괄호 잔뜩 러프 스케치
<양들의 침묵>(1991),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2013) 속 트랜스 재현
Feat. <디스클로저: 트랜스 리브스 온 스크린>(2020)
* 위 작품들의 장면 포함
<양들의 침묵>은 클라리스와 한니발의 요약적 대화로 ‘버팔로 빌은 트랜스섹슈얼(당시 용어)이 아니(므로, 이 영화는 트랜스를 차별하는 게 아니)’라는 서술을 빠르게 마친다. 그러나 빌이 트랜스가 아닌 이유를 “트랜스섹슈얼은 수동적”이라는 고정관념으로 대고는, ‘트랜스 페미닌(’여성‘만으로 한정되지 않는, ’여성적인‘ 몸들)은 시스 여성을 모방하고 질투하며 위협한다’는 잘못된 신화myth를 ‘빌이 여성의 가죽을 벗겨 옷으로 만든다’는 공포스러운 설정으로 극화한다. 이 두 지점은 다큐멘터리 <디스클로저>가 정확히 짚은 바 있다. 허나 <디스클로저>가 양들의 침묵을 비판하며 언급하지 않는 바는 빌의 패러디적 젠더 수행 자체다. 트랜스 여성은 오랫동안 ‘사실은 남자’라고 의심받으며 위협/조롱거리로 취급되어 왔으므로, 빌과 거리를 두고자 하는 제스처는 매우 이해가능하다. 트랜스젠더 유명인들의 인터뷰로 구성돼 있는 작품이기도 하니,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 빌을 옹호한다는 감각은 피해야 했을 것이다.
‘빌이 트랜스가 아님’을 <양들의 침묵>이 정말로 ‘알고 있는’가, 혹은 빌은 정말로 트랜스가 아닌가?라는 물음을 던질 필요를 느낀다. 애초에 이분법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그 ‘여부’와 관계없이, 빌의 폭력성과 규범에 어긋나는 젠더 수행을 단단히 결합한 묘사 방식은 위험하다. <양들의 침묵>은 성‘전환’ 수술에 관해 ‘의사의 승인’을 받지 못한 트랜스페미닌을 트라우마, 질병, 연쇄살인과 연결시키며 문제적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제시한다. 단단한 근육과 메이크업 동작, 굵은 음성으로 성적인 대사를 중얼거리는 입을 클로즈업으로 촬영해, 구덩이에 갇혀 절망을 표출하는 피해자와 교차편집한다. 빌의 폭력성을 ‘남성성 수행’과 ‘여성성 수행’이 충돌하는 그의 몸에 대입시키며, 규범적 성을 실천하지 않는 인물이 ‘병적이다’, ‘괴물스럽다’, ‘위험하다’는 부정적인 상상을 고착화하는 것이다. 빌이 집착적으로 수집하는 나비/나방은 ‘변태transform해 여자가 되고 싶다’는 빌의 욕망의 반영, ‘비정상성’의 또다른 상징이 된다. 수사 중이던 클라리스가 빌의 정체를 감지하는 계기가 ‘빠져나온 나비’였음을 떠올린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속 트랜스젠더 캐릭터 레이온과 겹치는 이미지 역시 나비다. 위독한 상태로 병원에 누워 있는 레이온의 모습에, 멕시코에 있는 주인공 로니가 창고 가득 날아다니는 나비를 목격하는 초현실적인 장면이 뒤따른다. 이어지는 건 레이온이 마지막 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브러쉬가 힘없이 툭 떨어지는 숏, 이때 레이온의 얼굴은 거울상으로 보여진다. 영화는 나비라는 상징에서 버팔로 빌을 걷어내는 데 성공하지만, 거기에 ‘비극적 죽음, 영원한 허상’이라는 또다른 이미지를 덧씌운다. 레이온은(트랜스젠더는) 이번 생을 마감하고 나서야 자유롭게 날 수 있는, 살아서는 ‘스스로를 엉망으로 만드는’ 레퍼토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인가. 이에 앞서 레이온은 화장을 지우고 남성용 수트를 차려입은 채 부친을 찾아가, “내게 친절했던 사람”에게 “빚을 갚게repay that debt” 해 달라며 금전적 지원을 요청한 바 있었다. 고맙다고 하는 이는 돈을 받는 로니가 아닌 레이온이었고. 일관성 있게도, 레이온의 죽음 직후 영화는 그것을 뒤늦게 알게 된 로니의 울분에 주목한다.
