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오브 어스 스트레인저스>(2023)
<올 오브 어스 스트레인저스(All of Us Strangers)>(2023, 앤드류 헤이)
*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나란히 실재하는 초현실
시나리오 도입부를 타이핑하던 애덤이 어린 시절 물건이 든 상자를 꺼낸다. 오래된 집 사진을 들여다보던 그가 창밖으로 눈을 돌려 달리는 기차를 내려다보면, 다음 장면에서 그는 기차에 타 있다. 이 방문은 상상이거나 환상, 혹은 창작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단 두 세대만 거주하는 아파트부터가 애덤의 내면에 건축된 것이며 화재 경보는 마음이 보내는 신호일 수도 있겠다는 짐작이 문득 들기도 한다. 허나 현실과 비현실을 구별하려는 시도는 <올 오브 어스 스트레인저스>를 이해하는 데 그다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건의 형태보다는 본질이나 성격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애덤은 그가 열 두 살 때 죽은, 이제 자신보다 젊은 부모의 영을 만나 영원히 해소되지 않을 물음에 대한 답을 듣고 실현되지 않을 대화를 수행한다. 애덤의 커밍아웃을 들은 엄마가 쏟아내는 불편한 질문들, 방안에서 울던 어린 애덤을 모른 척했던 아빠의 뒤늦은 사과와 포옹. 이러한 전개들이 인위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지만, 그 안에서 ‘엄마’와 ‘아빠’는 일관된 방향을 바라보고 움직인다. 그 형식이 불분명한 ‘부모와의 재회’의 본질은 애덤의 내면이 수행하는 자체 치유 과정일 수 있다.(“언제 끝날지는 우리가 정하는 게 아닌 거 같아.”라고 엄마는 말한다.)
부모의 집으로 처음 돌아간 날, 애덤은 음악에 맞춰 춤추는 부모를 흐뭇하게 바라본다. 카메라는 애덤을 등지고, 춤추는 부모와 거울에 비친 애덤의 상을 한 화면에 담는다. 거울 속 애덤의 시선 끝은 부모가 있는 위치와 일치하지 않고, 꼭 그가 닿을 수 없는 무언가를 상상하거나 추억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거울의 쓰임새는 애덤과 해리가 처음 만나는 장면과 유사하다. 노크를 듣고 애덤이 문을 열면, 해리가 현관에 서 있다. 측면에 붙은 거울이 카메라에 잡히며, 구조상 한데 담기기 힘든 두 사람의 옆모습이 한 화면에 담긴다. 그들은 마주 서 있지만, 거울 속 상인 해리의 시선과 실물인 애덤의 시선은 당연하게도 어긋나 있다. 그들은 상대방을 보고 있으나 보기 어려워한다, 혹은 서로를 보는 시선에 두려움이 필터처럼 끼어 있다. 부모의 집에 다녀온 애덤이 로비에서 해리를 만나 인사를 나누고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면, 그들은 한 방향을 보고 선다. 해리가 내리고, 애덤이 술자리를 제안한다. 답을 들을 겨를 없이 문이 닫히는 찰나, 돌아선 해리와 애덤은 마침내 마주 본다.
이쯤에서 오프닝을 돌이켜 본다. 동이 트자 푸른 하늘은 주황빛으로 가득 찼고, 애덤은 지워졌다. 타이틀 인 이후 소파에 무기력하게 늘어진 채 블루에 뒤덮인 애덤의 일상이 흐른다. 블루와 오렌지의 대비는 해리와의 첫 만남 직후에도 관찰된다. 애덤이 해리를 거절하고 문을 닫으면, 오렌지색 현관 센서등이 차단된 복도에 남겨진 해리는 검푸른 어둠에 둘러싸인다. 애덤은 어떤가, 타인이 머무른 흔적인 오렌지색이 거실의 절반만을 채운 와중 그는 여전히 검푸른 나머지 반의 영역으로 들어가 앉는다. 오렌지는 애덤 부모의 집 거실을 밝히는 색이기도 하다. 애덤이 죽은 부모에 대해 쓰기로 결심한 것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글 도입부를 타이핑하다 어린 시절 물건을 찾아보는 것은 해리와 만난 다음날로 보인다. 부모와의 만남은 해리를 알게 된 후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애덤은 해리에게서 동질감과 타인의 온기를 느꼈고, 무의식중에 ‘부모의 집’에서 그것을 얻으려 했던 것일까? 그러나 해리와의 로맨스가 과거 부모의 빈자리를 채워주지 않듯 부모와의 추억은 현재의 고독을 해결해주지 않는다. 두 관계는 다르다. 다르지만, 나란히 또 엮이며 진행된다.
