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갈아엎은 수준의 수정본)
<에밀리아 페레즈(Emilia Pérez)>(2024, 자크 오디아르)
*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A gendering violence is the founding condition of human subjectivity; having a gender is the tribal tattoo that makes one’s personhood cognizable. I stood for a moment between the pains of two violations, the mark of gender and the unlivability of its absence. Could I say which one was worse? Or could I only say which one I felt could best be survived?”
“젠더링의 폭력은 인간 주관성의 토대가 되는 조건이다; 젠더를 가진다는 것은 누군가의 개성을 인식가능하게 만드는 종족의 문신이다. 젠더 표식과 ‘그것이 부재하는 삶을 사는 일의 불가능성’이라는, 두 가지 위반/침해의 고통 사이에 잠시 머물러 있었다. 어느 것이 더 최악인지 말할 수 있는가? 혹은 어느 것이 생존하기에 더 낫게 느껴진다고만 말할 수 있는가?”
- 수전 스트라이커** (출처 맨 하단에 표시)
생물학적 지정 성별을 기준으로 트랜스젠더 캐릭터를 캐스팅하는 일의 문제점은 최근 몇 년 동안 화제였다. 공개 당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캐스팅 이슈로 뒤늦게 도마에 오르는 작품들도 다수 있다. <대니쉬 걸>에서 ‘트랜스다운’ 연기로 찬사를 받았던 에디 레드메인의 경우처럼, 배우 당사자가 출연 결정을 돌아보는 발언을 하는 사례가 있을 정도다. 그러니, <에밀리아 페레즈>가 트랜스 역할에 트랜스 배우를 캐스팅한 것은 당위와 실리 모두의 측면에서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허나 원작에서는 신분 세탁의 수단이었던 에밀리아의 “성별 전환”을 인물이 원했던 바, 목적으로 재해석했다는 각색을 고려하면, 트랜스 배우의 캐스팅은 서사와 캐릭터에 ‘진실된 것’을 불어넣겠다는 의도의 반영으로 와닿기도 한다. 이를 통해 드러나는 바는 현실성의 추구보다는 일종의 진정성을 향한 욕심에 가깝다고 본다. 설정과 서사는 지나치게 특수해 비현실적이고, 그것을 묘사하는 형식은 뮤지컬이라는 초현실이다. 비현실적 서사는 영화가 ‘진짜’라고 말하는 무언가를 비유하기 위함이고, 초현실적 형식은 그 안에서 움직이는 인물들의 ‘진짜’를 보여주기 위함으로 보인다.
첫 관람 직후 조 샐다나가 다수 영화제에서 조연상 후보에 올랐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의아해했다. 후보에 올랐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노미네이션 카테고리 때문이었다. 굳이 주조연을 구분한다면 리타가 주인공으로 적합해 보였고 엔딩 크레딧에 가장 먼저 뜨는 이름도 ‘조 샐다나’다. 그럼에도 단 하나의 주연이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으로 좁혀져야 했던 까닭을 다음과 같이 짐작했다. 영화 밖에서는: 트랜스 배우인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에게 스포트라이트를 주기 위해, 영화 안에서는: <에밀리아 페레즈>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체화한 인물이 제목 그대로 에밀리아 페레즈였기 때문에. 부러 ‘체화’라는 표현을 썼다. 영화가 에밀리아의 몸을 특정한 방향으로 보여주는 데에 관심이 많은 듯해서다.
이분법에 걸린 트랜스의 몸
<에밀리아 페레즈>의 모든 트랜스 재현은 에밀리아 페레즈라는 주인공의 특수성에 맞춰져 있다. 재현의 올바름을 논하기 적합하지 않은 작품이라는 지적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이 글은, <에밀리아 페레즈>가 오히려 트랜스의 몸과 젠더 디스포리아를 ‘무언가’에 비유하려는 욕심을 품고 있다는 의심을 던지고자 한다. 이를 테면 ‘마니타스’와 ‘에밀리아’의 외모가 그토록 달라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일단 제시마저도 에밀리아를 알아보지 못하는 전개를 설득하기 위한 분장일 것이다. 배우의 트랜지션 이전 외모에 관한 상상을 차단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처럼 영화 안팎의 기능 말고 정말로, 이들이 거의 ‘다른 사람’으로 보여야 했던 까닭은 무엇인가?
