라고 싶은 글이다. 재관람하게 된다면 (콩깍지가 걷혀 실망하거나,) 뒤집어 엎고 제대로 된 리뷰를 쓸 가능성도 조금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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