애덤이 부모와 재회한 날 그는 해리와도 재회해 그를 먼저 초대하고, 엄마에게 커밍아웃한 날은 해리에게 위로 받은 후 그의 속마음을 듣는다. 그 다음 방문에서 아빠와 대화한 애덤은 해리의 손을 잡고 외출해 클럽으로 향한다. 내적 불안을 집약한 듯한 악몽을 꾸고 깨어나서, ‘가슴의 매듭’에 관해 해리에게 털어놓는다. 새롭고 특별한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행위, 그리고 과거의 관계를 현재의 자아가 방문하는 행위가 동시에 진행되며 애덤의 ‘매듭’을 풀 실마리는 빛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빛이라고 적으며 나는 클럽에서 애덤과 해리가 키스할 때 둘 사이에 솟아오른 섬광을 떠올리고 있다. 그 빛 역시 물리적 현실이 아니다.
애덤이 다가갈 용기를 낸 시점에 해리는 이미 영이었다. 두 번째 조우, 애덤이 로비에서 유리 너머로 목격하는 해리의 가슴께에서는 희미한 빛이 새고 있었다. 케타민을 흡입한 애덤의 꿈 속에서 해리는 거울에 반사되지 않거나 거울의 상으로만 보이고, 시야에 들어왔다가 다음 순간 벗어나기를 반복한다. 이는 해리의 형태에 관한 복선 이상으로, 애덤과 해리 모두가 은연중에 해리의 죽음을 인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나타낸다. 이야기 초반 발생했고 후반 공개되는 해리의 죽음은 충격보다는 예정된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반전이며, 그 반전은 결론이 아니다. 심지어 영화는 그의 물리적 형태는 중요치 않다고 말하려는 것도 같다.
애덤보다 열 몇 살 쯤 어린 것으로 추정되는 해리는 애덤이 ‘20대에 경험하지 못한 첫사랑’이거나 ‘구하지 못한 그때의 나’라고 적어볼 수도 있다. 허나 이 관계는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일방적으로 위로하거나 충족하는 식으로 맺어지지 않는다. 해리는 과거에 닿아 있는 판타지보다는 지금의 인물로 거기에 있다. 카메라가 애덤의 눈이 되는 일은 드물었으나, 대부분의 사물은 애덤의 시야 내에 머물렀다. 그러나 영화는 애덤에게 거절당하고 홀로 엘리베이터를 타는 숏을 삽입하며 해리를 독립된 타인으로 설정했다. 애덤이 “매듭”에 관해 털어놓을 때, 손으로 움켜쥔 가슴의 클로즈업 숏 다음 화면에 떠오르는 것은 해리의 얼굴이다. 해리의 시선을 삽입하며 영화는, 그가 애덤을 ‘정말로 보고 있다’고 말한다. 영화에는 해리를 보는 애덤만큼 애덤을 보는 해리가 있다.(애덤은 방에서 울던 어린 날부터 누군가에게 보아지기를 바랐던 게 아닐까.) 애덤이 폭우를 뒤집어쓰고 엄마에게 커밍아웃한 날, 열이 오른 그의 몸과 마음을 해리는 따뜻하게 감싸주며 자신의 속마음도 공유한다. 이튿날 부모님 집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애덤은 어린 해리일지도 모를 소년을 목격한다. 애덤이 물리 법칙을 뛰어넘어 부모와 재회하듯, 현재에 서로를 목격하는 그들은 과거의 서로 역시 목격한다.