에밀리아에게 있어 그 ‘진정성’은 자주 몸과 연결된다. 호르몬 처방을 받고 있다면서 가슴을 열어젖히는 행위가 그 시작이다. ‘나는 여자’라는 주장의 진정성은 화학적, 물리적 케어로 인한 신체의 극적인 변화와 고통을 감내하는 종류의 것으로 표현된다. 얼굴에 붕대를 감은 에밀리아가 거울로 다리 사이를 비추어보며 참았던 숨을 내쉬듯 웃음을 터트리는 모습, 리타와 재회해 “고통을 겪었지만 그럴 가치가 있었다”고 울먹이며 털어놓는 모습, 수술을 집도할 의사에게 전하는 이야기로는 충분치 않다고 판단한 것일까, 영화는 그러한 묘사들로 에밀리아의 진심을 설득한다. 그러므로 이미 수없이 이루어진 “La Vaginoplastia” 넘버에 관한 비판은 이 맥락에서 다시 한 번 필요하다. 이 씬은 ‘penis-man / vagina-woman’의 구분을 그대로 가져가며, 젠더 트랜지션을 오로지 “성별 전환sex change” 수술로 다룬다. 오랫동안 성기를 중심으로 성별화된 신체를 만들어내는 수술과 결합돼 인식되어 온 트랜스의 몸, 원하는 젠더로 스스로를 일컬으려면 의사의 ‘승인’ 아래 촘촘히 해부돼 각각 특정한 형태를 ‘획득’해야 한다고 여겨져 온 트랜스의 몸, 붕대를 친친 감은 채 인위적으로 활짝 웃는 트랜스 앙상블은 이러한 몸자체, 소품으로 다루어진다. 이를 무비판적으로 전시해 볼거리로 소비하는 묘사 자체의 위험성은, 이 씬이 사실상 트랜스의 몸을 바라보는 영화의 ‘무의식’적 관점일 가능성과 엮여 더욱 심각해진다.
이후 텔아비브에서 이루어지는 닥터 와서만과 리타의 대화는 보다 ‘진실되게’ 들리기도 한다. 허나 에밀리아를 일컫는 “he”, “Mr.” 따위 젠더 지칭어를 문제삼지 않는다 해도 리타는 사실상 ‘여성적인 몸’으로의 “전환”이 에밀리아를 ‘여자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주장한다. (트랜스 당사자이거나 트랜스 이슈에 관심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관객은 방콕 클리닉에서 리타가 사전조사한 수술 중 일부를 받아 에밀리아의 몸이 ‘여성의 것’으로 재형성 되었으리라고, 그리하여 ‘비로소 여자가 되었’으리라고 상상하게 될 것이다. “La Vaginoplastia” 넘버 초반, “당신이 받을 건가요?”라는 의사의 물음에 리타는 “No.”라고 답한다. 이때 동반되는 애매모호한 반응이 인상에 남는다. 뮤지컬 넘버 가사로 직설되지 않는 숨겨진 심리, 트랜스 여성의 몸은 결국 리타와 같은 ‘여성성’을 ‘획득’할 수 없다는 영화의 관점이 슬쩍 드러난 찰나가 아닌가. 첫 대면에서 호르몬 투여 중인 에밀리아가 앞섶을 열어젖히자 숨을 헉 들이쉬던 리타가 이와 겹쳐진다. 수염과 유방을 동시에 가진 몸은 어떤 (기겁할 만한) ‘단계’일 수는 있어도 ‘그대로 정상적일’ 수는 없다는 것인가. 인물의 관점이 곧 영화의 관점이라는 일차원적 해석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같은 태도를 영화가 ‘자연스러운/그럴법한 리액션’으로 여기고 있다면, 이야말로 영화의 무의식이 ‘드러나버린’ 순간들은 아닌지 의심해보는 것이다.
관찰자의 시선을 경유해 보여지는 것들
다시 리타의 역할을 되새겨 보자. 작품 초반, 리타가 타이핑하는 모두진술은 뮤지컬 넘버의 가사가 된다. 그 스스로 믿지 않는 문장들을 상사가 외워 뱉을 때, 리타는 옆에 앉은 의뢰인 멘도사, 아내를 살해한 남자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속으로 평가한다. 줄곧 감정이나 상태만을 노래하는 에밀리아(&제시)와 달리 그는 감정만이 아니라 생각과 가치판단을 말하며 때로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영화는 관객이 리타의 관점을 따라갈 것을 요구하고, 때로는 작가의 목소리로 사용한다. 그는 에밀리아의 신분 세탁과 젠더긍정gender-affirming 수술 과정에서 대리인처럼 움직였고, 영국에서의 재회 후에는 그림자처럼 일하게 된다. 과거를 숨긴 에밀리아가 NGO의 얼굴로 나서며, 그의 과거와 현재 외모/행적을 모두 아는 유일한 인물인 리타는 한 발 물러나 그를 관찰하고 평가하는 위치에 자리잡는 것이다.
