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스>에 관해

<드림스(Dreams)>(2025, 미셸 프랑코)

by 않인


*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혼돈의.. 메모.. 어수선 주의)



그 폭력에 관해


<드림스>를 관람한 후 나는 페르난도가 저지른 강간을 계속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만 아니었더라면 완전히 그의 ‘편’이 되었으리라 생각하며, 왜 그것이 거기에 있는가를 자꾸 묻게 됐다. ‘편’이 될 수 있었다면 나는 곱씹는 대신 -영화가 명백한 정치적 선언을 하고 있다는- 빠르고 쉬운 판단을 내려버렸을까. 감독은 어떤 관객들이 편을 들고 마음을 놓을 수 없기를, 이 모든 지저분한 사건사고를 거리를 두고 불편하게 인식하기를 바랐던 걸까.


방에 갇혀 생리현상의 프라이버시도 보장받지 못하는 제니퍼의 상황은 무언가의 은유라고 적을 여지가 없진 않다, 특히 영화의 오프닝을 떠올린다면. 하지만 성폭력은 은유도 아니고 은유로 쓰일 수도 없다. 성욕이 거의 감지되지 않는 강간이 거기 있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어쩌면 그건 ‘페르난도’라면, 그 상태에서 어떤 복수…를 택할 것 같은가,라는 물음에 대한 작가ㆍ감독의 편치 않은 답변이리라 짐작한다. 페르난도는 제니퍼로부터 자신을 이민국에 리포트한 것이 본인이라는 고백을 들은 참이었다. ‘나와 같이 있고 싶냐’고 묻고 제니퍼가 긍정하자 감금했다. 페르난도가 저지르는 폭력들은 이러한 식의 뒤틀린 논리를 따른다. (짚고 넘어가면, 이어지는 내용은 페르난도에 대한 옹호가 아니라 짐작과 해석이다.) 비백인 이주민 남성을 악마화하는 프레임 중 하나는 ‘강간범’이다. 이 맥락에서 본다면 성폭행은 제니퍼를 향한 -당신이 나를 ‘그렇게’ 본다면 정말로 그런 인간이 되어주겠다는- 메시지인 동시에, 이들의 열정적인 사랑 표현이자 가장 솔직한 소통법이었던 섹스를 다시는 전과 같은 성격의 행위로 복구할 수 없도록 찢어발기는 자폭이 아닐까. 절대 ‘응당한 대가’의 부여 따위가 아니다. 상쇄될 수 없는 지저분한 폭력의 교환이다. 영화는 적어도 여기서는 관객이 페르난도에게 공감하길 바라지 않는다. 더불어 이 씬에는 인물의 실제 동기와는 상관 없는, 영화가 의도한 상징성이 있을지도 모른다.(은유에 해당하진 않는다) 영화가 페르난도의 신체를 때로는 발레 동작과 함께 시간을 들여 관찰해 왔다는 점과 연결해: 이는 어떤 ‘타고나길’ 육체적으로 뛰어나고 아름다운, 위험한 느낌을 주지만 사실 위험하지 않은(펍에서 일하던 페르난도를 만취한 백인 여성들이 성추행하는 장면을 보라.), 높은 확률로 ‘악센트’가 있는 영어를 구사하는, 젊고 ‘이국적’인 비백인에 대한 판타지를 시각적 충격으로 배반하는 연출이다.


‘연인’에 관해


이 사건에는 특수하게 꼬인 전사가 있고, 페르난도는-아무리 모든 개체가 특별하다 해도-지나치게 비범한 인물로 그려진다. 오프닝에서 그가 화물차 짐칸에서 나오자마자 다른 밀입국자들과 분리돼 걷기 시작했음을 떠올린다. 두 사람이 무언가-이를테면 국가-를 상징한다는 거대한 해석을 내놓고픈 욕심이 들지 않는 건 아니나, 그런 식의 읽기엔 위험성이 있다.(뒤에서 이런 류의 해석도 추가로 언급은 해볼 테지만, 특수한 전제 하에서다.) 물론 영화는 제니퍼와 페르난도의 상황과 선택을 그리는 동안 미국 사회의 인종주의와 그에 기반한 폭력적인 이주민 정책을 폭로한다. 그러나 이들 자체는 각자 특수하고 엉망인 인간들이 아닌가. 제니퍼의 부친과 형제는 뭔갈 대표한다고 할 가능성도 있겠지만, 제니퍼는 보다 복잡하다. 그는 부친의 자본을 세습한 기업가이나 권위는 그의 형제에게 몰려 세습된 것처럼 보인다. 부친은 아들과 딸을 나란히 소개하면서, 딸이 기획한 사업을 마치 (실은 반대했던)아들이 기획한 것처럼 포장한다. 그리고 제니퍼를 ‘내 사업을 꾸준히 보조해 준 예쁜 딸’로 수식한다. 제니퍼가 아이를 못 가진다는 정보가 언급된다는 점, 더불어 페르난도에게 ‘챙겨주고 싶다’고 하는 순간이 굳이 보여진다는 점과 연결해보면: 제니퍼에게 있어 페르난도는, 사랑하는 연인이자 (실제로 아들이 있다면 그보단 어릴 테지만)유사 아들, 공식적으로 크레딧을 얻지 못한 ‘내 사업’의 살아 숨쉬는 물증, 따위의 투사가 함께 얽혀 있는 존재라는 암시를 영화가 하고 있는 것 같다. 그가 페르난도와의 관계를 공식화하길 꺼리는 까닭은 자신보다 훨씬 어린 멕시코인이어서겠으나 그게 다는 아니라는 얘기다. 영화 초반 페르난도가 ‘내가 부끄럽냐’고 물었을 때 제니퍼의 정확한 대답은 “Right.”이었는데, ‘응/그래’라는 긍정보단 ‘그래, 너는 그렇게 생각하겠지’에 가까운, 미묘한 톤의 표현으로 들렸다.