공포를 나누는 유령, 우리 이방인 모두
다시 오프닝으로 돌아가 본다. 새벽 런던의 풍경을 보여준 영화는, 플랫 유리창 너머로 그것을 응시하는 애덤을 분리된 숏으로 잇는 대신 풍경에 오버랩시킨다. 꼭 그가 플랫에 갇혀 있는 듯 보이기도 하는데, 이후 화면 구성을 살피면 영화가 그를 일종의 자발적 감금 상태로 다루고 있다는 인상이 짙어진다. 불이 켜진 방과 꺼진 방의 빛 노출 차이로 나눈 프레임에 애덤을 가두거나, 밝은 창 곁에 선 애덤을 어두운 형상으로 촬영하며 도시에서 분리한다. 애덤은 “나 같은 사람에겐 대도시가 어울린다”고 여기면서도 이곳에 역시 속하지 않는다는 감각을 느끼고, “Not really”의 태도로 런던의 텅텅 빈 아파트에 고립돼 있다. 애덤과 동일시하기보다는 그를 관찰하는 카메라는 애덤이 보는 것을 촬영할 때 자주 그의 어깨너머에 자리잡는다. 평범한 숏으로 보고 넘길 수도 있지만, 화면 안에 그림자처럼 남는 신체 일부에 자꾸 눈길이 간다. 창에 기댄 검은 실루엣으로 처음 등장했던 해리가 애덤의 집에 들어와 커다란 창 곁에 나란히 서면, 그들은 두 개의 그림자, 도시의 유령이 된다. 그들의 데이트는 주로 애덤의 플랫에서 이루어지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 나오는 애덤의 대사 “너와 함께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선언이나 고백처럼 전달된다.
(새로운 관계를 맺는 행위가 그렇듯) 컴포트 존에서 벗어나는 행위에는 자신의 공포를 마주하겠다는 의지가 수반된다. 애덤이 클럽에서 흡입하는 케타민은 현실을 도피하게 해주기보다는 애덤의 내면에 숨어 있던 공포를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는 역할을 한다. 두 사람이 키스할 무렵 흘러나오는 음악은 애덤의 20대에 히트했을 ‘Death of a Party’(Blur)다. 클럽을 빠져 나와 일상을 보내는 모습이 뒤따르지만, 여전히 끊기지 않고 흐르는 곡을 통해 이 일련의 평화가 환각임이 암시된다. 별안간 클럽으로 돌아간 애덤은 해리를 목격하고, 해리가 사라지자 거울에 비친 애덤의 상은 분열되며 절규한다. 또다른 환각에서 애덤은 해리를 따라 지하철을 탄다. 해리는 시야에 들어왔다가 벗어나고, 애덤은 헛구역질을 동반한 거센 기침을 한다. 승객들은 그를 경계하듯 응시한다. 포스트 펜데믹 불안일까? 비틀거리며 앉은 애덤은 반대편 창에 비친, 역시 분열되며 절규하는 형상을 목격하는데, 그것은 갑자기 어린아이의 상으로 변한다. 오래 전부터 내재해 있던(애덤의 커밍아웃을 듣고 엄마가 걱정하는 바 중 하나인) 에이즈 공포가 표출된 것일 수 있다. 또한, 부모 사이에 누워 있던 애덤을 중심으로 카메라가 이동하며 그의 아버지가 해리로 변하고, 이어 어머니와 해리가 차례로 프레임에서 나가며 침대 위에 애덤 홀로 남는 연출은, 앞서 언급한 클럽 거울 환각과 더불어 부모가 죽기 전부터 존재했던 애덤의 소외 공포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기성의 사회가 개인에게 침투하는 경계에서 발생해 내면화되는 이 공포들은 감내하고 ‘극복’해야 하는 것일까, ‘극복’할 수는 있는 것일까?