자선 행사 씬을 알리는 숏을 살피면 어두운 배경에 “라 루세시타”의 현수막이 휘날리고 있다. 영화는 이러한 톤의 연출을 카르텔/‘카르텔적인 것’을 표현할 때 써 왔다. 에밀리아가 행사에 과거의 인맥인 부패한 기업가들과 관료들을 초대한 것을 본 리타의 사회풍자 넘버는, 에밀리아의 연설에 맞물려 흐른다. 예의 무대 조명을 드리우고 리타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따라가는 가운데, 영화는 연단에 선 에밀리아의 연설을 코러스나 추임새마냥 끼워 넣는다. 리타는 에밀리아와 더불어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도덕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평가하는 것은 에밀리아의 선의까지다. 연설 뿐 아니라 직전 씬 방송에서 한 호소마저 한데 휩싸여 공허하게 울리며 추락한다. 에밀리아에겐 수단의 관성과 목적의 선의가 공존한다. 리타가 의문을 가진다면 그 지점은 행위/지위에 있지 몸/젠더에 있지 않을 테다. 허나 이 전에도 후에도 꾸준히, ‘남성-마니타스-범죄조직 보스’/‘여성-에밀리아-NGO 대표’의 상을 일치시키는 방향의 묘사가 계속된다. 이 맥락에서, ‘당신의 말과 행위는 위선/모순이다’라는 지적이 ‘당신의 존재는 위선/모순이다’라는 감각으로 전염될 위험성은 없는가.
자주, 에밀리아의 언행 근처에는 그를 응시하는 리타의 클로즈업숏이 끼어 있다. 그것을 단지 평가하는 눈초리로만 뭉뚱그릴 수는 없을 테다. 허나 영화의 말미 리타가 에밀리아에게 표하는 감사가 일종의 ‘인정’보단 우정에 가깝다 해도, 뒤따르는 전개에서 리타는 다시 에밀리아의 관찰자, 해결사, 평가자가 되어버린다. 과거 행동 방식을 버리지 못했기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 이후 에밀리아는 납치된다. 리타는 에밀리아의 이미지 뒤에 가려진 “라 루세시타”의 영웅, 그리고 ‘에밀리아를 그 자신에게서 구하려고 시도하지만’ 실패하는 에밀리아의 영웅이다. 그가 에밀리아와 제시의 아이들을 거두는 ‘완벽한’ 결말로 이야기는 사실상 맺힌다. 에피파니아를 중심으로 에밀리아를 애도하는 군중이 행진하는, 추가된 엔딩 씬에는 에밀리아의 실체는 물론 사진도 없다. 관객이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은 손가락이 잘리고 무기력하게 늘어진 몸이다. 사욕이 불씨 역할을 해 죽음을 맞이한 에밀리아를 기리는 말들이, 그를 본딴 인형처럼 영혼이 결여된 언어로 들리지 않는가. <에밀리아 페레즈>가 말하는 ‘에밀리아 페레즈’는 혼란과 모순, “비밀”에 싸여 인형에 박제된 이름이다.
인물의 유일한 본질이 돼버린 트랜지션
에밀리아의 젠더 정체성은 처음부터 ‘에밀리아’였으나, 행위/지위-정체성은 과거 카르텔 보스와 “라 루세시타”의 얼굴이 뒤섞여 있는 채다. 인간의 ‘정체성’은 종류별로 나뉘는 것이 아닐 테니, ‘캐릭터의 복합성’을 모든 위화감의 원인으로 얼버무리면 될까. 에밀리아의 외적 트랜지션이 행위/지위-정체성의 탈바꿈과 결합돼 있기에, 의문과 우려의 순간들에 기계적인 설명을 덧붙이는 것은 가능하다. 설명이 되므로 포개지는 느낌과 이미지들을 들여다보지 않고 넘길 여지가 있다는 점, 이것이야말로 문제다. 이를 테면 제시와의 갈등 상황에서 튀어나오는 카르텔 보스다운 면모를 표현하기 위해 배우에게 규범적 남성성을 주문한 이유는 무엇인가. 허면 뒤집어 생각해보자, 특수한 설정들과 우연의 사건들은 (어쩌면 자각하지 못하는) 편견이 담긴 트랜스 상을 구성하기 위한 변명과 위장은 아닌가. 영화는 에피파니아와 사랑에 빠진 에밀리아에게 “half he/ half she.”라는 문구가 들어가는 넘버를 부르게 만든다. 트랜지션 후에도 젠더 디스포리아는 있을 수 있고, 스스로를 꼭 ‘남자’이거나 ‘여자’로 정의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영화는 가사 속에서 이어지는 다른 대조, “아빠/고모”, “부자/가난뱅이” 등을 정확히 대입되고 이분되는 정체성으로 다루며, 에밀리아의 존재를 모순으로 그려내고 있다. 특수한 설정을 통해 ‘그럴 수 밖에 없는’, ‘그렇게 그릴 수 밖에 없는’ 전개를 이어가지만 그 과정에서 편견은 수 차례 재생산된다. <에밀리아 페레즈>는 젠더 트랜지션을 ‘이전 삶의 청산’ 따위로 인식하고 있으며, 페니스를 가지고 태어난 이가 여자가 ‘되는’ 것은 마약상이 죽음을 위장해 NGO 대표가 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그리 바꾸었음에도 “half he, half she”일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닌가?