반면 페르난도의 감정은-적어도 스스로 말하는 바에 따르면-불타오르는 사랑과 욕망 그 자체다. 그는 연인과 함께 하기 위해 화물차 짐칸에 갇혀 국경을 넘었음에도 상대방이 부끄러워하는 관계 따윈 필요 없다고 선언하며, 발레 티켓은 받아도 구걸은 않는다. 한편 페르난도에겐 미국에서 발레 커리어를 쌓고자 하는 야망도 비치는데, 그의 재능은 누가 봐도 뛰어나기에 금세 주연 자리를 따낸다.(제니퍼의 입김이 있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제니퍼는 그가 조용히 집에 숨어 있길 바랐으리라.) 물론 제니퍼의 집을 나와 모텔에서 묵으며 노동하기도 하고 그러한 장면들은 이주노동자들의 상황을 반영한다. 그러나 멕시코로 추방된 페르난도는 곧장 도달한 변호사의 차를 타고 안전하게-아마 제니퍼가 마련해 주었을-저택으로 돌아온다.(유치장에 갇힌 비멕시코인 라틴계 사람들이 항의해 소동이 일어난 와중에. 영화는 이런 라틴아메리카 내 위계와 차별도 짚는다) 미국에서 페르난도는 다른 라틴계 이주노동자들과 유대감을 쌓지만, 멕시코에서는 제니퍼가 고용한 노동자가 그의 청소와 요리를 도맡는다. 그리고 페르난도는 이 위계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다. 이 연애는 그런 얼키고설킨 권력 관계에서 자유롭지 않고, 그들 주위에는 늘 이주민의 노동이 자리한다. 제니퍼에게 귤은 페르난도를 향한 욕망에 닿아 있는 과일이고, 회의 자리에서 그가 먹은 귤의 껍질-잔해는 비백인 청소노동자가 치운다.



‘드림스’가 드림스일 가능성에 관해


이제 조금 다른 얘길 해보려고 한다. <드림스>에는 시점과 관점이 모호한 장면이 있다. 페르난도가 다시 제니퍼의 집으로 돌아오기 직전 위치해 있다. 제니퍼가 준 티켓으로 페르난도가 발레 공연을 보고, 이후에 두 사람이 눈을 마주치며 통화하는 장면. 이 앞뒤에는 페르난도가 주요하게 비치지만, 발레 관람 도중엔 페르난도를 보는 제니퍼의 시선이 두드러진다. 과거의 잔상일까, 둘 중 한 사람의 꿈/환상일까. 이 무렵 페르난도는 자신과의 관계를 공식화하길 꺼리는 제니퍼의 집을 떠나 모텔에서 숙식하며 일하던 중이었고, 제니퍼의 전화를 계속해서 피하고 있었다. ‘내게 발레를 보여준, 다음에는 같이 오자고 말했던 사람’이라는 기억이 그를 전 연인에게 돌아가도록 만든 걸까, 아니면 발레리노 커리어를 이어가려면 제니퍼와 척지지 말아야겠다는 판단을 한 걸까. 시간을 되감아보면, 제니퍼는 페르난도를 찾기 위해 방문한 멕시코시티의 저택에서 테이블에 놓인 귤을 보곤 두 사람이 등장하는 장면을 하나 떠올린다. 이역시 기억인지 상상인지 그 형태가 모호하다. 혹시 이 무렵부터 일어난 일들이 제니퍼의 꿈/환상인 건 아닐까. 그는 페르난도가 나오는 영상을 줄곧 반복재생하고 있지 않았던가. 무모하지만 말도 안 되는 해석은 아니다. 이 전제 하에서라면, ‘허상으로서의 페르난도’가 ‘미국이 특정한 망상들을 투사해 상상하는 멕시코’(지역/국가/국민/거주자/이주민)를 상징한다는 아이디어를 이어가는 것도 가능은 하다. 그렇다면 진짜 페르난도는 어디에 있나. 샌프란시스코의 모텔에서 먹고자며 투잡을 뛰고 있나. 차라리 그편이 덜 비극일까. 모르겠다. 미국에서 ICE의 폭력적이고 무분별하며 인종차별적인 이미그런트 체포와 추방이 계속되는 현재에서, <드림스>가 어디쯤 있는 영화인지 나는 아직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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