<올 오브 어스 스트레인저스>가 애덤을 이끄는 치유의 여정에 해소나 삭제는 없다. 다만, 연결과 유대, “사랑의 힘”이 있다. “우리 집 문 앞에 뱀파이어가 있거든요.” 첫 만남, 애덤의 현관에 기대 뱉는 해리의 대사다. Frankie Goes to Hollywood의 히트송 ‘The Power of Love’를 인용한 플러팅이자 해리의 공포를 대변하는 문장이다. 화재 경보를 듣고도 대피하지 않았고 정적을 못 견뎌하는 해리와, 타인을 집에 들이기 주저하는 애덤의 공포는 언뜻 상반되는 듯하나 사실 겹친다. 아마 애덤이 들으며 자랐을 80년대 퀴어 팝 아이콘의 노래를 해리가 입에 올리도록 하는 제스처는 또한, 문화적 유산이 이어지듯 서로 다른 세대의 퀴어인 두 사람이 겪는 정서도 이어지고 있다는 암시가 아닐까 생각한다. 몇 차례에 걸쳐 애덤과 해리는 공포terror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거기 그들이 속한 각 세대의 퀴어가 경험하는 소외의 단면들이 있다. (영화는 ‘그때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이 괴로웠다’고 선을 긋지도, ‘그때도 지금도 똑같이 괴롭다’고 뭉뚱그리지도 않는다.) ‘퀴어’를 멸칭으로 기억하는 애덤은 “프루티tutti frutti”하다며 집단 따돌림을 당하고, 다리를 꼬는 것이 아버지에게 혼날 이유가 되었던 시대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지금은 괜찮지만, 사소한 것 하나에 그때로 돌아가버린다’고 그는 말한다. 반대로 ‘게이’를 조롱으로 겪은 해리는 부모가 자신의 커밍아웃을 ‘무리없이 받아들였다’고 말하지만, 결혼한 형제들이 중심을 차지하는 집안에서 가장자리로 밀려나 있는drifted to the edge 기분을 느낀다. 제목의 단어 ‘stranger’는 이 맥락에서 등장한다. 늘 스스로를 가족 안의 ‘stranger’로 인식해 왔고 커밍아웃이 그 위치를 못박았다는 해리의 대사는, ‘stranger’라는 표현을 ‘낯선 사람’이 아닌 ‘이방인’으로 옮기게 한다.
부모의 영혼과 작별인사를 나눈 애덤은, 해리의 시신을 당사자 대신 직면한다. 카메라에 잡히는 것은 입고 있는 상하의를 구별할 수 있는 허리께, 그리고 애덤이 집어든 빈 술병 정도다. “저 방에는 네가 없다”고 말하는 애덤처럼 배려심 깊게도, 영화는 죽은 해리의 낯을 보여주지 않는다. 해리가 애덤의 매듭을 함께 풀었듯, 애덤은 해리의 두려움을 함께 품는다. “혼자 있기에 너무 무서웠던” 사람과 “누군가를 들이기 너무 두려웠던” 사람의 마주침, 그들은 수 년을 건너온 ‘이질감’의 일부를 공유하며 서로를 보듬고 사랑한다. 가족relative에게서 얻을 수 없었던 종류의 위안이다. 첫 날, 카메라는 악수 후 놓지 못하는 해리의 손에서 머뭇머뭇 빠져나오는 애덤의 손을 클로즈업했다. 이날, 애덤은 해리를 몸으로 감싸안는다.
엔딩, 카메라는 같은 자세로 누워 한 덩어리가 된 두 사람을 천정 숏으로 촬영하며 천천히 멀어진다. 천정이 끝없이 올라가고 갈수록 주변은 어두워지며 그들이 아득한 심연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상승이었나보다. 점차 그들에게선 클럽 키스신의 섬광처럼- 빛이 새어나온다. 이내 그들은 하나의 빛점이 되고, 그 주위로 다른 점들이 빛난다. 스크린은 곧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이 된다. 애덤과 영혼들 사이를 다루며 영화가 선명하게 긍정하는 것은 사랑, 자녀와 몇십 년 전 죽은 부모 간 사랑이 현존하듯, 해리와 아담의 사랑도 수 광년을 흐른 별빛처럼 현존하고 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에너지와도 같다, 내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The Power of Love’)
감독 앤드류 헤이가 어린 시절에 살았던 집을 촬영지로 택했다는 사실은, 얼핏 애덤이 작가의 분신이라는 근거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가 도달하려는 장소는 그 집이 아니다. 부모와 분리되기 전부터 외로웠던 애덤과 부모 형제와 한집에 있으면서도 분리돼 있는 느낌을 받던 해리- 각 세대의 퀴어들이 감각할 여지가 있는 소외, 특수한 트라우마로 설명되지 않는 이방인적 정서, 영화는 거기에 닿으려 한다. 그렇기에 제목은 “All of Us Strangers우리 이방인 모두”다. ‘이방인은 당신 혼자가 아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자전적이면서 보편적이고, (감독의 말대로, 그리고 그가 엔딩에서 보여준 대로) “우주적”이다. <올 오브 어스 스트레인저스>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만남을 ‘진짜 있는 유령 이야기’로 되살리며, 작가와 주인공만이 아니라 ‘동료 이방인’ 관객에게도 치유의 여정을 선사한다.
* 참고
https://youtu.be/WtdRv6GT9Zg?si=s7dyDE35oZr0BI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