트랜지션의 과정과 형태는 다양할 것이다. 말할 수 있는 것은 과거의 청산이나 일시적 전환이 아니라는 점, 에밀리아가 말했듯 ‘진짜 나를 찾는’ 여정에 가깝다는 점이다. <에밀리아 페레즈>는 트랜스젠더를 좁은 의미의 mtf(male to female), ftm(female to male) 트랜스섹슈얼로만 바라보며 ‘여성-여성적인 몸과 행위/남성-남성적인 몸과 행위’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와중 트랜스젠더라는 점을 에밀리아의 특성 중 하나로 다루기보단, 트랜지션이야말로 그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본질이 트랜지션’이라는 표현은 유동적/모호한 정체성을 긍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트랜스의 젠더 모호성을 긍정한다고 착각하기 쉬운 묘사들은, 트랜스를 ‘이 성sex에서 저 성으로 전환된, 그럼에도 이전의 성이 드러나는 모순적인 몸’으로 인식하는 사고에 바탕을 두고 있거나, 실수로 그러한 이미지를 고착화한다. 영화는 젠더긍정 수술, 특히 bottom surgery(성기의 모양을 변하게 하는 수술들)를 한 주인공이 겪는 젠더 디스포리아를 과거 행동 방식의 재발현에 빗댄다(여기서 디스포리아의 원인이 ‘트랜스 본인이 행동 방식을 바꾸지 않아서’라는 오해의 가능성 또한 발생한다). 극단적인 신분 세탁을 젠더 트랜지션과 결합해 ‘공존해선 안되는 것의 공존’으로 묘사하고, 더 심각하게는 신분 세탁의 서사와 트랜지션 서사를 대칭/일치시켜 후자를 표현할 방법으로 전자를 사용하는 것처럼 보일 위험마저 지닌다.
위에 적은 내용이 영화의 의도와 다르다면, ‘진정성’을 불어넣기 위한 각색이 오히려 걸림돌로 작용한 것일 테다. 영화 초반 닥터 와서만을 설득하던 리타는 “신사 숙녀 여러분”에 이어 “그 사이에 있는 이들”과 “그 누구도 아니었던 이들”을 호명하며 카메라를 응시한다.("Ladies and gentlemen, and everyone in between, and everybody no one has ever been. I will never let you down!“) <양들의 침묵>, ‘우리는 트랜스섹슈얼리즘과 범죄심리를 연결짓고 있지 않다’고 요약설명하는 클라리스와 한니발의 대화처럼, ‘우리는 성별 이분법에 얽매여 있지 않다’는 변명처럼 들리지 않는가. “그대들을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장담은 화려한 전시로 빈 핵을 가리는 영화의 태도와 닮았다. 글에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화려하고 독특한 세트 디자인과 다재다능한 배우들의 퍼포먼스는 물론 멋지다. 인물의 심리를 직설하거나 사회를 비판하며 영화 안팎의 세계를 연결하는 수단으로 파악했던 뮤지컬, 돌이켜 보면 뮤지컬이라는 형식이야말로 영화가 도달하고자 했던 목적지라는 생각도 든다. 은유 안에 담긴 것마저 형식을 전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차라리 그편이 <에밀리아 페레즈>의 유해성을 덜어내는 해석일지도 모르겠다.
** 참고 문헌: Susan Stryker, 1994, “My Words to Victor Frankenstein Above the Village of Chamounix: Performing Transgender Rage”, <GLO: A journal of Lesbian & Gay Studies Vol. 1> (pp. 250) ⓒ Gordon and Breach Science Publishers SA,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