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플리트 언노운>(2024)
<컴플리트 언노운(A Complete Unknown)>(2024, 제임스 맨골드)
*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컴플리트 언노운>은 (영화 속)밥의 음악에 있는 ‘위대함’을 반응의 묘사에 기대 설득하려고 시도한다. 밥 딜런에게 영향을 받으며 수십년간 쌓인 대중음악의 퇴적층을 이미 직/간접적으로 접한 동시대의 관객에게, 화려한 기교나 퍼포먼스가 적은 (영화 속) 밥의 무대가 신선함이나 놀라움을 선사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걱정이라도 한 것일까. 감명 받은 동료 뮤지션, 프로듀서, 매니저, 관중의 얼굴들, 클로즈업의 연속은 퍼포먼스를 뚝뚝 끊으며 몰입을 방해하고 현장감을 떨어뜨린다. 감독은 이런 부작용을 예상치 못했을까? 혹은 의도된 ‘멋없음’일까. 그 리액션의 소용돌이에 가장 관심 없어 보이는 자는 그것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밥의 위대함을 설득하는 역할을 별로 성공적이지 않게 마친 장면들은 밥에 의해 버려진다.
영화의 말미에 친구들은 밥을 떠나보낸다. 실비는 시야 내에 있어도 좀체 잡히지 않는 밥을 자신이 떠난다. 피트는 우두커니 방 안에 앉아 있는 밥을 소란스러운 파티 너머로 스치듯 응시한다. 그에게 맺힌 희미한 미소는 다가가지 않음을 곧 보내줌으로 인식하게 한다. 조안은 바이크를 타고 호텔을 떠나는 밥과 눈길을 교환한다. 우디는 하모니카 연주를 작별인사처럼 남긴 밥을 창 너머에서 찾아 헤맨다. 이 장면은 밥이 거리를 걷다 사이렌 음을 내는 호루라기를 사는 순간과도 겹친다. 카메라는 상인의 시선에 머무르며 일부러 밥을 놓쳤다가, 길 건너편에서 되찾고는 그대로 놓아준다.
밥은 화면에서 발견되거나 화면을 벗어나곤 했다. 녹음 중인 스튜디오 구석에서 하모니카를 불며 튀어나오거나, 뉴워스가 공연하는 펍에 슬며시 들어온다. 아니면 그는 이동중이다. 걷거나 바이크에 올라 있을 때 그는 향하는 장소보다는 이동 자체에 관심이 있는 듯 보인다. 그러고 보면 이야기의 시작부터 밥은 길을 잘못 들었다. 뉴저지에서 우디 거스리를 찾아 왔다가, 그가 뉴저지에 있다는 것을 알고 되돌아갔다. 영화는 그 우연으로 밥, 우디, 피트가 한데 모였음을 암시한다. 이후 여러 번 재방문하는 우디의 병실도 도착지는 아니다. 어쩌면 길을 잃거나 헤매는 것이 목적인 것도 같다. 생방송에 늦어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합주처럼, 밥은 우연이 일으키는 불꽃을 반긴다. 이미 여러 번 불렀던 가사, 관중과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멜로디 따위는 그의 흥미를 끌지 않는다. 이동과 유동이야말로 밥의 속성인가. 카메라는 자주, 밥을 촬영하기보다는 그의 주위를 둘러가며 촬영하고, 움직이거나 빠져나가는 그를 따라다닌다.
밥의 태도는 부정과 미정(아직 정하지 않은)의 리액션들에서도 드러난다. ‘모르겠다’, ‘그게 아니다’, ‘포크가 뭔지 누가 정할 수 있단 말이냐’, ‘전향이라는 표현은 틀리다’… 그는 무엇이 되길 원하는 게 아니라 그저 거기 존재하기를 바라는 듯하다. ‘거기’가 어디인가는 세상이 그렇듯 매초 변하는 가운데, 그가 존재하고 말하는 방법은 (싱잉보단) 송라이팅이다. 때로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것으로 다가오기도 하는- 공연 씬이 유독 잦고 긴 까닭은 스크린 밖 관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밥의 공연은 조안의 공연에 대한 그의 첫인상처럼 “예쁠” 수 없고 사실 예쁨을 지양한다. 곡은 밥의 목소리다. 따라서 되도록 첫 소절부터 끝 소절까지 연주돼야 한다. <컴플리트 언노운>이 그리는 밥 딜런은 퍼포머나 스타보단 그 자신의 말대로 뮤지션이고 송라이터다.
영화는 밥이 ‘Like a Rolling Stone’을 부르는 뉴포트 페스티벌로 관객을 이끈다. 정확히는 피트가 연결선을 끊으려고 하자 뒤따라간 토시가 막는 순간이다. 토시는 가장 처음 밥을 알아본 친구 중 하나이되, 무대에 서거나 축제를 주도하는 피트와 달리 지켜보는 관찰자다. 일부 관중/팬들과 달리 요구하는 것도 없다. 토시는 내부와 외부의 경계에, 늘 “귀를 열어두는” 순수한 청자의 포지션에 배치돼 있다. 일렉기타를 든 밥이 밴드와 함께 여러 의미로 무대를 찢어tear apart놓는 광경을 바라보던 그가 피트를 단호하게 제지하는 제스처가, 영화의 클라이맥스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 대사도 몇 없는 인물인 토시의 반응이 무대 씬마다 나와야 했던 것이다. 밥의 목소리는 그 찰나 토시에게 닿았다.
+
(그 역량과는 상관 없이) 실존 인물을 연기하기에는 비적합한 배우가 아닌가 의심했던 티모시 샬라메는 ‘적합’ 이상이었다. 캐릭터의 재현보다는 이해와 해석에 힘쓰는 가운데 노래와 연주는 완벽히(그의 말을 변형해 빌려오면 ‘포크이므로 완벽하지 않게’) 해낸다. <듄> 관람 직전에도 어째서 폴 아트레이더스가 그여야만 했는지 의아해 했었다. 나름 팬인 주제에 나는 그가 뭔가 ‘새로운’ 역할을 하면 물음표부터 던지고, 스크린 위 티모시 샬라메는 어김없이 그것을 느낌표로 펴준다. 모니카 바바로의 연기는 처음 접했는데, 정말 반해버렸다. 저리도 감쪽같이 선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에드워드 노튼을 보면 좋은 의미로 신기하다. 넷플릭스 시리즈로 먼저 만났던 보이드 홀브룩 역시 멋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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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토드 헤인즈의 <아임 낫 데어>야말로, ‘움직이는 예술가’를 탁월하게 쉐이핑하는 영화라고 느낀다. 붙잡을 수 없음을 전제로 그려내는 비전형적이고 기발한 방법… 창작자도 그대로는 재사용할 수 없는 특허 같은 작업을 언급하는 것은 역시 조금 불공평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