‘영화의 바탕이 된 실화에는 없던 인물’이라고 <디스클로저>가 짚는 레이온은 아마도 처음부터 죽을 운명이었다. 영화의 시간을 한참 전으로 되돌려 보자. 레이온과 함께 장을 보러 마트에 간 로니가 전ex친구 TJ를 마주치는 장면이 있다. 그는 이성애자인 로니가 HIV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음을 알고는 동성애혐오적으로 조롱한 전적이 있는 남자다. 레이온이 로니의 일행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TJ는, 진한 화장을 하고 스커트를 입은 레이온의 외모를 f워드로 조롱한다. 그러자 로니는 레이온을 부르고 TJ에게 소개하며 악수를 권한다. TJ는 당황해 꺼려하고 레이온은 익숙한 일이라는 듯 수긍하지만, 로니는 TJ에게 헤드락을 걸고 강요한다. 결국 TJ는 레이온의 손을 잡았다가, 로니가 놓아주자 바지에 여러 번 손을 닦는다. 역시 퀴어혐오적인 발언을 일삼았으며 첫 만남에서는 레이온과의 접촉을 대놓고 꺼려했던- 로니가, 편견을 극복하고 성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에 맞서는 감동적인 장면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왠지 의기양양해진 로니의 의도가 의심스럽다. 그가 과거에 TJ와 옛 동료들의 조롱에 분노했던 원인은 (정확히), 혐오발언의 내용이 아니라 ‘나를 감히 동성애자로 여긴다’는 데에 있었다. 물론 레이온을 비롯한 성적 소수자들과 교류하며 그의 편견은 완화됐다. 헌데 TJ와 레이온을 ‘닿게’ 만든 고집은 대체 어디서 비롯되었나, 레이온이 당한 폭력에 대한 분노인가, 아니면 일종의 ‘복수심’인가. 나는 후자가 섞여 있다고 의심한다. 여기서 레이온은 로니에게조차 아직 비체로 소비되고 있거나, 자신을 ‘인정’해주는 이성애자가 맞서야 ‘악수를 받을’ 수 있는 힘없는 자로 그려진다. 로니의 퀴어포비아 탈피가 불완전하다는 점을 문제삼으려는 건 (당연히) 아니다. 문제는 이어지는 숏으로 인해 더 선명히 드러나는, 장면의 의도에 있다. 사건 직후 영화는 로니를 (고맙다는 듯)응시하는 레이온의 수줍은 시선과 엷은 미소를 조명한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은 줄곧 로니의 심리적 변화와 영웅적 면모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레이온을 다루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편견에 겹겹이 싸여 있던 로니가 탈피를 시도하는 동안 혹시 창작자들은 번데기에 머물러 있던 것은 아닌가.
조롱의 대상이나 위험한 존재, 비극적 결론을 이미 가지고 구성된 인물. 할리우드(만이 아닐 테다)의 트랜스젠더/젠더퀴어 재현의 고질적인 문제를 품은 두 사례를 설명했다. 이러한 비판은 현재에 다소 당연해지기도 했는데, 올바른 재현의 방향성은 아직 당연하지 않은 것 같다. (<에밀리아 페레즈>는 재현의 문제가 단지 당사자성을 지닌 배우의 캐스팅으로 해결되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트랜스의 몸은 영화의 문법으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묘사되어야 하는가-따위 명확한 기준을 세울 수는 없겠으나, 판단의 바탕을 쌓아갈 수는 있지 않을까. 여기서 그 표면이 퇴색되어버린 표현,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해 재고할 필요가 있다. PC는 (자주 오해되듯) 전면에 전시되는 방식이 아니어도 체화할 수 있는 것이다. 티내야 하는 것, 도착점, 결과물보다는(그런 방향을 바라보아 성공하는 작품들도 있지만) 품고 있는 것, 출발점, 토대에 가까워야 한다. 그야말로 ‘감수성’이다. 관객이 작품을 관람하며 그 수행과 재현에 갑갑함을 느낀다면, 첫째로 그동안 특정 형상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인물 묘사에 익숙해진 탓일 수 있다. 둘째로는 작품이 PC를 납작하게 전시하기 때문일 수 있다. 감수성, 토대여야 할 무언가를 다양한 해석을 차단하는데다 어울리지 않는 도달점으로 다루거나 그저 외형으로만 나열하는 선택들은 역효과를 일으킨다. "그런 기분 알아? 영화관에서 다들 웃는데 나만 이해가 안 돼서 가만히 있는 거." (-노미 막스, <센스8> 시즌1, 8화): ‘정치적 올바름의 감수성’을 직관적으로 나타내는 대사다. 특정한 재현이 어떤 이를 웃고 울게 하고 어떤 이를 가만히 있게 하는가, 그것이 나를 가만히 있게 만든다면 그 까닭은 무엇인가, 픽션을 소비하며 이런 물음들을 던져 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